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솔리니 구출작전.
1943년 7월 24일, 이탈리아 원로원이 찬성 19표, 반대 7표로 무솔리니의 직위 해임안을 의결시켰다. 이에 무솔리니는 다음 날인 7월 25일, 국왕 엠마누엘 3세에게 해임 의결을 보류할 것을 요청하러 갔다가 왕궁에서 체포 당한다. 그날 밤 10시 45분, 무솔리니의 실각이 전면 공식화 되고 바도글리오 원수가 새 수상에 임명 되었다.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실각 소식에 로마를 공격해서 교황과 국왕을 체포하라는 충동적인 명령을 내렸다가 측근의 만류로 다시 명령을 철회했었다. 히틀러는 다시 새로운 명령을 내려 친위대의 비밀 첩보 부대 지휘관인 오토 스코르체니 대위를 불러서 무솔리니를 구출해 올 것을 명령했다.
부하 50명과 각종 특수 장비들을 갖추고 이탈리아로 간 스코르체니는 우선 무솔리니를 찾을 방법을 강구했다. 우선 무솔리니의 생일을 이용해 무솔리니에게 선물을 전해 주려고 하니 위치를 알려 달라고 이탈리아 정부에 문의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정부는 선물을 자신들에게 주면 자신들이 알아서 전해 주겠다고 위치를 알려 줄 것을 거부했다. 이렇게 무솔리니를 찾기 위해 한 달을 동분서주하다가 8월 초, 마침내 스코르체니에게 해결의 실마리가 나타났다. 이탈리아 경찰국에 배치한 부하에게서 긴급 보고서가 올라온 것이다. ‘경찰이 경찰 한 개 중대를 그랑삿소 부근에 배치시켰다.’
그랑 삿소는 북이탈리아에 있는 아펜니노 산맥의 몬테코르노(코르노 산) 중턱의 호텔로 관광명소로 유명한 곳이었다. 지형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산장과 산 밑의 마을까지 케이블카가 연결되어 있었고, 그 외에도 스키장으로 쓰는 긴 비탈길이 있었다. 스코르체니의 뛰어난 머리는 순식간에 돌아갔다. 분명 무솔리니는 이곳에 감금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촌구석에 왜 경찰 병력이 투입된단 말인가? 물론 확인을 할 필요가 있었다. 일부러 부하 한 명을 군의관으로 위장시켜 그랑삿소를 병사들의 휴양소로 쓸 수 있는지 알아 볼 수 있도록 그랑삿소에 파견시켰다. 그 결과 이탈리아 경찰들은 그가 그랑삿소에 접근 시키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시켰다. 이제 무솔리니가 여기에 감금된 것이 확실해 졌다.
스코르체니는 생각이 확신이 되자 그 주변에 대한 항공 정찰과 항공 사진을 찍게 했다. 그런 다음 이 사진을 가지고 어떻게 침투할 것인지 고민했다. 높이가 높이일 뿐더러 땅으로 올라가는 것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그렇다고 그냥 케이블카를 타고 가자니 위에서 줄을 절단할수 있기 때문에 위험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 바로 위에서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스코르체니는 우선 낙하산 강하를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쉬운게 아니였다. 공군 조종사들은 사진을 보자마자 산의 대기류 때문에 낙하산이 산 밑으로 빨려 들어간다면서 대신 미끄럼 때문에 위험하지만 글라이더로 투입할 것을 권유했다. 9월 12일 아침, 12대의 예항기와 그 예항기에 매달린 12대의 글라이더. 그리고 1대의 ‘피제르 슈토르히’ 정찰기가 로마 근교 비행장에서 이륙했다. 슈토르히는 나중에 구출 작전이 끝난 뒤에 무솔리니를 안전하게 탈출 시킬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었다. 오후 2시, 몬테코르노 상공에서 스코르체니와 다른 공수부대원들을 태운 글러이더가 투하되었다. 글라이더 12대 중 4대가 골짜기와 충돌하기도 했었다. 경비를 맡고 있던 경찰들은 아무것도 아니였다. 그들은 이미 항복한 자신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스코르체니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쉽게 산장을 장악해 무솔리니를 구출했다.
그런데 마지막 난관이 하나 남아 있었다. 슈토르히 정찰기로 무솔리니를 이동시키려 했지만 조종사인 하인리히 게르라하 중위가 비행기가 양력을 받기엔 활주로라고 할 수 있는 비탈길이 너무 짧고, 또한 무솔리니까지는 태울 수 있지만, 스코르체니는 키가 2m인데다가 무게도 100kg가까이 되었기 때문에 3명이 타기엔 너무 무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비행기의 한 쪽 바퀴가 파손되어서 날기도 벅찬 상황이었다. 그러자 스코르체니는 조종사를 위협하면서 비행기를 이륙시키게 했고, 간신히 비행기는 이륙에 성공한다. 로마로 몰래 돌아온 무솔리니는 다시 독일로 갔고, 9월 15일, 독일 라슈덴부르크 비행장에서 히틀러와 재회하게 된다.
