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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a closed door 4

^^(115.140) 2014.02.09 23:57:09
조회 7313 추천 180 댓글 23

 

 


  홀 안에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엘사의 시선은 조심스레 노파를 훑어내리고 있었다. 만면에 푸근한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는 노인은 그야말로 친절하고 따뜻한 할머니 표본 그 자체였다. 울라프가 좋아하는 따뜻한 포옹을 맘껏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엘사는 저도 모르게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았던 경계심이 녹아 내림을 느꼈다. -물론이죠. 편히 쉬다 가세요. 엘사가 말했다. -정말 고마우이. 노파의 미소가 한층 밝아졌다. 왜인지 모르게 한 층 더 기분이 좋아진 듯한 울라프는 노파의 주위를 깡총거리며 뛰어다니기 바빴다.


  "울라프, 이 분께 침실을 안내해 드리겠니?"


  -문제 없어요! 엘사의 부탁이 끝나기가 무섭게 울라프가 답했다. 자신에게 다시 한 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채 멀어져 가는 노파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엘사는 이내 자신도 발걸음을 옮겼다. 노곤한 피로가 그녀의 몸을 무겁게 감싸왔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이런 성을 만들다니 아가씨의 실력이 보통은 아닐세 그려. 문득 어렴풋히 노파의 칭찬이 들려왔다. 

 


            

 


  엘사! 엘사!

 

  -누구지? 흐릿한 의식 속에서 엘사는 생각했다. -엘사! 잠깐만 멈춰 봐! 다시금 자신을 불러오는 앳된 목소리에 엘사는 숨을 멈췄다. 안나, 안나였다. 그녀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서 어린 안나가 두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자신을 향해 달려 오고 있었다. 엘사는 그녀가 자신의 앞에 다다를 때까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 좀 봐. 밖에 눈이 왔어!

 

  안나가 말했다. 빨갛게 얼어붙은 아이의 두 손엔 조그마한 울라프가 어설픈 모양새로 웃고 있었다. 그것을 들고 있는 본인의 입가에도 어설픈 미소가 서려있었다. 아이는 대체 무엇을 바라는 건지 모를 기대감으로 절박하리만치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안쓰러웠다. 그리고 사랑스러웠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북받쳐오는 여러가지 감정은 엘사의 얼굴에 소리없는 미소를 떠올렸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 안나. 그런 쓸데없는 일로 날 불러 세운거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었다.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튀어나간 말에 엘사는 기겁했다. 아이의 티없이 맑은 눈동자가 서서히 젖어갔다. -아니야. 아니야, 안나. 엘사는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구멍에서만 맴돌 뿐인 마음의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니, 나랑 같이 눈사람 만들자.

 

  눈 앞의 아이는 말했다. 아이의 자그마한 손에 들려있는 눈사람은 얼마 안 남은 체온마저 뺏어가며 서서히 녹아가고 있었다.

 

  꼭 눈사람이 아니어도 돼. 언니가 하고 싶은게 뭐든 언니가 원하는 데로 할께.

 

  울음을 참으려는 듯 붉은 머리의 아이는 입술을 악물었다. -아. 엘사는 작은 탄식을 속으로 삼켰다. 행여 상처가 나지 않을까 걱정됐다. 숨이 막힐 정도로 꽉 안아주어 아이를 달래주고 싶었다. 하지만 온 몸이 마비라도 된 듯, 그녀의 쓸모없는 몸뚱아리는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러니 제발 나와 함께 있어줘…. 이제 문을 닫지 마….

 

  결국 아이의 볼에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울지 마렴, 귀여운 내 동생. 이 언니는 널 너무나 사랑한단다. 엘사는 외쳤다. 가슴이 터지도록 외쳤다. 하지만 그 소리없는 절규는 끝내 훌쩍이는 아이에게 닿지 못했다. 엘사는 아이의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더 없이 차갑고, 더 없이 울적한 어린 날의 자신을. 그녀는, 자신은 그렇게 동생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안 돼. 이대로 떠나지마! 엘사는 스스로에게 외쳤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아득히 등 뒤의 훌쩍임이 멀어져갔다.

