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경영을 잘못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시대 변화에 불가피하게 실적이 나빠져서 인력 감원을 비롯한 구조조정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더라도 ‘사업 여건이 나빠졌으니 무조건 받아들여라’고 한다면? 특히 애초 보낼 때 “원대복귀가 원칙”이라고 약속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책임연구원 김모씨(39·경기 수원)는 1996년 삼성전자에 들어갔다. 2000년 말 군대에 다녀와서 복직하자 새로운 사업부로 배치 받았다. 컴퓨터의 CD롬 등에서 데이터를 읽어들이는 장치인 광디스크드라이브(ODD) 사업을 맡았다. 당시 호황을 타고 이 사업은 수익을 잘 냈다고 한다. 김씨는 “회사 안에서도 이익을 많이 내는 톱3에 들어갈 만큼 잘됐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국제특허 문제가 불거졌다. 삼성전자는 도시바와 2004년 합작사TSST를 만드는 방편을 택했다. 삼성전자에서 약 400명을 데려왔다. 김씨도 그해 4월부터 TSST코리아라는 명함을 찍어야 했다. 김씨는 “당연히 삼성 직원으로 다들 생각했다. ‘전출’된 신분이니까 변화가 생기면 언제든 삼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약속 받았다”고 말했다. 아직도 명함 한편에는 ‘삼성’ 마크가 남아 있다.
삼성전자가 도시바와 합작사인 TSST코리아를 만들기 전인 2003년 9월 사내 OMS사업부 직원들에게 '전출'을 설득하기 위한 설명회 때 쓰였다고 노조 측이 밝힌 문건에는 '원대복귀가 원칙'이란 표현이 나온다. / TSST노조 제공
직원 잘리고 문 닫을 지경에 삼성은 외면
ODD 사업이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장을 계기로 크게 위축돼 실적이 나빠졌다. 삼성전자는 도시바와 합작사업을 정리하고 ‘픽업’이란 부품을 납품하던 협력사 옵티스에 한국 자회사인 TSST코리아를 넘기기로 했다. 원래TSST코리아는 일본에 있는 합작사인 TSST재팬(삼성전자 51%, 도시바 49%)이 100% 지분을 가진 자회사였다. 옵티스가 2014년 3월 TSST코리아 지분 49.9%를 인수한 것이다. 매각 계약으로 TSST코리아는 옵티스로부터 150억원, 도시바와 삼성전자로부터 800억원 등 총 950억원을 지원받기도 했다. 아직 일본에 있는 페이퍼컴퍼니인 TSST저팬이 지분 50.1%를 가진TSST코리아의 최대주주이지만, 내년 3월까지 지분을 옵티스에 다 넘길 예정이다. 협력사가 원청사의 자금지원을 받으며 인수하는 특이한 사례다.
직원들로서는 하루아침에 주인이 바뀌자 “친정인 삼성전자로 복귀시켜 달라”며 반발해 왔다. 게다가 옵티스의 경영상황이 근래 급속도로 악화됐다. 결국 올해 6월 옵티스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임금조정안에 따라 부장급 이상은 사실상 강제로 통상임금 20%를 반납하고, 그 아래는 희망자에 한해 임금조정에 들어갔다. 숨통이 트이는가 싶더니 올해 들어 상황이 더 나빠졌다. 김씨는 지난해 6월부터 올해 2월까지 매달 90만원씩 월급을 반납했고, 올해 3월부터는 전 직원 월급이 20%씩 깎였다. 그러다 올 5~6월에는 임금을 제때 받지 못하고 체불된 상태여서 앞날이 더 걱정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들이 삼성에서 다시 받아달라고 하는 건 지나친 요구로 비칠 수 있다. 삼성전자도 요즈음 구조조정에 바쁘다. 그러나 TSST로 보낼 때 어떤 조건이나 설명이 따랐는지 더 들어보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동안 1심, 2심 법원은 ‘돈 갚겠다는 말은 원론적으로 그냥 해본 말’이고, ‘차용증도 하자가 있다’는 빚쟁이 말만 들어준 꼴이 됐다. 3심에서 약속(“원대복귀가 원칙”)의 가치와 TSST로의 전적동의서에 나타나는 하자를 제대로 가려낼지 주목된다.
