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곽영훈 에세이] MIT와 하버드에서의 추억

운영자 2005.12.26 16:51:19
조회 3375 추천 0 댓글 5

 1. 삶터에 대한 관심과 배움의 길

  MIT와 하버드에서의 추억

  오하이오주립대학에서 2년 공부를 마친 1966년 겨울, 마침내 그토록 소원하던 MIT의 입학 허가를 받게 되었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뚫은 듯한 느낌으로 하늘을 날 것처럼 기뻤다. 명성에 걸맞게 MIT는 다른 대학들과 달랐다. 우선 학생과 교수의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책에서나 봤던 유명한 교수는 넥타이도 매지 않은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었고, 반면 강의를 듣는 학생은 교수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이라 어느 대학보다 정형적이고 엄격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예상과는 달리 자유로운 토론과 학문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강의실 안인지 밖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나는 처음 전공 수업을 들으며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교수와 그 설명을 듣는 학생들이 와인 잔에 뭔가를 담아서 마시는 광경을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실제로 와인 종류인 ‘쉐리’였다. 세상에……, 수업을 하며 교수와 학생이 술을 마시다니! 밤낮의 구분이 없다는 것도 MIT의 특징이었다. 일부 도서관은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단 한 번도 문을 닫는 적이 없었고, 학생들은 도서관 바닥에서 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다시 공부를 하곤 했다. 이렇게 자유 분방한 학문 분위기는 학점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학생들은 학기를 마칠 때면 A에서 D까지 자신의 학점을 스스로 정해서 제출하고, 교수는 그 스스로의 평가가 타당한지를 판단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MIT에 와서도 곧 태권도를 시작했다. 학교 안에서는 무료로 가르쳤지만 대학생 이외에 일반 수련생까지 하나 둘 늘어나자 은근히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아예 내친 김에 센트럴 스퀘어라는 곳에다 조그마한 공간을 임대했고, 그곳에다 어설프게나마 작은 도장을 열었다. 그리고 종이에다 ‘TaeKwon-Do’라는 영어와 ‘태권도’라는 한글을 함께 내다 걸었다.


MIT 공대 본관 앞 찰스강변에서 태권도 시범

  후일 쌍용그룹의 회장이 된 김석원 씨가 인근 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그는 태권도장에서 청소를 하고 간판을 다는 등 참으로 스스럼없이 도움을 주었다. 어느 날 절친했던 룸메이트인 존 게이지가 자기와 함께 하버드 정부대학원을 다니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 왔다. MIT에서 학부와 석사 과정을 동시에 다니고 있던 내게 하버드대학원을 같이 다니자는 제안은 사실 삼중 부담을 주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존 게이지의 말은 나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도시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공공 정책의 차원이므로 정치학이라는 새로운 공부를 할 필요성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68년 가을, 나는 하버드 정부대학원의 정책 과정까지 밟게 되었다.이렇게 하버드 정부대학원을 다니던 어느 날, 학생들과 교수들은 기존 정책 및 행정 프로그램을 개편하여 하버드대학 내에 새로운 이름의 대학원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 대학원의 이름을 내가 지어 주겠다고 나섰다. 나는 짧은 인연이자 큰 추억으로 남겨진 케네디 대통령의 얼굴을 떠올렸고, 케네디 대통령의 자문역이었던 리차드 뉴스텟트 교수도 나의 생각을 좋아 할 것 같았다. 특히 그분이 새로운 공공 정책 프로그램을 시작한 교수였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제안했다.

  “프린스턴대학의 ‘윌슨 스쿨’처럼 미국 역대 대통령 이름을 딴 대학이 적지 않다. 불과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케네디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케네디 스쿨’이라고 하면 어떻겠는가. 정책 과정과 행정 과정 대학원이라는 특징과 맞지 않을까?” 이날 나의 제안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얼마 후 하버드대학 행정대학원의 명칭은 ‘케네디 정부대학원’으로 확정되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현실화된 것이다.

 

  학위 고행

  MIT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동시에 받게 되기 열흘 전쯤, 1969년 5월 31일 일요일 새벽 잠결에 어디선가 어수선한 소리가 들렸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하고 있다가 겨우 눈을 떴는데, 이게 웬일인가. 온 방안이 연기로 가득 차 있는 것이었다.

