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1943 년의 겨울동안 스탈린그라드에서의 파멸적 패배를 겪은 후 독일군은 놀랍게도 그 후유증으로부터 회복하여 1943년 7월 5일, 동부전선 사상 가장 야심 찬 Zitadelle 작전을 개시함으로서 시작된 쿠르스크 전투에는 양 측이 약 6000여 량의 전차, 4000여대의 항공기, 200만여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오늘날까지 역사상 최대의 전차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전투의 와중에서도 최고조의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7월 12일에 전개된 프로호로프카의 대 전차전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 이제까지의 많은 역사가들은 이 프로호로프카 전투를 독일군의 막강한 화력과 중전차들에 대한 소련군의 한층 진보된 전술의 승리라고 죽 기술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새로운 증거들은 이 전투를 기존의 시각과는 사뭇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원래 독일군의 Zitadelle 작전 목적은 서쪽으로 약 100km 에 걸쳐 뻗어있는 대돌출부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귄터 폰 클루게 원수의 중부 집단군(Heeresgruppe Mitte)이 발터 모델 상급대장 지휘하의 제 9군을 주축으로 하여 이 돌출부의 북쪽을 치기로 하였다. 여기에는 한스 초른의 제 46 기갑군단을 우익으로 요제프 하르페의 제 41 기갑군단을 좌익으로 하여 요아힘 레멜젠의 제 47 기갑군단이 쿠르스크의 방향으로 남진,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의 제 4 기갑군과 베르너 켐프 기갑대장의 켐프 분견군(Armeeabteilung Kempf)으로 구성된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의 남부 집단군(Heeresgruppe Sued)와 조우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독일군에 대항하여, 소련군은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가 지휘하는 중앙 방면군과, 니콜라이 바투틴의 보로네지 방면군이 맞서고 있었다. 이 중 중앙방면군은 우익을 니콜라이 푸코프의 제 13군 및 갈리닌의 제 17군으로 보강하여 돌출부 북쪽을 방어하였으며, 남쪽에서는 보로네지 방면군이 3개 군을 독일 남부 집단군 전면 방어선에 배치하고 2개군을 예비로 배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치스챠코프의 제 6근위군과 슈밀로프의 제 7근위군은 중앙 및 좌익을 지키고 있었다. 또 한 쿠르스크 동쪽에선 이반 코네프의 스텝 군관구 (1943년 7월 10일에 스텝 방면군으로 개칭됨.)가 독일군의 돌파를 저지하고 역습을 가할 예비대로 대기한 상태였다.
독일군 입장에서 만약 이 Zitadelle 작전이 성공한다면, 약 5개군 이상의 소련군 전력을 격파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런 대승리는 소련군 측이 기도하고 있는 여러 작전들을 크게 지연시킬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독일 국방군(Wehrmacht)에게 동부전선에서 보다 확실한 재정비를 한 여유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런 야심찬 기도에도 불구하고 북익을 담당한 모델 지휘하 제 9군의 공격은 극히 지지부진하여 소련군의 전방위선도 돌파하지 못한 채 극심한 소모전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남익에서도 캠프 분견군 예하 헤르만 브라이트의 제 3 기갑군단이 초반에 격심한 소련군의 저항에 휘말렸다. 반면 호트의 제 4 기갑군은 비교적 순조로운 진격을 보여 7월 11일에 프로호로프카를 장악하고, 프젤강 상의 교두보를 확보하며 오보얀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였다. 프젤강은 만슈타인의 기갑 부대와 쿠르스크 사이의 마지막 자연 장애물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제 4 기갑군의 북방으로의 공격은 파울 하우저의 제 2 SS 기갑군단, 오토 폰 크노벨스도르프의 제 48 기갑군단 및 오트의 제 52 군단에 의해 이뤄지고 있었다. 이중에 하우저의 제 2 SS 기갑군단은 당시 3개의 기갑사단 - LSSAH, Das reich, Totenkopf - 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물론 이들 3개 사단이 명목상으로는 기갑척탄병사단(Panzergrenadier-Division)이었으나 이들은 모두 Zitadelle 작전 개시 당시 100량이 넘는 전차들을 장비하고 있었다. 또한 크노벨스도르프의 제 48 기갑군단은 제 167 보병 사단, 제 332 보병사단, 제 3 기갑사단, 제 11 기갑사단, Grossdeutschland 기갑척탄병사단, 기갑여단 "데커(Decker)" (200량의 판터를 장비한 제 10 전차여단을 일컫는 것임.)로 구성되었으며, 오트의 제 52 군단은 제 25 보병사단, 제 57 보병사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러한 하우저의 프로호로프카를 향한 위협에 대항하여 파벨 로트미스트로프의 제 5 근위 전차군이 도착하였다. 이 제 5 근위 전차군은 남쪽지구에서 그제껏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가장 강력한 기갑예비로서 약 650량에 이르는 전차를 장비하 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기갑예비인 카투코프의 제 1 전차군은 이미 프젤강 남쪽에서 한창 교전중에 있었다. 격렬한 반격에도 불구하고 당시 카투코프의 군 만으로는 프젤강을 향한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힘들었다. 당시 제 1 전차군 소속 제 6 전차군단 경우는 원래 200량이 넘는 전차를 장비하고 있었으나 7월 10~11일 경에는 약 50량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으며, 다른 2개 군단도 역시 심각한 손실을 겪고 있었다.
