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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262의 데스 카피 -_- 황국 2호병기 키카

티안무 2006.03.09 19:36:13
조회 6991 추천 0 댓글 32

나카지마(中島) 황국 2호 병기 시제(試製) 특수공격기 키카(橘花) Nakajima empire number 2 weapon experiment special attacker Kikka 1. 제트 시대의 개막 세계최초로 실용적인 제트엔진이 개발된 것은 1930년, 23세의 젊은 영국 공군장교 프랭크 휘틀(Frank Whittle)에 의해서였습니다. 비록 최초의 가스터빈 제트엔진의 특허를 취득하긴 했으나 아직 이걸 실용화시킬 제작사도, 공공기관도 없는 상황에 휘틀은 고작 5년 후인 1935년에 가족의 병환과 출산으로 단돈 5파운드의 특허권 갱신비용마저 낼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러나 다행히 1938년 휘틀의 엔진에 매력을 느낀 왕립공군이 1,900파운드의 비용을 지불하고 특허권을 획득. 1941년 5월에 글로스터 E-28/29의 비행이 성공하게 됩니다. [이 로맨스그레이가 바로 휘틀입니다;;] 한편 독일에서도 제트엔진의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개발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일개 대학생의 손에 이루어졌습니다. 1936년 괴팅겐 대학의 학생인 24살의 한스 요하임 파브스트 폰 오하인(Hans Joachim Pabst von Ohain)이 가스터빈 제트엔진의 개발을 대학에 건의하여 연소실험에 성공. 차기 주력기 개발에 연거푸 헛물을 들이킨 하인켈을 방문해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오하인이 설계한 HeS.3B 터보제트엔진을 단 He-178이 비행에 성공하게 됩니다. 이는 1939년의 일로 영국보다 무려 2년을 앞선 괄목할 성과였으나 독일공군은 제트기의 가능성에 미온적으로 반응해 대대적인 제트기 개발연구로 이어질 순 없었다고 합니다. Me-262의 양산이 시작된 것은 이로부터 4년 후인 1943년의 일이었지요. [위로부터 인류 최초의 제트기 He-178과 2등인 E-28/29입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제트엔진의 개발이 시작된 것은 해군 다네가시마 토키야스(種子島 時休) 기술 중좌부터였습니다. 서구에서 개발하는 가스터빈 제트엔진에 큰 흥미를 가진 다네가시마 중좌는 1932년 해외 주재무관 근무 당시 스위스의 브라운 보베리(Brown Boveri) 사(社)를 방문, 1934년 11월 본국에 [항공기용 가스터빈]를 제출합니다. 이 보고서는 당시 항공기 개발에 전력을 가하던 일본해군에게 큰 흥미를 일으켰고 다네가시마 중좌는 귀국 이후 1938년 항공기술창(航空技術廠)에 배속되어 제트엔진 연구를 시작합니다. 그 후, 차기 주력전투기 개발 등의 산적한 문제들에 밀려 일본의 제트엔진에 대한 연구는 이렇다 할 진전이 미루어졌지만 그렇다고 다네가시마가 제트엔진의 실용화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요.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이 되어 다네가시마는 제트엔진추진에 대한 하나의 아이디어를 얻어 상부에 건의했고 이를 전문적으로 추진할 팀을 발족시킵니다. 2. 일본의 제트엔진 연구 제트엔진의 개발은, 엔진의 열분사의 가속계산, 수조의 실험에서 얻은 추진결과로부터 시작해 각종 실험결과를 모으며 이에 따른 이론으로 추진됩니다. 어느 정도 제트엔진의 실용화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하자 다네가시마는 그 방식으로 축류송풍기(軸流送風機 - 압축기를 이용한 방식)를 사용하는가, 원심(遠心)방식을 사용하는가, 양자의 혼용인가에 대해 약간의 고민이 있었지만 일단 원심방식이 채택되어 일본최초의 시험제작 제트엔진 Ne-10형이 완성됩니다. 그러나 벤치 테스트(bench test)에 들어간 Ne-10은 순조롭게 가동하던 중 갑작스런 진동과 과열문제로 터보 팬이 파손되고 그 파편에 연구원들이 목숨마저 잃는(...할 말 없군요. 우리나라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국산발칸 실험하던 중 대통령 앞에서 사람이 죽는 사고가 일어나긴 했지만) 사고가 발생하는 등 실패작으로 판명됩니다. 그러나 연구진은 서서히 증가한 추진력으로 보다 향상된 제트엔진개발의 가능성에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1944 년의 봄 무렵에는 이미 일본의 전세가 헤아릴 수 없이 악화되었고 일거에 이를 만회하기 위한 신형결전병기를 개발하려는 노력에 필사적으로 매달립니다. 