  나는 연기를 헤치고 창문을 열었다. 4층 건물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건물 아래서는 사람들이 “어서 뛰어내리라.”고 소리를 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에도 입과 코를 막은 채 방안으로 들어가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내 재산 목록 1호인 니콘 카메라였다. 워낙 고가인데다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에게 카메라는 필수품이었다.

  카메라를 찾은 나는 다시 창쪽으로 가서 우선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던졌다. 그리고 난간에 다리를 얹고 막 뛰어내리려는 순간, 윗층에서 여자의 다급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위를 올려다보니 4층에 사는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먼저 뛰어내리겠다는 신호를 보내 왔다. 그리고 불과 몇 초 사이, 건물 아래로 뛰어내린 여학생의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찔했다. 일단 난간을 붙잡고 최대한 다리를 내려뜨렸다. 그리고는 땅바닥을 주시하면서 난간을 잡은 손을 놓았다. 불과 1초 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순간이었겠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그 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다행히 다리부터 땅에 닿아서 치명적인 부상은 당하지 않았다. 다만 떨어지는 순간, 손목으로 바닥을 짚는 바람에 왼쪽 손목뼈가 부러졌다.

  그날의 화재로 두 명이 숨졌는데, 병원으로 후송된 윗층 여학생도 끝내 숨지고 말았다. 겨우 목숨과 카메라를 건졌지만 천만다행이라고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그때가 MIT 졸업식을 불과 열흘쯤 남겨두고 있을 때였는데, 석사 학위를 받는 데 필요한 과제가 다 타 버린 것이었다. 나는 화재 현장에서처럼, 아니 그날보다 더더욱 눈앞이 캄캄했다. 다른 과목은 이미 과제를 모두 제출해서 문제가 없었지만 화재 전날 마지막으로 들었던 과목의 과제물을 아직 제출하지 못하였다. 담당 교수가 정상 참작을 해주지 않으면 석사 학위 받기란 불가능했다. MIT 대학교와 대학원, 그리고 하버드를 동시에 다녀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한꺼번에 받으려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데 …….

  나는 깁스를 한 채 캠브리지병원을 나와 담당 교수 연구실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는 이미 스탠포드대학으로 강의를 하러 가 버린 뒤였다. 이리저리 수소문해서 스탠포드에 있던 그 교수와 통화를 하는 데 겨우 성공했다. 나는 화재 상황을 설명하고 뒤늦게라도 논문을 다시 작성해서 제출하겠다며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잔인하게도 “No!”였다.

  결국 나는 석사 학위를 뒤로 미룬 채 MIT 학사 학위만 받는 것으로 우선 졸업을 해야 했다. 졸업식 날 붕대를 감은 채 슬리퍼를 끌고 식장에 참석한 나를 워싱턴에 있던 누나와 매부가 올라와 축하해 주었다. 얼마 후 화재 현장을 다시 찾은 나는 숯더미가 되어 있는 내 방을 뒤적여서 두 개의 반지를 찾아냈다. 하나는 어머니가 MIT 졸업 기념으로 보내 주신 금반지였고, 다른 하나는 졸업을 앞두고 미리 MIT에 주문했던 졸업 기념 반지였다. MIT 반지에는 아직도 틈새에 그때의 흔적이 남아 있다.

  6월 졸업식 후 3개월을 더 다니면서 불에 탔던 과제를 다시 작성한 뒤 비로소 MIT 석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1969년 6월에 MIT 공과대학 건축학 학사 학위(B.S.A.D)를, 같은 해 9월에 도시 설계 석사 학위(M. Arch.)를 취득한 것이다. 정책학 과정을 밟은 하버드 케네디 정부대학원은 그때까지는 공식적인 학위 체제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정식 학위를 받지는 못했다. 그때 하버드에서 정책학 석사도 받고 싶었는데 …….

  MIT를 졸업한 후 나는 곧 건축 및 도시 환경 설계 최고 과정에 입학, 박사 과정을 이수하기 시작했다. 전세계에서 12명을 선발했는데, MIT 졸업생으로는 물론 동양계로는 내가 유일한 입학생이었다. 그런 까다로운 선발 절차 때문인지 나를 제외한 11명의 입학생들의 수준과 실력은 그야말로 달인의 경지였다. 따라서 말이 교수와 학생이지,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누가 교수고 누가 학생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학위를 받으려는 욕심은 없고 오직 순수하게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온 학생들이라 수업 과정 자체가 건축과 도시 설계, 그리고 환경 문제를 다루는 데 대한 정수를 맛보는 기분이었다.

