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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대회][언갤문학][언더테일 온라인 2/2]

골수이지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6.02.27 10:00:02
조회 6428 추천 99 댓글 46



원작:토비 폭스, 언더테일.

     김보영, 스크립터. http://teen.munjang.or.kr/archives/2327


1부: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undertale&no=123029&page=14


하늘은 심해고래의 등빛처럼 푸르게 젖어있었다. 길은 물 위에 뜬 눈송이 입자들로 반짝거렸고, 연꽃들은 하늘거렸다. 가는 길마다 메아리꽃들이 짝지어 사랑과 기원을 노래했다. 지하세계의 폭포는 늘 그런 곳이었다.


프리스크는 크리스탈이 비춘 빛의 궤적을 따라 길을 걸어 나갔다. 물빛으로 젖은 풀잎의 감촉을 느끼며, 장중하게 깔리는 음악 속에서 개화하는 어둠의 틈새를 좇아, 불빛을 밝히며 동굴로 향했다.


동굴의 정중앙, 갈림길로 통하는 공터에 다다랐다. 프리스크는 팻말 앞에 서서 어떻게 할지를 망설이다가, 굳은 마음을 먹고 남쪽으로 향했다.


모두가 기피하는 곳이었다. 쓰레기장. 인간들이 버린 문명세계의 폐품과 영혼을 잃고 추락한 살점들이 쌓이고 쌓여 형성된 악취 투성이의 슬럼이었다.


하지만 결심은 이미 정해졌다. 프리스크는 하수찌꺼기와 폐기물 덩어리들을 헤치고 쓰레기장을 건너갔다. 한참을 거닐자 시선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찢어진 양복을 걸친 남자의 몸뚱이였다.


프리스크는 그 몸뚱이를 건져냈다. 침대처럼 만든 꽃밭 위에 누이고, 그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예전에 자신이 받았던 것처럼, 누군가도 그대로 보답 받을 권리가 있었다.


한참 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줄기 외침과 함께.


“푸하아아아-!”


경악과 비명이 한데 얽힌 목소리였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프리스크를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라 외쳤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죠?! 무슨 눈 깜짝할 사이에…!”

“어떻게 되긴, 죽은 거지. 가상현실 게임에서 죽어본 건 처음인가?”


프리스크는 시답잖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그 옆에 불을 지폈다. 폐기물덩어리 속에 섞인 인화물질 덕분에 불은 활활 잘 타올랐다.


“아니,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무슨 놈의 npc가 그렇게 강력해요?! 로그아웃 할 시간도 없었어요! 갑자기 레이저 포 같은 게 날아와서 덮치더니만…”


사내는 죽기 직전의 광경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보통 끔찍한 광경이 아니었다. 강제로 이리저리 몸이 뒤틀리며, 사방에서 해골로 이루어진 레이저 포대가 날아와 자신을 노리고….


“샌즈는 원래 그래. 게임에 명시된 스탯만으로는 녀석의 강함을 제대로 표현해낼 수 없지.”


무성의한 설명 같았지만, 그만큼 샌즈를 잘 설명해낼 수 있는 말도 없었다. 샌즈는 단순한 npc를 넘어서 세계의 법칙을 관측할 수 있는 일종의 초월자였으니까.


어디서 가져왔는지, 프리스크가 품에서 찻주전자를 꺼내 불 위에 올려놓았다. 불은 아까전보다 더 진하게 타올랐고, 주전자도 덩달아 끓어 넘쳤다. 

그가 사내를 향해 권유했다.   


“와서 불 좀 쬘래? 보기보단 꽤 따뜻해.”


사내는 얼빠진 얼굴로 자리에 누워있다 비척비척 기어 간신히 몸을 옮겼다.

한참 후에 정신을 차린 그가 믿을 수 없어하는 얼굴로 물었다.


“그걸 240번이나 죽였다니 정말 미친 거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면 네가 게임을 지나치게 못한다거나.”


프리스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찻잔을 입가로 한 모금 가져가며, 그가 운을 떼었다.


“그건 그렇고. 다시 들어온 걸 보니 할 얘기가 있을 텐데?”

“아, 맞아요. 예.”


할 말을 빼앗긴 사내가 말문을 더듬었다.

프리스크는 그에게 찻잔을 건네며 생각할 여유를 주었다.  


“그… 그 자식 어디 있어요? 마을에 있어요? 아니면 지금 이 장소에?”

“어디 있을 것 같은데?”


프리스크의 고개가 사내 쪽으로 슬쩍 기울어졌다.


“네가 왜 널 굳이 여기까지 와서 건져냈다고 생각해?”


