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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예술가 소경염8 추가모바일에서 작성

ㅇㅇ(175.195) 2017.08.28 04:13:13
조회 1944 추천 67 댓글 21






















“전영아, 아빠 시력 좋아. 엄청 좋아.”
“아, 진짜…….”


*****

“내가, ……하면 어떻게 할 거에요?”
전영의 물음에 상대는 의아한 표정으로 전영을 바라보았다.
“왜? 너, 이 다 썩었어?”
“네?”
“너…….”
상대는 평온한 표정으로 조용히 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전영에게 물었다.

*****

“임플란트…….”
밥 잘 먹고, 이야기 잘 하다가 뜬금없이 무슨 소리일까. 그동안 치아가 많이 상했었나 싶어 걱정되는 마음에 물어도 전영은 대답 없이 중얼거리기만 했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 그리고 그 대답인 임플란트. 어쩐지 이대로라면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에 전영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열 사장은 생각했다. 우리 아들은 대체 뭐가 문제일까.

아버지의 뒷모습이 지겨워 도망치듯 미국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정착하진 못했다. 전영은 다시 프랑스로 넘어갔고 그곳에서 그림에 관심이 생겼다. 친구를 따라 잠시 여행을 갔던 것뿐이었는데 주변을 돌아보니 이미 프랑스였다. 그림을 보는 것도 좋았고 새로 사귄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았다. 그림을 보는 건 좋았지만 그리는 재주는 없었다. 자신을 잘 알았던 전영은 보는 거로 만족해야 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이대로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게 좋다. 파리에선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없어서 마음이 편하고 또 불편했다.
그리고 어느 날,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던 중 어쩌다 발견한 그림에 마음을 빼앗겼다. 누가 그린 그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쉬웠지만 그뿐이었다. 판매하는 그림도 아니었고, 적당히 용돈 받아 생활하는 처지에 살만한 가격도 아니었다. 전시회가 끝나는 날까지 몇 번 더 찾아가 혼자 감상하는 날도 더러 있었다. 그 그림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지나가는 길에 그림이 생각나면 찾아가서 봤을 뿐.
시간이 지나고 전영은 아버지의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외면해왔던 현실에 돌아왔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그동안 누군지 궁금해했던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을 자신의 집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을 직접 만나기까진 시간이 꽤 걸렸지만 첫 만남은 좋았다. 누군지 줄곧 궁금했던 그 사람은 굉장히 특이하고, 재미있고,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셋이 함께 있을 때 즐거움을 느꼈다. 그렇게 껄끄럽고 불편하기만 했던 이곳에서 처음으로 파리에서처럼, 그보다 더한 편안함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재미있는 나날 중 전영은 문득 뭔가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 한 번도 제대로 채워진 적 없는 마음이라 무엇이 문제인지도 몰랐지만 얼마 안 가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생각해보고. 재촉하고 싶진 않지만……”
“알아요.”
미안함이 묻어나는 아버지의 얼굴에 전영은 웃어 보였다.
언제까지나 부모의 그늘 안에 있을 수는 없다. 전영은 이제 자신의 진로,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때였고, 더 이상의 도피는 불가능했다. 이젠 그동안 미뤄왔던 선택을 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아직도 하고 싶은 건 없다. 하지만 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기에 우선 공부를 마치기로 했다.

새해,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온 전영이 때마침 갤러리에서 쉬고 있던 경염에게 자신과 함께 떠날 것을 제안했다.
“형, 나랑 같이 파리에 갈래요?”
장기간의 병간호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경염이 물끄러미 전영을 바라보았다.
“형한테 나쁜 제안은 아니잖아요. 그림은 앞으로도 계속 그릴 거고, 지금 형한텐 휴식이 필요해요. 계속 그렇게 살다간 분명 조만간 쓰러질 거야. 잠시라도 좋으니까 바람이라도 쐴 겸 나랑 같이 가요.”
처음이야 힘들겠지만 있다 보면 익숙해질 것이다. 이곳보다는 나을 것이다. 일단 가기만 한다면 방법은 있다. 가겠다고 하면 자신에게도 일말의 기회는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작은 저음의 목소리가 거절을 표했다. 쉽게 알았다 답할 거로 생각하진 않았지만 생각해볼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했다. 결국, 기회는 없었다.
“친구도 중요하지만, 친구보다 형이 먼저죠. 형이 건강해야 친구를 계속 만날 수 있는 거잖아, 형 잠깐 떠난다고 해서 큰일이 생기진 않아요.”
전영의 목소리가 커졌다. 평소와 다르게 감정이 잘 조절되지 않았다. 기회란 건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전영도 잘 알고 있었다. 전영에게 경고를 한 건 다름 아닌 소경염 본인이었으니까.
“알아. 그래도 아니야. 안 가. 안 갈래.”
“나 때문에 그래요? 같이 가자고 하는 사람이 나라서?”
그럴지도 몰랐다. 이 감정을 정리한 후 관계를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니.”
하지만 경염은 정리할 게 없었다. 처음부터 없었다.