 

  문득 무언가 철퍽이는 소리가 났다. 그때 처음으로 엘사는 자신의 의지대로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안나의 손에서 이미 반쯤 녹아있던 작은 울라프는, 바닥에 떨어져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저런, 악몽을 꿨나?"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엘사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두 눈에선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자신의 상태를 파악할 틈도 없이 엘사는 코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노파를 마주해야 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지? 지극히 자연스런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 챈 것인지 노파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조금 거리를 벌렸다.

 


"새벽에 잠을 깼는데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와봤지요. 아주 괴로워 하길래 깨웠는데…."

 


   노파는 멋쩍은 듯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제서야 상황을 납득한 엘사는 황급히 눈물을 훔쳤다. 고마움과 동시에 창피하고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노파는 그런 그녀를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은은한 미소를 띈 채 따스한 시선으로 엘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나 보구먼."

 


  -안나라는 이름을 수도 없이 불러대던데. 엘사가 노파를 쳐다보았다. 겨우 두 글자. 겨우 두 글자로 이루어진 이름을 들었을 뿐인데 수 천 개의 바늘로 찌르는 듯한 격통이 가슴을 파고 들었다. 엘사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이제 다신 울지 않겠다고 다짐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이러고 있는건지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꿈에서 보았던 안나의 모습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다. -어이구, 이런. 흐느끼는 엘사를 노파가 껴안아왔다. 노파의 품은 놀라우리 만치 편안하고 따뜻했다. 어린 날의 사건 이후 부모님에게조차 안긴 적이 없던 그녀에겐 이질적인 감각이었으나 타인의 온기가 주는 위안감은 놀라웠다. 결국 엘사는 노파의 품에 몸을 맡겼다. 그녀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을 쏟아짐에 따라 노파의 옷이 축축히 젖어갔다.

 


"며칠 전 동생을 잃었어요."

 


  엘사가 속삭였다. 노파는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어릴 적 그 아이와 난 무척이나 친했지만… 나 때문에 그 아이가 크게 다친 후론 난 내 동생을 멀리 하기로 결심했어요. 그게 그 아이를 지키는 방법이라 생각했죠."

 


  -무려 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렇게 믿어왔어요. 그동안 그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었다는 건 모른 채 말이예요. 엘사의 머릿속엔 조금 전 보았던 꿈 속의 어린 안나의 모습이 떠나가질 않았다. 어쩌다 밖에라도 나가면 엄마 잃은 병아리처럼 쫄래쫄래 따라와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던,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시무룩해 하다가도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금세 활짝 웃어보이던, 언제나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언제나 멀어지기만 하는 자신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소리없는 눈물을 삼키던 그녀의 모습이. -이제서야 겨우 마주할 수 있게 됐는데 대체 왜…!  엘사의 울음소리가 높아졌다. 노파의 옷자락을 쥐고있는 손의 힘도 강해졌다. 그때까지도 노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결같이 다정한 손길로 위로하듯 그녀의 등을 토닥여 줄 뿐이었다. 울어도 괜찮다고, 노파는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엘사는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자신의 응어리 진 고통과 비애를 토해내었다. 소리없이 주위를 맴도는 어둠은 행여 누가 볼세라 그런 그녀의 모습을 조심스레 가려주고 있었다.

 


"나도 수많은 소중한 사람들을 먼저 보내야 했지."

 


  한참의 시간이 지나 엘사의 울음 소리가 서서히 잦아 들 때 즈음, 노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엘사는 고개를 들어 노파를 바라보았다. 한결같은 그녀의 미소 끝자락엔 평소와 다른 옅은 씁쓸함이 감돌고 있었다.

 


"모두를 미련없이 떠나보냈지만… 그런 내게도 아직까지 보내지 못하고 있는 한 아이가 있어요."

 

"가족인가요…?"

 

"그 아이는 내 대녀(goddaughter)였으니 엄밀히 말하면 아니겠지만, 그래도 난 그 아이를 친 딸 이상으로 여겼다우."

 


  문득 방 안에 달빛이 서렸다. 그 투명한 빛은 부드럽게 노파의 얼굴을 타고 올라왔다. 그곳엔 기나긴 세월로도 지울 수 없는 쓸쓸한 회한이 서려있었다.

