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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커의 등가교환

피갤은피클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7.11.16 19:2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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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 너의 방.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도 보이지 않는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연덕스럽게 불을 켜고 너를 불러봐. 네가 있던 것처럼 온기가 올라와. 벽지는 인디고. 달과 별이 매달린 모빌은 외롭게 반짝이고 있어. 나는 한가운데서 전파를 쏘아 올리지만, 여전히 닿지 않는 듯해. 

  사 년 째야. 나는 그사이에 대학을 자퇴하고, 지금은 자동차 부품 공장을 다니면서 근근이 살고 있어. 너를 다시 만났던 곳이지. 공장에서는 몸이 조금 힘들 뿐, 일 자체는 간단한 편이지만 정작 나를 괴롭게 만드는 건 거기 있는 아저씨들이야. 이십사 시간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를 닮은 사람들. 서로의 언어가 다르지만 이렇게까지 말이 없을 줄은 몰랐어. 우리의 대화는 하루에 두 번이 전부야. 출근과 퇴근. 안녕하세요와 수고하셨습니다. 더 적고 싶지만 이게 끝인걸. 신기한 광경이지. 그래도 네 덕분에 이런 생활을 버틸 수 있었어.

  퇴근은 보통 일곱 시인데 특근이 있는 날이면 밤 아홉 시를 넘기는 일이 허다해. 그 시간대에는 7호선이 한산하니 망정이지 사람까지 붐볐다면 널 찾으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았을 거야. 매일 마주하는 상동역이지만 지하도를 벗어나면 숨이 턱 막혀 와. 부천터미널과 홈플러스, 그리고 주위에 핏줄처럼 자리한 유흥가, 먹자골목, 입시학원, 떼쓰는 아이와 팔짱 낀 커플,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노인, 내레이터 모델, 배불뚝이 아저씨를 뒤따르는 여고생, 발 디딜 데 없는 버스, 승차 거부하는 택시, 변기 대신 거리에 뿌려진 토사물, 그리고

  여기 없는 너. 그런 너를 만나러 온 나.

  얼마 전일까.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낸 답장을 봤다. 너는 내가 싫다고 했지. 알고 있었어. 내가 너무 이기적이어서. 하면 안 되지만 할 수밖에 없는 일이 몇 가지 있다. 내 사랑도 그중 하나였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을, 옛 속담을, 나는 신봉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계속 사랑했다. 사 년 넘게 이어진 도끼질, 그 끝이 보인 오늘. 오늘에서야 내가 간과했던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사람이 나무와 같지 않다는 것. 너도 예외는 아니란 걸.  

  저녁 먹고 쉬는 시간에 들었어. 포장 라인 아줌마들 사이에서 네 얘기가 나오더라. 재무과 경리팀 한 명이 죽었다고. 청담대교에서 투신한 널 아직도 찾지 못했다니. 네가 사채를 썼다는 이야기부터 사장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둥, 우연히 연락이 닿은 아기 아빠가 자살했다는 둥, 별별 추측이 난무했지.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이유라는 걸 알고 있었어. 나는 밥 먹고, 일하고, 잠자는 시간 빼면 항상 너를 지켜봐 왔으니까. 사인은 명확했다. 너는 나무가 아니었기에, 나의 사랑을 받아내지 못한 것이다. 실패한 메타포라는걸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해야 할 일도 분명해졌다. 죽음은 되돌릴 수 없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다. 나는 오늘 너에 관한 모든 걸 반추하려 여기에 왔다. 일을 마치고 한숨 푹 자면 답장이 오기를.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렇게 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남기는 이 메일을 볼 리 없지만. 안녕.  



  2.



  남자는 여자의 침대 위에 눕는다. 그리고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영화 하나를 떠올린다. 동자승이 주인공이고, 온갖 종류의 귀신들이 나오는 만화였다. 야기는 이렇다. 절 뒤편에 자리한 강가에서 놀던 동자승은 얕은 물가에서만 놀아야 한다는 주지 스님의 경고를 잊고 깊은 곳까지 헤엄친다. 동자승은 뒤늦게 발이 강바닥에 닿지 않음을 알게 되지만 이미 오랜 시간 동안 헤엄을 친 터라 다리에 힘이 없었다. 한편, 이 강에는 옆 마을 총각의 끈질긴 구혼에 시달리다 못해 투신한 여인의 원귀가 있었다. 개자리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물귀신은 고민에 빠진다. 하릴없이 깊은 물 속으로 빠져드는 동자승을 바라만 볼지, 아니면 자신이 가진 힘을 사용해 구해낼지. 다행히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원한 또한 깊지 않았던 물귀신은 동자승을 살려내리라 마음먹고 물살로 동자승을 자갈밭까지 밀어낸다. 사람을 살린 물귀신.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에 감명을 받은 강의 신은 물귀신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얼마간 강물을 벗어나게 해줄 테니 동자승을 따라 다니면서 십 위(位)의 귀신들을 성불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덧붙여 이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강에 붙박인 영을 완전히 풀어주겠다고 했다. 물귀신은 잠시 어리둥절해 한다. 하지만 곧 제안을 받아들이고 동자승을 따라 긴 여정을 떠난다.  


