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동검도 시끄러운 좆키들 닥치고 이단아 ㅇㅋ?
검도는 전투의 수단으로 성립되고 발전된 것으로, 현대에는 정신수양과 신체단련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이 되었다. 그러나 검도의 중요한 요소가 예절(禮節)과 수도(修道)하는 마음가짐, 기검체일치(氣劍體一致)인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무도(武道)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무도나 무예가 성립된 것은 구석기시대보다 훨씬 이후의 일로서, 기원은 고대(古代)의 병기와 병기를 운용하는 방법으로서의 병법에서 찾을 수 있다. 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사기(史記)》 <황제본기(黃帝本記)>와 <고공기(考工記)>에서 발견된다.
내용은, 황제가 수산(首山)에서 동철(銅鐵)을 채취하여 검을 제작하였다는 것인데 BC 26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석기 문명에서 청동기 문명으로 전환하는 시기다. 당시 새로 제작된 청동검은 최신 병기로서, 황제로 대표되는 부족 세력이 중국 대륙의 제국(원시적인 城邑國家)을 통일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를 들어, 황제를 병가지조(兵家之祖)로, 검은 병기지조(兵器之祖)로 일컫는다. 어쨌든 철제 무기의 위력은 위세를 떨쳐,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철의 주요산지인 초(楚)나라는 철검으로 국세를 떨쳤다고 《순자(荀子)》 <의병편(議兵篇)>에 실려 있다. 한반도에서도 위만(衛滿)이 고조선을 침략하여 위만조선을 세운 이면에는 중국에서 철제무기가 전래된 데 힘입은 것으로 추측한다.
검도라는 말은 2000년 전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검도 38편이 기록된 것에 처음 나타난다. 그 밖에 사법(射法) 42편, 수박(手搏) 6편이 기록되어 있는데, 검도는 법(法)이라고 부르지 않고 도(道)라고 불렀다. <예문지>의 검편(劍篇)에 있는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검을 배우는 것을 수도검(修道劍)이라 하였는데, 수도(修道)란 도가(道家)의 정좌법(靜坐法)을 말한다.
이는 단전호흡(丹田呼吸)과 기(氣)의 단련으로 심신을 수양하는 것인데 대개의 무사들이 이를 중요시하였다고 전해진다. 무예에 조예가 깊다는 것은 일찍이 그 무술이 도(道)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정좌법 외에 무예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중국 선종(禪宗)의 좌선(坐禪)이다. 달마조사(達磨祖師)가 저술한 《역근경(易筋經)》은 그러한 내공(內功)을 통한 심신단련법을 설명한 책이다. 선종(禪宗)이 한국에 전래될 때 이러한 좌선법에 중점을 두는 무예 역시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병기를 보면, 중국에서는 도검(刀劍)과 창극(槍戟:끝이 갈라진 창)이 주로 사용되었고, 한국에서는 검(劍) ·도(刀) ·창[矛] ·활이 주로 사용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잦은 전쟁을 통하여 각국은 나름대로 무예와 전법(戰法)의 발전을 꾀하였다. 고구려는 대륙에 대한 팽창을 꾀하는 가운데 북부 중국의 병법과 유사하게 기마전과 긴 병기의 사용에 능숙한 반면, 백제는 수전(水戰)에 능하여 짧은 검의 사용에 능하였으리라고 추측되나, 자세한 검술의 원형은 전해지지 않는다.
신라는 귀족무사집단인 화랑을 제도적으로 적극 육성하여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기반을 닦았다. 화랑의 무예와 그 수련에서 풍류는 최치원(崔致遠)이 전하는 현묘지도(玄妙之道), 즉 신라에 고유한 선도(仙道)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데,이것은 한국에도 고유한 무도가 있었음을 밝히는 최초의 증언이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전하는 본국검(本國劍)은 신라검(新羅劍) 또는 신검(新劍)이라고도 하는데 신라에서 성립된 우리 고유의 검술이다. 본국검은 신라 화랑들이 무술연마와 아울러 실전에서도 사용한 검술이며, 이것이 고려·조선시대에는 보졸(步卒)이 환도(環刀)를 사용하여 행하는 검술이 되었다.
본국검은 신라 사람 황창랑(黃倡郞)이 창안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칼춤을 추다가 백제의 임금을 찌르고 죽음을 당한 그의 공적을 기리어 후인들이 그의 검법을 흉내내어 칼춤을 춘 것이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고 한다. 본국검은 칼춤과의 연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무술과 예술이 혼연일체가 된 무예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정책적으로 무(武)를 천하게 취급하였으나 민간에 의해 여러 고유의 검법이 비전(秘傳)되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쇠잔해졌다.
임진왜란은 당시 국가의 무력적 기반이 된 무예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대체로, 한국은 진법(陣法)에 의한 병법이 주가 되었으나, 전쟁중에 단병접전(單兵接戰)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되어 임진왜란 이후 무술을 장려하고 국가적으로도 지원하여 본국검을 비롯하여 쌍수도(雙手刀) ·예도(銳刀) ·제독검(提督劍) ·쌍검(雙劍) ·마상쌍검(馬上雙劍) ·월도(月刀) ·마상월도(馬上月刀) ·협도(挾刀) 등 중국식 검술과 일본검(日本劍)을 가르쳤다. 임진왜란에서 모습을 보인 일본검은 숙종(肅宗) 때 군교(軍校) 김체건(金體乾)에 의해 전하여졌다고 한다.
한국 고유의 검술이 계속되지 못하고 침체된 것은 그 이후로도 계속된 당쟁과 숭문천무(崇文賤武)의 기풍, 그리고 서구문명이 침투하는 과정중이었기 때문이다. 신식군대의 편성과 훈련 등은 결정적으로 한국 고유의 검법과 검술을 사장(死藏)시켰다.
현재의 검도는 한국에서 전수한 검술이 일본 내의 전란 과정 속에서 발전되었고, 나중에는 스포츠로 체계화된 일본의 검도가 역으로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한말과 일제강점기를 통해 강제 수용된 검도는 8 ·15광복 후 상당 기간 동안 침체된 상태였으나, 점차 검도 자체가 가지는 운동의 진가를 인식하는 층과 국제화되고 스포츠화한 운동으로서 8·15광복 후 새로운 세대의 호응을 받아 스포츠로서 정착되었다. 1953년 11월 대한검도회가 재조직되어 대한체육회의 가입단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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