 


"신데렐라라고 하는… 아주 아름답고 착한 아이였지. 내 친한 친구의 딸이었는데, 남편과 함께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계모와 언니들에게 많은 학대를 당했다우. 하지만 난 그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었지."

 

"저런…."

 


  엘사는 진심으로 탄식했다. 노파는 괜찮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지어보였다.

 


"어느 날 그 아이는 내게 도움을 청해왔어요. 궁전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가고 싶은데, 심술맞은 계모와 언니들이 그녀가 무도회에 가지 못하도록 막아놨더군. 그래서 난 내 모든 힘을 다해 그 아이가 무도회에 참석해 왕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도록 해줬어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후에 일이 잘 안 되었나요…?"

 

"호호호, 그 둘은 그대로 결혼까지 했는 걸. 서로를 진심으로 아꼈지요."

 


  손사래까지 치는 노파의 모습을 본 엘사의 얼굴에 의문의 빛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녀를 잊지 못하시는거죠? 노파는 잠시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창 밖으로 자신의 시선을 돌렸을 뿐이었다. 엘사는 지금 그녀가 과거의 슬픔에 젖어있다는 걸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내가 한없이 순진했던 그 아이를 일국의 왕자와 이어줬던 건 그동안의 서러웠던 세월들을 보상해주기 위함이였어요. 참 어리석었지. 맑은 연못에서 놀던 물고기를 하루 아침에 진흙탕에 던져버린 내가 바보처럼 어리석었어."

 


  노파가 말했다. 엘사는 그녀의 두 눈이 창 밖의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천민이라며 뒤에서 계모와 언니들에게 당한 것보다 더한 핍박과 수모를 겪고, 후궁들의 음모에 빠져 그렇게 처참히 죽을 줄 알았다면… 절대로, 절대로 무도회에 보내지 않았을텐데…."

 


  아련한 세월의 목소리가 쓸쓸히 방 안의 차가운 공기 사이로 흩어졌다. 엘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충격과 안타까움으로 두 눈을 크게 뜬 채 황망히 웃고있는 노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난 두 번 다시 내 힘을 쓰지 않았어요."

 


  -인간의 운명에 가한 인위적인 힘은 강력한 저주가 되어, 상대에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어느 새 노인의 시선은 엘사에게로 향해 있었다. 엘사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어째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는가 의문이 들 정도로 노파는 한없이 깊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엘사가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노파는 언제나처럼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난 그저 남의 일에 참견하길 좋아하는 노인일 뿐이라우."

 


  문득 노파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엘사는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녀를 지켜 볼 뿐이었다. -선택은 언제나 당신의 몫이예요. 흐름에 순응하고 위대한 여왕이 되어 후대에 길이 남을지, 운명을 거스르려 발버둥치다 그대로 가라앉게 될 지. 그건 마치 자장가라도 불러주는 것처럼 나긋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노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것이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라면 엘사, 바람을 따라 황혼의 숲으로 가세요."

 


  -그곳에서 또 다른 당신의 갈림길을 만나게 될테니.

 

  엘사는 눈을 깜빡였다. 방 안엔 그저 창백한 달빛 만이 맴돌 뿐, 노파의 모습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차갑게 식어내린 어둠 만이 그녀를 맞이할 뿐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오도카니 앉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여러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흘러들었다. 그 모든 것들을 잡아 낼 수는 없었지만, 그 중 몇 가지는 확실하게 엘사의 마음 속을 파고들어왔다.

 

  자신도 겨우 올라온 산에 겨우 망토 한 장 걸쳤을 뿐인 노인이 올라 올 수는 없다는 것, 살아 움직이는 눈사람인 울라프를 보고도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는 것, 그 누구도 이 성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

 

  예상치 못한 혼란 속에 엘사는 의외로 스스로의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흐름에 순응하는 것, 그 흐름을 거스르는 것. 조용히 눈을 감고 노파의 말을 되새기던 그녀는 마침내 다시 눈을 떴다. 선명한 푸른 빛이 어둠 속에 고요히 떠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잠은 다 달아난 지 오래였다.

 

  지옥에 가라앉는 한이 있더라도 난….

 

  엘사는 창 밖의 죽어있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멈추지 않은 눈보라에 창문은 힘없이 덜컹거릴 뿐이었다.  

 

 

 

 

+++

 

 

 

 굿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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