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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믿어준다는 것

운영자 2019.01.21 11:07:40
조회 156 추천 3 댓글 0
십여 년 전의 일이다. 퇴직금을 사기 당해 나의 법률사무소를 온 오십대 후반의 남자가 있었다. 은행 여직원이 퇴직금을 모두 펀드에 넣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펀드를 예금과 비슷한 것으로 믿은 그는 그래도 나중에 원금은 돌려받겠지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의 퇴직금은 한 푼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그는 펀드와 예금의 구별을 하지 못했다. 은행 여직원은 잘못되는 경우 원금도 모두 없어진다는 얘기를 의도적으로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무렵 펀드열풍이 불었다. 많은 사람들이 펀드에 가입했다가 돈을 날렸다. 그는 변호비를 낼 능력조차 되지 않았다. 내가 소송을 제기해 주었다. 재판장인 젊은 판사가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학교를 어디 나오고 어떤 일을 하면서 평생 사셨습니까?”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월남에서 소대장을 마친 후 정보기관에 차출되어 정년퇴직할 때까지 평생 해외정보분야에서 일했습니다.”

“그 정도 경력자가 펀드하고 예금의 차이도 모른단 말입니까? 속았다는 게 말이 됩니까?”

재판은 당장 기각되고 그는 퇴직금을 날렸다. 군 지휘관을 했던 그는 일단 누구든 믿어주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몇 년 후 신문에서 그가 국정원장이 됐다는 기사를 봤다.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박근혜 정권이 무너지자 그가 구속됐다는 보도가 났다.

뇌물과 국고 손실죄 그리고 정치관여죄라고 했다. 나는 다시 그의 변호사가 됐다. 국정원장을 지냈지만 그는 역시 집 한 채와 연금이 삶의 전부였다. 그의 부인은 연금이 끊길까봐 걱정하는 형편이었다. 그가 감옥에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국정원의 예산책임자 기조실장이 나한테 와서 오랫동안 청와대에 예산지원을 해왔는데 그렇게 해야겠다는 거예요. 법조인출신 역대 국정원장시절도 그렇게 했고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행정적으로 담당자가 알아서 처리했지 하고 관심을 가진 적이 없어요. 그런데 정권이 바뀌니까 청와대 예산지원이 내가 상납한 뇌물이 되고 그만큼 국고손실죄를 범했다는 거예요. 청와대에서 그 돈의 일부를 여당후보 여론조사비용에 썼다고 해서 내가 정치관여범이 됐어요. 난 그런 적 없는데.”

“좀 살펴보지 왜 그렇게 했어요?”

“지휘관의 입장에서 부하를 믿어야 하는 거죠. 검찰에서 부하였던 기조실장이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모략하는데 가만히 있었어요.”

그렇게 해서 팔십 노인인 그는 징역형을 받았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문득 그의 늙은 부인이 했던 이런 말이 떠올랐다.

“한번은 사업을 하는 친구에게 인감도장과 인감증명서를 건네주고 기분 좋게 들어오는 거예요. 친구를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겠느냐는 거예요. 저희 친정이 보증을 섰다가 망했어요. 그래서 제가 가서 그 친구에게서 인감도장을 도로 받아왔어요. 우리 그이는 그런 성격이예요.”

법원의 판사는 예상대로 그의 어떤 말도 믿지 않았다. 변호사인 나는 의심이 가득한 판사의 뇌리에 그의 개성을 집어넣을 수가 없었다. 변호사생활을 하면서 이런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릇이 작은 사람은 의심하고 위인은 믿는다. 속는 것은 큰 사람의 한 특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형벌을 받았다.

그러면 세상을 다 안다는 듯이 사람을 캐보고 속지 않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었나? 그런 사람은 대개 그 자신이 좁고 속된 인간이었다. 예수는 자기를 속이는 가롯 유다에게 빨리 가서 그 일을 하라고 했다. 그리고 십자가를 졌다. 그래도 믿는 것은 의심하는 것 보다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국정원장은 한 평의 좁은 감옥 안에서 묵묵히 성경을 들여다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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