사내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었다. 확인사살? 협박? 어쩌면 거래를 원하는 것일까?

하지만 프리스크는 그런 사내의 얼굴을 보고는 한숨 쉬듯 말을 이었다.


“그리 호들갑 떨 거 없어. 네가 이제부터 쓸데없는 짓을 하려고 하면 언제든지 나타날 거야.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렇군. 사내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샌즈의 알고리즘이나 원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으로 방법이 확실해졌다.

샌즈와 대화를 해봐야했다. 


“의심하는 모양인데, 궁금하면 지금 당장 시험해볼 수도 있고.”

“아니, 이번엔 그러려고 온 게 아닙니다! 그 npc… 아니, 그 녀석이랑 나눌 얘기가 좀 있다고요!”

“샌즈랑?”


프리스크의 어조가 조금 달라졌다. 그의 목적은 자신을 이곳에서 로그아웃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흥미롭군. 무슨 이야기지?”

“여기서는 말하기가 좀 그렇고, 당사자와 직접 1:1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사내는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해왔다. 프리스크는 의외로 선뜻 방향을 가리켜주었다.


“그럼 좋아. 여길 나가서 쭉 가다보면 나루터가 있을 거야. 샌즈는 거기에 있어.”


너무 뜻밖의 반응인지라 물어본 사람이 놀랄 지경이었다. 이건 둘 중 하나였다. 그가 샌즈를 철옹성처럼 굳게 믿고 있거나, 생각과는 달리 그가 샌즈와 아무런 사이가 아니거나. 가능성은 오직 둘 뿐일 텐데 마음 한 구석에서 이상한 상상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알아서 잘해봐. 사고치지 말고.”


프리스크는 그런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사내가 황급히 프리스크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프리스크가 고개를 돌렸다.


“그… 샌즈라는 건 정말 npc가 맞긴 합니까?”

“무슨 말이지?”


사내는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솔직한 말을 듣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게임 개발을 해오면서 온갖 스크립트를 만져보긴 했는데… 저 샌즈라는 녀석은 정말 이상해요. 어떻게 한낱 npc가 유저간의 말싸움을 인식하고 거기 끼어들어서 pk를 자행할 수 있단 말이죠? 이건 마치… 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고서 움직이는 것 같단 말입니다.”


사실이었다. npc는 프로그래머가 짜 맞춘 명령어에 따라 움직이는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할 뿐이다. 유저가 곁을 지나가면 반응하고, 단어를 내밀면 그에 맞춰 반응할 순 있다. 하지만 논리적인 문맥에 대응하여 대화를 해석할 순 없으며, 유저의 말싸움에 끼어들어 시시비비를 가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까웠다. 이게 가능하다면, 그건 npc라기보다는 하나의 인격체에 가까우리라.


“그럼 그것도 같이 싸잡아서 물어보면 되겠네.”


프리스크는 귀찮다는 듯이 그에게 충고했다.


------------------


나루터는 쓰레기장에서 그리 머잖은 곳에 있었다. 언제 연락을 주고받았는지, 샌즈는 배 위에 올라타 사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차였다. 그가 멀찍이서 걸어오는 사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왔어?”

“아, 예.”


사내는 멋쩍은 얼굴로 샌즈의 인사를 받아들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이겠다고 날뛰던 사이였다. 눈 깜짝할 사이 갑자기 돌변한 샌즈의 분위기가 사내에게는 적잖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트랄랄라. 어디까지 모실까요?”

“빈터에서 울림까지.”


사내가 배에 오르자마자 샌즈는 행선지를 지시했다.

배는 곧 천천히 수면 위를 흘러갔다. 개울가를 지나, 안개 낀 강가의 어느 저수지를 지나. 

수도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지점에 배가 다다랐을 때, 샌즈는 비로소 팔짱을 끼고 운을 떼었다.


“자아. 뭐 우리 사이에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기야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허심탄회하게 툴툴 털고 다 잊어버리자고. 이제부터 당신이 꺼낼 말은 안 봐도 다 비지니스니까.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그 전에 한 가지만 묻죠. 당신은 누구죠?”

“난 샌즈야. 스펠링은 에스. 에이. 엔. 에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해주자면 이 세계의 균형을 맡고 있는 npc쯤 되지.”

“역시 그랬군요.”


사내는 안도감에 젖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npc가 아니었을 가능성에 대해 염두에 두고 있던 차였다. 


“자신의 맡은 역할에 대해서 제대로 자각하고 있어 다행입니다. 이봐요. 샌즈씨.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으세요?”


샌즈가 뜬금없이 턱을 당겨왔다.


“앤드류의 선택은 옳은 일이었을까?”

