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제8 회 엽편경연] 발걸음.

이체(125.140) 2008.02.13 00:01:01
조회 89 추천 0 댓글 5



담배연기가 자욱하다. 모든 근심과 걱정이 녹아져 있는 그 안개는 내 작업실에서 돌고 돌아 환풍구로 빠져나간다. 누구를 위한 담배연기일까라는 생각도 하기 전에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그 소리가 연기들을 헤치고 내귀에 들어온다. 나는 몸을 일으켜 문쪽을 바라본다. 문이 열리고 안개들이 빠져나간다. 빠져나간 자리에는 한 노년의 신사가 우두커니 서 있다. 노년의 신사는 푹 눌러쓴 중절모를 벗고서는 자글자글한 주름이 뭉친 그 입으로 몇 번 오물오물거리더니 입을 연다.

"여기 이것도 수리가 가능하우?"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양복 안에 걸어져 있던 낡은 디지털 카메라를 건넨다. 누렇게 빛이 바랜 디지털 카메라. 기종도 확인이 불가능하고 이제는 부품조차 구할 수 없는 초창기 디지털카메라의 수리라니. 나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며 그 카메라를 받아들고서는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외형만 이리저리 깎이고 볼품이 없게 변했지만 속은 열어보지 않았으므로 쉬이 단정하기가 어려웠다. 노인이 이리저리 카메라를 체크하는 나를 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어떻게 수리가 안되갔소?"

두번재로 들어본 노인의 말투에서 평양 사투리가 억세게 묻어져 나왔다. 아버지와 비슷한 말투를 여기서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줄곧 티비에서 개그 소재로만 사용되어 왔을 뿐, 평상시에 들을 기회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어디 출신이세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걸렸지만 이 필름카메라의 수리 말고도 올 손님이 더 있기에 나는 노인에게 입을 열어 답했다.

"할아버지, 아직 속은 확인을 못했어요. 만약 수리가 가능하다면 윗층의 직원이 전화 드릴거에요."
"고마우이. 내래 이거 고마워서 어쩌나. 꼭, 꼭 잘 좀 수리좀 해달라오."
"예. 할아버지."
"아, 그리고 말은 않했는데 거기 몇 장이 찍혀있는데. 그것도 좀 해주오."
"예. 할아버지."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있는 것도 꼭 내가 볼수 있게 해주오."
"걱정마세요. 할아버지."
"그럼 난 젊은 청년만 믿고 가보갔소."
"들어가세요."

나는 뒷모습을 보인채 윗층으로 올라가는 노인의 뒷모습에 인사를 한 후, 필름을 꺼내고 드라이버로 이리저리 분해하기 시작했다. 볼품없는 외관과는 달리 안은 깨끗했다. 그러고보니 나사도 녹슬지 않았다. 작업의 시작을 내 몸속에 알리기 위해 나는 담배를 꺼내들어 입에 문다. 불을 붙여 다시 한번 내 작업실을 안개에 빠져들게 하고 있었다.



배터리 부분이 좀 상했을 뿐이었다. 다른 전압을 사용한 듯, 과전압으로 안쪽의 배터리 부분이 시커멓게 그을려져 있었다. 아마도 수십번을 꽂았다 말았다 한 듯 해보였다. 전원이 켜지지 않으니 다시 한번 꽂고, 빼서 다시 꽂고를 반복했었기에 외형은 멀쩡했지만 배터리 부분만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사진인화를 부탁했었기에 나는 배터리 대신 쓰는 전압도구를 꽂고 켜 보았다. 한산한 거리의 풍경. 담백한 맛이 느껴지는 풍경에 아가씨들은 한복을 입고 젊은 청년들은 와이셔츠에 검은 정장바지를 입고 있다. 어디서 찍은 사진인 지 궁금하여 나는 버튼을 돌려가며 여러 사진들을 감상한다.

"세상에..."

돌려보던 사진 중앙에는 내가 찍혀 있다. 풋내나던 대학교 시절을 기준으로 담배연기에 찌든 지금의 내 모습까지. 크게는 성장과정이 찍혀져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항상 아버지가 서 계셨다. 환하게 웃는 채로 말이다. 평소에 표정이 없으셨던 분이, 나에게조차 그 웃음을 잘 보이지 않던 그 분이 이 카메라 안에서 활짝 웃고 계신다. 나는 잘 있습니다라는 안부를 전하는 듯한 그 미소에서 점점 이 고장난 디지털 카메라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담백하면서도, 이제는 하나가 된 피붙이 나라의 사진들이 나의 눈에 들어올때마다 나의 의심은 확신을 갖게 되었고 휴대폰을 꺼내들어 전화를 하기 시작한다.

"아버지. 저에요."



"젊은이 수리는 다 되었간?"
"네. 할아버지."
"고마우이. 정말로 고마우이. 사진은, 사진은 어디 있소."
"할아버지. 고장나고 그 사진들을 한번도 보지 못하셨나봐요?"
"찍기만 했었소. 전원이 잘 안켜져 수십번을 전기를 불어넣어도 안되는거라."
"사진, 현상했습니다. 보세요."

나는 품속에서 고화질로 현상된 사진들을 노인 앞에 건넸다. 노인은 디지털 카메라를 다시 목에 걸어 품속에 감춘 뒤에 사진들을 건네 받고 하나씩 하나씩 훑어보다가, 나의 모습도 번갈아본다. 자글자글한 그 두 눈속에서 이슬이 맺히고, 밥벌이의 역겨움과 애타는 그리움이 흘러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와 억센 두 손으로 나를 껴안으면서 무엇이 서러우신 지 땅이 꺼져라 통곡한다.

