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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의존재(223.33) 2018.05.23 23:19:36
조회 234 추천 0 댓글 1

    “그래서 도박에 실패해서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트럭운전사는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강철 같은 턱에서 솟아나온 도톰한 입술을 씰룩 거릴 때마다 갈색의 시가가 함께 흔들렸지만 신기하게도 아래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운전사의 각진 턱은 검고 짙은 수염 덕분에 위엄이 돋보였고, 우람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성도 듬직한 저음이었다. 관절마다 힘줄이 튀어나온 억센 팔과 두툼한 손으로 운전대를 붙잡고 있지만, 차를 굴리는 동작만큼은 난폭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놀림으로 석탄을 가득 채운 일톤 트럭을 가로등 불빛조차 흔히 보이지 않는 심야에 몰아가고 있었다.  


“저는 그런 결론을 내리고 싶진 않습니다. 물론 도박을 많이 강조하긴 했지만 문제를 외부의 탓이나 남의 탓으로 돌리고 싶진 않아요. 저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은 저 자신이고 그걸 환경 탓으로 돌릴 만큼, 몰염치한 인간이 되고 싶진 않다는 거에요. 제가 그 정도까지 자존심이 없는 남자는 아니거든요. 물론 죽고 나서 자존심이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요.”


“자네는 스스로 책임을 지고 가겠다고 말했지만, 지금까지 내게 해준 이야기중에서 가장 강한 어조가 도박 부분에 들어갔네. 자그마치 열 번이 넘는 욕설과 함께 말이야.”


“저같이 소심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충동적인 행위에 순식간에 아주 깊게 빠져들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요. 정말 조금의 거짓말만 보태서 하룻밤 새에 모든 돈을 다 잃어버렸단 말입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줄곧 내리막길을 달려오곤 있었지만, 카지노장에서 밤을 샌 그 이틀 동안에 정말 먼지 하나 날 것 없이 탈탈 털릴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요.”


“후회하나?”

“당연히 후회스럽죠. 지금 저를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평생 도박이라고는 구경조차 못한 인간이, 그리고 스스로가 나약한 겁쟁이임을 잘 아는 제가 어떻게 단 한순간의 충동에 굴복하여 모든 판돈을 다 걸어버리는 배팅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평범한 사람들, 견디기 힘든 하루하루를 계속 어깨에 짊어져가며 묵묵하게 나아가기만 하는 우리 같은 소시민들이, 이토록 느닷없이 불합리한 고방식과 행동으로 뛰어드는 점에 대해서 아시는 게 조금 있으십니까?”


“이 나이쯤 되면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질릴 만큼 경험해 볼 수밖에 없지. 하지만 주제넘은 충고는 못하겠어. 나란 사람이 타인의 인생에 대해서 왈가왈부 할 수 있을 정도로 떳떳하고 깨끗하게 살아왔다고 자신하기는 힘드니까 말이야. 단지 청년의 사례가 아주 드물고 기이한 것만은 아니라고만 말해주겠네.


몇 년 전에 내가 만난 어떤 청년은 자네만큼 몽상적이었어. 나이도 지금의 자네와 비슷했을 거야. 나서는 짓이라곤 한평생 해본 적 없는 명상에만 어울리는 성격의 친구였는데, 어느 날 밤, 술을 마시던 중 그 청년이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새로운 취미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고 하더군. 숲에 불을 지르는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야. 열 번을 넘게 시도를 하고 있지만 번번이 실패만 거듭하는 중이라 하더군.”


“허허.” 이야기를 듣던 청년이 짧게 탄식을 터뜨렸다. “권태에 찌든 사람이 폭력적인 충동에 이끌리면 참 위험한 법입니다. 그 사람을 지켜주고 있던 신뢰의 끈이 끊어지고, 어떤 내면적인 안전장치가 풀려 버렸단 신호와 다름이 없으니까요. 근본적으로 신경의 회로에 고장이 나버렸다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그래서 그 친구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 날 이후로 다시 본적이 없어. 하지만 나는 그 친구의 열한 번째 시도가 성공을 거뒀다고 믿고 있어. 그것도 너무 크게 성공해서 뒷수습조차 할 수 없게 말이야. 경성 동북부를 가로지르는 어마어마한 산불이 일어난 후로 그 친구가 모습을 감춰버렸거든.”