마지막 제안을 거절당했다. 강요하고 싶다. 하지만 더는 강요 할 수 없다. 강요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게 짜증이 났다. 서운하고 아쉬웠다. 그리고 이내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끝까지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는 모습이 많이 원망스럽다.
하지만, 벌써 몇 번을 거절당했건만 여전히 좋다. 그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 자신을 위해, 그 사람을 위해 후회 없는 선택을 하고 싶다. 이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 무엇을 원할까?

경염은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기로 했다. 연성을 통해 계약서를 재수정한 전영은 잦은 이동으로 피곤해하는 경염을 위해 경염이 지낼 집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얼핏 들으면 냉정해 보이는 말투와는 다르게 경염의 표정에 드러나는 감정을 보자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역시 이 사람이 좋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 이런 것까지 거절하진 마요.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겨우 이것뿐 인데.”
“……고마워.”

*****

경염 친구의 병원을 떠올리며 근처에 집을 알아보던 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구해주겠다며 큰소리쳤지만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가격이 적당하면 조건이 안 맞고 조건이 맞으면 가격이 맞지 않았다. 내뱉은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나버려 시간을 끌기도 애매했다. 연성에게 도움을 청할까 싶기도 했으나 벌써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연성이라면 쉽게 구했을 테지만 아버지의 지원을 받는 학생 신분인 자신에겐 그럴 능력이 없었다. 연성과 비교해보니 점점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에 한숨을 푹푹 내쉬던 전영의 머릿속에 순간 한 친구가 떠올랐다.
유명한 연예인이다 보니 만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전영의 제일 친한 친구이자 가장 오래된 친구였다. 친구는 항상 집에 없고 1년에 한두 번 들리는 정도로 집을 비워두는 상태에 집도 병원 근처인, 전영이 찾던 조건에 딱 들어맞는 집이었다. 탁 트인 넓은 공간과 무료거나 관리비 정도가 전부일 가격. 마침 휴식 중이었는지 친구는 전영의 전화를 바로 받았다. 절친답게 짧은 안부 인사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긍정적인 친구의 반응에 계획대로 흘러가나 했으나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었다.
“나야 상관은 없는데……. 가끔 들리는 사람들이 있거든. 우리 누나나 선생님이 가끔 들리긴 하지만 누나는 내가 집에 있을 때나 가끔 찾아오니까 괜찮을 거고……, 선생님은 일이 바빠서 주에 한두 번 들리는 편이라지만 집이 워낙 넓어서 마주할 일은 없을 거다. 평소에 상관없다고 말하긴 했는데, 일단 물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너한테 선생님 번호 알려줄게.”
통화를 마친 전영은 부자 친구의 너무 넉넉해서 문제인 인심에 불평했다. 필요할 때 써먹으려 했더니……. 주치의도 아니고 그저 병원에서 치료 몇 번 받은 사이에 집을 내어주다니. 혹시 비밀리에 사귀고 있는 애인일까 싶었으나 친구의 성격상 그럴 리 없었다. 언제쯤 연락이 올지, 혹시 거절의 연락이 온다면 다시 집을 알아봐야 했기에 전영은 다시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음 날, 전영의 친구에게서 전화번호와 이름이 적혀있는 문자 한 통이 왔다.

*****

경염은 간단히 짐을 챙겼다. 전영의 걱정에 그러겠다고 답하긴 했지만 그렇게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모르는 사람과 한 공간에서의 생활은 불편할 게 불 보듯 뻔했고 아직까진 괜찮았다. 충분히 참을 수 있고 버틸만했다. 육체의 피로는 잠시 쉬는 정도면 충분했다.