7월 10일, 프리쓰 지휘하의 제 3 SS 기갑 척탄병사단 "Totenkopf"가 결국 프로호로프카 서쪽에서 프젤강 상의 교두보를 장악하였으며, 7월 11일엔 급히 가설된 부교를 넘어 전차들이 교두보로 진출했다. 당시 카투코프는 남아있는 기갑전력을 긴급히 집결하여 오보얀 턱 밑으로 다가오던 제 48 기갑군단을 저지하고, 프젤강상의 교두보에 반격을 가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제 33 소총군단 및 제 10 전차군단을 증원받아 카투코프는 Totenkopf 사단을 향해 연속적인 공격을 퍼부어 대었다.
한편 7월 11
일 오후동안, 하우저는 그의 예하 사단들에게 본격적인 프로호로프카 공격을 준비시키고 있었다. Totenkopf 사단은 공세의 좌익쪽을 단단히 붙잡아 매는 역할을 하고, 그동안 테오도어 비쉬의 LSSAH 사단은 중앙에서 프로호로프카 로 향하는 철도와 프젤강 사이에서 집결하고 있었다. 또한 발터 크뤼거의 Das Reich 사단은 테트레비노 수km 남쪽, 프로호로프카의 남서쪽의 군단 우익 공격지점으로 이동중이었다.
이러한 하우저 휘하 SS 사단들의 공격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소련측에서도 맹렬한 공격준비가 함께 이뤄지고 있었다. 7월 11일, 제 5 근위 전차군은 7월 7일 부터 개시된 300km가 넘는 행군 끝에 프로호로프카 지구에 도착하였다. 이 제 5 근위 전차군은 제 18 전차군단, 제 29 전차군단, 제 5 근위 기계화군단으로 구성 되었다. 또 이 로트미스트로프 휘하 650여량의 전차에 제 2 전차군단 및 제 2 근위 전차군단이 증원되어 당시에 제 5 근위 전차군의 전차 전력은 무려 850여량에 이르렀다. - 이중 약 501량이 T-34 였다.
원래 제 5 근위 전차군의 주 임무는 쿠르스크 전투를 정지시킨 후에 이어질 소련군의 대역습 - 루미얀체프 작전 - 을 주도하는 것이었고, 부차적으로 소련군이 돌파당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쓰여질 예비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트미스트로프의 군이 이렇게 빨리 투입된 것은 소련군이 당시 얼마나 프젤강 지구의 상황에 위협을 느꼈는지를 잘 보여준다. 결국, 제 5 근위 전차군의 도착으로 인해 프로호로프카 전투의 무대가 완성되게 된다.
프로호로프카 전투는 2차대전 중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많은 전투들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전투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전투는 대단히 많은 글과 책들, 역사 다큐멘터리물 등에서 다뤄져왔다. 그러나 이런 자료들에서는 그 정확도가 대단히 많은 편차를 보인다. 어떤 자료들은 단지 조금 불완전한 정도이지만 심지어 어떤 것은 거의 소설 수준이다. 이들에서 나타나는 대략적인 전투의 모습은 다음과 같 다.