  죽은 이의 한을 풀어주는 일은 불심 깊은 승려들에게도 어려운 일이건만, 그 주체가 동자승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동자승과 물귀신은 갖은 고초를 겪게 된다. 걸귀에게 원하는 음식을 구해다 주는 간단한 일부터, 무덤귀의 무너진 봉분을 성한 모습으로 돌려놓거나, 귀신의 원한을 산 이를 설득 끝에 사찰로 데려와 49재를 올리게도 했다. 객지에서의 생활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밥 빌어먹는 일, 잠잘 곳을 구하는 일, 어느 하나 마땅찮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재수 없다며 쫓겨나는 일도 다반사였다. 설상가상, 물귀신을 매개로 삼아 귀신과 소통하던 동자승의 기력은 나날이 쇠했다. 그간 여정으로 동자승과 정든 물귀신이 정성껏 간호했지만 물 밖으로 벗어나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둘의 고생이 의미가 없진 않았던 터라 불귀신을 비롯해 아홉 위의 귀신을 성불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마지막 남은 귀신은 몽달귀신. 소문이 묵고 있는 마을에까지 파다할 정도로 악행이 심한 귀신이었다. 동자승은 물귀신의 넋을 하루빨리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물귀신이 더 휴식을 취해야 한다며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비단 고집만은 아닌, 생명의 은인에게 보답하고자 하는 동자승의 의지이기도 했다. 하늘이 어스름해질 무렵. 둘은 겨우 산 중턱을 넘을 수 있었다. 지긋지긋한 비탈길도 이제 끝이었다. 마을 어귀에 세워진 솟대를 지나고 나니 몇몇 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둘은 그중 한 집에 들어가 하룻밤 묵을 수 있을지 물었다.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집주인과 딸은 일행이 동자승 혼자임을 확인하고 별일 있겠나 싶어 방 한 칸을 내줬다. 봇짐을 풀고 군불이 올라오자 노곤했던 몸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다만 물귀신은 어딘가 몹시 불안한 기색이었다. 이유를 물어도 묵묵부답일 뿐. 몰려오는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동자승이 먼저 잠에 빠졌다. 음습한 바람이 창호지 구멍 사이로 스며드는 그믐밤. 밤이 흘렀다.


