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대 그로스도이취란트(Großdeutschland) □
(그로스도이취란트의 상징, 프릿츠 철모)
베를린 경비연대
경비대 사령부
베를린 경비대
베를린 경비연대
그로스도이취란트 보병 연대
그로스도이취란트 제 1 보병 연대
그로스도이취란트 척탄병 연대
그로스도이취란트 기갑척탄병 연대
그로스도이취란트 보병 연대는 2차 대전 당시 활동한 독일 육군의 정예 전투 부대였다.
그로스도이취란트 연대는 가끔 무장친위대 소속으로 오해받기도 하나 명백히 육군 소속이며 매우 잘 장비된 부대로서 후에 그로스도이취란트 사단으로 승격된다. 이는 2차 대전 독일 육군 중 가장 장비가 잘 된 부대로 무장친위대 사단과 마찬가지로 장비 보급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스도이취란트 연대는 1940년 서부전선에 참전하여 프랑스 외 몇몇 나라에서 활동하였고 그 후엔 오로지 동부전선에서만 활동하였다. 그리고 1945년 5월, 필라우(오늘날의 발티스크) 근교에서 전멸되었다.
= 창설 및 초기 - 베를린 경비연대 =
베르사유 조약 이후 독일군은 최대 규모 100,000명으로 제한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치안과는 거리가 멀었다. 재향군인들은 지네 정당의 사병 집단으로 탈바꿈하였다. 공산당원들과 파쇼들은 길거리에서 패싸움을 일삼고 있었다. 쿠데타 위협은 이제 심각한 문제였다.
쿠데타 위협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경비연대는 1921년 초에 창설되었다. 약해빠진 정부를 지키는 것 외에도 연대는 이따금씩 열병식을 하거나 수도 경비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애석하게도 베를린 경비연대는 단명하여 1921년 6월 해산되었다. 그러나 곧 경비대 사령부라는 이름으로 재편되어 경비연대와 똑같은 임무를 수행하였다.
경비대는 7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각각의 중대는 총 7개의 사단에서 차출된 것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위배되지 않았다. 각 중대는 3개월씩 임무를 수행한 뒤 소속 사단으로 돌아갔다. 이런 식으로 경비대는 국방군(Reichswehr)를 대표하게 되었다.
사령부는 모아빗 막사에 차려졌으며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토요일 마다 사령부는 시민들을 위해 근위 의식을 개최하였다. 이 의식은 보통 굉장히 조용히 치르어졌지만 일요일, 화요일, 목요일엔 악대를 동원하여 막사에서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전쟁기념관까지 행진했다. 이 행사는 영국 버킹햄 궁전에서 행해지는 여왕 근위대 의식에서 삘을 받은 것이었다.
경비대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하 나치당)의 의장이 된 후에도 계속 유지하였다. 1934년에는 베를린 경비대로 재편되었고 이어서 1936년에는 본부와 행정 중대가 추가되어 총 8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1937년 6월, 부대는 다시 재편되어 베를린 경비연대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징병제가 부활하면서 더 이상의 다른 사단과의 연계는 필요치 않았다. 대신 개개의 병사는 6개월 이상 복무하여야 연대에 편성되었다. 그리고 연대 지휘 체계에 보급 중대가 새로이 추가되었다.
1차 대전 때에는 겉모습은 비록 하나의 국가였으나 대부분의 사단들은 각각 지역의 명칭을 따서 명명되었다.(작센, 프로이센, 바이에른, 바덴 등등...) 나치당 집권 하에 독일은 완전한 하나의 독일로서 거듭났다. 그러나 이것은 대독일로서 거듭나기 위한 나치당의 하나의 계획에 불과하였으며 그들은 모든 독일인들을 대독일이라는 문구 아래 단결시키고 게르마니아라고 명명될 수도, 베를린을 중심으로 대독일 즉 그로스도이취란트를 이룩하는 것을 원했다.
연대는 국가 인사나 중요 회담, 심지어 베를린 올림픽에서도 호위 임무를 맡았었다.
