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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8. 배라도 타볼까 하고

zkqj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03.15 20:3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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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라도 타볼까 하고 -


*

시장 바닥이 소란스러웠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뱃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불만을 내뱉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일이 커져 버렸다. 가격에 대해 언쟁하던 그들은 끝내 몸싸움까지 벌이고 말았는데 현철은 태평한 표정으로 멀찍이 앉아 술을 마셨다.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뱃사람 중 우두머리 역할을 하던 노인이 현철에게 다가왔다.

“너는 뭐, 병신이냐? 아무렇지도 않아? 응?”

노인은 화풀이하듯 현철의 머리를 툭툭 찔러댔다. 이미 잔뜩 취한 채였다. 몇 사람이 들러붙어 노인을 말렸다. 그들 또한 취해 있었다. 노인은 팔다리를 붙들린 채 말했다.

“계속 일하고 싶거든, 뭐라도 목소릴 내는 게 좋을 거다.”

“다퉈서 뭘 해요? 그런다고 값이 비싸질 것도 아니고.”

노인은 다시 흥분해 욕지거리를 뱉어댔다. 현철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노인은 현철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뒤통수에다 대고 소리를 질러댔다.

해가 떠오를 시각에 맞춰 버스가 도착했다. 현철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눈앞에 해안도로가 펼쳐지자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다를 훑었다. 하늘이 밝아질수록 더욱 빛이 났다. 현철은 일찌감치 버스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바닷바람이 기분 좋게 스쳤다. 현철은 다른 지역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바다를 좋아하듯 그물 당기는 일을 좋아하지도 않았던 데다, 이젠 나이가 들어 몸이 예전 같지도 않았다. 몇 해 전부턴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술 마시는 일 빼고는 딱히 돈 쓸 일도 없었기에 모은 돈은 꽤 되었다. 며칠 전부터는 일도 잘 나가지 않고 있었다. 일할 기분이 아니면 해변을 산책하며 시간을 보냈고, 해가 저물 시간이면 모래사장에 앉아 파도소리를 들었다. 별 다른 계획은 없었지만 곧 떠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편하고 좋았다. 남은 것은 어디로 향하느냐의 문제뿐이었다.

집으로 이어지는 길은 경사가 꽤 있는 언덕이었다. 언덕 끝에 다다른 현철은 숨을 골랐다. 크기가 제각 가인 돌담이 보였다. 돌담은 날렵한 아이들이라면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낮았는데, 실제로 한 개구쟁이 녀석이 담을 뛰어넘다 아래 있던 장독대를 깨 먹은 일이 있었다. 돌담 너머로는 낮은 지붕이 있었고 그만큼이나 낮은 과일나무가 창문을 가리고 있었다. 건물 외벽은 생각보다 두꺼워 창턱엔 온갖 것들이 놓여 있곤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빈 화분이 놓여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현관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홀로 지내는 현철은 도둑들 일도 없겠다 싶어 항상 문을 열어두었는데 그 사실을 안 노파가 하얀 레이스 커튼이며, 경고 표지판 따위를 달아 두었다. 딱 봐도 고집스러운 인상을 지닌 노파는 집을 팔아넘긴 뒤에도 언제부턴가 제 집을 드나들듯 현철의 방에 들어와 이것저것 참견을 해대기 일쑤였다.

현철이 현관에 발을 딛자 아니나 다를까 노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집 좀 치우고 살아, 홀아비 냄새 때문에 숨쉬기도 힘들어. 나이도 어린놈이….”

“화분 하나 있던 거 못 봤어요? 하얀색인데.” 현철이 말했다.

“몰라 나는.”

현철은 마당에 있는 긴 나무 의자에 몸을 눕혔다. 노파는 뭔가를 내려놓고 현관을 지나 돌담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현철은 한 결 편한 자세로 의자에 누웠다. 높은 곳에서 구름이 흘렀다. 눈이 감겼다.

