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기록의 도구
—정치권력에 우선하는 욕망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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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Muse)는 그리스 신화에서 예술과 학문을 담당하는 여신의 이름으로, 주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담당해왔다. 덕분에 예로부터 많은 시인들은 자신이 뭔가를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뮤즈 여신들이 노래하는 것을 듣고서 단지 받아 적었을 뿐이란 겸허한 자세를 취해왔다(심지어 창작하기 전에 뮤즈 여신에게 기도부터 드리는 관행마저 있었을 정도라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부분은—적어도 헤시오도스(Hesiodos)의 《신들의 계보》에 따르자면—이런 뮤즈의 부모가 그리스 신화의 주신(主神)인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라는 것이다. 권력과 기억의 결합이 예술이란 뜻이 되는데, 고대 그리스인들은 왜 이런 설정을 취한 것일까? 예컨대 《국가》에서 플라톤이 예술이 영혼에 끼치는 막강한 영향력을 우려하면서 예술이 혼자만의 힘으로 도시의 기반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던 대목을 떠올린다면—이른바 ‘신성한 공포(theios phobos)’로서의 예술—그 본성상 예술이란 권력의 도구로 사용되는 걸까? 그래서 “선전은 본질상 일종의 예술이다”라던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1897-1945)의 목소리라도 떠올려야 하나?
좀 더 근본적으로 보도록 시도해보자. 그런 뒤에 예술을 권력주의적 해석으로 연결시켜도 늦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우선에 제우스가 아버지, 즉 시간의 신이었던 크로노스(Cronus)를 쓰러뜨리고 올림포스 왕좌에 올랐다는 것을 주목해본다면, 권력은 무엇보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정복해야만 했다는 뜻이 된다. 그저 흘러갈 뿐인 시간의 흐름 속에선, 만물이 의미를 잃어버리며 허무 속으로만 침잠한다. 그래서 고대인들이 시간을 이해함에 있어 그저 흘러가기만 하는 시간인 크로노스와 어떤 의미를 갖는 특별한 시간인 카이로스(Kairos)로서 시간을 둘로 구분해서 이해했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때 궁극적으로 권력이란 욕망을 구현해내는 수단이라는 것에 천착한다면, 의미란 크로노스를 어떤 목적 하에 종속시키는 걸 뜻하게 된다. 즉, 욕망을 위한 시간이 탄생이다. 그리고 이런 욕망이 보다 관계적이고 정치적일 때, 이는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정치권력이나—제우스의 상징이기도 한—왕권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왕권이란 자연적 리듬 속에 있던 인민들을 강제적으로 동원하는 것이지 않던가? 또는 인민의 카이로스를 자신의 카이로스 속으로 환원하거나 종속시키는 작업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제우스, 즉 권력의 아내가 기억의 여신인 므네모시네였다는 점이다. 어째서일까? 물론, 기록은 곧 인간의 합리성을 구성해낸다는 점에서—대관절 역사 없는 합리성이란 뭔가?—무엇보다 권력적일 수 있다. 확실히,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적었던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통제한다”라는 경구는 몇 번이고 반복돼서 강조될만한 값어치가 있다. 그러나 이런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 고대 그리스라는 것을 떠올린다면, 기록의 의미를 해석함에 있어 마냥 주권 권력의 영향만을 고려하는 것엔 어떤 모자람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예컨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떠올려보자. 안티고네는 테베의 권좌에 오른 섭정 크레온의 명령을 거부했고, 이에 크레온은 명령불복종과 주권 모독으로 안티고네를 처벌하고자 하지만, 이때 그의 아들인 하이몬이 안티고네를 옹호하면서 그녀를 벌줘서는 안 된다고 설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 장면은 정확히 스탈린의 목을 겨누고 있다.
크레온: 나는 이 나라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뜻에 따라 다스려야 하나?
하이몬: 한 사람에 속하는 국가가 아닙니다.
크레온: 국가는 그 통치자의 것으로 간주되지 않느냐?
하이몬: 사막에서는 멋있게 독재를 하실 수 있겠지요.
다시 제우스와 므네모시네 얘기로 돌아오자면, 소포클레스로 하여금 이러한 반(反)왕권적인 극작품을 쓰게 한 것이 바로 제우스의 딸인 뮤즈였다는 것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따라서 권력과 기록의 결합에는, 단순한 마키아벨리즘을 넘어서는 모종의 철학적 심층이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그건 뭘까? 충분히 질질 끈 것 같으니, 이제 그만 결론을 말하도록 하자. 반복되는 허무의 시간인 크로노스를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과 이를 위해 찾아온 기록이란, 곧 영원함의 구현이다.
사계절이 반복되고 먹고자고싸고의 생로병사가 반복되는 것엔 아무런 욕망도 의지도 부여될 수 없다. 그저 그러함, 즉 자연(自然)의 일과일 뿐이다. 반대로 욕망이 부여된 무언가는 그런 타의적인 순환을 깨버리고자 한다. 예컨대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펼칠 때마다 광주학살의 잔혹함과 슬픔이 다시 찾아오지 않던가?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이처럼 기록은 시간을 관통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자, 기억의 바통이다. 타의적으로 반복되고 흘러가기만 할뿐인 크로노스의 강물 속에서 새로운 영원함을 끄집어내는 방편인 것이다. 어찌됐든 참된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의 모습은, 익사자의 그것과 유사한 부분이 많으므로…….
고로 문학은 시간을 조탁(彫琢)하는 한 방식으로서 정의된다. 이로써 제우스와 므네모시네의 결합은 욕망과 이를 구현해내는 힘의 관계에 대한 유비로 밝혀진다. 그리고 이런 문학적 기록은 권력적 기록 이전에 존재한다. 이런 기록들이 집단의 사업과 결부될 때, 권력적 기록으로 재구성되는 것일 따름이다(그렇지만 권력적 기록 자체가 하나의 인위적인 크로노스를 구성해낸다는 점에서—여기에 반항하는 문학적 기록의 도래는—인간적 필연으로 역사 속에 잠재된다). 기록이 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역으로 권력이 기록의 도구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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