히틀러의 경호대가 친위대로 새로이 탄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대에서 차출된 소규모 인원들은 히틀러의 경호대로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총통과 함께 하는 자'(Führer Begleit)라 불렸으며 훗날 사단 규모로 불어나게 된다.
= 그로스도이취란트 보병 연대 - 프랑스 및 기타 나라 =
전쟁이 발발하기 몇달 전, 나머지 국방군(Wehrmacht) 부대들이 자르 지역,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지로 이동하고 있을 동안 베를린 경비연대 일요일마다 '운터 덴 린덴' 대로(베를린에 있는)를 열병식만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휴식은 오래가지 못했다.
1939년 첫 주에 히틀러는 연대에게 '보병 연대 그로스도이취란트'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부대에는 드디어 신교대가 생겨 기간병들이 배속되었고 다른 육군 부대(특정 지역에서만 징병을 하던)들과 달리 신병들은 독일 전역에서 몰려들었다. 그로스도이취란트 연대는 공식적으로 1939년 6월 14일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그 의식으로 수도의 거리에서 퍼레이드를 개최하였다.
연대는 1939년 9월 여전히 재편 중에 있었다. 덕분에 팔 바이스(Fall Weiß) 작전에는 참가하지 못해 소매에 조국의 이름을 새겨넣은 연대의 자존심에 약간의 타격을 주긴 했지만 1940년 5월에 연대는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Ewald von Kleist) 원수가 지휘하는 클라이스트 기갑군에 소속되어 팔 겔프(Fall Gelb) 작전에 창립 멤버(?)가 된다. 즉, 그로스도이취란트 보병 연대는 1940년 5월 10일, 드디어 서부전선에 참전하게 되었다.
작전 첫날 연대의 대부분은 제 10 기갑 사단에 편성되어 룩셈부르크를 거쳐서 벨기에 남부 외각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3 대대는 저 멀리 벨기에 북부에 공수부대로 동원되었다. 그로스도이취란트 연대는 뫼즈 강을 건너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스토느 마을 근교에서 프랑스 기갑 부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나 그럭저럭 잘 처리하였다.
그후 연대는 됭케르크를 향해 북쪽으로 진격하며 아라스에서의 영국군의 반격을 저지하였다. 연대는 세느 강 유역을 공격하기 위해 남부로 이동하기 전까지 됭케르크에서 주둔하였다. 프랑스는 리옹에서 항복하였다. 잠깐 동안 퍼레이드 때문에 파리에 머무르고 나서 제뢰베(Seelöwe) 작전 준비를 위해 북부 셀사세로 갔다. 그러나 제뢰베 작전이 무기한 연기된 후 그로스 도이취란트 연대는 지브롤터 공략 작전인 펠릭스(Felix) 작전 준비를 위해 프랑스 남부로 파견되었다.
= 유고슬라비아 및 바르바롯사 작전 =
펠릭스 작전이 취소되고 나서, 그로스도이취란트 연대는 루마니아를 향해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선 한창 유고슬라비아 공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연대가 맡은 대부분의 작전은 괴멸된 유고슬라비아 병력들을 추격하는 일이었다. 1 대대는 베오그라드 점령에 동원되었다. 이후 연대는 바르바롯사(Barbarossa) 작전 준비를 위해 북쪽 폴란드로 이동하였다.
소련 공략을 위해 그로스도이취란트 연대는 페도르 폰 보크(Fedor von Bock) 원수가 이끄는 중부 집단군에 편성되었다. 1941년 6월 27일에 국경선을 넘어 연대는 민스크를 공략하여 민스크를 완전히 포위하였다. 연대는 드네프르 강을 건너 옐냐로 진격하였다. 그곳은 굉장히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손실 또한 많았다. 옐냐 돌출부가 함락되자 연대는 키예프 전투에 참전했다. 연말에는 오룔 근처에 있는 오카 강을 사수하는 3개 보병 사단을 지원하였다.
