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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서] 폐쇄성 속에서 재현이 진행되는 것이 왜 치명적인 것인가

entweltlichte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8.07.17 02: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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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모든 이데올로기 극, 통화하고 해석(물론, 니체가 사용한 뜻으로가 아니고, 보편적인 의미로)하는 연극, 즉 내용이나 메시지(이것이 정치적, 종교적, 심리적, 형이상학적 등등, 어떤 성질의 것이든)를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시키는 극[주:잔혹극은 관객이 없는 스펙터클인 동시에, 듣는 이가 없는 말이다. 니체가 말하기를 '디오니소스적 흥분 속에 있는 인간은 광란의 주신축제에 모인 관중들이 경청자가 아닌 것처럼 경청자가 될 수 없다. 즉 서사시, 서술자가 앞에서 말했듯이 같은 디오니소스를 섬기는 자에 의해서만 이해된다. 디오니소스적 흥분의 도가니 속에 경청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엿듣다가 들킨 펜시우스가 광기의 여인들 메나드들에 의해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지는 그런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바이다......그러나 단어를 이해하려는 경청자의 요구에 따라, 가장 명백한 증언에 의거해, 오페라는 시작된다. 뭐라고? 경청자가 요구한다고? 말이 이해된다는 건가?("초기 그리스 철학(Early Greek Philosoohy)", trans. Maximilian Mugge(New York:Russell and Russell,1964), pp. 40~41).], 무대행위와 현재시제에서 완전히 소진되지 않을, 무대와 일치하지 않는, 이것 없이는 반복이 불가능한 메시지를 이해시키는 극. 여기서 우리는 아르토의 계획, 즉 그의 역사적이며 형이상학적 결정 속에 있는 심오한 본질을 다루려 한다. 아르토는 반복의 재현을 삭제하기를 원했다.[주:불어 단어인 Repetition은 '반복'과 '리허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배스]] 그에게는, 반복은 악이었고, 이런 주제를 중심으로 그의 텍스트 전부가 구성된다. 반복은 힘, 현존과 삶을 이것으로부터 유리시킨다. 이러한 유리는,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유보하는, 지출을 보유하고 두려움에 승복한데 대한 경제적이고 타산적인 제스처이다. 반복의 힘은 아르토가 파괴하려고 했던 모든 것을 통제하며, 신, 현존, 변증법 등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신은 삶 속에서 차이와 반복으로 그의 죽음은 삶을 끝없이 위협하면서 영원히 계속된다. 이것은 살아 있는 신이 아니라,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죽음의 신이다. 신은 죽음이다. '왜냐하면 무한성은 죽었고, /따라서 무한성이란 /죽지 않은 /죽은 자의 이름이기 때문이다'(84). 반복이 있는 순간, 거기에는 신이 있고, 현재는 현재를 고수하고 보존하는 듯하나, 현재를 피해버린다. '절대적이란 것은 존재가 아니며 결코 존재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서는, 다시 말하면, 신이 영원만큼이나 긴 시간 동안 수없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면, 오직 단 한 번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불가능하지만, 신과 같이 되고자 했던 존재를 나로부터 빼앗아가지 않고서는 어떤 존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945년 9월). 반복이 지니고 있는 또 다른 이름은 실체다. 실체란 수없이 다양한 형태와 삶의 기원과 죽음이 단어로 되풀이되는 형식이다. 왜냐하면 반복될 수 있는 가능성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 말이나 기호는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반복하지 않는 것, '처음부터' 반복에 의해 이미 분열되지 않는 것은 기호가 아니다. 매번 똑같은 것을 지시하기 위해서는 지시되는 의미화는 이상적이어야 한다ㅡ그런데 이 이상은 반복이 만들어내는 확실한 힘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실체가 죽음의 신의 승리이며 삶을 제압한 죽음과 영원한 반복의 가장 중요한 단어가 되는 이유이다. 