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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서] 나는 왜 연극을 하는가

pentatonix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8.03.17 16: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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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연극을 하는가"

 

-1959년 5월 12일 한 텔레비전의 프로그램 <클로즈 업>에 출현한 카뮈의 말. <동부연극>지가 발췌하여 출판한 것. (플레야드 전집, <연극, 이야기, 단편소설> 中)

 

 

 

뭐라구요? 내가 왜 연극을 하느냐구요? 사실 나 자신 여러번 그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봅니다. 지금까지 그 점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대답이란 여러분들에게는 좀 실망스러울 진부한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연극의 무대는 내가 행복하게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같은 소신은 생각보다는 덜 진부한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에 와서 행복이란 꽤 독창적인 직업이라 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주십시오. 사람들은 이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는 경향이 있고 이것이 마치 어떤 창피스러운 도색 댄스라도 되는 양 여기는 품이 바로 그 증거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모두들 의견이 일치한답니다! 이 점에 대해서, 나는 가끔 매우 근엄한 글 속에서 "행동가들이 모든 공적 활동을 그만 두고 그들의 사생활 속으로 도피해버렸다" 운운하는 말을 읽는 때가 있습니다. 이 도피니 은신처니 하는 생각 속에는 약간의 멸시가 숨겨져 있는 것 아닙니까? 멸시를 하다 보면 자연히 바보 같은 면을 드러내기도 하는 법이지요.