  배움이 많을수록 시간은 빠르게 흘러 1971년에 MIT 대학원 건축 및 도시 환경 설계 최고 과정을 수료했다. 1964년 하워드대학교에 입학한 지 7년, 1967년 MIT로 편입한 지 4년 만이었다. 이제 모든 과정이 끝나가고 박사 논문만 남았다.

  나는 박사 논문의 주제를 미국 연방정부의 모델도시 프로그램의 분석으로 정하고 하버드케네디스쿨의 리차드 뉴스텟트, 그래햄 앨리슨, 존 스타인부르니 등의 교수들이 같이 가르친 정책 분석의 틀을 적용시켰다. 내 나름대로는 양쪽 대학교의 학문 방법을 섞어 보는 것이 기발하다고 생각했다.

  논문 심사 위원장인 빌 포터 교수도 합의해 주어 2년이 지난 71년 봄 논문의 초안을 완성해서 교수에게 제출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교수는 갖가지 트집을 잡으며 내 논문의 개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자기가 원하는 주제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정책 분석을 위한 개념의 틀로 쓴 프라임 액토 모델과 정부 관료 조직과정 모델 그리고 사회 분위기 모델의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분석의 틀은 원래 그래햄 앨리슨 교수가 케네디 대통령의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쓴 정책을 분석하면서 만든 이론으로 『결정의 정수(Essence of Decision)』라는 책의 내용이었다.


MIT에서 Charlestown 대학교 설계 연습

  MIT에서 학사와 석사를 동시에 따려는 노력은 성공했지만 하버드 정치학을 도시 환경설계에 적용시키는 것은 무리였던 것일까? 아니면 인종 차별 주의자인 이 교수에게 끝까지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이 논문 하나에만 매달려 시간을 보내기가 아까운 생각이 들어 늘 염두에 두었던 교육학을 하버드에서 또 시작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 모든 것을 해냈는지……. 장학금과 고학으로 숨돌릴 새 없이 보낸 나의 이십대였지만 배움에의 열정으로 힘든 줄도 몰랐다.

  정치학과와 같이 교육학도 처음부터 확실한 결심을 갖고 택한 전공이었다. 나는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비무장 지대(DMZ) 근처에 평화 교육 도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 생각이 바로 모든 건축 관련 공부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남북뿐만 아니라 인류가 더불어 사는 도시, 함께 배우며 사는 도시를 만들려면 최적의 교육 환경과 시스템이 없이는 성공적인 민족 화합 도시 건설이 어렵다는 생각이었다.

  교육학을 전공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과목은 익스트림 인바이어런먼트(Extreme Environment), 즉 사람이 혹독한 환경에 가면 어떻게 되는가를 배우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독재 정권 아래 사는 사람들의 심리, 남극이나 북극에 사는 사람들의 심리 등을 연구하면서, 우리를 둘러싼 정치적·도시적 환경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유추해 내는 과목이었다. 이 과목을 통해 나는 환경 심리학의 기초를 다지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실제로 쓰레기가 마구 버려진 곳에서는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쓰레기를 버리고, 반대로 깨끗한 곳에 가면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데, 이 같은 심리적 환경 요인을 통해 건축과 도시 설계를 생각하는 계기를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73년에 교육학 석사학위(M.Ed)를 받았으나 나의 자존심 때문에 MIT 박사 논문을 쉽게 바꾸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다가 조경학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SDDA라는 회사에 입사하였다. 조경 설계도 배우고 돈도 벌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폐암 진단을 받으셨고 앞으로 6개월을 못 넘기실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급히 서울로 돌아와야만 했다. 아버지를 모시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녔고 동경에 가 암 치료에 유명하다는 의사를 만나 약을 구해다 드리기도 했다. 국립암센터에서 항암 치료도 받아 보았으나 77년 6월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이제는 가정도 이루어야 했고 조경공사와 홍익대학교에서 일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박사 학위는 93년 엑스포를 계획하고 자문하면서 우리 동네에 있는 동국대학교에서 “도시 환경 설계에 대한 교육적 접근”이라는 논문으로 뒤늦게 받게 되었다.

