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썼던 봄밤 후속편이야.
https://gall.dcinside.com/seonduk/381967나는 상상력이 부족하여
딱 요런 분위기의 비덕만 계속 파게 됨.
후아 정말 미치게 더워서 녹아버릴 거 같은데
다들 건강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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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처소로 돌아가는 길, 비담은 저 자신이 걸어가는지 뛰어가는지 혹은 날아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발이 제 발이 아닌 것 같았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음이 배어나왔다. 온몸의 신경은 오직 공주의 손을 쥐고 있는 제 왼손에만 쏠려 있었다.
공주의 고운 얼굴과 몸에 비한다면 조금은 거친 손이었다. 자유롭게 손을 쓰던 사막 시절, 고된 훈련과 전쟁을 견뎌야 했던 낭도 시절이 그 손 안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덕만의 엄지 손가락에 배긴 굳은살을 매만지며 비담은 결심했다. 다시는 당신의 손에 거친 것을 쥐어주지 않겠노라고, 내가 당신의 지팡이이자 검이 되어주겠노라고. 그 밤 비담은, 덕만의 무엇이든 되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처소가 가까워져오자 덕만이 슬몃 손을 빼냈다. 스르르 빠져나가는 흰 손을 비담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덕만의 얼굴에도 아쉬운 마음이 고스란히 머물고 있었다. 어느 쪽도 서로를 쉬이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청춘의 한가운데에서 휩쓸린 첫 연정이 오죽 애틋할까. 한밤의 소쩍새 소리가 더 서글프게 들려왔다.
- 한참을 다시 가야겠구나.
- 오는 길은 순식간이었는데. 혼자 돌아가는 길은 좀 멀 것 같습니다.
- 이걸 들고 가.
덕만이 제 머리장식을 하나 빼 비담에게 건네주었다. 눈에 초록 구슬이 박힌 작은 새 모양의 옥 장식이었다. 달빛에 반짝이는 장신구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짐작한 비담이 머뭇거리자, 덕만이 비담의 손을 끌어당겨 머리 장식을 쥐어주었다. 연녹색의 작은 새가 빛나는 녹색 눈으로 비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품으로 날아온 작은 새, 바로 덕만이었다. 비담이 덕만의 손등에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자, 덕만이 살포시 몸을 돌려 처소로 들어갔다. 산채로 돌아가는 내내 비담은 그 새를 얼마나 꼭 쥐고 뛰었는지 모른다. 아무에게도 주지 않아, 아무데도 날려보내지 않아.
*
다시 오겠다던 공주의 약속은 금세 이루어지지 못했다. 귀족들의 매점매석 때문에 곡물 가격이 폭등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흉년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었으나 누구도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손놓고 있던 일이었다. 당황한 것도 잠시, 사막의 상단 틈에서 자란 덕만은 허를 찌르는 방편을 내놓았다. 황실이 군량미를 풀어 장사를 한다? 가격을 안정시키고 자영농을 지켜주는 것 뿐 아니라 실제로 황실이 이윤을 취한다? 미실의 세력도 심지어 황실과 덕만의 세력들마저도 경악할만한 일이었다. 오직 비담만이 이전 첨성대 사건 때처럼 씨익 웃으며 소리쳤다. 역시 공주님 천재야 천재!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비담은 덕만과 염종 상단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군량미를 더 풀 거라는 소문에 귀족들이 곡물을 버리듯 내다 팔며 하루가 다르게 가격이 떨어졌지만, 비담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였다. 시장과 귀족들의 집과 염종의 상단을 직접 오가며 곡물가를 확인하고 동태를 살폈다. 화랑복을 벗고 자유로이 바깥 세상을 쏘다니는 것이 훨씬 더 비담의 성정에 맞았다.
하지만 자꾸만 밖으로 도는 것이 꼭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차라리 정신없이 바쁜 것이 나았다. 밤이 되어 혼자가 되면, 그 보름달밤의 입맞춤이 문득문득 떠올라 열기가 치솟았다. 시간이 지나도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되려 생생해지는 기억. 찬물로 세수를 너댓번 하고 나서야 비담은 비로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꿈속에서 만나고 싶다, 아니 차라리 만나고 싶지 않다 서로 반대편의 마음이 잠들 때마다 치열하게 싸웠다.