사실 내가 보기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사생활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공적 생활 속으로 도피하곤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권력을 얻은 사람들은 흔히 행복에 실패한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에게 전혀 부드러운 데가 없다는 것이 그 점을 잘 설명해주지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지요? 아, 그렇지요. 행복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사실 오늘에 와서 행복이란 형법상의 범죄와 같은 것이어서 절대로 자백을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별로 나쁜 생각도 없이 그냥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말해버렸다간 큰일납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당신을 에워싼, 위로 말려올라간 입술에서 당신을 매도하는 말을 읽게 될 겁니다. "아, 당신은 행복하다 이거지요. 이 양반아! 그렇다면 당신은 카슈미르의 고아들과 뉴헤브리디스의 나병 환자들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그들은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행복하지는 못하단 말씀이야." 암, 그렇구말구요. 나병 환자들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우리들의 친구 이오네스코의 말마따나 그들에게서 어떻게 벗어나지요? 이내 우리들은 이쑤시개처럼 비참해져버립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불행에 처한 사람들을 제대로 도와주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가 튼튼하고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지요. 자신의 삶이 무거워서 질질 끌고 가며 스스로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는 사람이 남을 도와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반대로 스스로를 지배하고 자기의 삶을 지배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너그러워질 수 있고 효과적으로 남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아는 한 남자는 자기의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는데 그는 그 사실 때문에 절망하고 있었지요. 어느 날 그는 마침내 아내에게 자신의 삶을 바치고 그 동안 잘못한 보상으로 자신의 삶을 아내에게 희생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동안 견딜 만했던 그 불쌍한 여자의 삶이 그때부터 진짜 지옥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답니다. 아시겠어요? 그의 남편은 눈에 빤히 보이는 희생을, 요란한 헌신을 감행한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를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의 경우도 그와 비슷하지요. 이 암담한 애인들이 서로 만나 이룬 것이란 최악의 사랑이지 결코 최선의 사랑은 아닙니다. 이런 꼴을 보고서도 세상 사람들의 안색이 나쁘다던가, 나는 행복하네 하고 겉에 나타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던가 하는 사실이ㅡ특히 직업이 작가일 때ㅡ새삼스레 놀랍다고 여기겠습니까? 그렇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가능한 한 남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터이고 행복과 행복한 사람들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며, 하여튼 건강을 위하여 가능한 한 자주 내 행복의 장소, 다시 말해서 연극무대에 서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이 행복은 다른 어떤 종류의 행복들과는 달리 20여년 동안이나 지속되는 행복인데 이제 나는 이것 없이, 살려고 애를 써도 그럴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1936년에 나는 가난한 극단 하나를 만들어 알제의 대중적인 댄스홀에서 말로로부터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아이스킬로스까지 포함하는 프로그램의 공연물들을 발표했습니다. 23년 뒤 앙트완 극장 무대에 또 같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각색하여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이 보기 드문 일편단심, 이렇게 오래가는 중독증이 나 스스로 보기에도 놀라워서 나는 이 집요한 미덕, 혹은 악덕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자문해보았습니다. 나는 두 가지 종류의 원인을 발견했는데 그 한 가지는 내 천성에 기인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연극의 본질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첫째 이유는 그다지 멋있는 것이 못 된다는 것을 나 자신도 인정합니다만 하여튼 나는 작가로서의 내 직업 중에서 싫증을 느끼게 하는 부분을 연극을 통해서 벗어난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경박한 성가심이라고 불러 마땅할 작가 생활의 일면으로부터 나는 우선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이 만약 페르낭델(유명한 희극배우ㅡ옮긴이주)이나 브리짓 바르도나 알리 칸쯤 된다고. 아니 좀더 겸손하게 폴 발레리쯤 된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 어느 경우든 당신의 이름은 틀림없이 신문에 나게 됩니다. 이름이 신문에 일단 나게만 되면 성가신 일은 이제부터지요. 수없이 많은 편지들이 날아들고 각종의 초대가 비오듯하고 또 그 초대에 응답해야지요. 당신의 시간의 가장 큰 몫은 그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바둥거리는 데 소모되는 겁니다. 인간의 정력의 반은 각종의 방식을 동원하여 거절하느라고 소모되니 이거야말로 바보 같은 짓 아닙니까? 물론 바보 같은 짓이지요. 그러나 바로 이렇게 하여 우리들은 바로 허영 자체에 의하여 허영의 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연극 역시 허영에 찬 직업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누구나 연극인의 작업을 매우 존중해준다는 사실을 나는 발견했습니다. '연습 중'이라고 문 밖에 팻말을 걸어두면 곧 그 어떤 감미로운 사막의 정적이 우리들 주변에 자리잡게 됩니다. 내가 종종 그렇게 하듯이 낮 동안 하루 종일 연습을 계속하는 꾀를 써두면 밤의 한 부분은 솔직히 말해서 천국과 같이 된답니다. 그런 각도에서 볼 때 극장은 나의 수도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떠들썩한 소리들도 이 수도원의 벽 밑에 와서는 사라지고, 성스러운 성벽 속에서 두 달 동안 오직 한 가지만의 명상, 오직 한가지만의 목적에 마음을 쏟는 작업 중의 수도사 공동체가 이 세기의 번잡을 벗어나서 어느 날 저녁 처음으로 막을 열게 될 그의 제단을 준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 수도사들, 다시 말해서 연극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봅시다. 이런 표현이 좀 놀랍다고 느껴집니까? 전문 잡지라든가 특수 잡지라든가 하는 것이 어쩌면 당신들에게 연극인이란 밤늦게야 잠자리에 들고 일찌감치 이혼을 해버리는 동물쯤 된다고 상상하도록 도와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연극이란 그보다는 평범한 것이며 이 분야에서 비록 이혼을 한다 해도 방직업이나 사탕무 밭이나 언론계에서보다는 덜 빈번한 일이라고 말씀드린다면 당신들은 실망하실는지요? 다만 그런 일이 연극인들 사이에서 생기면 다른 업종에서 생길 때보다 사람들이 더 열심히 떠들어댄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사라 베르나르라는 여배우의 가슴속 사정이 부사크 사장님의 가슴속 사정보다는 대중에게 더 어필한다고나 할까요. 사실 이해가 될 만도 합니다. 그렇지만 무대인들의 직업은 육체적인 저항력이나 호흡의 노력 때문에 매우 균형 있는 역사의 체질을 요구합니다. 육체를 허랑방탕하게 사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니 하여튼 다른 직업보다 더 함부로 몸을 굴려대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육체의 균형을 유지하고 그것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육체가 중요한 직업이 바로 연극입니다. 요컨대 필요 때문에 연극인은 도덕적이 됩니다. 아마 도덕적이 되는 유일한 수단일 것입니다. 아니, 나는 이야기의 실마리를 좀 잃어버린 것 같군요.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즉 나는 동료들인 지식인들보다는, 도덕적이든 아니든 연극인들과 어울리기를 더 좋아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냥 서로 따뜻하게 대해주는 일이 드문 지식인들은 서로 사랑할 수가 없다는 매우 잘 알려진 사실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식인들 사회에 들어가면 나는 마치 용서받아야 할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 것같이 느껴지니 웬일입니까? 나는 끊임없이 이 무리들의 어떤 관계를 깨뜨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자연 그러다 보면 나는 자연스럽지가 못해지고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보면 그만 나 자신도 따분해집니다. 반대로 연극무대에 서면 나는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다시 말해서 자연스러운가 아닌가 하는 것 따위는 생각지도 않게 되고 내가 나의 동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은 공동의 행위가 지닌 어려움과 기쁨뿐이게 되지요. 한때 내 삶은 가장 커다란 기쁨 중의 하나였지만, 한 팀이 되어 같이 일하던 어떤 신문사를 떠난 이후 잊어버리고 말았던 '동지애'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는 연극으로 되돌아오는 즉시 그 동지애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작가란 고독하게 작업하며 고독 속에서 비판을 받고, 특히 고독 속에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 판단을 내립니다. 그것은 좋은 일도 건전한 일도 못됩니다. 그가 만약 건전하게 형성된 사람이라면 어느 땐가 반드시 사람의 얼굴, 공동체의 따뜻한 체온을 그리워하게 마련입니다. 작가의 참여라는 문제도 대부분 바로 이렇게 설명되는 것입니다. 결혼이니 아카데미니 정치니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궁여지책이 별 도움은 되지 않습니다. 고독을 버리게 되기는커녕 고독을 그리워하기 시작하며 사람들은 동시에 공간이 확보된 느긋한 생활과 엄청난 연애를 꿈꾸며 아카데미 회원이 되고서도 보수주의자가 아니기를 바라며 정치의 참여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 대신에 행동하고 살인을 해주기를, 그러면서도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절대로 좋은 일이 못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자기가 보유하고 싶어합니다. 장담해도 좋지만 오늘날 예술가의 직업이란 결코 한직이 못 됩니다.