먼저 7월 12일, 하우저 휘하 3개 SS 사단들이 프로호로프카에서 서로 바싹 붙어 프젤강과 철도사이의 지역으로 몰려 들었으며, 여기에는 75mm포를 장비 한 5호전차 판터 및 88mm포를 장비한 6호전차 티거 수십 대를 주축으로 약 500 ~ 700량의 독일군 전차들이 투입되었다. 한편 이때 소련군 쪽에서는 급작스레 수백량의 T-34 전차를 SS 사단의 전차부대 한가운데로 맹진시켜 독일군을 온통 혼란에 빠뜨리면서 아주 가깝게 접근, 티거의 88mm 포를 무력화시키고 독일 전차들의 방어력을 극복하면서 수 백량의 독일 전차들을 격파했다. 소련군의 이런 대담한 전술은 독일군 측에게 참담한 패배를 안겨주었으며, 무력화된 SS 기갑군단은 400여량에 이르는 전차들 - 약 70~100여량의 티거와 판터를 포함 - 들을 전장에 버려둔채 퇴각했다. 이러한 대손실은 SS 사단들의 전투력을 완전히 꺾어놓아서 결국 호트의 제 4 기갑군은 남익에서의 일체의 승리의 가능성 조차 상실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드라마틱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전투 시나리오는 사실상 거의 다 전설에 불과하다. 워싱턴 D.C.의 National Archives에서 열람 가능한 제 2 SS 기갑군단의 일일 전차전력 보고서와 전투 일지들에 관한 마이크로 필름 자료들을 잘 살펴보면, 프로호로프카 전투를 재평가하도록 만들 수 밖에 없는 정보들을 얻게 된다. 이러한 기록들에서는 우선 하우저의 제 2 SS 기갑군단은 전투개시 당시에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적은 수의 전차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1943년 7월 12일엔 단지 보통수준의 손실만을 겪었다는 것이다. 이들 자료들이란 군단장이 예하사단들의 정확한 전투력을 평가할 수 있도록 작성된 것들이기에 꽤 정확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정보들을 고려해본다면, 최소한 독일군은 이 돌출부 남쪽에서 제한적인 성공 정도는 거뒀다고 볼 수 있다.
프로호로프카 전투에 참가한 SS 사단들의 전차수에 관해 몇몇 권위자들은 약 700량까지도 거론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대략 300 ~ 600량 수준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 쿠르스크 전투개시 전을 따져봐도 제 2 SS 기갑군단은 700량 은 커녕 500량 이상의 전차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7월 4일에 하우저의 3개 SS 사단의 총 전차 전력은 많은 지휘전차를 포함하여 327량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7월 11일에는 군단의 총전력으로는 211량의 전차가 기동가능했다 - Totenko
pf 사단이 94량 기동가능, LSSAH 사단이 56량 기동가능, Das Reich 사단이 61량 기동가능. 여기에 손상된 전차, 수리중인 전차는 포함이 되지 않았다. 이 가운데 에 프로호로프카 지구에서 기동 가능하던 티거는 단 15량에 불과했고, 판터는 단한대도 가용하지 않았다. SS 사단들의 판터대대들은 1943년 7월에 모두 독일에서 편성중에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것이 7월 13일, 프로호로프카 전투 다음날의 제 4 기갑군 보고서에서는 제 2 SS 기갑군단에서 163량의 전차가 기동가능하
다고 나타나 있다. 결국 7월 12 일의 손실은 단 48량이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수리된 전차들이 전장에 복귀하는 등의 요인을 생각하면 실제 손실은 좀 더 컸으리라 여겨진다. 보다 자세하게 각 전차 차종의 손실 통계를 연구하면, 12일의 군단 손실은 대략 70량 정도로 생각 된다.
그에 반하여 소련군의 전차손실은 그간 비교적 양호한 수준이라고 믿어왔던 것과는 달리 실로 처참한 수준이었다. 1984년에 로트미스트로프가 쓴 제 5 근위 전차군의 역사에 쓰여진 바에 의하면 7월 13일에 제 5 근위전차군은 약 400량의 수리가능한 전차 손실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 밖에 완전히 격파되었거나 회수할 수 없는 전차들에 관해서는 정확한 수치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몇몇 독일측 기록에서는 하우저가 LSSAH 사단 지구에서만 유기된 소련군 전차 93량을 분필로 세어 봤다고 언급되어있다. 또 다른 소련측 기록에서는 제 5 근위 전차군의 7월 13 일 당시 전차전력 수준을 약 150~200량으로 잡고 있으며, 결국 그들은 650량에 가까운 전차를 잃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대손실로 인해 스탈린은 대단한 책망을 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제 5 근위 전차군은 공격을 재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로트미스트로프는 그의 잔여전차들을 프로호로프카 서쪽의 보병진지 사이사이에 파묻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프로호로프카 전투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모든 3개 SS 사단들이 서로 바짝 붙어서 프젤 강과 철도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 프로호로프카 방향으로 기동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단지 LSSAH 사단만이 프로호로프카 직서쪽에 있었고 또 이 사단만이 프로호로프카를 공략하였다. 제2 SS 기갑군단의 전투지역은 여러 많은 자료들과 달리 약 15km 정도에 걸쳐, Totenkopf 사단이 좌익에, LSSAH 사단이 이 중앙에, Das Reich 사단이 우익에 뻗어 있었다. Totenkopf 사단의 기갑 전력 같은 경우는 프젤강 교두보에 투입되어 이곳을 향한 소련군의 맹반격을 막아내고 있었기에 프로호로프카 방면으로 전환될 여지가 없었다. LSSAH 사단만이 마을 서쪽 외곽으로 진격하고 초기 소련군의 공격을 막아냈던 것이다.