니체처럼(예를 들면 "철학의 탄생"에서처럼), 아르토도 삶을 전통철학에서 말하는 실체에 종속시키는 것을 거부했고, 계보학적 순서를 뒤바꾸었다:'첫째, 자신의 영혼을 살고 자신의 영혼에 충실하려면 존재의 문제는 그것의 결과일 뿐이다'(1945년 9월). '인간 육체의 가장 큰 적은 전통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다'(1947년 9월). 출판되지 않은 다른 텍스트에서 아르토는 '존재를 초월하는 것'을 우선시했다. 이 표현은 니체의 스타일로 플라톤(아르토가 틀림없이 읽었던 철학자)의 표현을 묘하게 다시 각색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변증법은 이 변증법의 움직임이 현존으로 재적용되는 것이며, 반복의 경제성 그 자체이다. 또한 진리의 경제성이기도 하다. 반복은 부정적인 것을 요약하며 과거 현재를 진리인 양, 이상인 양 모으고 유지시킨다. 진리란 항상 되풀이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현재를 유일한 그리고 특이한 시간 속에서 소진한 후 되돌아오지 않는, 확고한 비반복성이, 무서운 추론과 존재학과 변증법, 특히 '나를 소멸시킨 변증법'(1945년 9월)을 퇴치해야만 한다.[주:변증법이 가지는 경제성에 대해서는 "글쓰기와 차이"의 9장 '제한적 경제성에서 일반적 경제성으로'를 참고하라. 진리, 반복, 그리고 존재를 초월하는 것에 대해서는 "산종"에 있는 '플라톤의 약방' pp. 192~95를 참조하라. [배스]]
변증법이란 항상 우리를 멸망시킨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우리가 이것을 부정하는 것을 이미 계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긍정하는 것을 이미 계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복을 죽음으로 생각해서 거절하는 것은 되돌아오지 않는 현재인 죽음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구조는 거꾸로 뒤집어진다. 예를 들면, 니체가 생에 대한 긍정을 외쳤을 때 그러했다. 현재 시간의 고유성을 이같이 고유한 현시인 양 보이기 위해, 현시를 죽음에게 넘겨버리는 절대적 관용과 낭비는, 이미 현시의 현존을 유지하기를 원했고, 책과 기억을, 그리고 실체에 대한 사유와 기억을 재개하기를 원했다.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유한적 현존을 구성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 유한적 현존 속에서 되풀이될 수 없는 것을 보유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즉 차이를 유희적으로 소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냉혹한 구조로 환원된 채, 헤겔 이후 개념화된 사유의 역사적 모체가 된다.[주: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의 제9장 '제한적 경제성에서 일반적 경제성으로'에서 논의한 것을 되풀이하고 있다. 생략을 많이 하면서, 데리다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주인은 죽음의 위협을 마다하지 않으며 현재를 쾌락적으로 소비하면서 현시를 보유하지 않는다. 노예는 바로 이런 주인이 지닌 진리를 그대로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주인과 관계를 가짐으로써 현재를 보유하기 때문에, 이때 현시는 현시를 소모하는 것을 유보시킨 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변증법적 기억(Erinnerung)을 구체화시킨 것이다. 주인과 노예는 둘 다 형이상학과 현존 그리고 이것 중 어느 것을 확고히 하는 가능성이며, 항상 필연적으로 그랬듯이, 형이상학적 제스처를 반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배스]]
연극의 가능성은 어쩔 수 없이 반복에 불과한 비극을 반영하는 이런 사유의 초점이 된다. 반복이 발산하는 위협이 무대 위보다도 더 큰 곳은 없다. 그 어느 곳에서도 무대에서 만큼, 반복의 기원, 즉 삭제되었을지도 모르는 태고적 반복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아르토가 "연극과 연극의 모조"[주:1936년 1월 25일, 장 폴랑에게 보낸 편지에서:'내 책의 제목을 찾은 것 같다. "연극과 연극의 모조"이다. 왜냐하면, 극이 삶을 모조한다면, 삶은 진실한 극을 모조한다......이 책 이름은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에 내가 발견했다고 생각되는 극의 모든 모조를 뜻한다. 즉 형이상학, 질병, 그리고 잔혹성 등 모든 모조들 말이다. ...... 오직 무대 위에서만 사고와 제스처 그리고 행위의 합일이 재구성될 수 있다"(CW, 5:272~73).]