하여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연극은 나에게 필요한 공동체와 어느 누구나 필요로 하게 마련인 물적 속박과 한계를 제공해줍니다. 고독 속에서 작가는 군림합니다. 그러나 허공 위에 군림합니다. 극장에서 예술가는 군림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연출자는 배우를 필요로 하고 배우는 연출자를 필요로 합니다. 이 상호 의존은 그것이 적당한 겸손과 유쾌한 기분과 더불어 받아들여지게 되면 이 작업의 연대 의식을 만들어주며 매일매일의 동료애에 실체를 제공합니다. 개개인은 그 나름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우리들은 서로서로에 연결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미래 사회를 위한 좋은 공식이 아닐까요?


아! 오해는 마십시오! 배우도ㅡ물론 연출자도ㅡ다른 인간이나 마찬가지로 실망스러운 인간들입니다. 그들을 깊이 사랑한 탓에 방심하고 있다 보면 더욱 그렇지요. 그러나 혹시 실망을 맛본다면, 그 실망은 언제나 작업이 끝나고 각자가 자신의 고독한 본성으로 되돌아간 뒤에 나타납니다. 논리에는 별로 뛰어나지 못한 이 직업인들 간에는, 실패가 극단을 망치기도 하지만 성공도 마찬가지로 극단을 망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극단원들을 망쳐놓는 것은 바로 연습 동안에 그들을 한데 꽉 묶어주던 희망이 끝나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이 공동체는 사실 목표와 노획물에 한발 한발 다가서고 있을 때의 긴장이 없다면 그토록 긴밀하게 묶여지지 못합니다. 당-운동단체-교회 등은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미래의 어둠 속에 묻혀 있습니다. 연극에서는 그와 반대로, 작업의 결실은 단 것이든 쓴 것이든 오래 전부터 미리 알고 있는 터인 예정된 어느 날 저녁, 하루하루의 작업을 통해 한발 한발 다가서는 그날 저녁에 거두어들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공동의 모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위험이 오로지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온통 관심이 쏠린 남자와 여자의 무리들을 한데 묶어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마침내 내기를 걸어보는 그날 저녁보다 더 훌륭하고 더 아름다울 수 없는 공동체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대건축물을 짓는 사람들의 공동체나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이 공동 작업을 하는 아틀리에에서는 거창한 공연의 준비 작업에 열중한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 같은 열광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대건축물들은 후세에 남는 것이지만 공연은 지나가면 없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어느 날에는 죽어 없어진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사랑스러운 것이라는 차이를 지적해야 할 테지요. 나는 내가 젊었을 때 운동 경기 팀에 속했던 덕분에  승리나 패배를 맛보게 될 시합 날까지 여러 날 동안의 훈련을 동반하는 저 강렬한 희망과 연대의식의 감동을 체험해보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알고 있는 이 얼마 안 되는 윤리는 축구 경기장과 연극의 무대에서 배운 것입니다. 그곳들은 나의 진정한 대학교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면에 국한하여 이야기해볼 때, 연극은 오늘날 작가를 위협하는 추상화의 위험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덧붙여 지적해야 겠습니다. 내가 신문일에 종사할 때 나는 소위 사설이라고 부르는 그 설교조의 글을 쓰는 일보다는 인쇄소의 조판대 위에서 지면을 짜는 일을 더 좋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극장에서도 작품이 구체적인 조명 장치와 세트와 배경, 휘장과 소도구들이 엉킨 속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을 더 좋아합니다. 무대 연출을 제대로 하자면 무대 장치의 무게를 자신의 팔 속에 느낄 수 있어야만 한다는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모릅니다만 이것이 예술의 대원칙 중 하나입니다. 나로 하여금 인물의 심리뿐만 아니라 램프 하나, 제라늄 화분 하나, 천의 올 하나, 아치들에까지 전달되어야 할 궤짝의 무게와 두드러진 모습 하나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다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드는 이 직업을 나는 좋아합니다. 나의 친구 마요가 <악령>의 무대 장치를 설계할 때, 중후한 살롱-가구 등 요컨대 현실로 이루어진 무대 장치에서 출발하여 차츰차츰 연극이 더 높은 차원, 물세계와 점차 거리가 멀어지는 분위기 쪽으로 옮겨 가도록 세트의 스타일을 세련되게 정리해보자는 데 우리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연극은 이리하여 비현실적인 광기 속에서 끝나지만 처음에는 정확하고 현실적인 재료들로 가득 찬 장소에서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정의가 아니겠습니까? 오직 현실, 아니면 상상력 두 가지 중 하나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출발한 상상력 말입니다.