이미 7월 12일 아침 일찍, LSSAH 사단의 부대들은 엄청나게 큰 엔진 소음이 들리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었다 - 소련군 기갑부대의 대규모 집결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침 5시가 넘어설 무렵에 수백대의 소련군 전차들은 보병들을 실은 채 40~50량씩 짝지어 프로호로프카 방면에서 출몰하기 시작했다. 이들 T-34 및 T-70 전차들로 구성된 제파들은 일제히 독일군 진영쪽으로 고속질주에 돌입했으며 이어 독일군쪽에서는 기관총을 퍼부으며 철갑탄과 유탄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전차에 타고 있던 다수의 소련군 보병들은 급하차하여 엄폐하였으나, 각 전차들은 이를 아랑곳 하지않고 계속 전진하였다. 하지만 SS 기갑 부대들과의 초기 접촉에서 격파되지 않았던 전차들도 차례차례 종대전진을 하는 와중에 계속 독일군에 의해 격파되었다.
결국 소련군의 초기공격이 정지하자 LSSAH 사단은 기갑전력을 프로호로프카 시가 방향으로 밀어붙였으며, 로트미스트로프의 예비부대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 때 소련군 제 181 전차연대에 의한 공격은 수 대의 티거들에 의해 격파되었다. - 이들 제 1 SS 기갑연대 제 13 (중전차)중대 소속으로는 대전 중 가장 성공적이던 전차 지휘관 미하일 비트만도 끼어있었다. 비트만과 LSSAH 사단 티거부대들은 장거리에서 소련군 전차연대들이 반격을 꾀할 때 강력한 후방지원을 퍼부으며 전진 하였다. 확 트인 개활지형에서 티거 정면으로 돌입하는 소련군의 공격은 자살적 이었다. 티거의 전면 장갑은 T-34 의 76mm 포로 장거리에서 관통하기란 불가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벌판은 불타오르는 T-34및 T-70 전차들이 어지러히 널려 있게 되었다. 제 181전차연대의 역공은 분쇄되었던 것이다. LSSAH 사단의 공격은 이날 늦게 로트미스트로프가 그의 마지막 예비대인 제 5 기계화 군단을 투입함으로서 간신히 정지시킬 수 있었다.
Das Reich 사단은 이 날 공격을 프로호로프카 남서쪽 수 km 지점에서 개시하였으며, 얼마 안있어 제 2 전차군단과 제 2 근위전차군단의 강력한 반격을 받게 되었다. 독일군 전진 축을 따라 곳곳에서 전투가 개시되었고 보병과 대지 공격기에 의해 지원되는 20~40량씩의 소련군 전차들은 Das Reich 사단 기갑연대의 창 끝과 계속 충돌하였다. 로트미스트로프는 계속 그의 기갑부대를 연속투입하였으며 전투는 그날 내내 계속되었다. 결국 전투는 소련군 기갑부대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으며, Das Reich 사단은 비교적 적은 전차손실을 입은채 밤새 서서히 동쪽으로 전진하였다.
한편 제 2 SS 기갑군단 좌익에서는 소련군 제 1 전차군이 Totenkopf 사단이 확보하고 있던 교두보를 분쇄하고자 무던히 애쓰고 있었다. Totenkopf 사단은 소련군 제 33 소총군단의 지원을 받고 있던 제 31 전차군단, 제 5 전차군단의 공격을 계속 받아쳐내었으며 이런 격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카르타셰프카에서 프로호로프카에 이르는 가도상으로 진출하였다.
