トモダチ作戦、称賛の陰で 元空母乗組員ら健康被害訴え토모다치 작전에 참가했던 항공모함의 승무원들이 건강 피해를 호소
2015년 10월 1일 13:08
동일본 대지진 때 '토모다치 작전'(Operation Tomodachi)을 수행한 미국 핵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이 10 월 1 일에 카나가와현(神奈川県)에 있는 요코스카(横須賀) 미 해군기지에 배치됐다. 토모다치 작전을 수행한 지 4 년 반이 흘렀다. 그때의 승무원들은 지금, 건강 피해를 호소하며 미국에서 소송 중이다. 칭찬을 받았던 지원활동의 그늘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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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핵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이 제2의 고향 요코스카에 입항(2015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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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후 건강 악화
토모다치 작전에 참가했던 전직 해군 대위 스티브 시몬스(37 세) 씨를 만나기 위해 기자는 미국 유타주에 있는 솔트레이크시티를 방문했다.
그때의 승무원들은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부터 약 1 년 9 개월 후인 2012 년 12 월에 "도쿄 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때 도쿄 전력이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 피폭됐다"라며, 캘리포니아 샌디에고 연방지방법원에 제소했다. 당시에 함재기 부대의 관리관이었던 시몬스 씨도 소송에 함께했다.
"그때 항공모함에서는 해수증류장치의 물을 마시거나, 그 물로 조리한 음식을 먹었습니다. 현장 해역에 도착한 지 사흘 후인 2011 년 3 월 15 일, 물을 마시지 말라고 함장이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샤워를 하거나 마신 후였습니다. 그 후로도, 갑판을 청소할 때 오염된 바닷물을 사용했습니다. 승무원들은 강력한 방사선에 계속 노출됐지만, 그때는 건강에 대한 위험에 무지했습니다. 우리는 인도적 차원의 지원이었기 때문에 핵참사에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도쿄 전력이 올바른 정보를 제공했다면, 우리의 대응은 달랐을 것입니다"
시몬스 씨는 귀국한 후로 건강이 악화되어 다양한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2011 년 말에 운전 중 갑자기 정신을 잃었습니다. 고열이 계속됐고, 림프절도 붓고, 다리의 근육이 약해졌습니다. 머리카락도 빠지고, 체중도 수십 kg이나 격감했습니다. 토모다치 작전을 수행하기 전에는 등산도 하는 등 건강했기 때문에 증상이 나타났을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근육이 찢기는 듯한 통증이 팔과 가슴으로 퍼졌고, 전신에는 멍과 낭포, 발한, 방광부전 등의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통원치료를 받고 있는 솔트레이크시티의 재향군인병원의 의사는 '피폭의 영향 같다'라고 말합니다"
2014 년에 연방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미 국방성은, 승무원들이 토모다치 작전에서 받은 방사선량은 미국의 일반인이 자연에서 받는 것보다 낮다며 건강 피해와의 인과관계는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보고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모든 승무원을 검사한 것도 아니면서 건강 피해의 위험은 없다고 말합니다. 식수가 오염된 것은 감지기가 오작동한 것이라는 말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역주: 나머지 1,300 자(전체 2,294 자)의 내용은 아사히 신문의 회원만 열람 가능)
[토모다치 작전] 3 명 사망, 250 명 투병중(核リポート) 特別編:原爆生んだ極秘の地 傷痕は今も(핵 보고서) 특별편 : 원폭이 낳은 극비의 땅, 여전한 상처의 흔적
2015년 9월 28일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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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원자폭탄에서 시작됐다
지금으로부터 70 년 전인 1945 년 여름. 미국은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을 히로시마(広島)와 나가사키(長崎)에 투하했다. 그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나라는 그 후에 세계의 패권을 두고 미국과 경쟁한 소련이었다. 최고 지도자였던 스탈린은 그해 가을, 원자폭탄을 만들 핵시설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그 시설에 '마야크'라는 이름을 붙였다. 러시아어로 '등대'를 뜻한다. 그런데, 이 극비 핵시설은 빛이 아닌 어둠에 싸여 주변 주민들에게 핵참사를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결코 옛이야기가 아니라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원자폭탄이라는 '악마의 무기'를 낳은 '핵 시대'를 연 인류. 원자폭탄 제조가 부른 상처의 흔적을 미국과 대등한 핵대국 러시아에서 더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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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석(隕石)의 기억
지금부터 2 년 반 전인 2013 년 2 월 15 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으로 '첼랴빈스크'라는 이름이 단숨에 유명해졌다.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약 1,500 km 떨어진 곳이다. 우주에서 날아온 운석이 우랄산맥의 남쪽에 있는 첼랴빈스크주의 상공에서 폭발한 것이다. 현지의 차량에 달린 카메라가 포착한 그 신비로운 광경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직도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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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운석 폭발(2013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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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랴빈스크 운석의 비밀을 풀었다
지상에서는 약 7,000 채의 건물이 유리 파손 등의 피해를 입었고, 부상자는 약 1,600 명, 피해액은 10억 루블(당시 환율로 약 30억 엔)에 이르렀다고 한다.
