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선 물

운영자 2018.02.28 11:20:23
조회 224 추천 0 댓글 1
선물
 
점심시간 이웃사무실의 오 변호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도중에 이런 말이 흘러 나왔다.

“칠십대 중반쯤의 학자인 분이 어느 날 보자기에 싼 걸 들고 우리 집으로 오셨어. 보자기를 푸시는 걸 보니까 고급 공예품인 금빛이 나는 유리잔 셋트였어. 그분은 평생 아끼던 물건이었다고 하면서 미리미리 주변의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려고 가지고 왔다는 거야. 내가 인연이 깊은 것도 아닌데 그걸 주시니까 감동이었지.”

죽음의 준비로 미리미리 주변을 가볍게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도 갑자기 찾아온 고교선배로부터 중국음식점에서 식사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다. 죽기 전에 한번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서 밥을 사주는 게 그가 하는 일이라고 했다. 모르던 대학교수가 찾아온 적도 있다. 그의 버킷리스트에 나를 만나는 게 들어 있었다고 했다. 나 같은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그런 일은 감사이고 영광이었다. 가을이 되면 나무들이 한여름 무성했던 잎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몸을 가볍게 하듯 인생도 그렇게 겨울을 준비해야 하는 지도 모른다. 일찍 백발이 된 아내는 요즈음 자기 살림들을 하나하나 남들한테 선물을 한다. 집안에는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있게 하자고 한다. 아내는 그동한 소중히 보관해 온 쌀 뒤주를 백마강 가에 농가주택을 마련한 나의 고교선배 집에 선물했다. 아내는 어려서부터 친구같이 지냈다는 오래된 제니스 라디오를 카페를 개업한 나의 친구에게 선물했다. 빈티지스타일로 인테리어를 한 카페의 벽에 오래된 고물 라디오는 딱 어울리는 것 같았다.
 
몸이 약했던 아내는 어린 시절 묵직한 검은 상자 같은 제니스 라디오가 좋은 친구였다고 했다. 그 속에 작은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빈틈을 들여다보기도 했었다고 했다. 아내는 옥션에서 경매로 사온 그림도 찾아온 목사의 부인이 거기 눈길이 가자 아쉬움 없이 주어 버리는 걸 봤다. 죽은 다음에 주는 것 보다 살아서 따뜻한 피가 돌 때 선물하는 게 훨씬 좋다는 주장이다. 욕심이 많은 나는 내가 쓰는 좁은 골방 안에 물건들을 가득 쌓아놓고 하나도 버리거나 남을 주지 못하고 있다. 오래된 반닫이가 책상 옆에 있다. 내가 다섯 살 무렵 그 위에 올라 절벽이라고 생각하고 뛰어내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할아버지가 중고품을 사온 것이라고 들었다. 그 반닫이는 아마도 조선시대 어느 양반집 사랑에서 그곳을 찾아오는 선비들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 같다. 우리 집에 흘러들어와 할아버지 와 아버지를 거쳐 나와도 일평생을 함께 한 그 가구는 더 이상 물건이 아니라 든든한 인격체 같았다. 골방에는 일제시대 중학교에 합격한 아버지가 시장에서 산 작은 중고책장이 있다. 베니어판으로 만든 서랍이 세 개 달린 작은 책장이다. 그 문짝 안 귀퉁이에 아버지가 다니던 중동중학교의 마크가 붙어있다.

아버지는 공책위에 인쇄된 중학교 마크를 가위로 오려 밥풀로 책장에 붙여놓았었다. 80년이 지났는데도 밥풀로 붙인 그 종이 조각은 지금도 여전히 아버지의 중학교합격을 기념하고 있다. 중학교에 입학한 나는 아버지와 똑같이 공책에서 학교마크를 오려서 아버지가 붙인 학교마크 옆에 밥풀로 나란히 붙여놓았다. 그것도 지금까지 그대로 붙어 있다. 반닫이와 작은 책장은 평생 나와 동행한 친구 같은 든든한 존재였다. 나는 그 친구들을 내게서 떼어놓지 못한다. 집착으로 내 주변에 있는 그런 물건들이나 책이 너무 많다. 법정스님은 모든 잎을 땅에 떨 군 나무들이 서 있는 숲속으로 들어가 보라고 했다. 그 나무들이 하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 때 그는 삶을 살 줄 알 것이라고 했다. 나도 나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추천 비추천

