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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익숙한 곳이 보였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내다보니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몇 시간이나 잤는지 조차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저 허리가 삐걱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엄청 오래 잤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만이 들었다.

눈 앞에 보이는 대형 2절지, 썬키스트 병, 얼마 전에 받았던 나눔 그림들..

다시 한번 볼을 꼬집어 보고 나서야 현실이라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왼 손을 내려다봐도 힘같은건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그건 꿈이었던 건가.

다시 현실에 돌아왔다.

이미 겨울은 끝났다.

따사로운 태양, 산들거리는 바람, 반팔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나의 현실.

마음이 울적해진다.

'그녀는 없어.'

잠이나 한 숨 더 자자고 생각했다.

다시 자리에 눕는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없어.

절망감에 빠져 또 한참을 누워있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니 굿즈 보관함에 넣어뒀던 스틸북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블루레이 플레이어를 작동시켰다.

익숙한 배경음악이 흘러나온다.

몇 번의 조작을 하자 다시 한번 겨울왕국이 시작되었다.

여왕님과 공주님의 13년간의 고독과 슬픔, 갈등, 고난과 역경, 위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극복하는 '진정한 사랑'. 문을 여는 행위.

모든 시련을 이겨낸 그녀가 두 손을 뻗어 얼음을 모두 녹였다.

모든 것을 겪은 아렌델, 그녀의 현실은 겨울왕국이 아니었다.

닫혀진 문을 연 여왕님과 공주님은 이제 더 이상 겨울왕국에 살지 않았다.

얼어붙었던 그들의 세계가 녹았다.

..

'힘든 상황이 왔을때.. 문을 닫지 않겠다고. 문을 열겠다고 저랑 약속해요.'

문득 그녀의 말이 생각났다.

움직이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뭐라도 해보자. 였다.

책상에 한 손을 지탱하고 힘겹게 일어선다.

뻐근한 다리와 허리가 내게 다시 누으라고 비명을 지른다.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켜세웠다.

일단은 씻으러 갔다.

차가운 물이 온 몸을 적셔온다.

짜릿한 냉기가 내 몸을 찌른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차가운 물 덕분에 정신이 한결 상쾌해진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입지 않았던 옷을 꺼내입었다.

길어진 손톱을 깎고, 젖은 머리를 말린다.

거울을 보니 몰라보게 달라진 내가 있었다.

창 밖을 내다봤다.

이미 어두운 새벽은 끝나고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산뜻한 기운이 내 주위를 감싼다.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겨울은 끝났지만, 내 안의 겨울은 끝나지 않으리라.'

나는 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