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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덕 상플) 사막 3 (12금?)

바람의온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8.06.29 23:28:49
조회 2658 추천 55 댓글 12

 즉위식이 끝난 후 이윽고 왕으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논공행상을 하고 새로운 조직을 신설하고 더 나은 정책을 마련하기 위한 지리한 회의와 연구가 계속되었다. 그 와중 덕만은 비담을 자신의 칼로 삼았다. 사량부령으로 처음 마주한 비담의 모습은 낯설고도 매혹적이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올리고 검은 비단옷으로 몸을 감싼 채 궁궐을 활보하는 모습이 날렵하고 고고했다. 비담공이 원래 저렇게 멋진 사내였나, 수군대는 유화들의 목소리가 가끔 들려왔다. 관리들을 감찰하고 새로운 정책을 입안해 올리느라 비담은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그 밤을 잊은 듯도 보였다. 기다리겠다는 말도 희미해진 듯 보였다. 밀려드는 일과 잘해내야한다는 중압감 속에 두어 시간 쪽잠으로 매일을 보내는 덕만이지만, 침상에 누워 잠들기 전 몇 분의 시간 동안 그 밤의 일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기다리겠다던 그의 약조는, 어디로 흘러갔을까.



 즉위한 100일쯤이 지나고 나자, 정국은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안정되어 갔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체계와 기틀도 어느 정도 갖춰졌다. 급한 불은 껐구나, 덕만은 비로소 얕은 숨을 쉬었다. 100일 동안 제대로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시위부령 알천이 제발 눈을 붙이시라고 며칠을 사정한 끝에, 덕만은 비로소 오늘 일찍 정무를 마치고 인강전에 들었다. 그렇다고 쉬이 잠이 오지는 않았다. 하릴없이 서성이다가 덕만은 방문을 나섰다.



 - 잠시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 침수 드시지 않고 어디에 가십니까, 폐하?

 - 미실의 방에 가려 합니다.

 - 그곳은 어찌 가려 하십니까?

 - ....... 그곳만큼 온전히 과거인 곳이 또 있습니까.



 탄식이 섞인 듯한 여왕의 목소리에 알천이 한 발 물러섰다. 시위부령과 몇몇 궁녀들만이 덕만을 따랐다. 미실의 방으로 향하는 덕만의 발걸음은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100일 전과 똑같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 구석에 비담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지, 라고 생각할 무렵. 방 한 구석의 비밀 문이 삐걱 열리더니 검은 인영이 나타났다. 거짓말처럼 비담이 거기에 있었다.



 - ...... 어찌 여기 있는 것이냐.

 - 기다리겠다고 하지 않았사옵니까.

 - 매일 밤 이곳에 왔단 말이냐?

 - 예, 폐하.

 - 직무유기로구나. 사량부령이 제 할 일은 안 하고 엉뚱한 곳에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니.

 - 폐하께 올린 서안 대부분이 이곳에서 작성된 것입니다. 직무유기라니 당치 않습니다.



 비담이 억울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덕만에게 다가섰다. 바깥 시절 혹은 화랑 시절 보았던 소년의 얼굴의 설핏 겹쳐졌다. 기다리겠다던 그의 약조가 매일 밤 이어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와보았던 것뿐인데. 이렇게 단단한 그의 약조 앞에 나는 무엇을 주었던가, 덕만은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먼저 팔을 뻗어 상대를 안아든 것은 덕만이었다. 키 차이 때문에 비담에게 안긴 꼴이 되었지만, 그래도 제 연모가 먼저라는 듯 덕만은 비담의 등을 도닥여주었다.



 - 예전에는 너에게서 숲 내음, 연한 피 내음이 나곤 했는데. 지금은 먹 내음이 배었구나.

 - 싫으셨습니까, 피 내음이 나던 게.

 - 아니다. 검을 들고 사람을 베던 것도 너고, 붓을 들고 사람을 흔드는 것도 다 너다. 더 좋고 싫고가 무에 있어.

 - ...... 황공하옵니다, 폐하.



 덕만의 목소리가 비담의 가슴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덕만의 목소리에, 살 내음에, 따스한 손길에 비담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간절한 마음으로 매일 이곳에 왔지만 정말로 여왕이 이곳을 찾아주리라는 기대는 거의 없었다. 이것이 단순한 방문인지 혹은 무언의 허락인지, 늘 거부당하며 살아온 비담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촉.



