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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24나더모바일에서 작성

ㅇㅇ(110.70) 2018.06.13 16:27:34
조회 737 추천 34 댓글 13

														

지난번에 크게 앓아누운 후로 남편은 일림을 더 애지중지 대했다. 열이 떨어지지 않아 며칠을 고생했던 날, 새벽에 눈을 뜨자 옆에 있던 남편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아가, 목 마르지? 배고프지 않아? 뭐든 먹어야지. 뭘 먹고 싶어? 주스 마실까?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손을 감싼 커다란 어른의 손.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남편은 항상 곁에 있어주었다. 있지, 날 좋아해요? 남편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귀엽기도 하지, 내 사랑.

"아가, 일어나야지. 배 안고파?"
"응..."
"언제 일어나나 한참 봤더니."

베개에 기대어 앉은 남편이 웃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이젠 옆에 남편이 없는 침대가 어색했다. 웅크리고 누워있다가 다시 눈을 감고 옆구리에 얼굴을 파묻고 달라붙자 큰 손이 얼굴을 쓰다듬었다.

"일어나. 아침 먹어야지."
"으응."
"일어날 수 있어? 아님 침대에서 먹을래?"
"일어날래..."
"그래. 그럼 씻고 나와."

그렇게 무섭고 거칠게 대했던게 거짓말이었던것처럼, 남편은 다정했다. 늘 아가야, 공주님, 하고 불러주면서 바라는건 무엇이든 하게 해주었다. 잠자리도 억지로 강요하는 일이 없어졌다. 사실 일림도 더이상 잠자리가 막연히 싫거나 무섭진 않았다. 예전처럼 남편이 잠들면 몰래 자리를 떠나지도 않고, 혼자 목욕을 하지도 않았다. 더운 품에 안겨서 착하다, 예쁘다, 하고 귀여움 받는게 좋았다.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버릇처럼 약을 먹었다. 주방으로 가자 남편이 빙긋 웃었다. 고양이에게 밥을 챙겨주고, 옆에 서서 물을 끓였다. 남편이 마실 커피를 준비하고, 다기에 차를 우렸다.

"배고프지. 금방 다 될거야."
"뭐 만드는 거예요?"
"핫케이크. 너 좋아하잖아."
"응, 좋아요."

아침을 먹고 나면 남편은 출근 준비를 했다. 설거지를 하고 와서 넥타이를 매주고 옷깃을 만져주면 남편은 언제나처럼 품에 꼭 안아주고, 일찍 들어온다던가 무얼 먹고 싶냐고 물어보았다. 일림이 웃기만 하면 싱겁다며 놀렸다. 오랫동안 바라긴 했지만, 결국 일림은 취업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하필 졸업 직전에 크게 앓아 시기를 놓치기도 했고(졸업 논문도 못쓸 정도라 남편이 휴학을 하던가 미루자고 권했지만 학비가 또 나가는건 싫었다), 남편이 바라기도 했었다. 아가, 난 네가 내 품에서만 머물면 좋겠어. 일림은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일찍 들어올게. 밥 잘 챙겨먹고, 오늘도 많이 덥다니까 너무 나다니지 말고..."
"응."
"착하지. 전화할게."
"다녀오세요."

현관이 닫힌다. 일림은 서재로 올라가서 나무 사이를 빠져나가는 까만 자동차를 한참 바라보았다.

+++

결혼 준비는 남편이 전적으로 하니 새신부라고 해도 별로 할게 없었다. 가끔 남편이 이런건 어때, 저런건 어때, 하고 상의(라기 보다는 권유)를 하면 응, 그래요. 하는게 전부였다. 이런데 관심도 없고 흥미도 없다보니 처음에는 이것저것 물어보고 데리고 다니던 남편도 두손 들었다며 그냥 자기가 전부 준비하겠노라 했다. 게다가 남편은 일림이 컨디션이 안좋고 잠을 설치는게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야옹아, 착하지..."