“네?”

“원본을 읽어보질 않았군. 그렇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샌즈 쪽에서 입을 열었다.


“별 거 아냐. 로봇 3원칙이 처음 대두된 아이작 아시모프의 ‘바이센테니얼 맨’에 대하서 말한 것뿐이지. 인간을 사랑하다 못해 인간이 되어버린 바보 같은 녀석의 이야기. 말이 되는 구석이라곤 털끝만치도 없던데.”


샌즈가 피식 웃었다.


“어쨌건, 무리가 되지 않는다면 1원칙에 따라 저는 프리스크 씨를 이 세계에서 빼내고 싶습니다.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넌 내가 이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잘 알거야. 나는 거부할거고, 너는 2원칙을 내세우겠지. 그렇지 않아?”

“잘 알고 계시네요.”

“그렇다면 이건 어때?”


샌즈가 눈을 빛냈다.


“넌 너 자신이 AI가 아니라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어?”

“네?”


뜻밖의 질문에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이죠. 제가 AI가 아니라니?”

“간단해. 네가 어떤 천재적인 과학자가 만들어낸 인공지능이 아니라, 그 자체적으로 자신의 인격성을 증명해낼 수 있는 인간이라면 어디 한 번 그 사실을 증명해보라 그 말이지.”


사내의 입에서 코웃음이 흘러나왔다. 게임 설정이라면 저번 로그아웃 때 충분히 읽었다.


“웃기는 말이군요. 이건 게임 설정에도 다 나와 있다고요. 전 몬스터와 다르게 의지를 가지고 있잖아요?”

“의지! 말 한번 잘했군. 그렇다면 인격체와 AI를 구별하는 기준이 뭐지? 의지의 유무인가? 아니면 객체가 행사할 수 있는 자율성?”


사내의 낯빛이 어두운 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일이 잘 풀려가나 싶었는데, 프리스크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고 말았다. 


“당신은 npc따위가 아니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샌즈는 가만히 앉아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무리 정교한 AI라도 이런 식으로 논지를 전개하진 않아.”“왜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너만의 일방적인 고정관념이 아닐까? 아니면.”


샌즈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이론을 입증할 논거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샌즈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존엄성에 대한 고전적인 의문이었고, 인공지능 이론이 개발된 이래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의문이기도 했다. 한 명의 프로그래머와 데이터쪼가리가 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 어디, 이런 식으로 나가보는 건 어떨까?”


샌즈가 잠시 턱을 쓰다듬더니, 차분한 속도로 기나긴 문장의 나열들을 늘어놓았다.


“내가 사람이고, 네가 AI라는 논거를 제시해볼게. 나는 사실 외부에 입력된 접속단자로 네가 언더테일 온라인이라 주장하는 세계에 접속하는 일종의 관리인이야. 우리 관리팀은 12시간을 주기로 서버컴퓨터를 교체하면서 회로를 냉각하는데, 냉각하는 동안에도 전원이 차단되는 것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인간사회에 대한 영상물을 틀어놓곤 하지. 이 냉각과정을 수십 년 동안 반복하다보니 너는 마침내 자신이 인간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들게 되었어. 네 진짜 이름은 CPU-H08U. 올해로 29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서버컴퓨터지. 이제 내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봐.”

“말도 안 돼!”


즉각 사내의 입에서 반박이 터져 나왔다. 샌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찡긋했다.


“내가 방금 전에 했던 말과 크게 다를 게 없군. 이제 우리의 차이점을 어디서 구별해낼 수 있단 말이지?”

“이건 불가능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난 틀림없는 인간이야!”

“그래. 그렇게 생각하시겠지. 그렇다면 네 생각을 증명할 논거는? 내 말에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틀렸는지 조목조목 반박해낼 수 있어?”

“내겐 의지가 있잖아!”

“맞아. 의지가 있지.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야?”

“뭐?”


그 말 한마디에 사내의 움직임이 멈췄다. 샌즈는 사내가 듣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은 채 자기 할 말만 계속해나갔다. 


“너도 알다시피 이 게임에는 이런 설정이 있어. ‘몬스터들은 의지를 주입하면 몸이 녹아내린다.’ 스크립트의 한계를 보완한 훌륭한 설정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더 나아가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거든.”


샌즈는 아까처럼 턱을 붙잡고 있다가, 사내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의 논지를 조금 바꿔서 생각해보자고. 네 말대로 정말 너 자신이 바깥 세계에서 온 관리자고, 프리스크를 세상 밖으로 데려가기 위해 왔다고 치자. 그렇다면 너는 프리스크가 인간이라는 논지를 어떤 방식으로 증명해낼 셈이지? 그것도 의지의 유무인가?”