"미 항공 우주국(NASA)은 운석이 나가사키형 원자폭탄 25 개 분량의 에너지로 대기권에 돌입해서 광범위하게 피해를 끼쳤다고 추정했다"라는 기사를, 당시에 모스크바 지국장이었던 필자가 쓴 기억이 있다.
그날, 모스크바에서 곧바로 첼랴빈스크로 날아가 현지를 취재했다. 그때 크게 주목을 받은 곳이 첼랴빈스크 근교의 체바르쿨 호수이다. 운석 때문으로 보이는 직경 8 m 정도의 구멍이 결빙된 그 호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10 월, 호수 바닥의 준설(浚渫) 조사 때 운석이 발견됐다. 참고로, 2015 년 5 월 말에 러시아로 출장갔을 때 그 운석을 볼 기회가 있었다. 무게 약 500 kg. 첼랴빈스크 국립향토박물관의 유리상자 안에 전시되어 최고 명물이 됐다.
운석 소동 당시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 사람들이 있었다. 첼랴빈스크 일대에는 러시아의 핵전력을 지탱하는 핵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체바르쿨 호수에서 북동쪽으로 약 90 km 떨어진 곳에는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에 쓰인 플루토늄을 생산한 핵시설 마야크가 있다.
운석이 떨어진 지 이틀 후, 과학자 한스 크리스텐슨 씨의 논평이 'Meteors Against Nukes'(핵에 충돌하는 운석)라는 제목으로 미국 과학자 연맹(FAS)의 홈페이지에 게재됐다.
"언론이 러시아의 첼랴빈스크 상공에서 운석이 폭발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그 지명이 익숙했다. 그 지역에는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핵무기 생산·저장시설들이 있기 때문이다. 운석이 그 핵시설 중 하나와 충돌할 확률은 극히 작다. 하지만, 우주 차원에서 보면 매우 높은 확률이다"
핵무기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우발적인 사건으로 엄청난 핵 피해를 입을 위험성은 늘 있다. 크리스텐슨 씨의 논평은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다. 첼랴빈스크를 향한 운석이 만약에 마야크를 직격했다면... 핵을 보유함으로써 인류가 안고 있는 위험을 운석과 마야크는 재인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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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굴뚝
소련이 중앙 아시아의 카자흐스탄(구 소련 구성국 중 하나) 세미팔라틴스크에서 원폭실험을 성공시키며 미국을 따라잡은 것은 1949 년 8 월 29 일이다. 거의 4 년 가까이 늦다.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에 쓰인 플루토늄을 생산한 핵시설 마야크는 도심과는 먼, 물이 풍부하고 숲이 우거진 남부 우랄에 있다. 원자로를 냉각시킬 물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국립공원으로 꾸미기로 결정된, 원폭 성지(原爆聖地)의 하나이자 나가사키형 플루토늄 원자폭탄을 만든 미국 서해안에 있는 핸포드(Hanford Nuclear Reservation)의 이른바 러시아판인 셈이다.