전영은 친구의 집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람에게 연락하고 휴일을 맞췄다. 약속한 당일 경염과 함께 친구가 보내준 주소에 도착했을 때 보인 건 넓은 공원 사이 홀로 우뚝 솟은 고층 아파트였고 그중 가장 높은 층의 펜트하우스가 친구의 집이었다.
몇 년 전, 두어 번 놀러 왔을때 봤던 유령 도시 같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진 주변 풍경에 놀람도 잠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을 마중 나와 있던 남자의 반응에 한 번 더 놀랐다.
“어? 소경염?”
놀란 표정의 남자가 경염을 불렀다. 남자는 경염과 아는 사이인 듯 반가움을 표했지만 경염은 남자만큼 반가운 표정은 아니었다. 원래 표정이 없는 편이긴 했지만, 남자가 잡고 흔드는 대로 흔들리며 별 반응 없는 경염에 비해 일방적으로 반가워하는 남자가 조금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전영은 문득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하던 자신과 다르게 별 반응이 없던 경염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연성의 눈빛이 떠올랐다. 아마 연성이 자신과 경염을 바라볼 때의 느낌이 이런 것일지도…….
“그 백수가 너였구나! 잘됐네.”
남자는 경염에게 백수, 백수 거리며 오해할만한 상황을 만들었다. 누가 보면 전영이 경염을 백수라고 소개한 줄 알 정도였기에 전영은 당황스러웠다.
“아니, 난 백수라고 한 적 없는데! 그보다, 서로 어떻게? 경염 형, 저분이랑 아는 사이에요?”
초면에 경염을 백수라 부르며 조금 난폭한 행동으로 반가움을 표하는 남자를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전영이 물었다.
“아, 전화 주셨던 그 친구분이죠? 임수입니다. 반가워요. 얘랑은 어릴 때부터 친구 사이예요.”
전영이 경염을 쳐다보자 임수의 옆에 서 있던 경염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계속 서 있지 말고 들어와요. 경염, 너도 들어와.”
현관 밖에서 간단히 소개를 마친 임수는 자신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에게 간단하고 빠르게 집 소개를 시작했다. 그는 새로운 룸메이트가 이용할 방을 이미 정해놓은 듯했다.
“1층은 집주인의 개인 공간을 제외하고 이용 가능해. 난 1층의 게스트 룸을 사용 중이거든. 현관이랑 가깝고 병원에서 지내는 게 일상이라 피곤할 때 빼곤 일주일에 한 번 올까 말까라. 그래도 이젠 너 때문에라도 자주 와야겠네.”
“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 그냥 너 하던 대로 병원에서 살아.”
상관없다는 듯 단칼에 거절하는 경염에 임수는 여전하다며 웃었다.
1층의 다른 게스트 룸을 구경시켜주던 임수는 반응 없는 경염을 잡아끌고 계단을 올랐다.
“내 생각에 넌 2층 방이 좋을 것 같은데 어때? 거기가 경치가 제일 좋거든. 다른 방보다 창문도 크고 좀 더 많아서 밖이 잘 보여. 환기도 잘되고.”
임수가 경염에게 2층의 게스트 룸을 소개해주었으나 경염은 뭐에 홀린 듯 2층으로 올라감과 동시에 임수가 가리키는 방 대신 바로 보이는 거실 밖 테라스로 향했다.
“난 여기.”
혼자 바깥 구경을 마친 경염이 임수를 향해 말했다.
“아니, 멀쩡한 침대 놔두고 왜…….”
임수는 방 대신 거실의 소파를 지목하는 경염에 당황했다.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경염을 잠시 바라보던 임수는 고개를 돌리다 옆에 서 있던 전영과 눈이 마주쳤다.
전영은 경염의 증상에 대해 같이 생활하며 어느 정도 짐작만 하고 있었기에 임수에게 그냥 경염의 의견을 존중해 주자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뭔가 알고 있는 듯 한숨 섞인 미소로 잠시 바라보는 임수의 모습에 입을 닫았다.
“그래라, 이 소파가 방에 있는 침대보다 비싸니까 괜찮겠지 뭐……. 그래도 짐 같은 건 저 방에 풀어둬. 여기저기 늘어놓으면 지저분하잖아. 옷도 그렇고.”
어릴 적 친구도 알고 있다면 꽤 오래 지속된 증상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고 어째서 지금까지 방치된 것일까.
전영에겐 아프다는 경염의 친구보다 자신의 증상을 인지도 못 하고, 그렇기에 치료받을 생각도 없는 경염이 더 급해 보였다.