  이른 아침. 요의를 느껴 잠에서 깬 동자승이 변소로 향할 때였다. 난데없는 울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오줌도 참고 달려가 보니 주인집 딸이 마당 한쪽에 쓰러져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비는 어찌할 바 모르고 딸의 입에 냉수만 흘려 넣는 중이었다. 동자승은 물귀신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던 물귀신은 모두 몽달귀신의 소행이라고 털어놓았다. 새벽에 안채를 드나든 모습을 봤다는 것이다. 귀신의 악한 기운이 워낙 강해 자신은 보고도 막을 수 없다고 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딸의 입에서 거품이 부글부글 올라왔다. 주인은 물그릇을 내던지고 딸의 팔다리를 주물렀다. 동시에 허공에 대고 혼잣말하는 동자승의 모습을 보고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어린놈이 혼자 돌아다닐 때부터 의심해야 했는데. 분노에 찬 주인이 동자승의 멱살을 잡았다. 네 놈의 짓이지! 건강했던 딸이 널 재워주고 나서 간질에 걸렸다고! 주인의 머리 높이까지 들린 동자승이 캑캑거리며 오해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인은 손에 준 힘을 쉽사리 빼지 않았다. 강에 빠져서 죽을 뻔한 이후, 다시 느끼게 된 끔찍함. 질식의 공포. 동자승은 그만 오줌을 지렸다. 뚝. 뚝. 뜨뜻한 물기가 바짓단 밑으로 새어 나왔다. 그걸 본 주인이 내팽개치듯 멱살을 풀었다. 주위로 흙먼지가 잔뜩 일었다. 두 번이나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동자승이 숨을 가다듬는 사이 딸도 조금씩 정신을 되찾았다. 호흡이 가쁘긴 했으나 그럭저럭 기력을 차린 모양새였다. 동자승은 계속 기침을 하면서도 그 옆으로 다가갔다. 딸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잘 모르는 눈치였다. 동자승이 물었다. 어젯밤 일이 기억 나시는지요?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딸은 마침 떠오른 것이 있는지 미심쩍은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이 반지를 잘 때도, 씻을 때도 절대 빼지 않는데 오늘은 자고 일어나 보니 손가락에 반지가 빠져 있더라고. 반지 낀 손가락이 아주 아프기도 하고. 이거 말고는 기억이 안 나는데……. 말을 흐리고는 반지를 뺀 손가락을 보여 주었다. 왼손 약지 마디가 퍼렇게 부어 있었다. 멍든 손가락을 본 주인은 더욱 화가 끓어 올랐다. 그 기색을 느낀 물귀신이 주인을 설득하는 일이 먼저라고 동자승에게 귀띔해주었다. 분위기를 보니 확실히 그랬다. 성난 얼굴에 다시 오줌을 지릴 거 같았지만 동자승은 용기를 내 주인 앞으로 갔다. 어떻게든 담판을 지어야 했다. 동자승은 덥석 주인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자초지종을 말하겠다고, 잠시 시간을 내달라고 끈덕지게 빌었다. 주인은 말없이 딸을 봤다.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은 불신, 다음은 놀라움, 마지막은 불안이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주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늘 밤에도 우리 집에 온다니, 어찌해야 귀신을 쫓아낼 수 있겠소? 이제는 주인이 동자승에게 매달리는 형국이었다. 동자승은 먼저 갈아입을 바지를 달라고 했다. 그 말에 주인이 재빨리 옷장에서 바지 한 벌을 꺼내 주었다. 바지를 바꿔 입는 사이, 물귀신이 방법을 내놓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몽달귀신이 생전에 사랑했던 여자를 찾아내 직접 제사를 올리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물귀신은 이 방법에 큰 문제가 있다고 덧붙였다. 어떤 문제입니까? 동자승이 물었다. 이어진 물귀신의 대답이 꽤 심각한 내용이었다. 제사를 지내주어야 할 여인이 없다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주인의 탄식이 방안을 휘감았다. 한동안 모두 말이 없었다. 정적 끝에 물귀신이 이번 일 만큼은 자신이 직접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대신 딸의 속적삼을 안채 문고리에 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면 해가 뜨기 전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방에서 나오지 말라 했다. 그 말을 듣고 겁에 질린 부녀가 서로를 마주 봤다. 저와 물귀신은 저녁이 되면 다시 오겠습니다. 침묵을 수긍으로 여긴 동자승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손히 합장하고 대문을 나서려 할 때, 뒤따라온 주인이 겸연쩍은 얼굴로 앞을 막았다. 무슨 일인지 물으니 귀신을 퇴치하기 전까지 같이 있어 주면 안 되겠냐는 부탁이었다. 딱히 갈 곳도 없던 동자승과 물귀신은 선선히 그리 하겠다고 답했다. 그 날 받게 된 점심상에는 본 적 없던 귀한 음식들이 즐비하게 올라와 있었다. 

 

  다시 밤. 사람들은 해가 지기 무섭게 안방으로 들어갔다. 대청 뒤 소나무 숲에서 물귀신 홀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투를 풀어헤쳤지만 또렷이 기억나는 얼굴. 솜씨 없는 여인이 부쳐 낸 녹두전 같은 피부. 곰보라서 마을 처녀들에게 입에 발린 소리 한 번 듣지 못한, 그런데도 살아생전 자신을 지겹도록 쫓아다닌 남자였다. 죽고 나면 마주할 일이 없을 줄 알았건만. 박명한 생애에 한숨을 내쉬는 찰나였다. 괴이한 기운이 대문 너머로 느껴졌다. 올 것이 왔구나. 음기는 점점 강해지더니 곧 대청을 뒤덮었다. 익숙한 모습. 어제와 같은 몽달귀신이었다. 해어진 두루마기 이곳저곳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겠거니 짐작하는 사이, 몽달귀신은 안채 문고리 앞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계획대로였다. 몽달귀신은 선 자리에서 가만히 속적삼을 봤다. 하지만 그건 시간을 끌기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이제는 물귀신이 나서야 할 차례였다. 이번 일만 해내면 자유로워질 수 있어. 물귀신은 마음을 굳게 다잡고 대청으로 내려갔다. 서로의 존재를 알아차린 둘 사이로 공허한 시선이 맞닿았다. 