무엇보다 항공기를 띄울 연료부족에 시달린 일본은 이전과 같은 가솔린 연료가 아닌, 다른 유류를 사용하는 제트기 개발에 희망을 걸었고 잠수함을 통해 가져온 독일 Me-262를 모방해 제트공격기 개발을 1944년 9월 시급히 지시하기에 이릅니다. 나카지마 고이즈미(小泉) 제작소에서 마츠무라 켄이치(松村 健一) [함상공격기 텐잔을 설계한 사람] 의 주무로 동체의 설계가, 다네가시마 토키야스 기술 대좌(승진;;)가 제트엔진을 개발하도록 합니다. 시험제작기의 설계는 고이즈미 제작소의 본관 3층에서 진행되었고 기체호칭은 비밀리에 '마르뗑'으로 불렸습니다. 처음에는 제작재료가 부족한 당시 상황을 고려해 완전금속제로 설계했지만, 자원부족에다 궁여지책으로 함석판을 사용해 데이터를 모아야하는 등의 어려움에 봉착해 진행은 점차 늦어집니다.  거기다 전황은 이미 추축국의 패전으로 완전히 기울어 일본이 그토록 자랑하던 제국해군 연합함대는 마리아나와 필리핀의 레이테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항모와 항공력을 모조리 잃어버리는 참패를 당합니다. 이토록 연이은 패전과 연합군의 항공력에 시달린 군부는 "완성을 일각이라도 앞당겨라!"고 각 신형기제작사를 독촉했고 키카 또한 일본이 어느 정도 기술력을 축적한 경합금을 사용하여 개발을 가속합니다. 1945 년에 들어서 키카도 어느 정도 그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 2월 10일, 키카의 제작소가 위치한 오다(太田) 지역에서 황급한 공습경보와 동시에 B-29 90여기가 대대적인 공습을 가합니다. 이후에도 연합국 항모의 함재기에 의한 공습이 산발적으로 이어지던 중, 25일 함재기 60여기에 의해 제작소는 대규모 공습을 받습니다. 방공호에 피한 설계자들은 급강하해서 공장 전체에 공격을 퍼붓는 적기에 속수무책. 저녁 무렵 공습경보가 해체되고 슬레이트 지붕의 흔적만이 남아있는 조립공장 안에서 키카는 천우신조로 무사했다고 합니다 이 날 오후부터 내린 눈이 폐허가 된 대지 위에 쌓였습니다. 그 적막은 마치 곧 다가올 일본의 패전을 암시하는 것과 같았겠지요. 3. 키카와 엔진의 문제 기체설계팀보다 엔진을 설계해야하는 다네가시마 팀은 더 곤란한 점이 많았습니다. 비록 터보제트엔진이 주목받기 시작했고, 해군항공병기창 총감인 와다 소우(和田 操) 중장[1식육공의 아버지로 유명한 그 양반;;]의 명으로 이를 실용화하기 위한 본격적인 계획이 추진, 여러 기술 장교 및 동경제국대학 물리화학 연구소의 우수한 인재들이 파견되었지만 기술적인 격차가 너무 컸다는 것이겠지요. 일단 Ne-10을 개조한 Ne-10·개(改)로 추진력이 제트엔진의 추진력은 230kg단계로 상승. 다시 연구는 진행되어 축류송풍기(心式送風機) 4단을 원심식송풍기 앞에 설치한 Ne-12형을 다시 만듭니다. 이 덕분에 1944년의 가을에는 그럭저럭 킷카의 계발개획을 시작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Ne-12형 제트엔진은 여전히 내구신뢰성이 불안정한 등의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1944년 여름에 마지막으로 독일을 방문하고 돌아온 잠수함이 귀국합니다. 그리고 독일과의 기술교류를 위해 함께 떠난 이와야 히데카츠(巖谷 英一) 기술 중좌가 BMW 터보엔진의 전면설계도를 무사히 가지고 돌아온 것은 키카의 개발에 큰 행운이었습니다. 실은 그 외에 Me-262를 분해하여 다른 잠수함에 싣고 독일에서 함께 출발했으나 그 함은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곤 달랑 도면 1장뿐이었으나 연구원들은 Ne-12에 이르는 경험으로부터 단 1장뿐인 BMW 엔진의 전체도만으로도 이를 충분히 활용하고 새로운 엔진의 개발에 적용. 축류송풍기를 변경하여 터빈의 회전도 안정적으로 변했고 연소실도 충분히 길게 늘이고 연소분출구도 기울여 이전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터빈 날개에도 공기냉각방식이 적용된 것은 대단한 발전이었다고 하는군요. 전황의 다급함이 시시각각 더해지자 키카의 설계도 무르익고 이를 위한 제트엔진의 개발이 급선무가 됩니다. 다네가시마는 보다 시간이 필요한 새 방식의 엔진을 설계하는 것을 포기하고 독일제 엔진의 설계를 베이스로 소형화하는 결단을 내리지요. 이 엔진이 바로 Ne-20이었고 이 때가 1944년 11월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본격적인 설계가 진행,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1945년 3월에는 Ne-20이 어찌 모습을 드러냅니다. 