계속..

>

 

추천 비추천

0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연인과 헤어지고 뒤끝 작렬할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4/22 - -
42 [곽영훈 에세이] 모두가 아름답고 행복한 삶터를 위해 [58] 운영자 06.02.13 6359 5
41 [곽영훈 에세이] 웃음이 있는 동심, 아름다운 학교 [5] 운영자 06.02.10 3039 0
40 [곽영훈 에세이] 더 이상 죽이지 마라! [6] 운영자 06.02.09 3273 2
39 [곽영훈 에세이] 세계와 인류의 심장부 [2] 운영자 06.02.08 1954 1
38 [곽영훈 에세이] 세계를 향하여 [2] 운영자 06.02.07 1949 0
37 [곽영훈 에세이] 서울의 ‘전문의사’를 꿈꾸며 [3] 운영자 06.02.06 2363 1
36 [곽영훈 에세이] 서울과 함께 신음하고 아파하며 [4] 운영자 06.02.03 2580 0
35 [곽영훈 에세이] 만신창이가 된 서울 [3] 운영자 06.02.02 2660 0
34 [곽영훈 에세이] 통일 평화시(統一 平和市) [3] 운영자 06.02.01 2508 1
33 [곽영훈 에세이] 현실로 다가온 엑스포의 꿈 [6] 운영자 06.01.31 2376 0
32 [곽영훈 에세이] 올림픽의 평화 정신은 이어져야 한다 [3] 운영자 06.01.27 2495 0
31 [곽영훈 에세이] 영원히 꺼지지 않을 평화의 불 [4] 운영자 06.01.25 2651 0
30 [곽영훈 에세이] 고르바초프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 [5] 운영자 06.01.24 2550 0
29 [곽영훈 에세이] 제발 도와주세요!! [2] 운영자 06.01.23 1932 0
28 [곽영훈 에세이] 올림픽 공원, 짬뽕이 되다 [5] 운영자 06.01.20 2708 0
27 [곽영훈 에세이] 한강 종합 개발 프로젝트 [5] 운영자 06.01.19 2887 0
26 [곽영훈 에세이] 세계의 꿈과 희망 올림픽 유치 [2] 운영자 06.01.18 1733 0
25 [곽영훈 에세이] 세계인을 위한 사랑방 '영종도' [2] 운영자 06.01.17 2150 0
24 [곽영훈 에세이] 지구촌의 새로운 도시들 [2] 운영자 06.01.16 2204 0
21 [곽영훈 에세이] 수도를 옮겨라! [3] 운영자 06.01.13 3111 0
20 [곽영훈 에세이] 전국이 꿈을 가진 도시로 [2] 운영자 06.01.12 1643 0
19 [곽영훈 에세이] 지하철 2, 3호선 제안 [6] 운영자 06.01.11 2784 0
18 [곽영훈 에세이] 정주영 회장과의 인연 [7] 운영자 06.01.09 2367 0
17 [곽영훈 에세이] 멋진 한강 만들기 [5] 운영자 06.01.06 2087 0
16 [곽영훈 에세이] 아름다운 서울 만들기 [2] 운영자 06.01.05 1716 0
15 [곽영훈 에세이] 배워서 남줘라! [5] 운영자 06.01.03 2253 0
14 [곽영훈 에세이] 대학로를 살려라! [3] 운영자 06.01.02 2259 0
13 [곽영훈 에세이] 남대문과 남산이 끙끙 앓는 소리 [3] 운영자 05.12.30 2470 0
12 [곽영훈 에세이] 김대중 씨를 위한 장미 한 송이 [6] 운영자 05.12.29 2384 3
11 [곽영훈 에세이] 큰 안목 큰 숙제 [6] 운영자 05.12.27 2817 0
[곽영훈 에세이] MIT와 하버드에서의 추억 [5] 운영자 05.12.26 3375 0
9 [곽영훈 에세이] 징기스곽 [6] 운영자 05.12.23 1865 0
8 [곽영훈 에세이] 무일푼으로 미국 유학 가다 [8] 운영자 05.12.22 2872 0
7 [곽영훈 에세이] 케네디 대통령과의 만남 [6] 운영자 05.12.21 2253 0
5 [곽영훈 에세이] 글을 시작하며.. [22] 운영자 05.12.19 2751 0
1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