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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룡 에세이] 새내기의 꿈, 그리고 험난한 여정의 시작

운영자갤로그로 이동합니다.(202.136) 2007.03.28 11:50:06
조회 1949 추천 1 댓글 3

  제1장 스타트 라인에 서서

  2. 도서관을 나오다 - 새내기의 꿈, 그리고 험난한 여정의 시작


  나는 자갈밭을 팔아 대학을 다녔다. 집과 고향에서는 당연히 기대가 컸다. 나또한 법대에 들어 왔으니 막스베버와 같은 사회학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들어온 후 오직 학문에 몰두해 그간 굶주렸던 지적 호기심을 채우며 배움의 기쁨을 한껏 만끽하고 싶었다. 오래 전부터 나는 그런 삶을 꿈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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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눈이 휘둥그래졌다. 거리에는 온통 밝고 눈부신 사람들로 가득했고 도시는 어찌나 화려한지 제주에서 볼 수 없었던 진귀한 것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낯선 풍경들이 나를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대학에 입학 후 첫 번째 맞은 봄의 캠퍼스는 내 인생에 있어 커다란 감동이었다. 나는 조금씩 대학생활에 적응해 갔다. 같은 강의를 듣는 여학생들과도 알고 지내면서 시험기간에는 새벽에 일찍 도서관에 나와 대신 자리를 잡아주기도 했다. 1학년 1학기 때는 학점이 4.3만점에4.13을 얻을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 새벽부터 도서관 문을 닫는 시간까지 공부를 한 덕택이었다. 오죽하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대학 신입생답지 않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공부하는 습관이 늘 몸에 밴 덕분이기도 했지만 공부를 힘들게 하지 않고 즐기면서 하는 편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공부하는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웠다. 사실 그 무렵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장학금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집안 사정이 악화일로를 달리고 있었다. 부모님을 돕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공부 뿐이었다. 그렇다고 늘상 도서관에서만 살았던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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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5월 김태훈 '열사'의 추도식이 열렸을 때였다. 도서관 앞의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추도식이 열렸다. 추도식이 시작되자마자 최루탄이 발사되고 코를 찌르는 알싸한 냄새가 도서관 실내를 메웠다. 창 밖으로 전경들에 의해 진압 당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이고 도서관 안의 학생들도 하나 둘 밖으로 달려 나갔다. 문득 강한 의혹에 사로잡혔다. '내가 지금 이런 상황에 꼭 열람석을 지키고 앉아 있어야 하는가', '내 아버지가 원하는 모습이 겨우 이런 비겁한 공부벌레의 모습이었던가'. 나는 벌떡 일어섰다.


  5월에 접한 광주사태의 진상은 내게 너무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도서관에 비치된 <뉴스위크>지에는 광주에 관한 내용이 뭉텅뭉텅 찢겨져 나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도 광주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지 않았다. 진실은 철저하게 왜곡되고 은폐돼 있었다. 기성세대는 불의를 본 후 눈을 감아 버렸고 언론은 귀를 막아 버렸다. 그러나 나는 권력의 폭력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토록 아름답던 캠퍼스를 전경들이 장악해 버린 후 웃음이 넘치던 학생들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다. 꽃내음 대신 최루탄 가스가 온 교정을 장악하고 숨막힐 것 같은 공포의 기압이 갓 스무 살을 넘긴 젊은 영혼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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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팽팽한 시대적 긴장이 감돌던 시기였다. 그런 현실이 교과서에 나와 있는 민주주의와 정치이론으로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다. 또한, 정작 목소리를 높여야 할 기성세대와 언론이 진실에서 등을 돌려버린 것에 뼈저린 배신감을 느꼈다. 차츰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수업이 비는 시간에 도서관이 아닌 학생들의 시위 대열 속에 서 있곤 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의 공부를 위해 팔아 넘긴 자갈밭이 고스란히 시대의 황무지가 되어 내 인생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단 하나의 진실을 향한 험난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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