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덕분자지만
사실 내가 선덕에서 가장 많이 돌려본 장면은
합종 결렬 후 미담 모자가 언덕에서 만나는 장면이야.
비덕만큼이나 미담 사랑함 ㅜㅠ
서로 알면서도 공식적으로 관계를 인정할 수 없어 더 애절하고 비통했던......
설정은 비재 끝나고 유신 풍월주 된 직후 정도야.
이 때면 미담이 서로 모자 지간인 거 안지는 얼마 안되었지만, 이미 몇번 공격을 주고 받은 터임.
사실 본방에서는 미실이 비담에게 연모하냐고 대놓고 얘기한 건 청유 갔을 땐데... 좀 땡겨봤어.
덕만도 등장하니 미비덕이긴 한데, 공주님은 조연ㅎㅎ
말했지만 상플 써본 적 없어 시점 따위 엉망인데...
그래도 즐겁게 봐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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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떠돌이 생활에 익숙해 있던 비담은 원체 잠이 적었다. 큰 꿈을 품은 스승을 따라 고구려 백제 땅까지 다니다 보면 늘 인가나 주막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밤이슬 가랑비 피할 수만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머리를 대면 잠들었고, 쪽잠으로 기운을 회복한 후에는 걷고 또 걷던 날들이 비담의 인생 대부분을 차지했다.
궁에 들어와 화랑복을 입은 후에도 그 버릇은 여전했다. 날이 채 밝기도 전 눈을 뜨면 홀로 산을 타고 검술 수련을 한 후, 습관처럼 공주의 처소 근처를 지났다. 산채에서 황실 서고에 가는데 공주의 침소에 들르자면 조금 더 돌아야 하지만, 비담은 그냥 그녀의 곁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갈 수 있는 그 순간이 좋았다.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녀가 침소에서 곱게 잠들어 있으리라는 상상만으로도 심장 한 켠이 따뜻해지곤 했다.
뜻하던 대로 유신랑이 풍월주에 오른 뒤, 화랑도에 대한 공주의 관심이 지극히 높아졌다. 화랑도 조직을 새로이 편제하고 무예를 더욱 증진시킬 방안을 연구할테니 각자 준비하라는 공주의 말에, 비담은 아침 일찍 황실 서고를 찾아들었다. 책 속에 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화랑의 기원과 시대에 따른 변천을 살피다 보면 분명 괜찮은 생각이 나올듯 했다.
그러나 서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비담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덕만이었다. 덕만이 국사 진흥제 편에 머리를 대고 잠들어 있었다. 책 내음이 가득한 공간에 덕만의 체향이 은은하게 번져 있었다.
또 서책을 읽다 잠드신 모양이군.
비담은 잠들어 있는 공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섬세한 눈매, 뽀얀 두 뺨, 곱고 풍성한 머리채. 눈을 뜨면 더없이 단호하고 씩씩한 왕재이지만, 잠들었을 때만큼은 아기 같고 소녀 같은 공주였다. 비담은 덕만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덕만의 머리를 뺨을 입술을 쓸어내리고 싶어 한쪽 손이 허공에서 머뭇거렸다. 이윽고 손을 떨군 비담은 대신 서고 구석에 있는 얇은 담요를 가져와 덕만의 등 위에 덮어주었다.
그때 또다시 서고 문이 열리더니 인기척이 들렸다. 비담이 궁에서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 미실이었다. 미실 역시 이른 아침 서고에 있는 비담을 보고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 비담은 표정을 굳히며 까닥 고개를 숙였다. 미실은 비담과 덕만을 번갈아보더니 피식 웃음을 지었다.
- 또 보는구나.
- 예, 새주님.
- 공주께서 또 서고에서 밤을 새우신 모양이구나. 몸이 상할 수 있을 터. 네가 잘 살펴드리거라.
- ...... 예. 그리 하지요.
- 헌데, 공주께서는 알고 계시느냐?
-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 네 마음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걸 뭐라 하던가...... 연모? 아니면 사랑?
하마터면 비담은 손을 올려 미실의 입을 틀어막을 뻔했다. 미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잡았다는듯이 빙긋빙긋 웃고 있었다. 반면 비담은 공주에게 이런 식으로 제 마음을 들키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하필 미실이 그걸 제대로 꿰뚫어본 것은 더더욱 싫었다. 얼마 전 비재 일로 빈정거림을 들을 때도, 새주는 제 사심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무모하게 비재에 나선 것은 덕만에게는 연심을, 스승에게는 원망과 투정을 가득 담아 벌인 짓이 맞았다. 사랑받아 본 적이 없어 표현할 줄도 모르는 어린 소년의 치기였다.
그리고 마음 깊은 한 켠에는... 매정한 어미 앞에서 남다른 모습을 보여, 자신을 버린 것을 후회하게 만들고픈 사욕도 있었다. '당신이 키워주지 않았어도, 아니 당신이 키워주지 않아서 이렇게 잘 컸어'라고 보여주고 싶었다. 헌데 새주에게 그 모든 것은 한낱 비아냥거리에 불과했다. 오늘도 또 제 연심을 두고 이리 빈정거리는 미실 앞에서, 비담은 분하고 또 분했다.
