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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회 엽편경연] 저편에서

선생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8.01.28 04:26:14
조회 107 추천 0 댓글 6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건물들 사이를 헤치는 바람이 차가워 나는 코트를 꽉 여몄다. 땅거미가 지는 시간에는 전차를 타기 싫었다. 같은 방을 쓰는 L에게 전화를 걸어 집까지 태워 달라 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국인으로 가득한 역에서 나는 우편엽서를 샀다. 엽서 뒷면에는 바게뜨를 품에 안은 남자가 거리를 걷고 있었다. 거리의 노천 까페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 남자의 바게뜨에 눈이 갔다. 방에 들어가면 저녁부터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차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파리 도심의 어느 발음도 어려운 역은 한 달이 지나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간판을 보고서야 다른 사람들의 뒤를 따라 내렸다. 뒤늦은 음성메시지로 L은 밖에서 저녁을 먹는다고 했다. 혼자 뭘 해먹기도 궁상맞아 돌아오는 길에 빵집에 들렀다. 나는 빵집에서 작은 바게뜨를 사 엽서의 남자처럼 안았다. 빵집 여자는 낮에 구워낸 바게뜨만큼 맛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맛있다고 했다. 방에 돌아와 씹은 바게뜨는 속까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바게뜨는 먹을 수 없을 것 같아 냉장고를 열었다. 며칠 전에 L과 함께 한국 식료품점에서 사온 두부와 채소들이 조금 남아 있었다. 냉장고 구석에 있는 된장종지가 눈에 찼다. 한국 생각이 불현듯 나 이것저것 꺼냈다. 도마에 두부, 감자, 호박, 고추 등을 들쭉날쭉한 크기로 썰었다. 요리는 여전히 서툴렀다. 물에 된장을 풀고 숟가락으로 천천히 휘저었다. 이러고 있으니 한국에 있는 것 같았다.


 서울에 있을 때 K는 내 자취방에서 밥을 해 먹는 것을 좋아했다. 변변찮은 밥상이어도 K는 그저 꿀맛이라고 했다. 집에서 보내주는 김치와 멸치 따위의 건어물 따위만 있어도 밥을 한 고봉은 족히 비웠다. 가끔 K가 내 방에서 자고 가는 날이면 아침 식탁에는 K가 끊인 된장찌개가 올랐다. 나는 전기밥솥의 취사 버튼만 누를 줄 알았다. 자취생들은 기본이라는 흔한 계란도 형편없었다. 헤어지던 날에도 K는 그러다간 외국 나가서도 굶어죽기 십상이라며 웃었다. 나는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물은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나는 도마 위에 썰어놓은 채소를 조심스레 넣었다. 개어놓은 된장을 넣고 조금 지나자 구수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팔팔 끓어오르기 시작한 된장찌개를 보니 K가 끓였던 된장찌개보다 참 못 끓였다 생각이 났다. 누군가 문을 시끄럽게 두드렸다.

 문 밖에는 건물 주인인 여자와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 몇 명이 서 있었다. 사람들은 코를 싸쥐고 내 방 안을 기웃거리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무슨 일인지 몰라 짧은 프랑스어로 물었더니 집 주인 여자는 내게 빠르게 쏘아댔다. 하필이면 L도 자리를 비웠을 때라 나는 그녀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다. 점점 커지는 그들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옆집에 사는 금발의 여자가 내게 삿대질을 했다. 그들은 내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참을 떠들다가 돌아갔다. 문이 탁 닫혔다.

 혼란스러웠다. 나는 갑자기 울음이 났다. 서러웠다. 서러워서 엉엉 울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현관에 주저앉아 울었다. 저편에서 된장찌개가 끓어 넘치는 소리가 났다.



<끝>



쓰면서 배가 어찌나 고프던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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