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타자기는 보는 드라마가 아니다. 읽는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책처럼 적극적으로 읽지 않는다면 절반 밖에 즐기지 못하는 셈이 된다. 그 만큼 숨은 상징과 은유로 넘쳐나고 지난 5-6회는 그 숨은 의미의 수준과 범위가 정점을 찍고 있었다. 유령이 등장하고, 전생이 나오고,  외피로만 보면 판타지 로맨스물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으나 그 속내는 각기 다른 주제와 장르를 가진 이야기들이 층층으로 쌓여 있다. 특히나 5회는 현실정치와 사회를 비판하는 시대극으로서의 편린까지 발견할 수 있었다.  

"조국은 빼았겼지만 나에게서 문장을 뺏을 순 없어. 글을 쓰지 못하면 난 유령이나 다름 없으니까. 해방된 조선에서는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을 미친 듯이 쓸거야..."

 3류 연애소설이나 쓰느니 안쓰고 말겠다는 율의 말에 서휘영의 이 선언은 암혹한 시절,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름다운 세 청춘이 견뎌내야 했던 시대의 무게를 절절히 보여준다.

 청춘이 아름다운 건 꿈을 꿀 수 있어서다. 아니 꿈을 꾼다는 것은 청춘의 권리이자 당위에 가까운 것이다. 1930년대 일제 식민치하의 청년들이라 해도 그들 역시 빛나는 청춘이다. 꿈꿀 수 있는, 꿈꾸어야 하는 청춘이다. 허나, 녹록지 않은 현실은 천재 문인을 3류 연애소설이나 쓰는 작가로, 또 다른 문인은 흥청망청 여자와 술에 둘러쌓인 한량같은 술집 사장으로 위장하게 만든다. 또 뭐든지 빨리 배우고 금방 익히는 재능 많은 소녀는 나라를 구하러 다니느라 적재적소에서 그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다.

"해방된 조선에서는 블랙리스트 같은 건 없겠지?"

"있겠냐? 없으니까 해방이지."

해방만 되면, 조국을 되찾으면 꿈꿀 수 있는 자유를 찾으리라 믿었던 그들에게, 환생한 그들은 과연 그렇더라고 말해 줄 수 있을까. 진정 해방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이뤘지만, 현실 속에서나 드라마 속에서나 제국주의보다 더 무서운 자본주의로 또다른 지배 하에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청춘들을 목도한다.

 전설이 사격을 놓은 것은 그녀의 전생때문이지만, 수의사를 그만 둔 것은 '구제역'이라는 사회적 사건 때문이다. 비용과 효율성만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환경에서 비인도적인 밀실사육은 바이러스의 확산을 불렀고 살육을 당한 소들만큼이나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한세주가 보내기 버튼을 앞에 두고 그토록 오열했던 건 전설이 일깨워 준 순수했던 자신과 100억 프로젝트라는 거대한 자본이 주는 위압감 앞에서 한없는 무력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때나 지금이나 이토록 청춘들이 암울한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신 어떤 전직 대통령께서는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했더니 '자괴감'운운하며 자괴감을 모욕했더랬다. 아마도 대사 하나를 쓰더라도 낱말 하나 조사 하나  섬세하게 고민했을 우리의 작가님은 한세주의 입을 빌어 '자괴감'이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의 올바른 사용법을 친히 시전해 주시었다.  

"나라를 지대로 팔아먹은 년..."

 마방진은 하는 일마다 안 풀리는 전설에게 독립투사의 자손들은 못 살고 친일파의 자손들은 잘 먹고 잘  살았음을 상기시키며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게 아니라 '구했을'거라고 제대로 된 비유법을 가르친다. 우리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바탕으로 하는 이 뼈 있는 농담은 어떤 형태로든 수현과 휘영이 살았던 1930년대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암시한다.   

"계속 써 주라.... 그래야 내가 살아.."

 시카고 타자기를 완성해야만 하는 진오가 환생하지 못하고 영혼으로 봉인된 이유는 적어도 셋 중 하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불행했던 역사가 억압했던 그들의 꿈은, 적어도 그들이 환생한 2017년에는 이루어져야 한다.  진정 해방이 되었다면 그들이 이루지 못했던 사랑과 우정은 반드시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세주가 혹은 휘영이 '시카고 타자기'를 완성하는 일이 일차적으로는 진오가 성불하는 방법일수도 있겠다마는 그보다 진오가 그토록 소설의 완성을 바라는 이유는 '시카고 타자기'라는 소설은 식민지 지배시절 억압됐던 청춘들의 꿈과 미래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장마저 빼앗기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써야만 했던 3류 연애소설이 아니라 미치도록 쓰고 싶었던 글. 시대의 비극이 가져간 그 시절 아름다운 청춘들의 꿈과 사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