평온이 찾아오던 어느 저녁, 비담은 홀로 염종 상단을 찾았다. 염종은 문을 등지고 고개를 숙인채 장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문에 기대어 선 비담이 낮은 목소리로 염종을 불렀다.
- 야.
- 아우씨 깜짝이야! 야! 기척 좀 해 제발! 넌 발이 땅에 안 붙냐? 왜? 또? 뭐?
- ......너네 상단에 여인네 장신구들 좀 있냐?
- 장신구? ...... 왜, 너 공주님 드리게?
- ...... 아 그게.
- 야 공주님은 황실 물건 최고급으로 다 가지고 계실텐데. 네 안목으로 뭘 고른다 그러냐.
- 그러니까 좋은 걸로 보여달라고. 너네 상단에 귀한 거 많을 거 아냐.
비담이 눈을 부라리자 염종은 궁시렁거리며 창고 열쇠를 들고 앞장섰다. 염종 상단의 창고에는 과연 없는 것이 없었다. 진귀한 그림에 문구에 구슬에 면경에 동물에 화초에...... 산으로 들로만 내다니던 비담의 눈에도 고아하고 휘황한 것들이었다. 염종은 몇 개의 방을 슥슥 지나더니 한 방에 이르러 구석에 놓인 장의 경첩 몇 개를 열었다. 보통의 여인네라면 어쩔 줄 몰라할, 그 눈 높은 춘추라도 만족시킬 법한 아리따운 장신구들이 눈 앞에 쭉 펼쳐졌다.
- 이쪽 건 당나라 최신 유행이고. 이쪽 건 서역에서 건너온 거고. 이쪽 건 유행은 조금 지났지만 여전히 인기가 좋아. 그리고...
염종이 물건들을 하나씩 보여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굳이 듣지 않아도 머리장식, 목걸이, 팔찌, 반지, 면경, 무엇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었다. 비담은 염종의 말을 듣는둥마는둥 하며 물건들 사이로 시선을 옮겼다. 일순간 그의 눈을 사로 잡은 건 옥을 깎아 만든 나무 모양의 머리 장식이었다. 하얗게 빛나는 작은 구슬이 알알이 박혀, 복숭아 열매가 맺힌 듯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듯도 했다.
- 그건 너무 수수하지 않냐? 골라도 뭐 그런 걸.
- 어차피 이 중에 공주님보다 고운 건 없어.
- 허, 이런 미친.
염종은 못 들은 걸 들었다는 양 몸을 부르르 떨며 다른 경첩들을 탁 탁 닫았다. 비담은 제 손에 든 옥 장식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맑고 단단하고 정갈한 모양새, 은은하고 기품 있는 광채가 덕만을 꼭 닮아 있었다. 언제쯤 이걸 건네줄 수 있을까. 산채에 정말로 오시긴 할까. 그냥 처소에 보고 드리러 가는 김에 드려야 할까. 장난처럼 툭 건네야할까 진심을 다해 드려야 할까.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비담은 품에 장신구를 챙기며 몸을 돌렸다.
- 나 간다.
- 야! 값도 안 치르고 그냥 가냐? 수수해 보여도 그게 얼마짜린데!
- 니 목숨값보다 비싼가보지?
- ...... 저 말하는 본새하고는. 가라 가! 제발 한동안 좀 오지마!
비담은 씨익 입꼬리를 올리더니 손을 확 치켜올렸다. 움찔한 염종이 몸을 수그리자 비담은 킥 웃으며 창고를 빠져나갔다. 비담이 완전히 간 것을 확인한 염종이 한참 욕을 퍼붓던 끝에 중얼거렸다.
- 공주에게 마음 줘봐야 지 손해지. 저거저거 검귀인 줄 알았더니 한참 모지리네.
*
두번이나 달이 지고 차며 다시 찾아온 보름밤은 제법 여름의 기운이 느껴졌다. 산채에서 홀로 수련을 마친 비담은 찬물로 대충 땀을 씻어내고 단촐한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품고 있던 머리 장식 두 개를 꺼내어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으니, 두 달 전의 일이 꿈처럼만 느껴졌다. 그 밤의 입맞춤이 공주님에게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새와 나무, 나무와 새. 비담은 자신이 받은 것과 주고자 하는 것 둘 다를 침상 옆 협탁 서랍에 고이 넣어 두었다.
잠을 청하려 침상에 앉았을 때, 산채 밖 멀리서부터 자박자박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공주님이다. 분명 공주님의 발자국 소리다. 비담은 벌떡 일어나 산채 밖으로 향했다.
