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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소포클레스 「필록테테스」를 읽고

도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7.10 17:07:01
조회 2357 추천 20 댓글 24

드디어 두터운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을 완독했다. 코로나로 도서관이 다시 닫을 것 같아 후다닥 빌려왔는데, 시험 기간과 겹쳐 한동안 읽을 수가 없었다. (시험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한 것 같지는 않지만...) 내용 자체는 어렵지도 않고 각 편이 술술 읽힌다. 원래 극작품은 그렇게 즐기지 않았는데(특히 빙빙 돌려 말하는 투의 그리스 비극은), 뭐든 맛을 들여야 한다고 이 책을 끝내니 이제 나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면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워낙 훌륭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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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와 더불어 소포클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로 꼽힌다. 셋 모두 활동 시대도 다르고, 나타내고자 하는 전체적인 주제 또한 상이하다고 한다. 소포클레스는 신이 내린 고된 운명 하에 인간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행동을 펼쳐나가는지에 집중했다. 재밌는 점은, 신이 내린 그 고된 운명은 인간이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다. 소포클레스 비극의 주인공들은 잘못이 없어도 혹은 악의 없는 과실을 행했을 뿐이라도 신들의 저주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된통 얻어맞는다. 그리고 그 저주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마찬가지로 신에 의한 구원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이성과 주체적 힘은 무슨 의미를 가진단 말인가?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된 것이고, 인간은 신들의 꼭두각시 또는 장기말 같은 존재가 아닌가? 그러나 소포클레스는 모든 것 가운데서도 인간의 굳건한 마음, 스스로의 의지를 부각시키고자 했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아이아스, 엘렉트라, 그리고 필록테테스는 모두 이러한 류의 인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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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록테테스는 멜리보이아의 왕으로, 기본적으로 선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트로이전쟁에서 활약하던 중 독사에게 다리를 물렸고, 렘노스 섬에 버려져 10년 동안 홀로 고통 속에 근근이 연명하게 된다. 하지만 트로이를 함락시키려면 필록테테스와 그가 헤라클레스로부터 받은 활과 화살이 필요하다는 예언을 듣고,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와 저 유명한 오디세우스는 렘노스 섬으로 찾아간다. 오디세우스는 필록테테스를 속여 그를 납치하고자 했지만 (적어도 소포클레스 비극에서는) 본성이 고결했던 네오프톨레모스는 그러길 꺼려 했다. 네오프톨레모스는 활과 화살을 손에 넣는 데에 성공했지만, 결국 필록테테스에게 동정심을 느껴 사실을 털어놓고 다시 그에게 돌려준다. 네오프톨레모스는 필록테테스를 고향에 데려다주면 후에 그리스 장수들에게 보복을 당할까 염려해 같이 전쟁터로 돌아가자고, 예언에 따르면 필록테테스는 그곳에서 상처도 완치되고 큰 명성도 얻을 수 있다고 하지만, 필록테테스는 끝까지 트로이에 가는 것을 거부한다.



아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좋은 뜻에서 충고하는 이 사람의 말을 어떻게 귓등으로 듣는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양보한다면? 그때는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내가 어떻게 사람들 앞에 나타난단 말인가?



네오프톨레모스가 단념하고 그를 고향으로 데려다주려 하는 순간, 헤라클레스의 혼백이 나타나 예언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마침내 두 장수는 함께 다시 트로이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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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록테테스'를 읽는 도중 실존주의가 떠올랐고, 이는 나머지 소포클레스의 비극들과 어느 정도 궤를 같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인간은 내던져진 존재이고 도무지 저항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사건들과 환경에 의해 지배받지만, '어떤 신념을 택할 것인지',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지'는 그 스스로가 매 순간순간 선택해나갈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환경과 운명은 한 인간의 본성과 미래를 완전히 결정할 수 없다. 한 사람이 악한 것은 그가 악한 행동을 해왔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이 정의로운 것은 그가 정의로운 습관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추락하여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은 운명이 그의 무릎을 꿇렸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굴복하여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고, 최악의 상황에 처해도 더 나은 선택지를 택하는 것은 온전히 그의 몫이다.



끔찍한 진실을 마주할 것을 고집하고, 그 진실과 마주했을 때 스스로의 눈을 멀게 하고 무관심한 아들에게 저주를 내린 것은 오이디푸스 자신이다. 지배자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오라비의 장례를 위해, 또는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 목숨도 버릴 의지를 관철한 것은 안티고네와 엘렉트라 그녀들이다. 아테나 여신의 환상에 속아 수치스러운 짓을 한 자신을 '발견'했을 때 자살을 선택한 건 아이아스 본인이며, 고된 과거에서 벗어나 상처를 치료하고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거부할 뻔한 것 역시 운명 탓이 아닌 필록테테스 자신의 결정이었다.



오오, 불운한 자여, 이것은 그대가 자청한 것이오. 이런 운명은 외부에서 더 위대한 자에게서 온 것이 아니오. 그대가 지혜를 보여줄 수 있었을 때, 그대는 좋은 운명 대신 나쁜 운명을 택했던 것이오.



때때로, 특히 요즘은 더 "흘러가는 인생에 무력하게 몸을 맡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최근 들어 유난히 안팎으로 어지러운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결과를 빚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에게 달려있는데도 자꾸만 그 사실을 회피하는 것만 같다. 차라리 모든 것이 정해져 있으면 좋겠다, 내 앞에도 헤라클레스가 찾아오면 좋겠다, 싶을 때도 있지만 막상 그렇다면 또 너무나 불행할 듯싶다. 이런 자유인듯 자유 아닌 자유가 정말로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이런 생각 끝에 드는 생각은 거진 결국 "열심히 살아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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