- 쓸데없는 소리 하시려거든 그냥 가시지요.
- 나야 살필 것이 있어 왔으니, 네가 가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말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위인이었다. 욱하는 마음에 비담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는 그때, 덕만이 움찔하더니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한쪽 얼굴에 서책 자국이 남고 옆머리가 비죽 헝클어져 있는 모습마저도 비담의 눈에는 사랑스러워보였다. 비담을 본 덕만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미실을 보고는 더욱 커졌다.
- 오셨습니까 새주.
- 예. 오늘도 밤을 새우신 모양입니다.
- 예, 어쩌다보니... 비담도 와 있었구나. 서책을 보러 온 것이냐.
- 예 공주님. 계속 이리 하시면 몸이 쉬이 상하십니다. 왕업을 달성하는 것은 장기전이 아닙니까. 처소에 들어 잠시라도 눈을 붙이시지요.
왕업이라는 단어에 미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연심을 입에 올려 비담을 비웃는 미실이나, 왕업을 입에 올려 미실을 조롱하는 비담이나. 과연 그 어미에 그 아들이었다. 두 사람 간 팽팽한 긴장감의 본의를 잘 모르는 덕만만이 생긋 웃으며 비담에게 답했다.
- 폐하께 바로 가서 아뢸 일이 있다. 내가 필사한 것들을 처소에 가져가서 좀 기다려주겠느냐? 금방 돌아올테니 어제 하던 논의를 이어하면 좋겠구나.
- 알겠습니다, 공주님. 제가 가져다 놓을테니 다녀오십시오.
- 고맙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새주.
- 살펴가시지요, 공주님.
덕만이 다정히 웃으며 사뿐하게 비담의 곁을 지나갔다. 공주를 발걸음을 좇는 비담의 시선을 보며, 미실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비담과 다시 시선이 마주쳤을 땐, 뜻모를 웃음만이 입가에 남아 있었다.
-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꼴이. 꼭 어미 젖 못 뗀 강아지 새끼 같구나.
- ... 어미 젖을 먹어본 적이 없어, 떼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대놓고 저를 공격해오는 비담의 말에 미실도 순간 멈칫했다. 어미, 새끼, 젖. 모성을 자극하는 본능의 단어를 저도 모르게 뱉어놓고, 되받아치는 비담에 되려 당한 꼴이었다. 저답지 않은 언사에 미실은 입술을 깨물었다.
미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또 다른 이가 보기에도 모성이라는 단어는 미실과 거리가 멀었다. 하종도 보종도 다른 보통의 어미들처럼 애정을 듬뿍 주며 키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제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종류의 인간이 바로 미실이었다. 제 꿈이 언제나 앞서던 사람이었다.
경멸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보는 비담 앞에서, 미실은 비재 때 비담에게 진 후 막사에서 저를 올려보던 보종의 표정을 떠올렸다. 어미라기보다는 주군에 가까운 사람 앞에서 보종은 심하게 떨고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돌보지도 못한 채, 미실을 실망시킨 데 대한 꾸지람을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실로서는 최선이 아닌 결과였으나 보종이 최선을 다했음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멍투성이 피투성이가 된 채 입술을 깨물고 있는 보종 앞에서는 미실도 그 흔한 어머니일 수 밖에 없었다. 설핏 눈물이 날 것도 같았다.
- 잘 했어. 잘 싸웠느니라. 내 아들아.
비록 미실이 다정하고 살가운 어미는 아니었지만. 보종은 미실의 신뢰를 받으며 곁에서 자기 몫을 해내는 든든한 아들이었다. 설원공의 골품 때문에 정계 요직을 맡을 수는 없더라도, 그 누구나 보종이 미실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다. 미실 역시 제 입으로 아들임을 인정할 수 있는 떳떳한 존재였다.
그러나 장성한 아들의 몸에 팔을 두르며 이 말을 뱉을 때, 미실이 떠올린 것은 비단 보종만이 아니었다. 보종의 반대편에 서 있던, 태양과 명왕성만큼이나 멀고 먼 그 아들이 미실 머릿속의 반을 채웠다. 사랑과는 먼 이유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가장 멀어졌고, 지금 선 자리에서 앞으로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할 그런 아들이었다. 누구에게도 심지어 비담에게도 그 출생을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없는 그런 아들이었다. 잘 싸웠다 내 아들아, 그 말 한 마디는 차마 비담에게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자연스레 그 아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지만.
- 너무 다 보이지는 말거라. 더 많이 보여줄 수록, 지는 싸움이 연모다.
- 평생을 투쟁으로만 여기며 살아온 새주께서 어찌 연모를 논하십니까.
- 연모보다 더 지독한 투쟁이 어디 또 있을 성 싶더냐.
- 그보다 더 행복한 투쟁도 없겠지요. 하아, 있어봐야 서로 방해만 될터이니 새주께서 먼저 볼 일 보시지요.
비담은 다시 고개를 꾸벅하더니 공주의 필사본을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거친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책을 두어장 넘기던 미실은 책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 그래도, 승패가 너무 뻔한 싸움은 하지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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