선잠에 든 현철은 이따금씩 꿈을 꿨다. 꿈은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날의 일이 선명해지며 완성되어가자 현철은 발작하듯 몸을 꿈틀댔다. 꿈속의 그녀가 말했다.

‘결혼하고 나면 제주도에 집을 구할 거야. 바다와 가까운 곳에 집을 사서 아침마다 함께 수영을 하는 거야. 아이는 자라면서 수영을 배우겠지. 언젠가는 술도 함께 마실 거고. 그렇게 살면 좋을 거야.’


*


“배 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처음 보는 중년 남자가 어색한 모양새로 서 있었다. 그는 며칠간 잠을 못 잔 듯, 퀭한 눈이었고 멀끔한 양복 차림이었다. 현철은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배 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가 다시 물었다.

“어디 가는 배요?”

“고기 잡는 배 말입니다.”

“어디든 바닷가로 나가면 있을 겁니다.” 현철은 남자를 자세히 보았다. 이따금씩 목돈이 필요한 사람들이 찾아오곤 했지만 그렇기에 남자는 나이가 많아 보였고 주머니 사정이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해안 도로를 따라 터벅터벅 걸어 내려갔다. 현철은 썩 달갑지 않은 심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더 분명해졌다.

“쓸모없는 놈이 들어왔어.”

그날 역시 노인은 취해 있었다.

“그러게 확 쫒아내 버리자니깐”

언제나 노인의 곁에서 그를 떠받들던 이도 불만을 터트렸다. 둘은 현철을 보더니 마침 잘 됐다는 듯, 현철을 불러 세웠다.

“네가 언제 떠난다고 했지?” 노인이 물었다.

“준비만 되면 내일이라도 갈 겁니다.”

“그럼 가기 전에 부탁 하나만 하자.” 노인은 답지 않게 친근한 척을 해댔는데, 이럴 때면 어김없이 곤란한 부탁을 해왔다.

“거 이상한 아저씨가 하나 들어와서 일단 일을 시켜보긴 했는데, 시원치가 않아.”

“그냥 쫒아내 버리면 될 거 아니에요?”

“새파랗게 어린놈이면 모르겠는데, 나이도 지긋한 양반이 저러니 내가 마음이 편치가 않아.”

현철은 아니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고 노인은 생글생글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유지했다. 현철은 어차피 떠날 마당에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지만 괜히 손해 보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미운 정이라는 것이 들었는지 속 시원히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현철은 마지못해 말했다.

“누군데요?”

“저기 있네, 와이셔츠에 장화 신은 사람.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지? 와이셔츠에 장화라고. 무슨 유람선이라도 타러 온 줄 알았다니까.”

노인이 손가락질하는 곳엔 며칠 전 만났던 남자가 있었다. 장화며 방수 앞치마며 제법 작업복을 갖춘 채였는데 모양새가 영 어색했다. 현철은 잠깐 그의 차림새를 살폈다. 다시 보니 속에 입은 와이셔츠 때문이라기보다는 겉에 걸친 다른 것들이 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노인은 현철이 망설이는 것이라 여겼는지, 워낙에 인내심이 없던 사람이기도 했지만, 남자 쪽으로 등을 떠밀어 댔다.

“평소처럼만 해, 응? 내가 시켰다고는 하지 말고.”

현철은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는 듯 이마를 긁적이며 남자 쪽으로 향했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노인은 어서 가보라며 손짓을 했다. 현철은 일부러 걸음을 늦추며 무슨 말을 꺼낼지 생각했다.

남자는 부둣가에 다리를 걸치고 앉아 바다를 보고 있었다. 벗겨진 머리칼이 초라하게 휘날렸다. 현철은 그의 뒤로 다가가 어깨를 툭 건드렸다.

“또 봅니다?”

남자는 미안할 정도로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빠지면 어쩌려고 그러고 있어요?”