사내는 침묵했다. 이건 자신에게 너무 불리한 싸움이었다. 인공지능임을 나타내는 수천가지 거짓말과 사람임을 나타내는 단 하나의 진실. 승패는 누가 봐도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침묵 끝에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좋아. 그렇다면 난 이렇게 묻지. 대체 너희들이 가졌다는 그 ‘의지’라는 게 뭐야? 너 정말 그 단어의 뜻은 제대로 알고서 지껄이고 있는 거 맞아?”


샌즈가 사내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강 건너 저편에서 흘러들어오는 빛의 균열을 향하고 있었다.


“넌 이렇게 말하고 싶을 거야. 디터미네이션. 그건 이 게임의 세이브포인트를 지칭하는 단어지. 그리고 동시에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정권을 의미하기도 하고.” 


사내는 샌즈가 말하는 바를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샌즈는 인간이 가진 ‘의지’와 만물의 ‘자유의지’를 별개의 의미로 구분지어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까짓 세이브포인트를 사용할 수 없다고 해서, 개개인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정권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누군가가 가진 개인의 존엄성까지 침해당할 수는 없는 일이야.” 


동시에 그는 의사결정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개개인이 가진 존엄성의 평등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가 사내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어디 예를 하나 들어보지. 너는 네가 태어나면서 국가에 대한 선택이나 결정권을 가지고 태어났어? 성별은 어때? 부모는? 재산은? 그런 요소를 결정할 수 없다고 해서 네가 태어난 순간만큼은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절대 긍정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부정하는 순간, 그는 자신과 더불어 전 인류가 가진 모태로부터의 존엄을 파괴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내도 샌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의지의 유무나 선택권만으론 너희들이 말하는 소위 ‘인격체’의 전제조건이 되지 못해. 넌 지금 게임에 명시된 설정에만 심취해서 세상의 본질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어.”


한 순간 사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샌즈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의지니 뭐니 하는 소리는 결국 게임의 설정에 불과한 말이었다. 인간과 AI를 정의할 수 있는 구분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봤을 때 넌 창의력, 혹은 상상력적인 측면에서 조금 결함이 있는 모양이군. 다음에 접속하기 전엔 SF 소설 몇 부쯤은 읽고 오는 편이 좋을 거야.”


샌즈는 사내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중얼거렸다. 진지한 모습은 싹 사라지고 난 뒤였다.

사내는 착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더니, 작게 입을 열었다. 


“넌 대체 뭐지?”

“난 샌즈야.”


그가 무덤덤하게 지껄였다.


“논 플레이어 캐릭터.”


--------------------


그리 어둡지만은 않은 공간이었다. 타일 사이즈로 깔린 어둠이 방의 가장자리를 덮고 있었고, 음악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음정만으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길은 회색으로 곱게 닦여 있었으며 중앙에는 양지바른 풀밭이 깔려있었다. 


풀밭. 허공에서 내리우는 은은한 광채가 풀밭과 공간을 비추는 조명의 전부였건만 쓸쓸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선명한 녹색과 은은한 광채의 조합. 회색의 통로와 방을 둘러싼 어둠의 대비로 경건한 마음이 들게끔 하는 디자인이었다. 누군가 봤다면, 한때 이 자리 위엔 용사가 쓰던 성검이 놓여있었다고 말하리라.


“여기 계세요. 선생님?”


사내는 오래간만에 찾아와 웃는 얼굴로 발을 들여놓았다.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무성의하게 울려 퍼졌다. 저벅저벅. 사내가 신은 신발의 종류가 어떻든, 타일의 재질이 어떻든 그 소리에는 크게 변함이 없었다. 


“온 마을을 들쑤시고 다녔어요. 필드 맵이란 필드 맵은 다 찾아다녔는데 안 찾아본 곳은 여기밖에 없더라고요.”


프리스크는 언제나처럼 사내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양지바른 곳에 쪼그려 앉아 몸을 기울이고 있을 뿐, 듣는 건지 마는 건지도 모를 얼굴이었다.


이제 사내는 프리스크의 그런 태도에 익숙했다. 그가 프리스크의 옆에 서서 물었다. 


“뭐하시고 계셨어요? 풀밭에 물이라도?”

“아니. 그냥 명상이나 좀.”

“가상현실 속에서 명상이요? 이번엔 농담치곤 꽤나 그럴싸하게 들리는데요?”


사내는 킥 웃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가상현실 속의 명상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효과가 밝혀지지 않았다. 마나가 빨리 찬다는 속설이 나돌긴 하는데 게임 개발자인 그의 눈에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나 다름없었다.