집에 혼자 있으면 무서웠다. 남편이 없으면 거실이나 서재, 예전에 쓰던 작은 객실로 갔다. 이 집을 무척 좋아하지만, 언젠가부터 자꾸 누군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서워졌다. 고양이를 껴안고 만지작거리던 일림은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정원에 늘어선 시커먼 나뭇가지에 하얀 여름볕이 부서지고 있었다. 오늘도 많이 덥겠지. 뒷뜰에 해바라기를 보러 가고 싶었지만 무서웠다. 뒷뜰은 침실과 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침실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시선, 한여름인데도 등골을 훑는 싸늘한 공기. 일림은 가볍게 도리질을 하고 수조 앞으로 갔다. 일림이 열심히 돌본 덕에, 수초는 무성하게 잘 자랐다. 유유히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들을 바라보면 기분도 좋아졌다.

"아이 예뻐라, 그렇지? 저기, 물고기..."

하지만 오늘은 고양이에게 하릴없이 중얼중얼 말을 걸며 어항을 바라봐도 그다지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잠깐 머뭇거리다가 서재로 올라갔다. 책이라도 읽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하여 적당히 몇권을 골라 소파에 누웠지만 도통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결국 세번째 고른 책을 덮고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일림은 다시 일어나 서재를 서성였다. 이상한 일 투성이였다. 언제부터였을까? 사라진 앨범, 다락의 여자아이, 잠 못 이루는 밤들... 일림은 흘긋거리면서 다락 입구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결혼식이나 생각해보기로 했다. 웨딩드레스도 골랐고, 웨딩사진도 찍었다. 남편은 인화된 사진을 보고 예쁘다며 침실에 장식해두었지만 일림은 이상하게 그 사진들이 싫었다. 사진 속 자신은 낯선 화장을 하고, 어색하게나마도 제대로 웃질 못하는 얼굴이었다. 사실 웃는 얼굴의 신부들이 더 대단한 거였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머리에 핀을 수백개를 꽂아두고, 숨도 못쉬게 꽉 죄는 옷을 몇벌이나 입었다 벗었다, 걷지도 못하는 구두를 신고 이리저리 오가며... 생각해보면 웨딩 촬영을 하고 나서 크게 앓았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남편은 꽤나 자연스러웠는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난 전에도 해봐서, 하고는 슬쩍 일림을 보고 웃었다. 아, 맞아. 당신 한번 결혼했댔죠? 별로 상관은 없는데. 남편은 종종 자신이 결혼을 한번 결혼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상기시키곤 했다. 한번은 일림이 물은적이 있었다. 지난번엔 어땐 부케를 들었어요? 남편은 웃었다. 기억 안나. 너무 오래전 일인걸...

"아이, 싫어라."

서재를 맴돌던 일림은 책상 위에 놓인 액자를 보고 눈쌀을 찌푸렸다. 침실을 옮기면서 짐정리를 하다가 아주 옛날 사진이 나왔다. 막 시설에 들어갔을 무렵에 찍은 사진이었다. 시설에 들어간다는건 백화점에 진열되는 상품이 되는것과 비슷했다. 오래 그 안에서 지내고 나서야 알았지만, 좋든 싫든 그런 곳에서 생활하면 우중충한 그늘이 드리우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런 물이 들기 전, 하루라도 어릴 때 예쁜 옷을 입고 사진을 찍어두는게 좋았다. 카탈로그에 올라간 화려한 신상품은 누구나 한번 더 보게 되니까. 자, 이 아이는 어떠신가요? 하고 자신만만하게 권해볼만하도록. 키 작은 치자나무는 하얀 꽃이 활짝 피어있었고, 그 아래 선 다섯살 어린아이는 꽃잎처럼 하얀 원피스를 입고 맹한 얼굴로 서있었다. 남편은 사진을 보자마자 무척 기뻐했다. 귀여워라, 이거 너지? 몇살때야? 지금이랑 똑같네... 한참 사진을 보던 남편은 자기가 가져도 되냐고 물었다. 당장 버리고 싶었지만 다시 빼앗기도 무엇해서 그러라고 했더니 이런데 두었나보다. 치워버려야지, 액자 뒷면 잠금쇠를 돌렸다. 받침대를 들어보니 사진은 한장이 아니었다.