현철이 이죽거리며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아, 여기서 일하시나 봐요?” 남자가 반갑게 굴었다.

“진짜 일하러 온 줄은 몰랐는데.”

“저도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어요.” 남자는 다시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사업이라도 거하게 말아 드셨나 봐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내 하나만 말합시다.” 현철은 빨리 해결해버리자는 심산으로 말했다.

“저 노인네들, 당신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요. 내가 몇 년이나 함께 일 해봐서 아는데, 같이 일하기에 좋은 사람들은 아니란 말입니다. 보아하니 돈이 궁해서 온 사람 같지는 않은데 사정이야 어찌 됐든 여기 오래 머물지는 말아요.”

남자가 무어라 말하려 하자 현철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저기 보이는 인상 험악한 노인네가 여기 우두머린데, 양복 입은 사람만 보면 지레 겁부터 먹어서 그렇지 별 볼일 없다 생각되면 바로 본색을 드러낼 거요. 다시 말하지만 같이 일하기 좋은 사람은 아닐 겁니다.”

남자는 대강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금방 떠나지도 않을 것 같았다. 현철은 제 할 일은 끝냈다 싶어 몸을 일으켰고 노인과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


‘이런 젠장 할.’

현철은 잠에 들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였다. 한 통의 부재중 전화 때문이었다. 그날, 서로에게 몹쓸 말은 있는 대로 내뱉어 놓고 연을 끊었다 생각했건만, 이제와 연락이 온 까닭이 무엇일까. 아무리 고민해 봐도 좋은 일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뜬금없이 당신 자식이라며 아들을 데리고 온다거나, 사기라도 당해 빚이 생겼다면 분명 골치 아픈 일일 것이다. 어쩌면 단순히 그 흰색 화분을 돌려받으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 화분은 전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으니까. 현철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미련이 있는 것처럼 비치기는 싫었고, 괜히 전화를 걸었다 별 일이 아니라면 자신만 놀아나는 꼴이니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벽에 걸린 시계가 현철의 눈에 들어왔다. 조금 있으면 그물을 손질하러 갈 시간이었다. 현철은 한숨을 푹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덕분에 전처에 대한 생각일랑 지워졌지만 문젯거리는 또 있었다. 영악한 노인네가 책임지란 식으로 남자를 떠넘겨버린 터라 그가 뱃일을 손에 익힐 때 까지는 고생을 해야만 했다. 애초에 뱃일이란 것이 육지에서의 노동보다 배 이상은 고된 대다, 일하는 시간 자체가 너무 길었다. 한 번 배를 타면 적어도 반나절은 걸리니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그 노인네가 대단한 것이었다. 선장이 될 능력은 또 없어서 수십 년째 선원 일을 해오고 있건만 갈수록 몸이 거대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아픈척하며 남몰래 병원을 찾아가 간호사들의 보살핌을 받는 것을 즐기는 둥 그의 인품은 경멸할만했지만, 현철이 내심 노인네의 말을 따르는 것은 뱃사람으로서 일말의 존경심이 있었던 탓이었다. 성격의 흉측한 점만 없었더라면 좋은 친구사이가 되었을 법도 했다.

버스가 다니지 않는 새벽, 현철은 한참을 걸어 부둣가에 도착했다. 현철은 길게 늘어앉아 그물을 정비하는 사람들 틈에서 남자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희미한 배 조명 아래에서도 그를 찾기란 어렵지 않았는데, 뱃사람 중 하얀 셔츠를 입은 사람은 그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그물의 구멍 난 부분을 붙들고 제 나름대로는 노력하고 있었다. 현철은 그를 지켜보고 있는 노인네에게 눈길을 건네고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은 부분을 먼저 잘라내 어. 매듭 바로 아래까지 바짝.”

“일찍 나오셨네요?”

“덕분에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남자가 씩 웃었다.

“덜렁거리는 부분 깔끔하게 잘라내 어. 잘랐으면 매듭을 풀었다가 새 어망이랑 다시 매듭을 짓고.”