이렇게 소련군 기갑부대의 막대한 손실로 특징지워진 전투는 7월 12일 내내 어느 한 쪽의 결정적 승리 없이 계속 이어졌다. 이것은 많이 알려진 동부전선의 명 저들에서 독일군의 참패로 끝난 하루였다는 것과 상반된다. 이들 저자들은 당시 전장에 격파된 수백량의 독일군 전차들이 널려있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소련군은 SS 사단들의 수리부대도 쓸어버렸다고 기술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프로호로프카 주변의 전투들은 이후로도 며칠을 더 끌었다. Das Reich 사단은 7월 16일까지도 서서히 동쪽으로 소련군을 밀어내고 있었고, 이 전진으로 인해 7월 14일 제 3 기갑군단은 제 2 SS 기갑군단과 조우하여 프로호로프카 남쪽에서 수개 소련군 사단을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Totenkopf 사단은 카르타 셰프카-프로호로프카 가도에 도달한 후에도 북쪽의 전술적으로 중요한 언덕들 몇 군데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들은 더 이상 전과확대되지 못하였다. 바 로 히틀러의 새로운 결정 때문이었다.
소련군이 새롭게 미우스강 전선과 이쥼 돌출부 방면에서 공격을 개시할 징후가 보인다는 보고와, 영미 연합군이 시칠리섬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히틀러는 Zitadelle 작전의 취소를 결정하게 된다. 이에 만슈타인 원수는 작전취소를 극력 반대하며, 그의 남부 집단군이 마저 교전중이던 두 개의 소련군 전차군을 완전히 격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때 남부 집단군 수중에는 경험많은 3개 기갑사단으로 구성된 제 24 기갑군단이 아직 쓰이지 않은 예비대로 즉각 투입가능한 상태로 대기중에 있었다. (역자 주: 제 24 기갑군단에는 제 17 기갑사단, 제 23 기갑사단, SS 기갑척탄병사단 "Wiking" 이 속해 있었다.) 이 군단은 프젤강 교두보에서 발진하거나 프로호로프카 동쪽에서 프젤강을 도하하여 소련군 제 5 근위 전차군 후방 깊숙히 공격해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는 이미 남쪽 지구에 가용한 모든 소련군 기갑부대들이 투입된 상황이었고, 소련군은 전선의 전면붕괴를 각오하지 않고서야 이들을 마땅히 후퇴시킬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였다. 만슈타인은 정확하게 프로호로프카 지구에서 소련군의 작전 및 전략 기갑부대를 확실히 섬멸시킬 수 있는 기회가 왔음을 포착했던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공격을 계속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벨고로드 - 하르코프 남쪽지구에서 예견되는 소련군의 공세에 대처하고자 제 2 SS 기갑군단 예하 사단들을 분산시켜 버렸다. 그래서 7월 17~18일의 밤중에 제 2 SS 기갑군단은 프로호로프카 일대에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로서 프로호로프카의 전투는 독일의 전차손실 때문이 아니라(7월17일에 하우저는 200량 이상 작전가능한 전차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히틀러의 작전지속 의지의 결여로 그 종막을 고하게 된다. 아직 SS사단들은 전의에 충만한 상태였다 - 3개 SS 사단중 2개가 그해 나머지 여름 내내 남부 러시아에서 효과적인 전투를 치뤄냈다. LSSAH 사단은 이탈리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반면 Das Reich 사단과 Totenkopf 사단은 동부전선에 남게 되었다. 이들 2개의 잔여사단과 LS
SAH 사단을 대신한 제 3 기갑사단은 제 6 군 지구로 이동, 7월 31일부터 8월 2일까지 미우스강 전선에서 강력한 소련군 교두보를 제거하는 반격 작전을 수행하였다 . 그후 휴식없이 이 3개 사단은 1943년 8월 초에 보고두코프 지구로 이동했다. 여기서 이들은 제 3 기갑군단의 지휘하에 제 5 SS 기갑척탄병사단 "Wiking"을 지원받아 3주간의 격전끝에 쿠르스크 이후에 벌어진 소련군의 반격작전 - 루미얀체프 작전 - 을 저지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들은 쿠르스크 전투 이후 전차 503 대 수준의 전력으로 회복된 로트미스트로프의 제 5 근위전차군의 공세와, 또 한 전차 542대 수준의 전력으로 회복된 제 1전차군의 주공을 맞아 싸웠던 것이다.