내가 시내에서 열리는 만찬회나 따분하기만 한 사교계에 대해서는 그토록 고집스럽게 아끼며 거절하는 시간을 연극에 기꺼이 바치는 것은 바로 이런 개인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이유이지만 나에게는 예술가로서의 이유, 다시 말해서 더 신비스러운 이유도 있습니다. 우선 나는 연극이 어떤 진실의 장소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이 환상의 장소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런 말은 믿지 마십시오. 환상을 먹고 사는 곳은 오히려 사회입니다. 당신들은 분명코 무대 위에서보다는 거리에서 더 많은 엉터리 배우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여튼 우리들의 살롱이나 관청이나, 혹은 더 쉽게 연극 총연습장의 객석에 나타나는 저 비직업적인 배우들을 관찰해보십시오. 그를 무대 위의 저 에누리없는 공간에 올려놓고 그에게 4천 와트의 불빛을 쏟아부어보십시오. 연극은 도무지 성립도 되지 않고, 당신은 그가 어느 면 완전히 가면이 벗겨진 채로 진실의 불빛 속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대 위의 불빛은 가혹합니다. 이 세계의 속임수와 위장에도 불구하고 이 60평방미터의 공간 위에서 걷고 말하는 남자, 혹은 여자는 저 가장과 의상 너머로 그의 진정한 모습을 노출시키고야 말게 됩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알고 지내고, 있는 그대로 이해했던 사람들도, 오직 그들이 나와 더불어 다른 시대, 다른 성격의 인물들의 역을 연습하고 연기해주는 우정을 내게 보여주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그들을 참으로 깊이 이해한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의 신비와 사람들의 숨겨진 진실을 사랑하는 이들이 찾아와야 할 곳은, 그들의 불안정한 호기심이 부분적으로나마 만족될 가능성이 있는 곳은, 바로 여기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말을 믿어도 좋습니다. 진실 속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연극을 해보십시오!