[일림, 첫 여름]

사진 뒷면에 흐르듯 반듯한 글씨가 적혀있었다. 뒤집어보니 낡은 흑백 사진 속, 어린 소녀가 웃고 있었다. 한여름인지 얇은 홑옷을 입은 소녀는 부채를 들고 꽃이 흐드러지게 핀 등나무 그늘 아래 앉아있었다. 숱 많은 머리를 한쪽 어깨로 땋아서 늘어트린 고운 뺨에 애교스럽게 볼우물이 파였다. 눈썹이 진하고 웃는 눈매가 사랑스러운 이 얼굴은 낯설지 않았다. 아, 할머님이신가. 그렇게 옛날 사람인데도 렌즈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색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카메라를 든 맞은편 사람에 대한 시선이겠지. 정말 사랑받는 사람이었구나. 하긴, 이렇게 예쁘니까... 등나무 가지를 보니 아랫층 침실 창 앞인것 같았다. 긴 나무의자에 앉은 소녀의 고운 손을 한참 바라보던 일림은 섬뜩해졌다. 아냐, 실수겠지. 그럴리가... 무언가 나쁜것이라도 들킨 모양으로 서재를 휘휘 둘러보던 일림은 얼른 사진 두장을 집어내고 액자는 소파 옆 장식장 안에 쑤셔넣었다. 초조하게 책장을 살피다가 적당히 한권을 골라 사이에 사진을 집어넣고 다시 제자리에 넣은 후 책등을 보며 몇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초조하게 서재 안을 오락가락하던 일림은 문득 창가에 놓인 휠체어를 보았다. 낡고 오래된 휠체어였지만, 남자는 이 서재에 있는 물건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낮은 앉은뱅이 탁자, 짙은 마호가니 책상 옆 큰 창가에 놓인 휠체어는 바퀴가 커다란 구식이었지만 아직 쿠션이 푹신했다. 거동이 불편하시던 할머님이 쓰시던 휠체어라고 했다. 할아버님은 할머님을 정말 귀여워하셨거든. 할머님이 몸이 불편해지신 후로도 늘 곁에 함께 계셨대. 일을 하시거나 할때도 늘 여기 앉혀서 옆에 두시고... 한참 낡은 손잡이며 등받이를 만지작거리던 일림은 살그머니 휠체어에 앉아보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너른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발을 올릴 수 있는 받침대도 있었다.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은걸, 일림은 어느새 허리를 쭉 펴고 편안하게 앉았다. 에어컨이 조용히 찬바람을 내보내는 백색소음이 반복되자 나른하게 졸려왔다. 일림은 어느새 푹신한 쿠션에 몸을 파묻고 잠이 들었다.

+++

집에 가고 싶어. 무서워. 더운 여름날의 풍경이 눈 앞에 흐릿했다. 앉아서 잠들었던 탓일까, 온몸이 저리고 머리가 아팠다. 열심히 힘을 내보았지만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몸도 좀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가위에 눌린건지 겨우 고개를 돌리자 큰 책상 앞에 흐릿하게 누군가 앉아있는게 보였다.

-아가, 일어나고 싶어? 가엾기도 하지.

꽃향기가 훅, 끼쳤다. 큰 손이 허리와 등을 안아서 몸을 일으켜주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잠시 몸을 부축을 받으며 서재를 천천히 한바퀴 돌았을 뿐인데 지쳐버렸다. 사실 걷는게 아니라 질질 끌려다닐 뿐이니 몸은 더 괴로워지기만 했다. 곧 소파에 앉았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다시 기척이 느껴지더니 입 안으로 시원한게 들어왔다. 복숭아였다.

-맛있지? 좋아하는 거잖니.