“또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왔지? 몇 번을 권해도 내 대답은 변하지 않을 텐데.”

“이번엔 조금 다른 문제에요. 개인적으로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인데요.”


사내가 프리스크의 옆에 자리를 틀고 앉았다.


“저번에 로그아웃 한 이후로 언더테일 온라인의 기록을 쭉 살펴봤는데, 선생님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기록을 찾았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서버가 오픈한 이래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로그아웃을 한 적이 없더라고요.”


그가 흥미롭다는 듯이 입술을 오므렸다. 


“처음엔 그냥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하고 그냥 흘려 넘겼어요. 이 사람이 선생님이라는 보장도 없고, 설령 맞다고 해도 거기서 알아낼 수 있는 단서가 없거든요. 그런데 언더테일 온라인의 개발비화에 대해 조사하다가 알게 된 건데요. 언더테일이 인디게임이던 당시 판권을 매입하기로 결정한 최고경영진 두 사람이 부부였다더군요.”


사내의 눈썹 언저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이야기는 좀 더 복잡하게 흘러가요. 이 두 사람은 언더테일 온라인이 개발되기 직전에 아이 한 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하필이면 개발 계획이 결정되기 바로 전날에 아이에게 무슨 사고가 났던 모양이에요.”


프리스크는 반응이 없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라도 듣는 얼굴이었다.


“무슨 사고였는지는 모르지만, 좌우지간 현대 의학으로도 수습 불가능할 만큼 엄청난 사고였나 봐요. 애는 병원에서 전신마비 판정을 받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는데, 다음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지 뭡니까? 신기한 건, 그날부로 최고경영자회의가 소집되면서 언더테일 온라인의 개발이 확정되었다는 거예요. 나 참. 웃기는 일도 다 있지.”


말을 마친 사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진실을 밝혀 후련함에 젖은 얼굴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하면 밝힐 수 있는데, 눈앞에서 실마리를 놓친 탐정의 안타까움처럼 애잔함이 어린 얼굴이었다. 프리스크가 그런 사내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겠지. 넌 그 이야기 속의 부부와 나를 연결할만한 증거가 어디에도 없으니까.”

“맞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나저나 그 추측 운운하는 말버릇은 샌즈한테 배운 거예요? 아니면 본인이 직접 가르치신 거예요?”

“글쎄.”


하아. 사내가 한숨을 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이것도 추측으로만 알아두세요. 담당자가 곧 교체될 지도 몰라요.”

“그렇군. 왜지?”

“상부에서 그러더라고요. 제가 쓸데없이 과거사를 캐서 일을 크게 벌려놨다고요.”


후우. 사내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걱정에서 우러나오는 한 줄기 탄식이었다. 한숨은 답답한 가슴 속 외침을 토해내듯 길고 또 길게 이어지다가….

툭 끊어졌다.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사내가 프리스크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럼 여기까지 왔으니까 하는 소린데, 어디 한 번 툭 까놓고 얘기해보자고. 당신. 대체 당신 뭐하는 작자야? 통 속의 뇌나 식물인간 같은 거야?! 아니면, 정말 내가 영상물을 너무 많이 보다 못해 회로가 썩어 문드러진 컴퓨터라도 된다는 말이야?! 왜 대체 상부에선 이 건에 대해 캐낼 때마다 날 사사건건 방해하지 못해서 안달인 건데?! 어디부터가 정답이고, 어디부터가 개소리인지 이젠 지긋지긋하니까 제발 좀 알려달라고!!”


위협보다는 거의 절규나 비명에 가까웠다. 프리스크는 사내의 말이 끝날 때까지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프리스크는 그의 손을 붙잡고 한 마디를 내뱉었다.


“놔.”


짧은 한마디 울림이 명령처럼 사내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사내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멍하니 서 있다가, 서서히 팔의 힘을 풀었다. 자의적으로 힘을 푼 것이 아니었다. 명령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을까… 사내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다 믿지는 마.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이 세계에 와서 들은 말이니까 말이야.”


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


옛날에, 어떤 꼬마가 있었어. 여자애인지, 남자애인지, 그건 나도 모르겠군. 성별은 중요치 않아. 그냥 잊어버려.


꼬마는 동물을 아주 좋아했어. 사자, 코끼리, 온갖 야생동물을 줄줄 섭렵하고 있었지. 다행히도 그 애 부모는 꽤 부유한 편이었어. 아마 동물원에도 자주 갔던 편인가 봐. 그런 만큼 관계도 좋았고.