  당신이 왜 여기 있소? 먼저 말문을 튼 쪽은 몽달귀신이었다. 물음에 원망이 짙게 깔렸었다. 물귀신은 대답 없이 그의 얼굴을 응시하다 천천히 간격을 좁혔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울음에 당황한 몽달귀신이 무슨 일인지 물었다. 내가 죽은 이유도 모르고,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당신이 불쌍해 눈물이 나왔습니다. 비록 영혼일지라도,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여인의 눈물은 꽁꽁 언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차근차근 말해 보시오. 나의 구애에 시달리다 못해 죽은 게 아니라는 거요? 누그러진 표정과 어조. 물귀신은 이 정도면 됐다 싶어 재빨리 이야기를 꾸며냈다. 알려진 사실과 다르게 자신은 강가에서 빨래하다 발을 헛디뎌 죽은 것이고, 다만 구애를 거절한 이유는 어려운 살림에 혼수가 마땅치 않아 내린 결정이라고 속여 말했다. 모두 몽달귀신이 생각지도 못한 이유였다. 정말 그것뿐이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몽달귀신이 재차 물었다. 그렇습니다. 이미 죽은 마당에 무엇이 아쉬워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흉한 얼굴을 싫어하는 건 사람이 더러운 똥을 피하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라 여겼는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구나. 적어도 그녀만큼은, 자신을 남자로 봐줬을지 모른다는 안도감. 몽달귀신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괜한 오해를 했군. 미안하오. 염치없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부탁 한 가지 해도 되겠소? 말씀하십시오. 당신을 처음 본 날부터 이승을 떠돌아다녔던 지금까지, 하루라도 그대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소. 아직 한이 온전히 풀리지 않았지만, 이제는 당신을 만났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나와 같이 여길 떠납시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가슴이 철렁였다. 이승의 인연을 구천에서까지 이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인연이라는 말 자체를 부정하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속을 고스란히 내보였다간 악행이 계속될 게 분명했다. 적당한 핑계를 대고 먼저 보내야지. 물귀신은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도 당신과 같이 떠나고 싶습니다. 하나 남겨진 부모가 자꾸 떠올라 가슴이 미어지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딱 삼 일 정도. 마음을 달랠 시간을 주신다며 제가 뒤따라 가겠습니다. 몽달귀신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에는 어쩐지 동정심마저 묻어 있었다. 알겠소. 나 먼저 떠나겠소. 삼일 뒤, 꼭…….  몽달귀신은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완전히 모습이 사라졌을 때, 물귀신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일을 끝냈다는 해방감, 몽달귀신을 속인 데에서 오는 미안함, 죽어서도 거짓말을 해야 하는 처지에 대한 자기 연민. 물귀신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안방에 들어가 나지막이 말했다. 모두 끝났습니다.


  이후의 일은 누구나 예상할 만한 전개였다. 약속대로 십 위의 영을 성불한 물귀신은 강에서 벗어나 그토록 원하던 구천으로 향하게 된다. 홀로 남겨진 동자승이 돌아간 곳은 사찰. 혼이 날 줄 알았지만 주지 스님은 너그러운 미소로 맞아 주었고 이에 감동한 동자승이 그간의 여정을 고백한다. 주지 스님이 듣기에도 물귀신의 행적은 신통한 면이 있었다. 결국에는 동자승의 청을 받아들여 물귀신을 기리는 위패를 만들고 명부전에 모시기에 이른다.  


  어렸을 때는 흔하디흔한 해피엔딩인줄 알았다. 아니, 명확한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일방적인 행복도 해피엔딩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남자는 궁금하다. 몽달귀신이 물귀신과 재회할지. 구천에서 사랑을 이어나갈지. 윤회가 존재한다면 둘은 다음 생애에 부부로 만났을 수도 있겠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만화는 몽달귀신의 사랑에 관심이 없다. 남자는 뇌까린다. 이야기 속에서 물귀신은 선의 대리자이고, 몽달귀신은 악의 대리자일 뿐이다. 나는 몽달귀신같이 모호한 해피엔딩의 피해자가 되지 않겠다. 절대로.




  3.




  남자는 눈을 뜬다.