직원들 소송을 대리한 법률사무소 새날은 먼저 ‘전적동의서’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최종연 변호사는 “삼성전자가 제출한 전적동의서에 직원들이 동의 서명을 하지 않았고, 증거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밝혔다. 2심까지 법원은 삼성 측이 제출한 한 장의 ‘전적동의서’를 근거로 나머지 직원들에게 모두 준용해 적용했다고 최 변호사는 전했다. 지금은 퇴사한 한모 직원이 해외에 근무할 때 서명한 전적동의서라고 한다. 다른 직원의 전적동의서는 없지만 법원은 이 한 장으로 일반화시켰다. 최 변호사는 “당시 직원들이 동의서에 서명을 했더라도 ‘전적’이 아닌 ‘전출’로 삼성전자에서 TSST로 파견된다고 알았다”며 “이는 기망(속임)에 의한 서명이어서 10년 제척기간(2014년 4월까지) 안에 무효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즉 전적이라고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설명회에서는 “복귀가 원칙”이라고 한 뒤 서명을 받았다면 형식상 전적으로 적혔지만 인정될 수 없다는 논리다.
TSST코리아(현 옵티스) 직원들이 2014년 3월 서울 서초의 삼성 본사 앞에서 '삼성전자로의 복귀약속 실천을 지켜라'며 상경시위를 벌인 모습. / TSST노조 제공
또한 인사기록카드에는 ‘합작사 전출’로 기록돼 있다고 최 변호사는 지적했다. 삼성 측은 재판 과정에 ‘인사기록카드에는 전적을 전출이라고 쓴다’고 설명했다고 알려졌다.
<주간경향>이 입수한 삼성전자 OMS사업부가 직원들과 가진 설명회 때 쓰인 것으로 보이는 ‘질문사항/답변사항’을 담은 두 가지 문건에는 복귀 원칙이 언급돼 있다. 2004년 자료의 답변사항에는 “합작관계 폐지 시 RollBack(‘복귀’로 풀이)은 가능하나 성문화하지 못함. 그동안 사례로 볼 때, 삼성의 고유문화로 이해해야 함”이라고 돼 있다. 복귀가 가능하지만 문서로 못 박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앞서 2003년 설명회 자료에는 “합작관계가 종료될 경우 SEC(‘삼성전자’로 통용) 원복이 원칙이며, 합작 후 중도 복귀에 대해서는 사안에 따라 T사(도시바 지칭)와의 협의 후 결정함. 단, 개인적 사유로 인한 복귀는 불가능함”이라고 못 박았다. TSST에서 2007~2008년 5명, 2011년 7명이 삼성전자로 복귀하기도 했다. 차준호 TSST코리아 노조위원장은 “이런 모습을 보며 삼성전자의 복귀 약속이 깨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원대복귀는 원론”이란 법원 심리미진?
TSST로 옮길 때 받은 지원금의 규모와 성격도 논란거리다. 상여기초의 500%(약 3개월치 급여)가 지급됐다. 삼성전자는 “2004년 전적동의서를 통해 동의를 구했고, ‘전출’에 보상금을 지급한 사례가 없으며, 새출발 격려금을 지급한 바 있다”고 밝혔다. 반면 직원 측도 “전적 대가가 아니라 새출발 격려금”이라고 강조했다. 전적 대가라면 일반적인 삼성전자 보상 수준인 2년치 이상 급여를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새출발 격려금은 TSST로 이동하지 않은 삼성전자 OMS사업부 직원도 200%를 지급받았다고 한다.
예컨대 2013년 11월 삼성코닝정밀소재를 미국 코닝에 넘기기로 했을 때 삼성으로 전적하지 않고 코닝에 남는 직원에게 잔류 위로금으로 ‘4000만원+기본급 10개월분’으로 정한 적이 있다. 1인당 약 6000만원 선이다.
통상 3심 재판은 사실관계를 따지지 않고 법리 해석과 적용을 제대로 했는지를 본다. 다만 사건 심리를 충분히 하지 않았거나(심리미진), 중요 증거를 충분히 판단하지 못했을 경우(채증법칙 위반) 등에 대법원은 사건을 파기환송해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낸다. 당시 설명회에 나선 경영인 황인섭 TSST코리아 전 대표와 최낙의 전 전략그룹장의 증인심문 신청도 기각됐다. 다른 법무법인의 박모 변호사는 “이는 근로자가 전적이 아니라 전출임을 입증해야 하는 사건으로 보인다”며 “경험칙(상식) 위반도 법령 위반이라고 본다면 ‘사실관계 미확정’ 측면에서 아직 다퉈볼 여지는 남아 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TSST 건은 전적이냐, 전출이냐 다툼 이전에 직원을 대하는 태도가 더 본질적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LG IBM은 2005년 해체됐을 때 직원들에게는 LG전자로 돌아가거나, IBM으로 전적하거나, 1억원을 받고 퇴사하는 세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한 직원은 “LG IBM으로 갔다가 다시 친정인 LG전자로 직급을 그대로 수평이동해 왔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옵티스는 삼성전자와는 별개의 회사”라는 답변을 보내왔다. ‘우리와는 무관한데 왜 이제 와서 이러느냐’는 뉘앙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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