이탈리아에서 탈출하고 독일로 온 무솔리니를 만난 히틀러는 그에게 이탈리아로 내려가 배신자들을 처단하고, 연합군과 싸울 준비를 하라고 명령한다. 9월 28일,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권세를 등에 업고 로마에서 북쪽으로 48km 떨어진 작은 마을 살로에서 괴뢰정권 살로 공화국을 출범 시킨다. 무솔리니는 반대했지만, 히틀러에 의해 강압적으로 자신을 해임한 원로의원 6명을 비롯한 18명의 각료 인사를 처형했다. 그 중에는 자신의 사위 갈레아노 치아노 백작도 있었는데 당시 무솔리니는 사위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나를 용서해라!”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1944년 6월 4일, 로마가 연합군에게 함락되면서 무솔리니는 사실상 살로 공화국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이래저래 도피생활을 하던 무솔리니는 1945년 4월 27일, 독일군 철수 대열에 숨어서 알프스를 넘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운 나쁘게도 빨치산들이 그를 발견해 체포당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4월 28일, 마을 헛간에서 총살당한다. 한편, 무솔리니의 애인도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발로 걸어나와 자신도 처형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에 따라 무솔리니와 함께 처형된다.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밀라노 미잘로 로레토 광장의 과거 공산당원들을 공개 처형하던 바로 그 교수대에 각료였다가 빨치산에게 처형된 각료 한 사람과 함께 세 사람은 거꾸로 매달려 밀라노 시민들에게 욕을 보이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 시신들은 가족 묘지에 안장되게 되었다.
한편, 무솔리니 퇴출 이후 이탈리아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선, 무솔리니의 집권 발판을 마련해 주고, 또한 그를 퇴출시켰던 빅토리오 엠마누엘 3세를 비롯한 정부 각료들은 독일군이 로마를 점령하자 바도글리오를 비롯한 대부분이 연합군에게 도망쳤다. 엠마누엘 3세는 전후 무솔리니를 등용했다는 여론이 들끓자 아들인 움베르트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집트로 망명했다가 1947년 향년 78세의 나이로 이집트 카이로에서 객사한다. 또 무솔리니의 뒤를 이어 수상에 임명된 바도글리오는 무솔리니를 감금시키고, 파시스트 인사들을 체포하는 숙청을 단행했다. 이후 연합군이 로마를 점령하자 수상직을 보노미에게 물려주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956년 향년 8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퇴출된 무솔리니를 따라 파시스트 군대를 이끌었던 그라치아니 원수는 전쟁이 끝나고 1950년에 19년 형이 언도되었으나 그 해에 바로 풀려났다. 그는 네오 파시스트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5년도 안되어 1955년, 로마에서 향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북아프리카에서 롬멜을 따라 큰 전공을 세웠던 조반니 메세 원수는 원수로 진급하기 전날, 연합군에게 체포되었지만, 신 이탈리아 정부가 세워져 연합군의 일원이 되면서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퇴역, 조용히 지내다가 1968년에 로마에서 향년 85세에 사망했다.
한 가지 더,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무솔리니가 체포된 직후 바로 그랑삿소에 감금된건 아니라는 점이다. 무솔리니는 체포된 후, 나폴리 서쪽 가에타 만에 있는 벤토테네 부근의 폰차 섬에 감금되었다. 그러다가 8월 8일, 사르데냐 북쪽 해안에 있는 마달레나 섬으로 옮겼다. 스코르체니가 무솔리니를 찾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모든 사실을 독일군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8월 11일 롬멜의 약식 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8/11
저녁 회의에서 총통은 뭇솔리니가 구금되어 있는 벤토테네 섬의 항공 사진을 면밀히 검토했다. 그는 뭇솔리니를 구출할 대책을 협의하기 위해 되니츠, 슈투덴트와 토의했다. 이러한 임무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므로 내게 주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모두 소용없는 짓이라고 생각한다.’(롬멜 전사록, 리델하트 저, 황규만 옮김)
8월 18일에도 스코르체니는 이미 마달레나 섬 상공에서 비행 정찰을 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이것을 눈치채고 재빨리 8월 28일에 무솔리니를 그랑삿소에 감금시킨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경찰을 이 주변에 너무 눈에 띄게 배치시켰고, 이것이 바로 스코르체니의 눈에 띈 것이다. 또한 이탈리아의 경찰 장관 칼미네 체니이제는 이미 스코르체니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미 망해 먹은 나라를 위해 옛 상전이던 무솔리니를 연합군에 팔아먹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눈을 감았던 것이었다. 결국 무솔리니를 감금하는데 이탈리아는 너무 허술하게 감시했던 것이다.
출처 - http://blog.naver.com/koreak878/140021983889
짤방1.2 - 무솔리니를 구출하는데 엄청난 공을 세운 스코르체니
<한쪽 얼굴의 상처는 학창시절 펜싱 경기 도중 생긴것으로, 학창시절에는 운동을 상당히 잘했다고 합니다. 1931년 SA 돌격대 가입으로 나치정권에 입문했으며, SS 무장친위대로 2차세계대전에 참전했습니다. 그가 부각되기 시작한것은 1943년 7월, 이탈리아 원로회에서 축출되어 감금되어 있는 무솔리니를 구출하는 것이었고, 스코르체니는 혼자서 무솔리니를 구출하는데 성공합니다. 그 이후로는 유고슬라비아에서 활동하던 티토와 파르티잔 부대들을 소탕하는데 공을 세우고, 무엇보다도 1944년 7월에 있었던 히틀러 암살사건을 저지하는데 큰 공을 세웁니다. 1944년 말기엔 헝가리 국경까지 근접한 소련군에게 헝가리가 항복하려하자, 헝가리 섭정 호르티의 아들을 납치해 헝가리를 45년까지 친독국가로 남게 만들었으며, 독일군의 발지공세 당시에는 미군으로 위장해 미군기지에 투입해 많은 활약을 했으며,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1945년초 미군에게 체포되었으나 1948년 7월 감옥을 탈출하여 스페인으로 잠입했고, 스페인의 프랑코 총통의 보호를 받으며 사업가로서 엄청난 부를 쌓아 백만장자가 되기에 이릅니다. 후에는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의 경호원이 되는 등 여러활동을 하다 1975년 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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