저녁은 자신의 취향과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임수가 직접 준비했다. 야심작이라며 연어 스테이크와 게살 크림 파스타, 샐러드를 얹은 얇은 씬피자를 내놓았다. 요리에 취미가 있어 틈틈이 양식을 배워왔다는 임수는 손님들의 칭찬을 기대하며 요리의 평가를 물었으나, 경염은 류연성이 구운 고등어가 더 맛있다며 자리에 있지도 않은 구운 고등어에 한 표를 던졌다. 패배를 인정하지 못한 임수는 류연성의 재력과 소경염의 배신을 비난했다.
“너넨 어차피 모르모트였어. 내 님만 맛있다고 하면 되거든? 난 신경 하나도 안 써. 완전 괜찮아!”
어째서 발언권이 없어 아무 말 하지 못한 자신까지 싸잡혀 모르모트가 된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 전영은 자연스레 임수에게 시선이 갔다. 큰소리치는 임수의 얼굴은 하나도 안 괜찮아 보였다.

*****

“자, 밥을 먹었으니 술을 마셔야지!”
“저기, 임수 형. 우리가 저녁 먹으면서 마신 건 술이 아니라 물이었나요?”
전영이 빈 와인 잔을 들어 보이며 물었지만 임수는 이미 들리지 않는 듯 신나서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 준비하기 시작했다. 와인 잔에선 조금 전 마신 와인 향이 남아 있었다.
“소경염 너도 콜?”
“아니.”
경염은 관심 없다는 듯 테라스로 나가 문을 닫았다. 평소엔 술에 절여지다시피 살더니 최근엔 끊었는지 오늘 저녁에는 입에 대지도 않았고, 임수도 딱히 강요하지 않았다. 술을 건강식으로 마시는 임수는 글라스에 소주를 따른 후 물을 탔다. 추가로 레몬즙을 뿌려가며 얼음을 넣어 천천히 마셨다. 취향이 아니라며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한 모금 마신 전영이 임수에게 질문했다.
“의사들은 다들 그렇게 마셔요? 건강 때문에?”
“아니? 보통은 너처럼 마시지. 안 마시는 사람도 있고, 필름 끊길 때까지 들이붓는 사람도 있고, 먹고 토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아.”
“좀, 특이하네요.”
처음 보는 방식이라며 신기해하는 전영의 반응에 임수가 웃었다.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먹은 건 아니고, 여자 친구가 마시는 거 보고 따라 마시다 습관이 된 거라, 그리고 건강해지려면 술 먹으면 안 되지. 술은 원래 맛과 분위기로 먹는 거야. 물론 오늘의 분위기는 몹시 안 좋았지만.”
임수는 저녁 식사 때 경염의 옳지 못한 태도를 비난하며 잔을 들었다. 임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마셨더니 금세 맥주 한 캔을 다 비웠고, 전영의 빈 맥주 캔을 본 임수는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잔뜩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주로 소주만 마시다 맥주만 먹기엔 너무 밍밍했던지라 전영은 테이블 위의 잔에 새로 가져온 맥주를 따르고 추가로 임수가 전영의 몫으로 준 소주를 따랐다. 오랜만의 소맥이라 그런지 향과 맛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이야기가 계속되고, 임수가 권하는 대로 몇 잔을 그대로 들이켜 살짝 취한 상태의 전영은 경염의 오랜 친구라는 임수에게 그의 어린 시절과 추가로 경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근데, 쟤 성질 진짜 많이 죽었다. 나이 먹어서 그런가?”
어린 시절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며 겸사겸사 경염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임수는 온순한 경염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며 신기해했다.
“에이, 경염 형은 원래 착하잖아요.”
전영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전영아, 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니. 어디 아프니? 내일 병원 갈래? 형이 예약해줄까?”
경염은 애초에 감정표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전영은 지금껏 경염이 화내는 것도 본 적 없다며 의아해했다. 그런 전영을 동정심 가득한 얼굴로 보던 임수는 팔을 뻗어 전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불쌍한 것. 너, 그동안 많이 맞고 지냈나 보구나. 맞은 충격으로 네가 맞았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걸 거야. 분명. 여기 방음 좋아서 네가 진실을 말해도 밖에 있는 쟤 귀엔 안 들려. 봐, 문도 닫혀 있잖아. 눈치 볼 거 없단다.”
임수가 닫혀 있는 테라스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임수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몹시 선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다.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어처구니없어하는 전영의 표정에 임수는 사실을 알려주는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좋아,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다 답해주지. 그러면 내 말을 믿을 거 아냐.”
사실 약간의 배려였다. 전영은 임수에 관해 궁금한 듯 웃으며 대화를 했지만, 그동안의 이야기에서 전영이 반응한 건 경염과 연관된 것들이었고, 자칭 눈치 백 단인 임수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임수 형이 이렇게 경염 형 이야기를 막 하고 다니는 거, 경염 형도 알아요? 아니, 형 진짜 경염 형 친구 맞아요? 무슨 친구가……”
“나는 그래도 돼. 난 소경염의 평생 친구니까. 그리고 쟤가 스스로 입 열 때까지 기다리다간 결국 무덤을 발로 차게 될 것이다.”
무척 듣고 싶어 하면서도 쉽게 응하지 않고 고민하는 전영의 모습에 임수는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중요한 이야기를 해줄 생각은 없었다. 제삼자인 자신이 타인에게 알려 줄 수 있는 것까지. 딱 거기까지였다. 임수가 입을 열었다.
“어린 시절의 경염은 말이야…….”
전영이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난폭하고 공격적이며 자비라고는 ‘류연성의 친절함’ 만큼 없어서 어쩌다 한번 싸움이라도 나면 말리느라 수고스러웠지. 그놈의 성질을 못 죽여서 내가 진짜……”
임수는 투덜거리며 경염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임수가 들려주는 가히 충격적인 이야기에 전영은 그날의 임플란트 발언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임수의 말대로 경염이 조금 난폭하긴 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아주 조금 들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대부분 임수가 원인 제공자였기에 그다지 신뢰가 가진 않았다.