에서 사용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억제할 수 없는 반복의 움직임 속에서 무대로부터 삶으로부터 현시적 행위의 순수한 현존을 훔치는 은밀한 복사와 모조를 지칭하는 의미에서. '그 한때'란, 의미도 현존도 없는, 독해불가능의 수수께끼다. 아르토는 축제는 오로지 한번만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텍스트 비평은 대학원 학생들에게, 형식 비평은 문학이론가들에게 넘겨주라. 여태 말해졌던 것이 말해졌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라. 표현은 똑같은 가치를 두 번 갖지 않으며, 두 번의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모든 말은 한 번 사용되면 죽고, 사용되는 그 순간에만 기능하고, 형식은 한 번 사용되면 다시 사용될 수 없으며,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도 없으며, 무대란 제스처가 한 번 사용되면 똑같은 방법으로 두 번 사용될 수 없는 유일한 곳임을 인식하라'(TD, p. 75). 모든 것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 것 같기도 하다:연극적 재현은 유한적이며, 이 뒤에 연극적 실체, 현존 뒤에는 아무런 흔적도, 다른 곳으로 옮겨놓을 수 있는 어떤 물체도 남기지 않는다. 연극은 책도 작품도 아니며, 에너지 그 자체이며, 이런 뜻에서 생의 예술이다. '극은, 한번 행해지면 다시 행해질 수 없는 행위의 무용성과 생으로 표현되지 않는 상태가 더 우수하다는 것, 그리고 복원되면 순수함을 생산하는 더 우수한 행위를 가르쳐준다'(TD, p.82). 이런 뜻에서 잔혹극은 경제성[죽음]이 없는, 유보되지 않는, 회귀되지 않는 역사가 없는, 차이와 '낭비의 예술'이 될 것이다. 순수한 차이가 순수한 현존이 된다. 잔혹극의 행위는 잊혀져야 한다. 능동적으로 잊혀져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니체가 '축제'와 '잔혹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도덕적 계보학"의 두번째 논문에서 논의되고 있는 '능동적 망각'을 실천해야만 한다.
아르토가 극 이외의 글에 혐오감을 가졌다는 것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아르토에게 혐오감을 일으킨 것은, 플라톤의 "파에드러스"에서처럼, 육체의 제스처나 영혼 속의 진실의 기술에 이물질적인 모조기억술의 표시가 아니라, 이와 반대로 진실이 기술되는 장소, 살아 있는 육체의 타자, 반복에 불과한 글이 내세우는 이상이었다. 플라톤은 글을 육체에 비유하면서 질시했고, 아르토는 살아 있는 육체와 제스처를 삭제한다고 생각했기에 글을 질시했다. 글은 공간 그 자체이며 일반적으로 반복의 가능성 그 자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텍스트와 쓰여진 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신을 제거해야만 한다. 쓰여진 시는 단 한 번만 읽을 가치가 있으며, 읽고 난 후에는 없애버려야 한다'(TD, p.78).
이렇게 아르토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극은 이 세상에 없다. 그리고 아르토 자신이 시도했던 극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이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발견되어야 한다'고 그가 말한 잔혹극의 '문법'은, 항상 반복이 아닌 재현, 죽은 모조품을 지니고 있지 않은 충만한 현존을 재출현시키는, 스스로 반복하지 않는 현시의, 즉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비현시의 재현이 지니는 접근 불가능성의 제한을 벗어나지 못한다. 현시는 스스로를 이렇게 제공하고, 나타내고, 출현시키고, 시간이 지배하는 무대, 혹은 내면적 차이를 보유함으로써, 그리고 다만 고유한 반복의 내면적 모사를 통해서만, 재현을 통해서만, 무대의 시간을 재개한다. 그리고 변증법을 통해서도.
아르토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어떤 변증법......' 만약 우리가 변증법의 지평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전통적인 헤겔철학을 벗어나서ㅡ아마도 우리는 변증법은 유한한 것이 무한하게 움직이는 것, 삶과 죽음의 통일성이, 차이가, 고유한 반복이, 즉 순수한 기원의 상실인 비극의 기원이, 무한히 움직이는 것임을 이해할 것이다. 이런 뜻에서, 변증법은 비극이며, 순수한 기원에 대한 철학적 혹은 기독교적 사유에 대항하는, 즉 '최초의 정신'에 대항하는 유일한 긍정이 된다:'그러나 최초의 정신은 여전히 나를 멍청하게 만들고 있으며, 기독교 정신인 이 최초의 정신으로부터 나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1945년 9월). 비극적인 것은 반복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반복의 필수조건이라는 점이다.