“매듭이 잘 안 풀리네요. 그냥 잘라버리면 안 되나?”

“그랬다가 저 노인네한테 무슨 소릴 들으려고? 지금이야 나한테 지랄을 하겠지만은….”

현철은 남자가 하는 꼴을 지켜보다 노인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결국 남자의 손에서 그물 바늘대와 가위를 뺏어 들었다.

“오늘 한 번만 보여드릴 테니 다음부턴 직접 하세요. 오늘은 그냥, 잘 보기나 하시라고.”

남자는 하품을 쩍 하면서도 현철의 손을 관심 있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말이에요,” 현철이 넌지시 물었다.

“보아하니 돈 때문에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뭣 하러 여기까지 왔어요?”

“아버지가 가보라고 해서요.”

“그 나이 먹고 아직도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만 하시나?”

“유언 같은 거라, 어쩔 수가 없네요.”

“유언 같은 건 또 뭐람. 아니, 어느 아버지가 유언으로 배를 타라고 시켜요? 이런 말하기 미안하지만 고약한 양반이셨나 보네.” 현철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유언은 아니고, 아직 살아계셔요. 대학 갈 나이쯤인가 들었던 말이었던 것 같은데.”

현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그때 한 말을 아직까지 기억이나 하신데요? 나 같으면 당장 달려가서 따졌을 텐데, 재수 없어서라도 그 말 취소해달라고.”

“사실 배를 타란 말까지는 없었는데,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자니 좀이 쑤셔서요. 그 뒤로 별 대화를 해본 적도 없고.”

“그 나이에 뱃일을 배우려면 힘들 텐데.”

“뭐라도 해야죠, 쓸모 있는 어른이 되려면. 아버지도 평생 그걸 원하셨어요. 바다 구경이라도 하라는 건 그냥 하신 말씀일 테고.”

“그런데 그걸 지키러 오셨고.”

“말했잖아요. 유언 같은 거라고.”

현철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거 참.”

현철은 그물을 들어 펼쳐 보였다. 제가 봐도 좋은 솜씨였다. 현철은 그물을 당기며 살펴보다 또 다른 구멍을 발견했고 다시 바늘대를 집었다.

“가족들은 어쩌고? 참, 가족은 있어요? 실례되는 질문인가?”

“괜찮아요. 가족들은 다 의정부에 있어요. 저도 얼마 전 까진 의정부에 있었고.”

“그러다 문득 아버지 유언인지 뭔지가 떠올라서 내려오셨고?”

“문득은 아니고, 정말 그게 유언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요.”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현철이 물었다.

“여든은 넘은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네요. 아직 여든까지는 아닐 수도 있고.”

“와이프는요, 와이프가 가만히 내버려 둡디까?”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았죠.”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여기까지 오셨다?”

“그렇죠.”

현철은 또 한 번 허탈하게 웃었다.

“진짜 이상한 양반이시네.”

그물 손질이 끝나가자 사람들은 분주히 출항 준비를 시작했다. 마침 새벽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배의 조명이 하나 둘 꺼졌다. 바다 표면 또한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현철은 늘어지듯 기지개를 켰다. 남자도 연신 하품을 해댔다.

“오늘 배에 타세요?” 남자가 말했다.

“글쎄요, 노인네가 타라면 타고, 아니면 뭐, 보아하니 당신 고생 좀 시키려는 것 같던데.”

잠시 말이 없던 남자가 물었다.

“다른 곳으로 떠난다고 하시던데, 어디로 가시려고요?”

하품 탓에 눈물이 잔뜩 고인 채로 현철이 말했다.

“서쪽은 갯벌이 많아서 별로고 동해 쪽이 좋을 것 같긴 한데. 글쎄요, 바다가 가까운 곳이면 어디든 좋겠죠. 사방으로 지평선이 보이는 곳이면 더 좋고. 제가 뱃일은 참 싫어하지만은, 바다는 또 좋아하거든요.”