*****

“소경염은 한번 아니면 끝까지 아니거든. 정 관계를 만들고 싶으면 나처럼 약점이라도 잡는 걸 추천할게. 그 약점 하나로 나는 소경염의 평생 친구란다. 후후후.”
사악함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와, 형 진짜, 엄청 계획적으로 치사한 사람이었네요.”
“그런 칭찬은 조금 민망하네. 뭐, 그때니까 가능했지 지금은 먹히지도 않을 일인데. 너도 노력하면 할 수 있어.”
“칭찬 아니거든요?”

*****

“니들, 12시 넘었어. 가서 자.”
테라스에서 돌아온 경염이 두 사람을 향해 말했으나 정리하기엔 아직 테이블에 술이 잔뜩 남아있었다.
“네가 들어가서 자는 건 어떻게 생각해? 아니면 이 형아랑 같이 여기서 잘까? 어때?”
평온한 표정의 경염이 말없이 테이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경염의 손이 소주병에 닿기 전, 임수가 재빠르게 낚아챘고, 경염의 손은 허공을 움켜쥐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소경염. 너, 성질머리 드러운 건 여전하구나? 표정 풀어라. 어차피 우린 지금 막 자려고 했어. 그치?”
임수가 전영에게 동의를 구했다. 처음 보는 조금 공격적인 경염의 반응에 놀라 술이 확 깨버린 전영은 조금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임수의 말에 동의했다.
“아 맞다, 소경염. 나 차 생겼다!”
투덜거리며 전영과 함께 테이블을 정리하던 임수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차?”
“여기 있는 네 동생께서 유학 가 있는 동안 차 쓸 일 없다고 나 차 빌려준대.”
임수가 전영을 가리키며 경염에게 자랑했다. 외모만큼 마음 씀씀이도 좋다며 전영을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 근데 너, 면허 따고 운전해 본 적 없다며?”
“그건 그렇지.”
“무사고니 차 걱정은 말라면서요? 임수 형, 저한테 거짓말 한 거예요?”
전영은 황당했다.
“무슨 거짓말? 나는 사실만 이야기했는데? 난 사실만 이야기한다고 했잖아. 성인 되자마자 바로 따서 운전한 적이 없으니 사고도 안 났고, 따라서 무사고지. 그리고 차는 보험이 있잖아. 보험 들면 되는 걸 그게 뭐라고.”
전영이 따져 물었으나 임수는 개의치 않는 듯 귀를 후비며 대꾸했다.
“뭐야? 아니, 왜 그런 눈으로 날 봐? 나한테 뭐 불만 있어?”