 덕만의 입술이 비담의 입술을 가볍게 훔쳤다. 비담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덕만이 눈을 흘기며 입을 열었다.



 - 어찌 아무 말도 없느냐. 

 - ...... ?

 - 신국의 일 앞에서는 못 하는 말이 없더니. 어찌 갑자기 이리 말을 잃은 게야.



 정세와 판세와 사람에 관한 일이라면 무서울 것도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이치를 따지고 들면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연정 앞에서는, 게다가 덕만과 이런 행동 앞에서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덕만의 몸에 팔을 두르지도 내리지도 못한 채 비담은 주춤거렸다.



 - 내일은 즉위식이 아니란 말이다.

 - .......

 - 내가 어디까지 말해줘야 하는 것이냐?



 덕만의 눈매는 찡그려졌지만 입매는 살포시 올라가고 있었다. 그 미소가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었던 듯, 얼어있던 비담의 몸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아까 나왔던 비밀의 문을 빠르게 열더니, 덕만을 빨아들이듯 그곳으로 데려갔다. 한 손으로는 덕만의 머리와 뒷목과 등을 성급히 쓰다듬어 내려가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단단히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 밤처럼 뜨겁게 입술이 입술을 찾아들었다. 달빛도 불빛도 없는 컴컴한 어둠 속에서, 성마르고 달 뜬 두 사람의 숨소리와 옷자락 사르륵거리는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비담의 손길이 닿는 자리마다 화르르 불꽃이 일었다. 입술이 닿는 자리마다 붉은 꽃잎이 내려앉았다. , 신국, 대업 이런 것들의 무게가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소년과 소녀, 사내와 여인이 한데 얽혀들며 수줍은 연정을 내보였다. 둘 다 모든 것이 처음이니 능수능란하지는 못했으나, 이보다 더 솔직하고 뜨거울 수 없는 몸이었다. 검고도 깊은 비담의 몸이 새하얗게 환한 덕만의 몸으로 감겨들었다. 때로는 사냥하듯 때로는 악기를 연주하듯 비담은 덕만의 몸을 넘나들었다. 덕만도 맹수에 물린 사냥감처럼 혹은 고운 악기 선율처럼 신음했다. 사내와 여인의 시간은 지금껏 한 번도 드러나지 못했던 서로의 맨얼굴을 보게 해주었다. 섬세하고 유연한 비담의 몸짓도, 뜨겁고 교태로운 덕만의 음성도 모두 상상 외의 것이었다.



 비담의 아래에서 덕만은 몇 번이고 사막의 별밤을 보았다. 그리고 덕만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사막으로 들어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이미 이 사내를 벗어날 수 없었음을. 이 사내야말로 사막의 밤 그 자체였다. 사막의 밤은 춥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을 빼곡히 덮고 있는 별들의 노래로 가득하다는 것을. 눈부시게 찬란한, 그래서 애달프고 그래서 속절없는 사막의 별밤이 덕만 앞에 아득하게 펼쳐졌다. 눈앞이 하얘졌다가 어두워졌다가 하면서 자꾸만 까무룩해지는 것이었다.



 - ...... 새주가 은인이로구나. 너를 내게 보내주고, 이 방까지 허락해주었으니 말이다.

 - 그렇게라도 못한 어머니 노릇 좀 하시라지요.

 - 비담.

 - 예, 폐하.

 - 지금 내가 약속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항상 기다리는 자, 그게 네가 될 거야.

 - 예, 폐하. 알고 있습니다.

 - 그리 아무렇게 대답하지 마. 투정이라도 부리란 말이다.

 - 덕만아.

 - ...... ?

 - 너는 네 일을 하면 돼. 나는 내 일을 하면 되고. 기다리는 것은 내 일이야. 너는 길 잃지 말고 오기만 하면 돼.



 덕만은 이상 대답하지 않고 비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맨살과 맨살이 닿는 느낌이 비할 데 없이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좀 더 일찍 네 마음을 보아줄 걸, 아니 좀 더 일찍 내 마음을 보아줄 걸. 비록 입을 열어 말로 약조해 줄 수는 없지만 덕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비담을 매번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자신이 먼저 사막의 밤을 찾아오리라는 것을.



 그 후로 여왕은 그믐날이 되면 미실의 방을 찾아들곤 했다. 시위부령은 여왕이 그곳에서 온전히 과거의 시간을 음미하고 있다고 여겼겠지만, 실상 여왕이 만끽한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현재,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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