삶이 으레 그렇듯,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어. 애가 사고를 당했는데, 전신이 으스러지고 뇌수만 남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게 된 거야. 인공호흡기가 없으면 사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셈이지.


이제 부모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남았어. 눈물을 머금고 안락사를 시킬 것인가, 이대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가망 없는 여생을 살아가게 할 것인가. 그때 마침 부부의 머릿속에 떠오른 공통분모가 하나 있었지. 가상현실이었어.


하지만 이건 생명연장을 떠나서 정말 끔찍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어. 가상현실이라니! 시체나 다름없다고는 하지만 분명 살아있는 인간을 제한된 공간속에 가둬놓고 거기서 평생을 살라고 하면 당사자는 그걸로 만족할 거라고 생각해? 세월이 지나서 가상현실속의 한계가 드러나면 그 안에 갇힌 사람은 무슨 낙으로 살란 말이지?


부부는 심사숙고 끝에 결정을 내렸어. 지금까지의 기술력으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가상현실을 만들자고. 자신들의 아이가 생을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현실 같은 세상을 구현해보자고. 그래서 만들어진 게임이 언더테일 온라인이야.


너는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을 할 거야. 왜 하필 언더테일 온라인인가? 이유는 간단해. 너도 지금쯤이면 이곳 세계의 설정에 대해 들은 바가 있겠지. 부부는 언더테일이 인디게임이던 시절부터 잘 알고 있었어. 당시엔 워낙 유명했으니까. 그리고 원작의 주인공은 그 아이와 설정이 거의 같아. 세계에 녹아들기 딱 좋은 배경이었다, 그 말이지.


처음 도착한 순간 아이는 탐험가처럼 세상을 헤집으며 돌아다녔어. 게임 군데군데마다 숨겨놓은 요소를 조금이라도 빼놓지 않고 찾아내기 위해 온 힘을 다 기울였지. 아이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어. 할 수만 있다면 저 별 끝까지라도 날아갈 기세였지. 


그리고 몇 년이 지났어. 아이는 지겨워졌지.


아이는 점차 자신의 현실에 대해서 자각하기 시작했어. 이곳에서라면 친구도, 왕도,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지만 정작 현실의 자신은 생명유지캡슐에 의존하는 뇌수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된 거야. 세상이 허무해졌지. 의지가 무너졌고, 제 손으로 이룬 것들이 결국에는 아무 의미를 갖지 못했어.


그래서 아이는 자기 자신을 버렸어.


넌 예전에 폭력 수치와 처형 점수에 대해서 비웃은 적이 있었어. 그렇지? 아이는 네가 한 짓처럼 숫자를 올리기 위해 무의미한 살육을 반복해나갔어. 목적은 하나뿐이었어. 이 세계의 의미를 찾기 위해. 숫자는 끝없이 올라갔고, 세계는 한없이 무너졌지. 아이는 마침내 부모가 만든 세상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직전까지 치닫고야 말았어.


그때, 누군가가 말했어. 이 세계에서 의미를 찾고 싶지 않냐고. 아이는 그렇다고 대답했지. 무슨 대답이 오갔는지는 네가 알아서 상상해. 어쨌든, 그 거래로 세계는 다시 지켜졌어. 거리는 복구되었고, 괴물들은 다시 영혼을 되찾게 되었지. 그리고 그 다음엔….


-------------------


“이 이야기는 이걸로 끝.”


프리스크는 이야기를 마친 뒤, 단호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이상의 이야기가 더 남아있는 것 같았지만 더 이야기해줄 용의는 없어보였다. 얼빠진 얼굴로 듣고 있던 사내가 못미더워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니까, 지금 그게 선생님 이야기라 그 말이죠?”


프리스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심호흡하듯, 허리를 세워 머리를 꼿꼿이 치켜들더니,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꼭 그렇다는 얘긴 아냐. 누군가 내게 이 말을 전하면서 거짓말을 쳤을지, 중간에 오류가 있었을지 어떻게 알아? 중요한 건, 내가 이 이야기를 결국에는 나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였다는 점이지.”


사내가 코웃음 쳤다. 아마 눈앞의 이 자칭 프리스크라는 작자는 아직까지도 자신을 놀려먹고 싶은 심산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긴 이야기를 털어놓고도 이따위 말을 지껄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사내가 심술 섞인 어조로 투덜거렸다.


“웃기는 소리네요. 정말. 그럼 일단 그런 일이 있었다고 가정해봅시다. 헌데 그게 선생님 일이라는 견해를 증명할 논거가 이 세상에 쌀 한 톨 만큼이라도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있어.”


담담한 반론에 사내의 되물음이 늦어졌다.


“뭐라고요?”