현철이 바다를 바라보자 남자도 현철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수면이 반짝이며 사방으로 주황빛을 반사시켰다. 남자는 조금 인상을 쓴 채 들릴 듯 말 듯 무언가를 읊조렸다.

*


날이 좋지 않았다. 하늘이 어둑어둑 해지더니 조금씩 비가 내렸다. 항상 있던 화분이 사라지니 그 공간으로 비가 들이쳤다. 노인네는 남자를 잔뜩 벼르고 있던 모양인지 쓸모없는 사람 취급하며 현철을 돌려보냈다. 덕분에 현철은 하루가 텅 비었고 할 일도 없던 터라 머릿속은 남자의 생각으로 가득이었다. 지금쯤이면 배 멀미로 잔뜩 고생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쉬울 것 없어 보이는 그가 뭣 하러 사서 고생인지, 아버지의 말은 핑계고 아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리라 현철은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굵어진 빗줄기가 창틀에 부딪혀 튕겨 올랐다. 현철은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화분은 어디로 갔을까. 노파가 자주 드나들긴 했지만 물건이 생겼으면 생겼지 사라진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노파는 현철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집안에 드나들 때에도 전처의 물건엔, 남은 물건이라 해도 화분 하나뿐이었지만, 얼씬도 하지 않았다. 현철 또한 화분을 치운 기억은 없으니 도무지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현철은 휴대폰을 집어 들어 통화목록을 들여다보았다. 만약 그녀가 화분을 돌려받기 위해 전화를 건 것이라면, 그건 문제였다. 사라졌다고 솔직히 말한다 해도 치졸한 거짓말로 받아들여질 게 뻔했다. 아예 뻔뻔하게 구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제와 악감정일랑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녀는 모르는 일이고 어찌할 수도 없을 테니까. 현철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어댔다. 이러나저러나 골칫거리가 될 테니 찾아두는 것이 아무래도 좋았다.

전처는 유독 그 하얀 화분을 애지중지했다. 여러 화분을 기르면서도 가장 아끼는 꽃은 하얀 화분에 담았었다. 얼핏 기억하기로는 장모가 결혼 기념으로 선물해준 것이었다.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것을 정작 떠나는 날에 두고 갔으니 현철이 이혼 후 꽤나 오랫동안 화분에 의미를 부여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버린 것도 최근이었는데 부재중 전화 한 통에 다시 심란해지고 만 것이다. 전처는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언가에 실망해 버렸고, 아직 어렸던 딸과 함께 현철을 떠났다. 그것은 평생을 뱃사람으로 지내온 현철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현철은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화분에 발이 달렸을 리도 없고 어딘가에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참을 찾아도 화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현철은 찾기를 포기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동네 아이들이 가져갔으리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아이들이 화분을 가져가서 무얼 하겠는가. 현철은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손가락이 버튼으로 향했다.

“비가 들이치는데 창문도 안 닫고 뭐해?”

노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철은 화들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노파는 성이나 씩씩대며 현관에 서 있었다. 한 손엔 우산을, 한 손엔 반찬거리가 담긴 봉투를 든 채로.

“놀랐네.”

노파는 젖은 우산을 홱 집어던졌다.

“맨날 오는데, 놀라기는…. 여자라도 숨겨놨어?”

“다 아시면서 그러시네.” 현철이 툴툴거리자 노파가 으르렁댔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래? 평생 혼자 살 거야?”

“어머니 소리가 듣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불러 드릴게요.”

그러자 노파는 정말 어머니라도 된 것처럼 잔소리를 시작했다.

“그리 늦은 나이도 아니니까 빨리 다른 여자 만나서 결혼하든가 해. 지금처럼 백날 빈둥거리기만 하면 아무도 너한테 시집 안 온다. 능력 없는 남자는 인기 없어.”