###

비명소리가 끊이질 않는 곳이다. 악취와 함께 풍기는 지독한 피 냄새. 그리고 완전히 죽지 못한 자들의 신음소리. 그 끔찍한 모습에 눈이 감기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몸은 말을 듣지 않아 그 풍경을 빠짐없이 눈 안에 담았다.
“나는 잊을 수 있어, 기억할 가치가 없는 일이니까.”
녀석이 손을 들어 내 눈을 가렸다. 시야가 차단되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 공포가 사라지진 않는다. 여전한 공포 속에 녀석은 다른 손으로 떨고 있는 내 손을 잡아 귀에 붙였다. 소리가 차단된다. 깜깜한 풍경, 두근거리는 심장박동만 느껴진다.
  떨리는 몸 때문에 알지 못했다. 눈을 가린 녀석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는 걸.

천장을 보니 시계 바늘은 오전 4시 44분을 가리킨다. 재수 없는 꿈 덕에 잠은 다 자 버린 데다, 다시 잠들기엔 애매한 시간이었다. 오늘의 할 일은 류 회장의 심부름 하나.
지금의 이 더럽고 불쾌한 기분은 거울을 보면 될 일이었기에 연성은 평소보다 조금 이른 아침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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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642 여기서 회초리질하는거 그 익갤에서 퍼가면 ㅇㅇ(106.101) 23.05.01 320 0
87641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인가 [3] ㅇㅇ(210.97) 23.05.01 535 5
87640 +(번역글)+샤오잔은 '꿈 같은 꿈'의 '극악무도한 물'에 낙인찍혔고 ㅇㅇ(210.97) 23.05.01 442 1
87639 로드쇼에 무언가 날라왔다고 한다. 누가 왜 그랬을까??? [1] ㅇㅇ(210.97) 23.05.01 356 0
87638 지나가다가 ㅇㅎ ㅇㅇ(210.97) 23.04.30 297 0
87637 홍해 ㅇㅇ(210.97) 23.04.30 276 0
87636 어떤 것이 진짜 금이고 어떤 것이 놋쇠인지 ㅇㅇ(210.97) 23.04.30 231 0
87635 내 이름을 아는 모든 이에게 ㅇㅇ(210.97) 23.04.29 238 0
87634 GUCCI의 남자들 ㅇㅇ(210.97) 23.04.28 430 0
87633 왜 이러는 걸까 ㅇㅇ(210.97) 23.04.28 281 0
87632 야 와 아 가 되시겠슴다 ㅇㅇ(210.97) 23.04.28 226 0
87631 혼자 다 했써 누가 1005점이래 ㅇㅇ(210.97) 23.04.28 240 1
87630 잘 생각해 봐 ㅎㅎㅎ ㅇㅇ(210.97) 23.04.27 222 0
87629 이 애기는 잘 자랐고 ㅇㅇ(210.97) 23.04.27 261 1
87628 표면에 있는 3천만 명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며 ㅇㅇ(210.97) 23.04.26 233 1
87627 누가 좋아? ㅇㅇ(210.97) 23.04.26 226 0
87626 오늘 5주년 ㅇㅇ(210.97) 23.04.25 250 0
87625 이런 비하인드가 있었다 ㅇㅇ(210.97) 23.04.25 259 0
87624 드라마 무대에서 점점 더 편안해졌고 ㅇㅇ(210.97) 23.04.24 245 0
87623 매번 운 것 같아서... ㅇㅇ(210.97) 23.04.23 227 1
87622 3년 동안 72편의 드라마 출연,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ㅇㅇ(210.97) 23.04.23 255 0
87621 '꿈같은 꿈' Shenzhen Station의 공연은 4월 22일 시작 ㅇㅇ(210.97) 23.04.22 18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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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603 쿨럭은 이런 말을 하는데 펄럭 기준은 하늘끝 천장인가? ㅇㅇ(210.97) 23.04.12 24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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