  엉거주춤 일어나서 시트에 튄 묽은 정액을 휴지로 훔친다. 퀭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지만 사람은 없다. 요람 안에 작은 강아지 인형이 놓여 있을 뿐이다. 옆구리 사이에 인형을 끼고 베이비파우더 향으로 가득한 방을 빠져나온다. 이제 올 일 없겠지. 뒤돌아본 옥탑방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바닥의 방수 페인트가 가물은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있다. 이런 곳에서 아이를 키웠구나. 남자는 만난 적도 없는 아기 아빠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쓴다. 어떻게 생겼건,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남자다. 낙인을 찍어 버린다. 그 낙인은 너무 훌륭해서 순간이나마 자신이 부성애 강한 남편으로 느껴질 정도다. 얄궂은 인연도 오늘로 끝이지만. 내가 너의 남편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상동역. 네온사인과 소음에 무감각해진 인파 사이를 비집고 지하도로 내려간다. 벤치 하나에 사람 두 명.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스마트폰에 얼굴을 박고 있다. 남자는 이어폰을 끼고 습관처럼 뉴스를 본다. 여당과 야당이 싸우고, 노조와 사 측이 싸우고, 정부와 국민이 싸운다. 이 맹렬한 증오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남자는 자문한다.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방이 존재함으로써 생기는 감정인가. 사랑도 증오도, 뿌리가 같은 감정이라면 나는 지금 목적을 잃어버린 것인가. 그녀는 이미 죽었는데. 나는 이 사랑을 어떻게 이어가야 하나. 물음을 끊는 안내방송이 역사에 울려 퍼진다. 스크린 도어 너머로 낯선 공기를 싣고 온 지하철이 숨을 뱉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내리고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몸을 맡긴다. 밤 시간대 상동역 상행선은 지상의 시내와는 또 다른 세상이다. 소름 끼치도록 고요하다. 껌파는 사내도, 높은 목소리로 전화하는 학생도 없다. 남자는 구석 자리에 앉아 잠을 청한다. 뚝섬유원지까지 가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리기 때문이다. 가벼운 흔들림이 남자의 숙면을 방해하지만, 눈을 감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쓴다. 얕은 의식 속에서 뉴스는 이어진다. 불면도 계속된다. 뒤늦게 또 하나의 방해 요소를 기억해낸 남자가 이어폰에 손을 댄다. 빼내려다 멈칫한다. 


  오늘 오후 다섯 시 삼십 분쯤, 서울 청담대교 북단에서 스물한 살 박모 씨가 유서를 남기고 한강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제보를 받고 출동한 순환구조대가 박모 씨를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조사 결과 박모 씨는 구 개월 된 딸이 있는 미혼모로, 삼 개월 전 아이의 아버지가 자살로 숨진 뒤부터 심한 우울증을 앓아왔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생활고와 우울증에 시달리던 박모 씨가 근처의 베이비 박스에 딸을 맡기고 청담대교로 돌아와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내린 거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아. 남자의 부르튼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온다. 그녀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 자부했는데. 겨우 이런 이유였나. 나는 그녀에게 어떠한 의미도 될 수 없었던 건가. 하다못해 죽는 순간까지. 남자는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린다. 견고했던 믿음 하나가 뿌리째 뽑혀나가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배신감. 남자는 창밖을 응시한다. 긴 터널. 빛과 어둠이 모스 부호처럼 교차한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녀는 어떤 SOS 신호도 보낸 적이 없었다고, 자신을 위로한다. 그 사이에 스물여덟 개의 역이 지나간다. 남자는 뚝섬유원지역에서 내린다. 


  역을 빠져나오자 강 비린내가 훅 끼쳐온다. 조금 더 걸으니 캠프장 주위로 수많은 돗자리와 텐트가 보인다. 더위를 피해 모인 사람들 손에 저마다 맥주가 한 캔씩 들려 있다. 몇 시간 전 사람이 죽은 장소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풍경이다. 남자는 자전거 도로에 서서 어둠이 깔린 강물을 바라본다. 그러다 무언가에 홀린 듯, 강아지 인형에 코를 들이민다. 희미한 아기 냄새. 문득 결심이 선 남자가 인형을 강물에 던진다. 사람들의 시선이 날아와 꽂혀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남자의 생각은 이미 한 가지 선택지로 가득 차있다. 딸이라도 데려와야겠어. 남자는 더 망설이지 않기로 다짐한다. 풀밭마다 자리 잡은 텐트 사이를 빠르게 가로 지른다. 걸음 뒤로 연인들의 웃음이 껌처럼 달라붙는다. 부러운 웃음. 남자는 미래를 떠올린다. 이십 년 정도만 지나면 나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보겠지. 휴일에는 다른 아버지들과 똑같이 원터치 텐트를 트렁크에 구겨 넣고, 조수석과 뒷자리에 부인과 아이들을 앉힐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텐트를 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야지. 여보, 당신의 어머니는. 딸아, 너의 외할머니는. 여기에서 돌아가셨어. 항상 우릴 지켜보고 계실 거야.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꿈. 남자는 꿈을 이루기 위해 거리로 나가 손을 흔든다. 택시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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