“전처는 이런 날 좋아했는걸요.”

“그럼 왜 전처가 됐느냐고, 응?”

현철은 안 들리는 체하며 봉투를 뒤적였다. 반찬 통 위에는 편지가 한 통 놓여 있었다. 딸에게서 온 편지였다. 노파가 현철을 쏘아보며 말했다.

“나이 먹고 혼자 사는 것만큼 서러운 게 또 없다. 날 좀 봐라. 내가 시간이 남아돌아서 여길 찾아오는 줄 알아? 말동무라도 삼으려고 오는 거지.”

“반찬은 잘 먹을게요.”

노파는 혀를 차며 몇 마디 더 중얼대더니 우산을 펼쳐 들었다. 그러더니 마지못해 말했다.

“다시 연락을 해보든가.”

현철은 능청맞게 손을 흔들었다.

“잘 먹을게요.”

현철은 노파가 떠난 것을 확인하고 편지를 열어보았다. 편지에 그립다거나 하는 말은 없었다. 그저 오랜 친구에게 안부를 묻듯, 일상적이고 덤덤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현철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현철은 탁자 아래에서 겨우 펜을 찾아내 답장을 썼다. 그 첫 문장은 이러했다.

‘내 주소는 어떻게 알았니?’

*


배가 돌아오는 시각에 맞춰 현철은 부둣가로 향했다. 멀리서 조명이 반짝였다. 사람들의 머리가 하나씩 보이고, 조금 더 다가오자 얼굴이 보였다. 현철은 남자를 찾았다. 그는 배 한쪽 구석에 주저앉아 그물을 붙들고 있었다. 표정은 예상대로 일그러져있었다. 배가 항구에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지만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느지막이 배에서 내린 노인은 전투에서 돌아온 남자처럼 기고만장한 얼굴이었다. 현철은 남자를 찾아 배에 올라탔다. 파도 탓에 정박된 배가 많이 흔들렸다. 남자는 여전히 한쪽 구석에 앉아 그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안 내릴 거예요?” 현철이 물었다.

남자는 꾸중을 들은 아이처럼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힘들죠? 저 노인네가 대단한 거라니깐.”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현철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립시다. 가자고요. 내려서 술이나 한 잔 해요.”

“매듭이 풀리질 않아요,” 남자가 말했다. 바늘대를 쥔 손이 잔뜩 불어 터져 있었다.

“내가 다시 알려줄게요. 내려요 일단, 그러다 감기 걸려.”

현철이 바늘대를 빼앗자 남자는 그물을 쥔 손에 힘을 주고 놓지 않으려 했다.

“그만하고 일어나요. 정 안되면 잘라버리면 되니까.”

“그러다 혼나면 어쩌려고요.” 현철의 말에도 남자는 고집을 부렸다.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자 현철은 남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남자는 현철의 등에 업히듯 배에서 내려왔다. 다리에 힘도 풀려버린 듯싶었다. 남자는 몸을 떨었다. 온몸이 젖어 있었다. 현철은 외투를 벗어 남자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여기 도대체 뭣 하러 온 거예요?”

남자가 느리게 말했다.

“배라도 타볼까 하고 왔지요.”

“거 정말,”

현철은 택시를 잡아 남자를 숙소까지 데려다주고 침대에 눕혔다. 그는 여전히 몸을 떨었다. 당분간은 바다 근처에도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남자는 순식간에 잠에 들었다. 현철은 젖은 외투를 챙기려다 의자 위에 그대로 걸쳐두었다. 나중에라도 그가 일어나거든 다시 만날 구실이 필요했고 만나게 된다면, 왜 지금껏 묻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자식이 있는지를 물을 참이었다.

숙소 밖으로 나오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시 택시를 부르려 휴대폰을 들자 진동이 울렸다. 전처였다.

현철은 휴대폰 화면의 익숙한 번호를 바라보았다. 진동은 한참이나 울리다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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