실험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터빈의 팬에 받침이 균열이 생겨, 추진력을 받아내는 축이 부적합하다는 결과와 연소실의 진동이 너무 심각한 문제가 남아있었지요. 그러나 다네가시마 이하의 기술진은 엔진을 소형화하고 축의 위치를 변경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 1945년 5월에 Ne-20 터보제트엔진을 완성합니다. 일본최초의 제트엔진은 독일 BMW-003의 축소판이었지만 그것은 그 이전 기술자들의 오랜 연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단지 1장의 도면만으로 1년도 지나지 않아 실전용 제트엔진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기술진의 노력이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빈약한 일본 공업능력의 실체랄까요. 원래 제트엔진은 연소시의 고온, 추진시의 고압을 견디기 위해 중금속으로 제련한 초(超)합금으로 설계해야 합니다. (저도 짧긴 하지만 소재공학을 배우고 있는 학생으로서 강도 높은 합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순도 높은 자재와 대규모의 공정(工程)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군요 ^^;; 필요한 금속을 첨가해 원하는 강도의 합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큼 다른 찌꺼기 금속을 없애야하고 높은 고온과 오랜 제련과정을 필요로 하지요.) 그러나 미국에서 수입한 고철을 철강산업의 주로 하고 있던 일본에게 초합금을 사용한 제트엔진을 설계하는 것은 창호지를 발라 전차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곤혹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결국 일본은 엔진을 소형화하여 고온, 고열을 줄이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트엔진을 탑재한 전투기의 선정은 1944년 여름, 특수공격병기의 구상 중에 나카지마 항공사가 당시 터빈로켓이라고 부른 제트엔진을 사용한 전투기인 '황국(皇國)2호 병기'(아유~ 센스하곤 -_-) - 키카의 제안을 해군항공병기창에 채용된 것에서 시작되었지요. 그 해 9월에는 키카의 개발에 참가하고 있던 나카지마 항공사의 마츠무라 켄이치로부터 고이즈미 제작소에 그 진행이 보고, 긴급개발체제가 발동됩니다. 맨 처음 선택된 엔진은 실험용인 하츠카제(初風) 로켓,  Tu-11형이었고 이는 압축송풍기를 통상엔진인 하츠카제에 돌려 연소실로 유입되는 추진력을 얻는 방식으로 이후 실전용인 Ne-12형 제트엔진을 장착할 예정이었습니다. 이것이 키카의 초기 구상이었으나 Ne-12의 추진력은 계산치로도 320kg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_- 해군은 당초 계획에 따라 1945년 2월에 3기, 3월에 7기, 4월에는 30기, 5월에는 100기의 제트기 생산을 나카지마에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요구가 현실에 들어맞을 리가 없었고 1944년 10월에는 아직 주요도면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지요. 해군의 억지요구에 나카지마 항공사의 설계부문 기술자들은 당혹했고 민간인 기술그룹은 해군에게 이를 설명하기 위해 상당히 곤혹을 치러야 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미지의 분야였기에 단기완성을 위해 엔진을 독일제를 카피한 Ne-20형으로 변경한 것과 같이 제트기 설계자들도 이와야 히데카츠 중좌가 잠수함으로 독일에서 가져온 Me-262에 관련된 자료를 참고하는 것을 선택했지요. 또 해군이 약속한 Ne-12엔진의 진행도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좋지 않았습니다. 12월이 되어 점차  [시제 키카 계획요구서]가 나오게 되자 나까지마 항공사는 서둘러 Ne-12형 엔진을 전제로 설계를 추진합니다. 그러나 1945년 1월에 항공병기창에서 Ne-20형의 설계가 제시되자 실제로 키카는 아직 벤치 테스트로 끝나지 않은 엔진으로 날아야할 예정이었습니다. 이 개조 다음으로 제2차 목재 실험기체 심사가 2월에 끝났고 6월에는 키카 1번 기 완성을 향해 총력공사체제에 들어갑니다. 이것으로 기체 개발팀과 엔진 개발팀은 개발을 겨우 공동으로 진행할 수 있었지요. 1945년 3월에 들어서 일본 군부는 연합군의 폭격에 대비해 시험기제작부대를 분산시키는 소개(疏開)계획을 본격화합니다. 