겨울은 연대에게 많은 희생을 강요했다. 2월 초에는 피골이 상접하신 2 대대께서 그대로 녹았고 생존자들은 다른 대대에 합류하였다. 월말에 남은 두 대대는 하나의 확장 대대로 통합되었다. 9개월이 넘는 격렬한 전투를 겪으면서 연대는 드디어 전선에서 철수하였고 지원을 받았다. 와해된 대대는 회복하고 시작했고 연대는 몇 주간 달콤한 휴식을 취했다.
= 그로스도이취란트 제 1 보병 연대 =
(1942년, 그로스도이취란트의 활동)
1942년 4월 1일, 오룔 근처에서 재정비를 하면서 재편 및 확장을 하였다. 더 이상 연대가 아닌 사단으로 거듭나기 위해서였다. 그로스도이취란트 보병 사단. 기존 연대는 그로스도이취란트 제 1 보병 연대로 명명되고 사단을 구성하기 위해 그로스도이취란트 제 2 보병 연대가 추가되었다. 베를린에서 조직된 2 연대는 지원 부대 성격이 강했다. 기갑 대대와 돌격포 대대가 편성되었고 방공포, 포병, 공병이 더 많이 편성되었다.
베테랑들인 1 연대는 시작부터 새 연대와의 사이가 그닥 좋지는 않았다. 새 연대를 조직하는데 기존의 신교대가 하나도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두 연대가 만날 기회가 많이 없었고 서로를 좋지 않은 별명으로만 불렀다. 로렌츠(Lorenz, K.) 대령이 1 연대를 떠나 사단을 맡으러 가버리고 나선 이 불안정한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재편 후 그로스도이취란트 사단은 제 48 기갑군단에 편성되어 팔 블라우(Fall Blau) 작전, 즉 스탈린그라드 공격에 참여하였다. 사단은 성공적으로 돈 강을 건너 보로네슈를 점령하였다. 8월엔 도네츠 제방 북쪽으로 철수하였다.
= 그로스도이취란트 척탄병 연대 =
1942년 10월 1일, 1 연대는 그로스도이취란트 척탄병 연대로 개명하였다. 2 연대는 경보병 연대로 재편되었다. 소련의 우라누스(Uranus) 작전이 있은 후 연대는 르쉐프 근교에서 나머지 사단과 함께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야 했다.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사단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 상급대장의 실패한 스탈린그라드 구출 작전인 빈터게빗터(Wintergewitter) 작전에 동원되었다.
- 하르코프 -
1943년 1월에서 2월 동안, 그로스도이취란트 사단과 제 48 기갑군단은 제 2 무장친위대 기갑군단과 함께 세번째 하르코프 전투에 참전했다. 이 전투에는 제 1 무장친위대 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Leibstandarte Adolf Hitler) 사단과 제 2 무장친위대 사단 다스 라이히(Das Reich) 사단, 그리고 제 3 무장친위대 사단 토텐코프(Totenkopf) 사단이 함께 하였다. 하르코프 함락 후 사단 전체가 재정비 및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이 때 사단은 처음으로 1개 중대의 6호 1형, 즉 티거를 지급받았다.
이 기간에 그로스도이취란트 척탄병 연대 1 대대는 Sd.Kfz. 251(하노마크라고 불리우는 그것)를 장비하게 된다. Sd.Kfz. 251는 주 기능은 지휘 차량이지만 보병 수송용으로 쓰이기도 했다. 하르코프에서 전투가 한창일 때 옷토에른스트 레머(Otto-Ernst Remer) 소령이 이끄는 대대는 83대의 Sd.Kfz. 251로 완벽히 기계화되어 작전에서 많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경보병 연대는 1944년 봄까지 장갑차를 지급받지 못했다.
= 그로스도이취란트 기갑척탄병 연대 =
1943년 6월, 장갑 수송 차량과 티거가 추가되면서 사단이 그로스도이취란트 기갑척탄병 사단으로 개편되고 1 연대 역시 그로스도이취란트 기갑척탄병 연대로 개편되었고 2 연대도 그로스도이취란트 기갑경보병 연대로 개편되었다.