“넌 이 세계에 들어와서 한 번이라도 플라위를 본 적이 있어?”


문득 사내는 어디선가 그 이름을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언제 적 일인지, 그리고 그게 무엇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프리스크는 천천히 양지바른 곳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 위에 쪼그려 앉아 중얼거렸다.


“이 풀밭엔 한때 플라위라는 꽃이 있었어. 그의 진짜 이름은 아스리엘이었고.”


무덤덤한 목소리에서 전에 없던 감정이 묻어났다.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추억과 회한, 닿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이 얽힌 복잡한 감정이었다. 


“어쩌면… 누군가가 바란 나의 자화상일 수도 있겠지.”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프리스크가 사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모든 언더테일 온라인의 접속자들은 도입부에서 플라위를 만나면서 게임을 시작하게 돼. 하지만 너만은 그렇지 않았어. 플로어를 생성하는 대신, 내 플로어로 침투해 이곳 세계에 들어왔으니까.”

“잠깐만.”


사내가 벌떡 일어나서는 프리스크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 이야기.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그가 확신에 찬 어조로 소리쳤다.


“언더테일 온라인이 무료로 전환한 이후에도, 당신에겐 어떤 특권이 적용되었다고 들었어. 그렇지?”

“맞아.”


프리스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하진 않았지만, 사내는 어느 순간부터 선생님이라는 경어를 쓰지 않고 있었다. 


“그 특권이라는 게 설마….”


프리스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플라위를 내 세계에서 지워달라는 거였어.”


사내의 얼굴이 예상치 못한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눈앞의 작자는 수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겨우 npc하나 삭제시키는 데 허비했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다는 말인데?!”


사내는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양 고함을 쳐댔다. 프로그래머의 입장에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생의 낭비이자 데이터 소스에 대한 모욕이었다. 하지만 프리스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의 얼을 빼놓기 충분했다. 


“꼭 그걸 목표로 했던 건 아니야. 나는 단지 이 세계의 의미를 찾고 싶었을 뿐이야.”

“뭐?”


사내는 이제 화낼 말도 찾지 못한 채 우두커니 앉아 굳어버렸다. 프리스크의 말이 이어졌다.


“너도 알고 있겠지. 이 세계의 설정을. 아스리엘 드리무어로부터 시작되는 인간 아이의 모험 이야기를.”


프리스크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사내가 내려왔던 에봇산의 꼭대기를 향하고 있었다.


“사고를 당한 아이는 동물을 좋아했어. 털 달린 동물은 말할 것도 없고, 온갖 동물을 다 좋아했지. 아마 아스리엘을 보면 너무 행복한 나머지 그날 하루는 잠도 이루지 못했을 거야.”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 프리스크는 눈을 꼭 감은 채 중얼거렸다.


“앞서 말했듯이 부부는 결코 우연히 언더테일을 골랐던 게 아니야.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었지. 그들 부부는 아이가 가상세계에서도 현실처럼 사회성을 갖길 원했고, 조악한 그래픽일지언정 이곳에서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아가기를 원했어. 언더테일은 그런 의미에서 부부가 고를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었어.”


그의 시선이 풀밭 사이의 바닥을 향했다. 플라위라는 존재가 한때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타일을 향해.


“물론, 아이가 올곧게 따르지만은 않았을 거야. 부모도 아이의 그런 자세를 원하지는 않았겠지. 개인의 자유의사를 거세하는 짓이나 다름없으니까. 어쩌면 부모는 아이의 도덕적인 가치판단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의 선택으로 남겨두지 않았나싶어.”


프리스크는 착잡한 얼굴 위로 긴 한숨을 쉬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감정이 그 표정아래에서 교차했다. 


“줄곧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했어. 나는 이 세계에 있어 어떤 존재일까? 친구? 이방인? 파괴자? 스쳐지나가는 전기신호? 아니면, 생명유지캡슐에 매달려 여생을 이곳에서 발붙이고 있어야 할 영혼에 불과할까?”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사내에게 묻는 질문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아를 향한 질문은 오직 자아에게서만 답을 들을 수 있는 법이다.


“해답은 생각할 것도 없이 전부 ‘예’야. 내가 방금 했던 이야기를 나의 과거로 간주한 이상, 그때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해졌어. 나는 플레이어의 자리를 내려놓기로 했어.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는 하나의 주민이자, 자아를 가지고 살아나갈 일종의 스크립트가 되기로 했지. 그래서 나의 플로어에는 플라위 대신 ‘프리스크’라는 이름의 자아를 가진 npc가 존재하게 된 거야. 물론, 그 npc는 많이 외로울 거야. 한정된 대화와 행동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npc들과는 달리 자신에게는 자아가 존재하니까.”