시덴(彩雲 - N1K1 가와사키 국지전투기)부대는 타테바야시(館林) 중학교에, 렌잔(連山 - 4발 폭격기인 18시[試]육상공격기)부대는 카즈야(熊谷) 여학교에, 그리고 킷카부대는 사노(佐野) 중학교에 흩어집니다. [키카와 Me-262의 비교입니다. 보다시피 키카는 Me-262에 비해 엔진도 상당히 소형화되었으며 미끈한 유선형 동체가 나무토막으로 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엔진출력도 부족해서 양력을 얻기 위한 수평익을 채택하여 후퇴익이 된 Me-262와는 많은 차이가 있지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로 병기제작팀이 숨어든 것처럼, 일본 군부는 국민전체를 방패막이로 삼아 연합군의 상륙에 대한 일전을 준비했습니다. 황국불멸(皇國不滅)에 사로잡힌 그들에게 신의 나라인 대일본제국의 항복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아나미 고레치카(阿南 惟幾) 육군대장 이하의 또라이들은 본토+대만+조선 1억 황국신민이 모두 옥쇄(말이 좋아 玉碎지, 본토결전은 죽창 들고 연합군 전차에 뛰어든다는 -_-)하면 연합국의 공격을 막아내고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실제로 오키나와에서는 이미 철혈근황단(鐵血勤皇團)이나 히메유리(百合姬)와 같은 민병대가 조직되어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 소녀, 어린이, 그리고 사회의 약자들이 “천황 폐하 만세”란 외마디와 함께 인간폭탄 및 총알받이로 버려졌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히메유리는 일본군 간부들의 성욕해소용 창녀부대였고 -_-) 우리도 최소한 국민 스스로가 권리와 의무를 행사할 수 있는 대한민국에 태어난 걸 감사해야겠지요. 4. 키카의 완성, 그리고 일본의 패전 여하튼 조립에 들어간 1번 시험기는 이전 제작소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진 토부(東武)철도의 키자키(木崎) 역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인 시라가와(柏川)라는 마을의 농촌 초가집에 숨겨집니다. 마루의 봉당으로 꾸며진 곳에 부품을 숨겨두고, 한적한 전원풍경 속에 기계소리를 내며 시험기를 제작하고 있었지요. 설계자들은 철제 헬멧을 등에 매고, 설계 데이터를 적어둔 노트를 가슴 호주머니에 넣고, 50센티 정조의 공학용 자를 허리에 차며 공급경보에 대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시라가와에서 1번 시험기의 조립은 5월에 들어서 구조검사를 시행할 단계로 들어섭니다. 구조검사는 와다 중장 이하 18명의 관계자가 그 초가집 제작소에 모여 무사히 종료되었고 6월부터 각 부위의 강도시험이 이뤄지지요. 이 실험은 타테바야시로 피해있던 부대에 의해 주익, 보조익과 나머지 부분들이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그리고 6월 28일에 이르러 고이즈미 제작소에서 그토록 바라던 완성검사가 이루어집니다. 고이즈미 제작소 시험제작 공장은 이후로도 몇 번의 공습을 받아 지붕이 날아가고 벽도 많이 훼손되어 오히려 바람이 잘 통하는 좋은 환경으로 완성검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제작진들로선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겠지요. 과거 1918년 이지마(尾島)라는 작은 마을의 초가집에서 시작한 일본 최대의 항공기 제작사인 나카지마 항공기가 그 마지막 항공기를 처음과 같이 초라한 초가집에서 만들어낸 키카로 최후를 마치게 된 것은 단순히 어떤 우연이었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1945년 8월 7일, 계속된 연합군의 일본본토 폭격 가운데 오랜만에 맑게 게인 날씨. 그 날, 키사라즈(木更津) 기지에서는 극비리에 결전병기의 테스트를 진행되었습니다.  엄중한 경계태세와 긴장감마저 느껴지는 공습의 위험 속에서 신예 전투기가 11분간 시험비행을 마치고 무사히 착륙. 그것이 바로 다카오카 데키(高岡 迪) 소좌가 탑승한 일본 최초의 제트기인 키카(橘花)였습니다. 패전을 눈앞에 둔 마지막 몸부림으로 하늘을 날아올랐으나 아시아를 무참히 짓밟으며 위세를 높이던 일본제국은 이미 두 차례의 원폭투하로 무조건 항복을 고작 1주일 남기고 있던 때였습니다. . . . . 4. 마치며 키카는 당초부터 폭격기 요격이나 지상공격도 아닌 가미가제 공격을 위한 자살특공기로 개발된 불운한 전투기였습니다. 