"네가. 네가. 아..네가."
"반갑습니다. 할아버지."
"참. 참. 참 애새끼가 너무나도 잘생겼어. 참 애새끼 잘 키웠어. 참으로..."
"번갈아 가면서 찍은걸 교환하시느라 많이 힘드셨겠어요."
"아니야. 아니야. 내 새끼는 어딨어. 네 아비는 어딨나 그래. 이 날만을 죽도록 기다렸어 기래."
"집으로 모실게요."

눈물과 콧물을 내 자켓에 묻히실 때마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세월이 굽게 만든 그 허리만을 다독여주고 있었을 뿐이었다. 평양에서 중국으로, 그리고 또 중국에서 한국으로. 그리고 또 한국에서 중국으로, 평양으로. 험난한 여정을 하다가 직접 이곳까지 오게 된 이 디지털카메라. 하나가 된 이땅에서 다시 태어난 그 카메라의 감촉이 내 품속에서 아련히 전달되어왔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할아버지의 억센 가슴 안팍에서.

추천 비추천

0

고정닉 0

0

원본 첨부파일 1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연인과 헤어지고 뒤끝 작렬할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4/22 - -
99508 죽음만이 명료하네 [3] 검은남작(121.125) 15.10.07 95 1
99505 이 시 어떻게 다듬으면 좋을까 [5] ㅇㅇㅇ(121.165) 15.10.07 103 0
99498 참 써두길 잘했다 싶은 ㅇㅇㅇ(39.7) 15.10.07 91 3
99495 사실 여기 글 쓰기가 좀 무서웠었는데 [8] ㅇㅇㅇ(39.7) 15.10.07 125 0
99494 비평받을 때 가장 좆같은 건 말이야 [28] po(39.116) 15.10.07 1103 0
99493 표현하는 연습이 중요한가 ㅇㅇㅇ(39.7) 15.10.07 38 0
99490 일요일에 내가 짜파게티 요리사가 되는 까닭은? ㅁㄹㄱ(223.33) 15.10.07 39 1
99487 곱창 [7] ㅁㄹㄱ(223.33) 15.10.07 63 0
99485 소세키의 우미인초를 읽고 있는데 이 구절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4] 나그메(110.70) 15.10.07 130 0
99483 스트레스 받아서 위아프다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0.07 44 0
99482 존나 힘드네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0.07 29 0
99480 많이 모자란 습작입니다. [5] (120.75) 15.10.07 127 2
99479 함민복의 긍적적인 밥에서 ㅇㅇ2(119.18) 15.10.07 79 0
99473 시를 써 보았습니다 관람료는 후불입니다 [5] 시인같잖은(112.222) 15.10.07 148 1
99471 똥 싸며 만든 세계 [3] 시인같잖은(223.62) 15.10.07 129 0
99467 소설 쓰기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 [11] khy(182.160) 15.10.07 128 0
99464 너네는 삶이 비관하다고 생각하냐 [9] 아니요(117.16) 15.10.07 103 0
99462 맘충 [6] ㅇㅇ(223.62) 15.10.07 126 1
99459 수란 [3] 로고(1.239) 15.10.07 112 3
99457 로모는 나문재를 나문재 하오시었다네들 [9] (183.99) 15.10.07 178 1
99456 초유로써->초유로서 (183.99) 15.10.07 43 0
99455 니그라토, 지적 외계 생명체의 침공을 경고하다 (183.99) 15.10.07 38 0
99453 범인(凡人)의 아침 기도 로고(211.171) 15.10.07 78 2
99451 달달한 커피.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0.07 54 0
99450 숨겨진 여자 [1] 로고(211.171) 15.10.07 89 1
99448 죽음은 최고의 축복이다. [13] 검은남작(121.125) 15.10.07 201 1
99445 신비의 무도회를 열자 검은남작(121.125) 15.10.07 72 1
99444 고귀한자들아 눈을 떠라 [2] 검은남작(121.125) 15.10.07 83 0
99443 똥쌀땐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2] ㅁㄹㄱ(14.41) 15.10.07 94 1
99442 황금만능주의에 대한 생각★ ㅁㄹㄱ(14.41) 15.10.07 79 0
99441 두 손으로 가리면 [1]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0.07 69 0
99440 1/5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0.07 45 0
99439 졸렵. [1]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0.07 51 0
99438 사랑의 시 [2] ㅁㄹㄱ(14.41) 15.10.07 77 0
99437 생은 고귀하지 않다. [5] 검은남작(121.125) 15.10.07 121 1
99436 반성해야될게 많은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0.07 33 0
99434 모든게 짜증스러운걸보면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0.07 35 0
99432 허물고싶다 [2]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0.07 57 0
99429 죽음은 완벽하다. [1] 검은남작(121.125) 15.10.07 100 0
99428 마음에 추가 기울어져있고 [1]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0.07 41 0
99427 쓸데없어보이지만 [3]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0.07 59 0
99425 시 평가해줄수 있을까? [6] 단순(121.165) 15.10.07 163 1
99424 감정을 시에 옮겨 담는다는게 [2] 잉영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0.07 92 0
99423 지금 있는 사람? [1]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0.07 64 0
99416 오롯이라는 표현은 참 올드해 [6]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0.07 138 0
99415 이정도면 작문 ㅁㅌㅊ? ㄱㅈ(218.235) 15.10.07 75 0
99410 슬픔과 동시에 기쁘다 [4] 시인같잖은(112.222) 15.10.07 101 0
99409 · ·(112.149) 15.10.07 50 0
99408 닉추천좀 해 주십쇼 [6] 시인같잖은(112.222) 15.10.07 97 1
99407 족발을 꿈꾸는 청년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0.06 53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