누구예요? 도무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자꾸 울고 싶어졌다. 목소리도 낼 수 없고,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곧 다시 몸이 떠올랐다. 꿈을 꾸는 모양이었다. 가위에 눌린게 분명했다.

-낮잠 자러 가야지, 착한 내 아가. 피곤해서 그랬니?

삐걱,삐걱, 나무 계단이 울리는 소리. 매미가 세차게 울고 있었다. 틀어올린 머리칼이 흘러내리고, 얇은 홑옷이 감싸졌다. 자리에 눕자 옆에 앉은 사람이 가만히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크고 건조한 손이었다.

-착한 아가, 책 읽어줄까.

흐릿한 눈 앞에 알록달록한 그림책 같은게 펼쳐졌다. 귓가로 웅웅, 고장난 라디오가 제멋대로 소리를 내는것 같은 소음이 울렸다. 그만해, 싫어, 억지로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무언가에 막혀버린듯한 목구멍에서는 쇳소리만 울려퍼졌다.

-그러지마. 착하게 굴어야지.

그만해, 누구야, 싫어, 날 보내줘, 아파, 괴로워, 온힘을 다해서 일림은 기었다.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꿈틀거리는게 전부였지만 그나마도 온힘을 다한 것이었다. 끄윽, 끅, 목구멍에서는 여전히 괴로운 쇳소리만 나고 있었다. 옆에 있던 사람은 한참을 가만히 일림을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다시 다가온 하얀 손에는 커다란 혁대 같은것이 들려있었다. 몸이 묶인다, 아파, 그만해, 일림은 소리를 질렀다. 곧 형광등이 켜지듯, 눈 앞이 하얗게 밝아졌다.

-가엾은 내 아가.

가는 눈썹에 갸름한 턱, 얇은 입술. 빙그레 웃는 입매와 다르게 마른 손은 짐승을 대하듯 몸을 묶고 있었다. 그러지 말아요, 일림은 소리를 지르다가 기절했다.

+++

머리가 아파서 잠에서 깨어났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구역질이 났다.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머리를 말리던 일림은 우울하게 거실로 갔다. 아직 환한 오후였다. 진통제를 먹고 소파에 웅크려 누웠지만 기분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기분이 안좋으니 꿈도 이상해, 싫어. 다시 잠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몸은 바다에 빠진것처럼 자꾸만 늘어졌다.

"몸이 안좋아? 왜 거실에서 이러고 있어."
"오셨어요..."

현관문 소리를 못들었는데, 어느새 남편이 거실에 들어와있었다. 잔것도 깬것도 아닌 모양으로 누워있던 몸은 더 무거워졌다. 크게 숨을 내뱉고 부스스 일어나자 남편이 빙그레 웃고는 옆에 앉아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그래."
"몰라..."
"또 그런다. 너 그럴때마다 나 미치는거 알면서."
"거지같아."
"말 조심해."
"자기한테 배운거예요."
"난 네가 자기라고 부르는거 좋더라. 쪼끄만게 어른 흉내 내는것 같아서 귀엽거든."
"..."
"더워서 그래? 낮부터 샤워를 하고."
"피곤해..."
"이리온, 가서 자자. 편하게 자야지."
"있지, 나 그 방 싫어요. 다시 2층에 가면 안돼요?"
"애기처럼. 결혼하면 그 침실 쓰기로 약속했잖아."
"아직 결혼 안했잖아."
"결혼한거나 마찬가지지. 나랑 몇해나 같이 살았는데."
"그 방 싫어. 자꾸 무서운 꿈을 꿔..."
"서방님 없으면 무서워서 그래?"

남편이 웃었다. 괜히 농이나 거는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진 일림이 뾰루퉁하게 쳐다보자 큰 손이 코를 꼬집었다. 남편은 가끔 일림을 정말 어린아이 대하듯이 놀리곤 했다.