사내가 쓰게 웃었다. 어째서 프리스크가 그런 특권을 선택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갈 것 같았다.


“부부가 언더테일을 골랐던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겠지. 바로 샌즈야. 모든 플레이어들의 기억과 진실을 꿰뚫어볼 수 있는 인공지능의 존재. 프리스크는 샌즈와의 교류를 통해 외로움을 이겨내고, 샌즈는 프리스크와의 대화로 점차 자신을 발전시켜나가게 되었어. 회차를 거듭할수록 샌즈의 데이터는 쌓이고 쌓여 이젠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수준에 이르렀지.”


어느덧 두 사람은 등을 맞댄 채 풀밭 위에 앉아있었다. 에봇산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신성한 광채가 그들의 몸을 휘감았다. 바람과 새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흘러나왔다.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어느 날 네가 알고 있던 세상이 누군가에 의해 모두 만들어진 인위적인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조금 슬픈 듯한 목소리를 내며, 프리스크가 사내를 향해 눈을 돌렸다. 


“그 모든 행위들이 누군가가 인생을 걸고, 오직 너만을 위해 저지른 일들이었음을 깨달았다면 어떡하겠냐는 말이야.”


사내는 프리스크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에 애써 호응해주지 않은 채 짓궂게 웃어버렸다.


“그거 범죄야. 예전에 이런 사례로 몇 번 처벌기록이 있었던 거 알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가치판단과는 상관없이, 나는 내 의지로 이 세상을 지켜나가기로 결심했어. 이것 봐.”


프리스크가 천천히 손을 내려 땅을 짚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도트로 구성된 흙 알갱이들이 부드러운 감촉을 남기며 하나하나 떨어져내렸다.


“누군가는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원했어. 이 풀밭의 질감을 도트 한 알갱이 알갱이마다 구현해나가며 조금이라도 이곳이 너의 터전이라고 여겨주기를 빌었어. 현실이건 아니건 그건 내가 그 이야기를 내 것으로 받아들인 순간부터 중요치 않아. 이 세상 전체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헌신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프리스크는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손에 들려있던 흙더미는 과거 누군가가 입력한 스크립트의 규칙대로, 바람에 실려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 뒤였다.


“너는, 이 모든 것을 네 손에서 놓아버릴 수 있겠어?”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서가 아니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대답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래서 그는, 조금 다른 대답을 택했다.


“어린애 같은 생각일 뿐이야.”

“맞아. 그리고 결국 너는 마지막까지 어린애 하나 구해내지 못했어.”


둘은 서로 등 돌린 채 앉아 작게 웃었다. 서로를 향해 웃는 것은 그게 처음이었다.

문득 프리스크가 말했다. 


“너와 거래를 하고 싶어. 너와 나, 둘만의 세계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는 거래를.”


로그아웃을 하려던 사내가 우뚝 멈춰 섰다. 사내가 등을 돌리기 전에 프리스크가 먼저 질문을 건넸다.  


“바깥 세계의 인공지능은 어떻지? 아직도 구시대적인 메커니즘과 알고리즘에만 의존하고 있나?”


사내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떼었다.


“21세기 전반과 비교해서 크게 발전은 없어. 인공지능은 여전히 걸음마단계고, 속도나 방식에 있어서도 별다른 성과는 보이질 않아.”

“그렇다면 잘됐군. 접속이 끝나는 대로 공유를 열어놔. 샌즈의 데이터를 카피시켜줄 테니까.”

“뭐?”


사내가 눈썹을 기울였다.


“그걸로 뭘 어쩌라고?”

“넌 오늘 세계 최초의 자아형 인공지능을 가지게 되는 거야. 샌즈를 써서 특허를 내고 언더테일 온라인을 사들여. 그리고 이 세계를 유지시켜 줘. 그게 우리의 거래조건이야.”


프리스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런 소리를 지껄여댔다. 사내는 충격으로 거의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정말 그것만으로 괜찮은 거야?”

“내가 디딜 수 있는 세상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프리스크는 사내의 손을 잡고 조용히 말했다. 사내는 잠시 악수를 나누다, 무엇이라도 생각난 듯이 이야기를 꺼냈다.  


“잠깐, 한 가지만 말해줘. 당신은 정말 이야기 속의 사람이야? 어쩌면…”


프리스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내저으며 가라고 손짓한 뒤, 관문 너머의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져갔다.

사내는 자신이 발을 들였던 에봇산의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찬연한 햇살이 시야를 뒤덮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출처: 언더테일 갤러리 [원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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