0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운전대만 잡으면 다른 사람이 될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4/15 - -
3324 벗꽃 잎 같이 진 친구 운영자 24.04.15 36 1
3323 조용한 기적 운영자 24.04.15 32 1
3322 감옥은 좋은 독서실 운영자 24.04.15 29 0
3321 앞이 안 보이는 사람들 운영자 24.04.15 28 0
3320 미녀 탈랜트의 숨겨진 사랑 운영자 24.04.15 36 1
3319 두 건달의 독백 운영자 24.04.15 29 0
3318 명품이 갑옷인가 운영자 24.04.15 23 0
3317 나는 될 것이라는 믿음 운영자 24.04.15 28 0
3316 오랜 꿈 운영자 24.04.08 52 2
3315 그들은 각자 소설이 됐다. 운영자 24.04.08 55 1
3314 나이 값 [1] 운영자 24.04.08 70 1
3313 검은 은혜 [1] 운영자 24.04.08 58 3
3312 실버타운은 반은 천국 반은 지옥 [1] 운영자 24.04.08 66 2
3311 늙어서 만난 친구 운영자 24.04.08 36 1
3310 그들을 이어주는 끈 [1] 운영자 24.04.01 145 2
3309 그가 노숙자가 됐다 [1] 운영자 24.04.01 96 3
3308 밥벌이를 졸업하려고 한다 [1] 운영자 24.04.01 102 2
3307 허망한 부자 [1] 운영자 24.04.01 105 2
3306 죽은 소설가가 말을 걸었다. [1] 운영자 24.04.01 98 2
3305 개인의 신비체험 [2] 운영자 24.04.01 103 2
3304 나는 책장을 정리하고 있다. [1] 운영자 24.04.01 91 2
3303 노인의 집짓기 [1] 운영자 24.04.01 89 1
3302 똑똑한 노인 [1] 운영자 24.03.25 120 2
3301 곱게 늙어간다는 것 [1] 운영자 24.03.25 124 4
3300 두 명의 교주 [1] 운영자 24.03.25 120 1
3299 영혼이 살아있는 착한 노숙자 [1] 운영자 24.03.25 108 1
3298 팥 빵 [1] 운영자 24.03.25 101 0
3297 얼굴 [1] 운영자 24.03.19 128 1
3296 이별의 기술 운영자 24.03.19 105 1
3295 노년에 맞이하는 친구들 운영자 24.03.19 97 1
3294 노년의 진짜 공부 운영자 24.03.19 93 0
3293 주는 즐거움 운영자 24.03.19 83 1
3292 장사꾼 대통령 운영자 24.03.19 110 1
3291 나는 어떻게 크리스챤이 됐을까. 운영자 24.03.19 122 1
3290 태극기부대원과 인민군상좌 운영자 24.03.19 92 2
3289 결혼관을 묻는 청년에게 [4] 운영자 24.03.11 279 0
3288 손자의 마음 밭 갈기 운영자 24.03.11 123 1
3287 어떤 여행길 운영자 24.03.11 127 2
3286 나의 돈 쓰는 방법 [5] 운영자 24.03.11 2222 12
3285 순간 순간 몰입하기 운영자 24.03.11 131 1
3284 먼지 덮인 수필집으로 남은 남자 운영자 24.03.11 118 1
3283 아버지 제사 운영자 24.03.11 119 2
3282 속을 털어놓기 운영자 24.03.04 135 1
3281 반전의 묘미 운영자 24.03.04 125 1
3280 성공과 승리 운영자 24.03.04 143 2
3279 영정사진 속의 표정들 운영자 24.03.04 122 2
3278 세 가지 선택 [1] 운영자 24.03.04 151 2
3277 인생의 작은 맛 [1] 운영자 24.03.04 159 2
3276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두 손님 운영자 24.03.04 133 1
3275 인생 무대는 연습이 없다 운영자 24.02.26 159 2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