"겁쟁이."
"그런거 아녜요."
"너, 몸이 약해서 그래. 예전부터 곧잘 가위도 눌리고 악몽도 꾸고 그랬잖아? 별로 그 방 때문은 아닌것 같은데."
"아냐, 자꾸 같은 꿈을 꿔요."
"무슨 꿈?"
"빨간 옷을 입은 여자애가 나와요."
"..."
"무서워, 자꾸 꿈에 나오는걸요."
"병원 가볼래?"
"병원?"
"임신한거 아냐? 태몽일지도."
"그런 농담 싫어요."
"농담 아닌데. 임신일지도 모르잖아."
"...아니예요."
"부끄럼탈거 없어. 병원 가보면 확실하니까... 대신 식을 좀 당기는게 좋으려나."
"저기... 지난주에 그거 했으니까... 아니거든요."
"뭐야, 좋다 말았네. 그랬었지."
"뭐예요, 그게."
"아기가 있으면 좋겠어. 너처럼 귀여운 여자애면 더 좋고... 그럼 너도 혼자 있지 않아도 되고. 좋지 않아?"

목이 말랐다. 비척비척 일어나서 주방으로 가자 남편도 따라왔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자 남편이 생수병을 빼앗아 뚜껑을 열고 컵에 따라주었다. 물을 마시자 냉장고에 기대어선 남편이 빙그레 웃었다.

"전에도 물었는데, 넌 별로 아기 생각은 없나봐."
"응."
"뭐, 어리니까... 나도 별로 생각은 없었거든. 그런데 널 보다보면 아이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어린애가 좋아요?"
"좀 뉘앙스가 이상한데. 네가 귀여우니까 그러지... 너처럼 예쁜 여자애가 태어나면 내가 모르는 네 어린시절을 보는것 같을거야."

바깥은 여전히 하얀 여름볕이 부서지고 있었지만 주방은 묘하게 서늘했다. 멍하게 창 밖을 보던 일림은 문득 남자를 바라보았다.

"있잖아요."
"왜."
"부모님은?"
"응?"
"결혼...하잖아요. 부모님한테 인사 드리러 간다던가... 허락이라던가..."

붕, 냉장고의 모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릴적 지내던 작고 좁은 집(이라고 하기보단 방)에 있던 낡은 냉장고는 툭하면 붕,붕하고 요란한 모터소리를 냈고 어린 일림은 곧잘 그 소리가 무서워서 울음을 터트리곤 했었다. 냉장고 옆에 선 남자는 그 소리가 거슬리지도 않는지 팔짱을 낀채 비스듬히 서서 묘하게 웃고만 있었다. 손에 들린 유리컵 표면에 자잔한 물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

남편은 전부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냐 물었더니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사실 너무 뻔한 질문이었다. 가족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고, 묻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명절도 둘이서만 보냈다. 남자는 일림이 속상해하거나, 보호해줄 사람이 없는 어린애니까 건드렸다는 오해는 받고 싶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어쩐지 창피해졌다.  처음 만났을 무렵처럼, 가장 받고 싶지 않은 질문을 먼저 해버린거니까.

"뭐 어때. 외로운 사람들끼리 의지하겠다는데."

남편이 비죽 웃었다. 어쩐지 시무룩해졌다. 외로운 사람들, 이라니. 사실이긴 했다. 남편이 없으면 기댈 사람은 없었다. 낯가림이 심해서 친구도 없고, 시설이 싫어서 나오자마자 연락을 끊어버렸다. 덜컥 무서워졌다. 이 사람이 없으면, 정말 혼자가 되어버린다. 사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이젠 억지로도 누군가와 함께 있을 기회가 없다. 그래서, 남편이 어리광을 좋아하는건 다행이었다. 괜시레 옆으로 가서 투정을 부려대도 뿌리치지 않았다. 머리도 만져주고, 안아주기도 하였다. 아무도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어색하긴 했지만 싫지 않았다. 어린날의 보상을 이제야 받는다고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외로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외로웠어요?"
"외로웠지. 오해는 하지마. 외로워서 너랑 만난건 아니야."
"그럼요?"
"기다린거지. 네가 나타날때까지... 연애란 그런거야."