그 엔진의 개발이나 전투기 설계부터 단기간에 이루어져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고 실전에서 '제트기'로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에 대해서도 역시 부정적인 측면이 더 많지요. 또한 나름대로 축적된 경험을 반영했다고 하나 엔진과 동체 모두 Me-262를 모방한 것도 항공기 발전사에 그다지 주목받는 전투기가 되지 못한 점일 겁니다. 키카는 분명 일본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만들어졌으며 향후 그 운용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기체였지요. 그러나 이러한 비난 가운데서도 키카는 새로운 분야의 개발을 위해 노력한 기술자들의 열정이 반영된 기체이며 오늘의 F-2로 이어진 아시아 최초의 제트기란 점에서 이제 막 제트기 설계국에 돌입한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연합함대는 구미에서 수입한 목조선에서 시작했고, F-2 또한 일본이 면허 생산한 전투기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우리도 이에 부족할 이유가 전혀 없겠지요. 키카 상세 데이터 전장 : 9.25m 전고 : 3.05m 전폭 : 10,00m 익면적 : 13.21㎡ 자체중량 : 2,300kg 최대중량 : 3,550kg 최고속도 : 677km - 고도 6,000m 상승한계 : 10,700m 항속거리 : 889km 엔진 : 정지추력 475km Ne-20 축류식 터보제트엔진 2기 승무원 : 1명 무장 : 250kg 폭탄 2발 혹은 500~800kg 폭탄 1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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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702 일제시대 조선인 친일파들은 진정한 애국자들이다. [4] 암흑의 왕자(220.117) 11.04.04 98 0
83700 야, 방금 지나간 아저씨 얼굴봤냐? F씨(218.150) 11.04.04 35 0
83699 일제시대에 '조선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수탈' 은 역사왜곡 [2] 스카브란드(220.117) 11.04.04 56 0
83697 일제시대 조선인이 차별 당했다..이것은 팩트인가? [2] 스카브란드(220.117) 11.04.04 70 0
83696 차별이라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에서부터 발생한다. [2] 카이로스(220.117) 11.04.04 43 0
83695 대한민국의 뿌리와 원류는 오히려 구 일본제국이다 [2] 카이로스(220.117) 11.04.04 47 0
83694 로마제국은 인정하고 일본제국은 인정안한다? [3] 스카브란드(220.117) 11.04.04 80 0
83693 우리나라 2천년 역사동안 외세의 힘으로 독립을 2번일구었지.... [2] 마스크(220.117) 11.04.04 89 0
83692 한국인들의 일제교육에 대한 이중성 [2] 데모넷(220.117) 11.04.04 69 0
83691 정말로 친일파가 민족을 배신하고 자기 권력을 이용해서 조선인 [2] 마스크(220.117) 11.04.04 81 0
83690 친일파에 대한 이미지 왜곡이 왜 생겨 난 것일까? [2] 데모넷(220.117) 11.04.04 48 0
83689 일본이 뭘 그렇게 잘못했나? [2] 마스크(220.117) 11.04.04 64 0
83688 친일파란 없다.. [2] 데모넷(220.117) 11.04.04 40 0
83687 친일파의 학문적 의미를 모르는가 본데.. [2] 암흑의 왕자(220.117) 11.04.04 63 0
83683 탄성 방어에 대해 질문 좀 할까 합니다. [1] 명견실버(112.159) 11.04.04 89 0
83670 내가 하는 보드게임중에 빨리 나왓으면 하는게 있는데 meltyhonny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1.04.04 85 0
83667 포르셰티거 [3] 요하임 파이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1.04.04 165 0
83665 학교 도서관 폐기서적 배부회 하는데서 타임라이프 건짐 [1] ㅇㅇ(114.207) 11.04.04 186 0
뉴스 페노메코, 새 EP ‘RNSSNC TAPE’ 23일 발매…양동근과 다시 만난다 디시트렌드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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