- 쿠르스크 -
재정비된 사단은 헤르만 호트(Hermann Hoth) 상급대장이 이끄는 제 4 기갑군에 편성되어 치타델(Citadel) 작전에서 무장친위대 기갑군단과 다시 함께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그들은 드디어 지상 최대의 전차전인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됐다. 작전 준비 기간 중에 사단은 1개 대대의 5호 D형을 추가로 지급받아 지휘 아래에 놓았다. 작전이 개시되자 사단은 돌출부의 남쪽 측면을 뚫기 위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새 판터들은 가히 재앙에 가까웠다. 전장에 닿기도 전에 엔진에 불이나서 퍼지기 일수였다. 이러한 맹점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1943년 7월 18일 토마로프카로 퇴각할 때까지 열심히 싸웠다.
- 방어전 -
빌어먹을 쿠르스크 공세 이후 사단은 중부 집단군으로 돌아왔다. 사단은 카라체프에서 큰 전투를 겪고 8월 말에 제 48 기갑군단으로 돌아왔다. 사단은 우크라이나를 거쳐 하르코프, 벨고로드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며 드네르프 강까지 퇴각하였다. 연말에는 키리보이록 동쪽에 있는 미추린록에서 강력한 힘 깨나 쓰는 소련군이랑 송년회를 벌였다. 그 기간동안 사단은 '소방대'(die Feuerwehr)라는 별명을 얻는다.
= 1944년 =
1월까지 사단은 키리보이록 근교에서 전투를 하고 재충전을 위해 서부로 잠깐 철수했다. 이 기간에 판터 26대가 기갑 연대에 새로이 들어왔다. 그리고 1 대대는 훈련을 위해 프랑스로 갔는데 노르망디 상륙 이후까지 사단에 합류하지 못했다.
기갑척탄병 연대는 1944년까지 4개 대대 편성이었으나 6월달에 3개로 줄어들었다.
몇 달간 사단은 최전방에서 위기 상황을 넘나들었다. 기갑 연대를 제외한 사단은 드니스터에서 베사라비아까지 힘든 전투를 겪어야만 했다. 5월 초, 사단은 제 57 기갑군단의 일원으로서 루마니야 야쉬 근교의 타르굴 프루모스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곳은 훗날 냉전 시대에 나토의 방어 요충지 중 하나가 된다. 디터 번하겐(Dieter Bernhagen) 소위가 이끌던 기갑척탄병 연대의 1 중대는 소련 기갑의 공격에 마지막 한 명까지 쓸렸다. 앞서 나왔던 연대지휘관 로렌츠 대령은 전선에서 직접 지휘차량을 타고 혼자 놀기를 좋아해서 백엽 기사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
그후 그로스도이취란트 사단은 포둘 근처에서 싸우다가 7월 초에 잠깐 쉬고 북부 루마니아로 다시 투입되었다. 7월 말에는 동프로이센 지방으로 옮겨가서 몇 달간 동프로이센 지방과 발트 제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을 전전했다. 인명이나 물질적으로나 막대한 희생이 뒤따랐다. 그나마 성공적이었던 빌코비슈켄에서는 기갑 연대와 기갑경보병 연대가 측면에서 지원하는 가운데 기갑척탄병 연대가 선봉에 서 1 대대의 장갑차들이 마을을 접수하였다.
그러나 승리에 기뻐할 겨를도 없이 사단은 독일 본토로 후퇴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실질적인 전멸을 맞게 될 메멜 교두보 전투에 떨어졌다.
= 1945년 =
3월달, 그로스도이취란트 사단은 약 4,000명 정도로 감소하였다. 무너지는 메멜 교두보에서 나룻배를 타고 간신히 탈출한 인원들이었다. 그들은 필라우에 상륙하여 배수진을 쳤다.
4월 25일, 사단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필라우 근교에서 전멸하였다. 몇 백명의 생존자만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으로 탈출하여 영국군에 항복했다. 그러나 나머지 대다수는 낙오되어 소련군에게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굴락에 있는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거의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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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 busut
피번역물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Infantry Regiment Großdeutschland'( http://en.wikipedia.org/wiki/Infantry_Regiment_Gro%C3%9Fdeutschla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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