7월 말까지 로트미스트로프에게 남은 전차라곤 단 100량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카투코프의 경우는 8월 마지막 주에 단 120량의 전차가 가용한 상황이었다. 이런 일련의 작전 중에 독일군에겐 사단당 55량 이상의 전차가 작전 가능했던 적이 없었으나, 이들은 수 개 소총군단의 지원을 받는 소련군의 2개 전차군의 공격을 계속하여 받아친 것이다.
Totenkopf 사단은 하르코프-폴타바 철도를 향한 제 1 전차군의 모든 공세를 차단하고 방어해냈다. Das Reich 사단은 보고두코프 남쪽에서 소련군 2개 전차군단을 내던져 버렸으며 하르코프 서쪽을 향한 로트미스트로프의 마지막 주공을 꺾어 버렸다. 그리하여 제 3 기갑군단은 루미얀체프 작전 전체를 막아내었다.
어쨌거나, 하르코프 실함 이후 독일군 전선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급속히 강력한 예비대들을 추가로 재편성하고 전선에 투입하였으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드네프르강을 향한 공격을 재개하였다. 독일육군(Heer)과 Waffen-SS의 기갑사단들은 7~8월 내내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하계공세의 손실 이후 하르코프-벨고로드-폴타바 전선을 고수하기에는 독일군의 전력은 너무 약했다.
이런 늦여름에 SS 사단들이 벌인 작전들로 판단해 볼 때 이들이 결코 프로호로프카에서 격파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전투의 재평가는 만약 만슈타인의 기갑예비들이 그가 의도했던대로 쓰일수 있었다면 가능할 법도 했던 독일군의 성공을 생각해 볼 만한 여지를 준다. 
사실 과연 그랬다면 러시아 전선의 상황이 얼마나 바뀔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번 추측해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이다. 만약 남부집단군의 기갑 예비가 사용되어 제 5 근위 전차군과 제 1 전차군을 포위, 섬멸할 수 있었다면 독소전의 결과는 아마도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비록 1943년 여름 내에 전쟁을 끝내 버린다는 것은 독일군의 능력 밖이었다손 치더라도, 이런 남부 지구에서의 제한적인 승리는 소련군의 차후 전략적인 대 작전들을 몇 달 이상 늦출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러한 여유가 독일군이 충분한 전력을 서부로 이동시켜 1944년 6월 6일의 영미 연합군의 침공을 분쇄할 수 있을만큼 길었을까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그러나 소련군이나 독일군이 전차를 몇대 보유하고 있었건, 차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간에,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확실하다. 그것은 제 2 SS 기갑군단이 7월 12일 프로호로프카 탈취 실패와 기갑 예비의 잘못된 사용 이후에 독일군 제 4 기갑군의 공격력은 어마어마하게 저하되었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Zitadelle 작전을 포기한 바로 그 7월 13일,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전략적인 수준의 사태 향배에 영향을 끼칠 마지막 기회를 상실하였다.
또 재미있는 것은 왜 이제까지 프로호로프카에서의 독일군의 전차 손실에 관한 정보가 제대로 나오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1차 사료 정보의 부족 - 특히 동부전 선에서의 제 2 SS 기갑군단 기록 - 때문에 그간 기존에 나온 동부전선 관련 연구들의 잘못된 기술과 인상을 정정할 증거가 없었다.
Waffen-SS 부대들의 동부전선 작전 기록은 1978~1981년까지도 기밀해제가 되어 있지 않았었다. 그때까지 이미 동부전선에 관한 주요한 많은 저작들이 출간된 상태였고, 이후의 저자들도 기존 저작들의 전투 자료들을 그대로 인용한채 부가적 인 연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동부전선에서 가장 잘 알려진 전투중의 하나는 막상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던 것이다. 프로호로프카 전투는 독일군의 주요한 패배로 믿어지고 있으나 실제는 정반대로 막대한 전차손실을 입은 소련군 쪽의 패배였던 것이다.
만슈타인이 훗날 말한대로, 프로호로프카 전투는 분명히 히틀러의 결정에 의한 "잃어버린 승리 (verlorenne Siege)"였다. 이렇게 의지의 가치를 가장 중시했던 독일의 독재자가 막상 1943년 7월 남부 우크라이나에서 그 자신의 의지를 잃어버 린 것은 연합군 측으로서는 큰 다행이었다. 만약에 만슈타인이 프로호로프카 지구에서 소련군 2개 전차군에 관한 공격을 계속할 수만 있었다면 그는 1943년 3월 하르코프를 탈환한 반격작전보다도 소련군에게 더욱 큰 피해를 입히는 승리를 거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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