“아아. 칠년 전에 경성 전체를 휩쓸었던 경모산 화재 사건 말이군요. 정말 세상을 다 태워버릴 것 같이 맹렬하게 불길이 휩쓸고 다녔었잖아요. 그 사건의 실체를 여기서 확인하게 될 줄이야. 하하하하하. 그때 집을 홀라당 태어먹고 거리에 나앉은 사람이 몇이나 되더라.”


조수석에 앉은 청년의 졸렬하고 차가운 조소를 들으면서도 운전사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바라보는 눈매가 더욱 좁아지는 것이 내심 동조의 기미까지 엿보였다. 조수석에 앉은 청년에게서는 트럭운전수 만큼의 당당하고 늠름한 남성미를 찾을 순 없었다. 비록 운전사의 거대한 위엄에 비교하긴 힘들어도 체격자체가 작은 편은 아니었다. 그의 언변은 유창했고, 애써 쾌활한 태도를 지키려 했지만 과장된 손동작과 고저가 급변하는 보이스의 톤 등에서 내면의 불안과 긴장감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비록 세상풍파를 다 겪어본 몰골이긴 했지만 청년의 용모 자체는 꽤 수려한 편이었다. 무엇보다 눈에 돋보이는 것은 부드러운 흑발이었다. 녹색의 사냥꾼 모자 아래로 어깨 위까지 윤기 흐르는 흑발을 늘어뜨렸다. 새까만 눈동자도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규방의 여자들이라면 사뭇 마음이 흔들릴 법도 했다. 하지만 청년의 얼굴에선 지성의 빛이 감돌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무성영화에서나 흔히 볼 법한 머리 나쁜 미남의 고전적 형태를 완벽히 재현해낸 듯한 얼굴이었다.


운전수가 브레이크를 살짝 밟았다. 덜커덩거리면서 쉼 없이 달려온 석탄 트럭의 속력이 조금 늦추어졌다. 저 멀리서 반짝이는 가로등 불빛들의 집합이 보였다. 은색 빛줄기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서 반짝였다. 곧 시내진입로가 나타날 것이라는 신호였다.


“생각할수록 정말 기이한 인연으로 느껴집니다. 하필 죽음의 순간에 선생님에게 구조돼서,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요. 이것은 신께서 저에게 계획하고 있는 운명의 일부분인 걸까요. 아님 그저 기막힌 우연의 일치일 까요. 물론 저는 신을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


청년은 안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의 손과 소매에는 검댕이 잔뜩 묻어있었다.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검댕에 흠뻑 묻혀있었다. 그의 외모를 처량하게 만드는 주원인이 그것이었다.


세 시간 전쯤, 청년은 유서를 작성하다 문구들이 너무 마음에 들어오지 않아 구겨버렸다. 자살을 결심하는 순간까지 살아남은 작가지망생의 자존심이 허수룩한 글을 용서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세상에 남겨놓고 싶은 말이 있긴 했지만, 살아있을 동안에 자신의 말을 들어준 적이 없었던 세상이 죽었다고 해서 귀를 기울여줄 이유는 더욱 없을 듯싶었다. 볼펜을 내려놓고 그는 지갑에 있던 팔십 원의 지폐 중에서 사십 원을 꺼내 화로속에 집어던졌다. 사십원을 남겨둔 이유는 저승길에서 쓸 노잣돈으로 남겨두기 위해서였다. 경성 사람들의 장례문화 전통이 그러했다.


그는 빌라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둥근 달이 떠있는 하늘을 보았다. 장엄하고 아름다웠다. 오늘 따라 더 크고 둥그스름하게 보였다. 북녘별도 유난히 새초롬한 빛을 발산했다. 세계의 아름다움을 이토록 무감동한 순간에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세계가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자신이 받아들여질 수 없단 것을 알기에 세상이 빛나는 것이라고, 그는 결심을 더 굳건하게 했다. 어느새 눈가가 조금 축축해져 있었다. 그는 난간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십사 층의 아래에 있는 대지가 그의 몸에다 남김없이 입맞춤을 해주기를 바라며. 내 몸의 모든 부분을 핏빛으로 물들여줘, 난간을 넘어서는 순간에 그렇게 되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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