  아르토는 잔혹극이 순수한 현존 안에서 시작되고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잔혹극은 이미 재현 속에서 '두번째로 탄생된 것'이며, 순수한 기원이 가지는 힘이 될 수 없는 힘의 갈등 속에서 만들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의심할 나위도 없이 잔혹성은 이런 갈등 속에서 실천되는 것이며, 스스로 관통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기원은 항상 관통된다.이것이 바로 연극의 연금술이다.

더 이야기를 전개하기 전에, 독자는 원형적이며 원시적 극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물을 것이다. 문제 핵심에 접근해보자. 극의 기원과 존재이유 혹은 원초적 필요성에 대해 사실상 질문을 제기하다보면, 본질극도 이질적인 질료로 형상화됨으로써 형이상학적으로 본질주의 극의 본질이 이미 제거되었고 분열되어 있어, 본질주의 원칙만을 유지하고 있지만, 중요하고 능동적인 형태로(예를 들면, 울려퍼지면서) 갈등의 무한한 퍼스펙티브를 충분히 포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극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시적으로 분석해야 한다......이런 본질적인 드라마는ㅡ어떤 갈등도 없이ㅡ창조보다 더 오묘한, 오직 단 하나의 거대한 의지의 결과로 반드시 재현되어야만 하는 어떤 것의 이미지를 따라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모든 위대한 신비의 뿌리에 자리잡고 있다는 이 본질 드라마도, 창조의 두번째 시기, 표상의 어려움과 모조, 사유의 질료화의 두번째 시기와 연관되어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만 한다. 단순성과 질서가 지배하는 곳에는, 극이나 드라마가 있을 수 없는 것 같고, 시 같은 진정한 극예술은 다른 수단을 통해서 조직화된 무질서에서 탄생된다(TD, pp. 50~51).

이리하여 원시극과 잔혹성은 반복되면서 시작된다. 재현없는 극과 불가능한 것에 대한 사유가, 무대에 그대로 적용되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는 기원, 전야, 한계 그리고 이런 것들이 지닌 죽음의 지평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서구극이 지니고 있는 에너지는, 극 자체가 지닌 가능성 안에서 제한 포위되어 있는데, 이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며, 서양의 전체 역사를 구성시켜 온 중심적 위치가 되어 왔다. 그러나 반복이 중심적 위치가 됨으로써 반복은 중심적 위치를 훔치고, 우리가 탄생의 가능성에 대해 죽음의 지평과 지나간 과거의 열림으로서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금지시킨다.
아르토는 이러한 한계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다. 즉 순수한 극예술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현존이 현존이 되고 자체적인 현존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 스스로를 재현시켜야 하며, 사전에 이미 관통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긍정은 스스로를 되풀이할 때 관통되어야만 한다. 이 말은 재현의 역사와 비극의 무대를 시작한 부친살해, 즉 아르토가 가장 가까이 접근해서, 그러나 오직 단 한번만 반복하기를 원했던 부친살해ㅡ이러한 살해는 끝없이 무한히 되풀이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이 자체에 대한 언명을 분열시킴으로써 시작되고 이 자체의 재현을 동반시킨다. 바로 이렇게 됨으로써, 스스로를 삭제하고 이탈된 법을 언명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호만, 즉 반복만 있으면 충분하다.