구 소련 시절에는 핵시설 마야크의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오조르스크를 포함해서 '첼랴빈스크40', '첼랴빈스크65'와 같은 코드명으로 불렀다. 지도에도 없는 비밀도시였다. 지금도 외국인은 출입금지이다.
마야크의 공장 부지는 약 40 km²에 이르고, 주변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접근이 쉽지 않다. 인접해 있는 오조르스크에 가는 것도 입구의 검문소까지 밖에 못 간다. 마야크의 부지 경계임을 알리는 철조망 틈으로 숲속에서 간신히 확인할 수 있었다. 접근은 거기까지였다.
공장 부지의 둘레는 약 250 km²의 주거와 농업이 금지된 '건강 보호 구역'이고, 그 바깥은 약 1,800 km²의 '환경 모니터링 구역'이다.
마야크의 상징이기도 한 약 150 m 높이의 공장 굴뚝들을 아득히 먼 곳에서 바라볼 뿐이다.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숲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고지대에서나 볼 수 있다. 차량으로 주변을 빙빙 돌다가, 멀리서 굴뚝을 볼 수 있는 곳을 찾아냈다.
마야크는 망원 카메라로 보는 것조차 거부하는 듯했다.
1948 년에 가동을 시작한 마야크는 스탈린의 측근이자 핵개발 책임자인 베리야의 호령 밑에서 급속도로 건설됐다. 플루토늄을 만들기 위해 세 개의 시설이 지어졌다. 우라늄 연료를 조사(照射)하는 원자로와, 플루토늄을 분리하고 추출하는 방사화학시설(재처리 공장), 그리고 농축된 플루토늄을 압착하고 주조해서 핵탄두를 만드는 화학야금시설(化学冶金施設)이다. 1949 년에 소련이 처음으로 핵실험에 성공했을 때 사용된 원자폭탄의 핵탄두를 만든 곳이 바로 이 화학야금시설이다.
그 후로 마야크는 미·소 냉전시대의 핵 군비 경쟁을 지탱했다. 1980 년대에 소련은 최대 4만 발의 핵탄두를 비축하기도 했다. 마야크에서의 핵무기용 플루토늄 생산은 냉전시대였던 1989 년에 접었지만, 낡은 핵탄두 속의 플루토늄을 신형 무기에 바꿔 넣는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핵참사의 씨앗은 가동 초기부터 안고 있었다. 미국의 핵개발을 추월하려고 서두른 나머지 안전은 뒷전으로 밀렸고,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고준위 방사성 폐액은 주변의 테챠강으로 흘렀다. 1957 년, 그 방사성 폐액을 저장해 놓은 탱크가 폭발하는 사고로 방사성 물질이 뿌려졌는데, '우랄 핵참사', '키시팀 폭발 사고' 등으로 알려져 있다. 사고의 원인은 저장 탱크의 냉각기능 상실이다. 이번의 취재에서 마야크의 홍보 담당자는 필자에게 "원인과 결과 모두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와 매우 닮았다"라고 말했다.
*역주
1957년 9월에 소련의 남우랄 핵무기 공장에서 화학폭발이 있었다는 사실을 1989년 6월 16일 소련 당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 원인과 영향을 상세하게 정리한 보고서를 그해 7월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제출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폭 9 km, 길이 105 km에 걸친 범위가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당시 1만 명 이상이 피난해야 했다고 한다. 이 사고에 대해서는 여러 서방국들이 이전부터 계속 지적해 왔었는데, 32년 만에야 겨우 사실이 공개됐다.
(출처:
원자력 지식 정보 관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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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성 폐기물은 어디로 가는가, 끝나지 않은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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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1980 년대까지 수십 년간 철저하게 감췄던 극비 영상프란치스코 교황, "원전은 바벨탑"원자력은 국가가 국민을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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