때때로 "당신은 어떻게 연극과 문학을 조화시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합니다. 글쎄요. 나는 더러는 마지못해서 더러는 취미 때문에 많은 직업을 가져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직업들과 문학을 조화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여전히 작가니까요. 나는 심지어 내가 글 쓰는 것을 버리는 때는 바로 내가 오로지 작가만이 되기로 마음먹게 되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연극으로 말할 것 같으면 조화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연극이란 바로 가장 드높은, 아니 적어도 가장 보편적인 문학의 장르이니까요. "관객석에 있는 단 한 사람의 바보를 위하여 글을 쓰고 연기를 하시오"하고 항상 그의 극작가와 배우들에게 말하던 연출가를 나는 알고 사랑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당신 자신이 바보같고 저속하게 되십시오"라는 뜻이 아니라 "상대가 누구든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시오"라는 의미였습니다. 누구든 관심을 가져볼 가치는 있는 것이므로, 요컨대 그의 눈에 바보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인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너무 높게 겨냥하거나, 너무 낮게 겨냥합니다. 이렇게 하여 대중 속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자들에게 말하는 극작가들이 있는데 그들은, 장담해도 좋지만 언제나 성공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은 가장 지적이라는 사람들을 상대하는데 거의 매번 실패합니다. 전자들은 침대 위의 서사시라고 불리는 매우 프랑스적인 연극 전통을 연장시키고, 후자들은 철학적 잡탕 속에다 몇 가지 채소를 덧보태는 것입니다. 반대로 한 작가가 그 주제에 있어서는 야심을 그대로 간직한 채 만인에게 간명한 표현을 하는 데 성공하게 되면 그는 예술의 진정한 전통에 기여하는 것이며 극장의 객석 속에서 모든 계급, 모든 정신들을 동일한 감동이나 동일한 웃음 속에 화합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은 바로합시다. 오직 위대한 작가들만이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당신 스스로 희곡을 쓸 수 있을 텐데 왜 남의 작품을 각색하는 거지요?"하고 권하는 듯이 말해올 때 사실 나도 좀 마음이 흔들립니다. 물론이지요. 그러나 사실상 나는 스스로 희곡을 쓴 일이 있고 또 앞으로 다른 작품들을 쓸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내가 새로 쓰는 작품이 오히려 내가 각색하는 작품을 아쉬워할 핑계를 제공하게 될지 모른다는 지레짐작을 하게 되는군요. 다만 내가 나의 작품을 쓸 경우 나는 좀더 광범하고 정확한 계획에 따르는 작품과의 관련하에서 작업하는 작가로서 쓰는 것입니다. 내가 각색을 할 때는 그의 연극적 개념을 따라 작업하는 연출자로서 각색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는 동일한 정신에 의하여 고안되고 영감을 받고 기획되며 동일한 사람에 의하여 씌어지고 연출되는 '총체적 스펙터클'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한 공연물의 근본적인 승산인 톤과 스타일과 맥박의 통일을 얻을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다행히도 배우-연출자인 동시에 작가의 경험을 가져온 터이므로 이와 같은 복안을 실천하려고 노력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에게 텍스트나 번역이나 각색을 주문하고 그것들을 나중에 연습할 때 연출의 필요에 따라서 무대 위에서 다시 손질하게 됩니다. 요컨대 나는 나 자신과 합작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연출자와 작가 사이에 그리도 빈번하게 일게 되는 마찰을 피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이 작업 때문에 스스로가 위축된다고 생각한 일은 거의 없으므로 기회가 생기는 한 나는 이 작업을 안심하고 계속할 예정입니다. 반대로 과거에도 현재에도 파리의 무대에서 구경할 수 있는, 저 심금을 그리도 잘 울려준다는 대성공의 기업들처럼 축소된 수단을 통하여 연극을 공연하는데 내가 동의할 때만 오직 나는 작가로서의 내 직업을 저버린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닙니다. 현재 내가 연극에 대하여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을 요약하는 <악령>을 무대에 올리면서 나의 작가로서의 직업을 저버렸다는 느낌을 가져본 일은 한번도 없습니다.


이상과 같은 것이 내가 연극에서 사랑하는 점이고 내가 연극에 봉사하는 점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두고두고 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 고된 직업은 오늘날에 와서 바로 그것이 지닌 고귀한 성격 자체에서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수익성의 끊임없는 상승과 직업 단체의 관료화 현상은 점차로 사설 극단을 보다도 상업적인 스펙타클 쪽으로 내몰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리하여 이 위대함의 장소가 저속성의 장소로 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투쟁을 포기할 이유야 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궁륭들 아래, 저 막 뒤에는 언제나 멸망할 줄 모르는, 모든 것이 멸망하는 것을 막아줄 예술과 광기의 힘이 배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 각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힘이 잠들지 않게 하고, 그 힘이 장사꾼들과 제조인들에 의하여 그의 왕국에서 추방되는 일이 없도록 막아주는 것이 우리들에게 맡겨진 소임입니다. 그 값으로 저 예술과 광기의 힘은 우리들을 꼿꼿이 지탱하게 해줄 것이며 우리들을 좋고 튼튼한 마음속에 보호해줄 것입니다. 받으며 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가 처음에 말했던 행복과 순진무구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분명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 모두가 필요로 하는 억세고 자유스러운 생명적 삶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다음 작품에 열성을 쏟기 위하여 일자리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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