바로 이러한 한계하에서, 그리고 그가 내면의 차이나 반복이 아닌 현존의 순수성(이것은 거꾸로 차이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차이와 같은 것이 된다)[주:차이라는 개념에 순수성을 재도입하려면, 이 차이를 비차이와 충만한 현존으로 되돌려주어야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반헤겔주의에 스스로 반대하는 결과를 낳는다. 즉 헤겔주의가 다시 된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현존으로써 실체를 결정하지 않는 범위에서, 차이를 원래 불순한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차연을 차이를 끝없이 되풀이하는 경제성으로 생각할 때 가능하다.]를 구제하려고 했던 범위내에서, 아르토는 동시에 무대의 불가능성을 선언하고 그리고 무대를 없애버리려고 했으며, 반복에 의해 살해되는, 부친에 의해 금지되고 얼이 빠진 무대가 발산하는 것을 더 이상 보기를 원치 않았다. "여기에 눕다"에서 아르토가 '나 앙토넹 아르토는, 내 아들이자/내 아버지이며, 내 어머니인 동시에/내 자신이다'(AA, p.238)라고 썼을 때, 그는 원형적 무대를 격하시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극의 가능성을 끝까지 고수하면서 무대를 만드는 동시에 무대를 철폐하고자 했던 것은 아르토가 가장 철저하게 극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1946년 12월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난 지금
아마도 많은 사람들을 멍하게 만들 수 있는 말을 하려 한다.
 
연극의 적이었다.
난 항상 그랬다.
내가 연극을 사랑했던 만큼,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난 연극의 적이었다.

그후 그는, 반복에 의한 극을 인정할 수도 없었고, 반복하지 않는 극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무대는
정열적으로 넘쳐흐르는 무서운 힘이
육체에서 
육체로
이동되는 곳이다.
이러한 이동은 두 번 되풀이될 수 없다.
이러한 이동을 한 번 보여준 후
다른 것을 추구하는 대신
이렇게 얻어진 별 같은 제스처를 제거하면서
특이한 매력의 구조에 맡겨버리는 발리 극보다
더 불경건한 극은 없다.

스스로 반복하지 않는 것을 반복하는 무대, '불변의 법은 악이 되고, 노력과 다른 잔혹성에 이미 첨가된 잔혹성이 선이 되는' 힘의 갈등 속에서 차이를 고유하게 반복하는 무대ㅡ이것이 바로 재현과 함께 시작되는 잔혹극의 치명적 한계가 된다.
왜냐하면 재현은 이미 태초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끝이 없다. 그러나 끝이 없는 재현의 폐쇄성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수 있다. 폐쇄는 차이가 끝없이 반복되는 순환적 한계다. 다시 말하면, 폐쇄는 폐쇄가 유희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유희인 세상의 움직임이다. '이유는 절대적인 삶 자체도 게임이기 때문이다'(OC, 4:282). 이러한 게임은 필연성과 유연성의 총체로서 그 자체이다. '무한한 것은 신이 아니라 우연성이다'("단편글모음"). 이러한 삶의 유희가 예술이다.[주:다시 니체로 되돌아가자. 모든 텍스트는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헤라클리투스를 그대로 따르면서, 니체는 말했다:'비슷하게, 어린아이와 예술가가 유희하듯이, 영원히 살아있는 불꽃은 유희하고 건설하고 파괴한다. 바로 순진성을 유지하면서ㅡ이 유희의 불꽃은 그들과 함께 유희한다......어린아이는 장난감을 내던진다;그러나 순진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한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건설하자마자, 질서에 대한 선천적 감각으로 합당하게 연결하고 가담하고 형성시킨다. 따라서 예술가로부터, 그리고 예술가가 예술을 어떻게 창조하는가를 배운 미학적인 인간만이 세상에 대해서 명상할 수 있고, 다양성이 만들어내는 갈등이 어떻게 질서와 정의 속에서 포함되는지, 어떻게 예술가가 높은 곳에서 관조할 수 있고, 예술작품 속에서, 어떻게 필연성과 유희, 갈등과 조화가 예술품 탄생을 위해 서로 짝을 이루고 있는가에 대해 명상할 수 있다'("초기 그리스 철학" 중에서 '그리스 비극시대의 철학', p.108).]
재현의 폐쇄성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현존이 스스로 탄생하게 허락하는 죽음과 유희의 잔인한 힘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며, 현존을 연기시키면서 회피하는 재현을 통해 쾌락적으로 현존을 소진시키는 죽음과 유희의 잔인한 폭력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다. 재현의 폐쇄성을 생각하는 것은 비극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운명의 재현으로서가 아니라, 재현의 운명으로서의 비극에 대해서. 그리고 이것이 지니고 있는 필요 없고 근거 없는 필연성에 대해서.
그리고 폐쇄성 속에서 재현이 진행되는 것이 왜 치명적인 것인가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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