소리가 나는 저 멀리서 용화향도 낭도복을 입은 사람이 걸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낭도? 아니다. 공주님이 분명하다! 비담은 미친듯 뛰어내려가 그대로 덕만에게 온 몸을 겹치며 입을 맞추었다. 완력에 밀린 덕만이 휘청거리며 서너발 물러섰지만, 비담이 두 팔로 덕만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가녀린 공주의 허리가 한껏 뒤로 휘어졌다.
한참의 열렬한 입맞춤 끝에 비담이 간신히 입술을 떼어내었다. 열기로 일렁이는 두 쌍의 눈이 서로를 빤히 응시했다. 덕만의 동그마한 얼굴에 한참을 머물던 비담의 시선이 그제야 아래로 향했다. 비담은 의아한 눈으로 덕만을 훑어보았다. 뭘 입어도 고운 태를 숨길 수야 없었지만, 덕만이 갑작스레 낭도복을 입고 온 연유가 궁금했다. 비담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덕만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오랜만에 입어봤는데. 이상해?
- 그럴리가요 공주님. 여전히 고우십니다.
- 비담.
- 예 공주님.
- 아니. 비담.
장난기 어린 얼굴로 덕만이 재차 비담의 이름을 불렀다. 비담 두 글자에 실린 단단한 무게가 한껏 덜어진 가벼운 목소리였다. 비담은 그제야 덕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공주와 화랑이 아닌, 처음 만나 동무처럼 자유로이 서로를 불렀던 그 시절이 제 앞에 펼쳐졌다. 비담의 얼굴에도 삐뚜름한 웃음이 걸렸다.
- ...... 왜?
- 너 정말 이 차림에도 한눈에 반한 거 맞아?
- 응. 그런데.....
- 그런데?
- 지금은 그 속이 더 좋아.
- 비담!
능청스러운 비담의 대꾸에 덕만이 얼굴을 붉혔다. 비담은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덕만을 안아올려 산채로 들어갔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리는듯 하더니 이내 적막이 찾아들었다. 가끔씩 여인의 떨리는 교성과 사내의 단단한 신음이 새어나올뿐이었다. 단촐한 살림살이의 산채는 궁의 어느 전각보다 귀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처음은 서툴지 몰라도 한번 두번 덕만을 안으며 비담은 금세 그녀의 몸에 눈을 떴다. 사실 못하는 것이 없는 사내였다. 여체만큼이나 예민하고 섬세한 것이 검과 활 아니던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덕만을 전율하게 만든 후에야 비담은 제 욕망을 덕만에게 밀어 넣었다. 비담 못지 않게 덕만도 열정을 아는 여인이었다. 몇번의 전투를 치른듯 소진된 덕만은 비담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나른하게 풀어져 있었다. 비담은 덕만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어 천천히 빗어내렸다.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이 두 사람을 한 데로 엮어주었다.
갑자기 비담이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몸을 일으켰다. 침상 옆 서랍을 열더니 무언가를 꺼내 손에 쥐었다. 대번에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하는 모습이 비담답지 않아, 덕만은 웃음이 났다.
- 뭔데 그래.
- 이런 거 골라본 적이 없어서.... 마음에 들어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비담이 긴장한 얼굴로 존대를 하자 덕만도 자세를 고쳐 앉았다. 머리를 풀어헤친 채 이불로 가슴께를 가리고 앉은 모습이 고혹적이었지만, 또한 더없이 꼿꼿한 공주의 자태이기도 했다. 쭈삣거리며 내민 비담의 손에는 나무 모양의 옥 장식 하나가 들려 있었다.
- 지난번 내가 준 머리 장식 대신인 것이냐.
- 공주님이 새처럼 제게 오셨으니, 저는 새가 쉬어갈 수 있는 나무가 되어드리겠습니다. 그런 사내가 되고 싶습니다.
- ...... 비담.
- 예 공주님.
- 어디 가지마. 흔들리지마. 뿌리가 깊은 나무여야 해.
- 예 그리하겠습니다.
작은 새가 다시 나무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단오날 시냇물처럼 싱그러운 여인의 체향과 버려진 원시림처럼 짙은 사내의 체향이 한 데 섞여들면서 산채의 초여름밤이 깊어 갔다. 단 둘만 들어 갈 수 있는, 지도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깊고 은밀한 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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