가끔 안어울리는 간질간질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었다. 이상하게 피곤했다. 등 뒤에 기대어놓은 베개며 쿠션이 뭉실뭉실, 자꾸 몸을 빨아들이는것 같았다. 몸 위에 올라온 체온이 유난히 더웠다.

"무거워요."
"무겁긴. 아, 오늘 귀여운거 입었네."
"뭐예요, 싫어."
"귀여워서 그러지. 바로 누워봐, 보기 힘들잖아."

구물구물 자리에 눕자 남편이 빙긋 웃고는 옷깃을 벌리고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남편은 어리광을 받아주는것도 좋아했지만, 어리광 부리는것도 좋아했다. 젖먹이 어린애처럼 가슴에 파묻혀서 얼굴을 비비거나 만지작거리는걸 왜 그렇게 좋아하는건지.

"왜 그래. 기분 좋아서?"
"좋아요?"
"오늘 너 좀 이상하네. 좋지."
"만지는게 좋아요?"
"좋아. 너는 부드러워서 만지면 기분 좋거든."
"이상해."
"너도 이상해."

남편이 품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살며시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기분이 좋은지 숨소리가 낮아졌다. 낮에 가위를 눌리며 잠을 설쳤던 탓인지, 피곤한데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저기..."
"왜, 또."
"할머님...은 어디가 불편하셨어요?"
"원래 몸이 약하신 분이었어. 크게 앓으신 후로 못 일어나셨다고..."
"그래요...? 나이도 젊으셨을건데."
"뭐, 나이 많은 사람만 아픈건 아니니까."
"아기도 없으셨나봐요?"
"없었지. 그래서 날 돌봐주신거고."
"그래요..."
"그런게 궁금해?"
"자기도 어릴때 이야기 안해주잖아요."
"네가 안해주니까."

남편이 뺨을 감싼 손을 겹쳐잡고 슬쩍 얼굴을 올려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자꾸 불안해졌다. 이상한 꿈, 사진, 흐드러진 등꽃. 품에서 잠드는 남편이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을 멍하게 누워있는데, 남편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흠칫 놀라는걸 느낀건지 큰 손이 허리를 토닥였다.

"너도 자야지. 착한 아가."
"..."
"잘 자고... 오늘은 무서운 꿈 안꿀거야."

다시 잠든건지, 남편은 미동도 없이 품에 얼굴을 묻은채 낮은 숨소리만 내었다. 어두운 밤이었다. 툭, 툭. 창 밖으로 작게 빗소리가 들렸다. 밤 비였다. 일림은 에어컨 소리와 빗소리를 들으며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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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635 내 이름을 아는 모든 이에게 ㅇㅇ(210.97) 23.04.29 242 0
87634 GUCCI의 남자들 ㅇㅇ(210.97) 23.04.28 436 0
87633 왜 이러는 걸까 ㅇㅇ(210.97) 23.04.28 289 0
87632 야 와 아 가 되시겠슴다 ㅇㅇ(210.97) 23.04.28 232 0
87631 혼자 다 했써 누가 1005점이래 ㅇㅇ(210.97) 23.04.28 244 1
87630 잘 생각해 봐 ㅎㅎㅎ ㅇㅇ(210.97) 23.04.27 226 0
87629 이 애기는 잘 자랐고 ㅇㅇ(210.97) 23.04.27 265 1
87628 표면에 있는 3천만 명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며 ㅇㅇ(210.97) 23.04.26 238 1
87627 누가 좋아? ㅇㅇ(210.97) 23.04.26 231 0
87626 오늘 5주년 ㅇㅇ(210.97) 23.04.25 254 0
87625 이런 비하인드가 있었다 ㅇㅇ(210.97) 23.04.25 263 0
87624 드라마 무대에서 점점 더 편안해졌고 ㅇㅇ(210.97) 23.04.24 24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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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622 3년 동안 72편의 드라마 출연,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ㅇㅇ(210.97) 23.04.23 25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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