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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트바페 보고서 1

문제중년 2006.05.19 0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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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스 함락까지: 루프트바페의 교훈 습득과 적용 PETER H. OPPENEIMER 주: 이 논문은 2차대전을 전후한 인물, 사건등을 주제로 한 역사 논문 사이트인 Institute for Historical Review(http://www.ihr.org/)의 논문 중 하나로서, 스페인 내전에서부터 덩커르크 함락에 이르기까지의 동안에 루프트바페가 치른 전투를 고찰하는 내용입니다. 홈지기 개인적으로는 이 논문이 주장하는 결론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은 스페인 내전과 개전 초기의 루프트바페의 행적과 상황에 대한 흥미있는 묘사들이 포함되어 있고, 뿐만 아니라 현대 공중전 전술과 전략의 큰 기틀의 일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루프트바페의 전술과 전략이 형성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번역하여 소개를 합니다. Magic Fire 작전 (1936년 7월 28일 - 1939년 3월 29일) 1935년 3월 10일, 헤르만 괴링(Hermann Goering)은 재건된 독일 루프트바페(Luftwaffe)의 존재를 선언하였다. 18개월 이내에 새로운 루프트바페는 스페인 내전의 국가주의자들을 지원하는 계획인 Magic Fire 작전에 착수하였다. 1936년에 발발한 그 전쟁은, 히틀러에게는 대륙의 다른 지역에 대한 음모로부터 유럽인들의 주의를 흩트림과 동시에 갓 부화한 루프트바페가 군사행동을 통해 공중전투 교리와 무장을 야전에서 시험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되었다. 루프트바페는 스페인 내전에서 전략, 전술, 병참, 작전술 등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이 교훈들은 1939년 9월의 폴란드 침공으로 보강되었으며, 1040년에 스칸디나비아(Scandinavia), 저지대 국가들(네덜란드, 덴마크 등), 프랑스에서 적용되었다. 콘돌 군단(Condor Legion)은 1936년 11월에 스페인 전투에 급파된 독일군 부대의 이름이다. 이 논문의 과제는 스페인의 콘돌 군단과 관련된 주제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특히, 루프트바페는 스페인 전쟁에서 무엇을 학습하였는가? 그 전쟁에서 콘돌 군단의 임무는 무엇이었는가? 루프트바페에게 스페인 내전의 경험은 도움이 되었는가 방해가 되었는가? 스페인 전쟁은 2차대전의 독일의 패배의 한 원인이었던 루프트바페의 작전 교리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는가? 이 질문들에 답변함으로써, 필자는 스페인 전쟁이 초기의 루프트바페에 분명치 않은 이득을 제공했음을 보이고자 한다. 콘돌 군단의 스페인 개입이 귀중한 훈련과 시험 기회라는 것이 증명되기는 하였지만, 습득한 교훈들은 때때로 잘못 해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스페인의 콘돌 군단의 경험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초기에 심한 주목을 이끈 루프트바페의 다채로운 경험의 원천을 확립하였다.       작은 시작 1936년 7월 18일,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스페인 국가주의자들의 하루 전에 시작된 내전에 대한 군사 원조 요청을 승인했다. 10일 이내에 20대의 융커(Junker) Ju52기들이 루프트한자(Lufthansa; 독일의 민간 항공사)의 조종사들과 루프트바페의 자원자들에 의해 스페인으로 급파되었다. 얼마 후에는, 여섯 대의 하인켈(Heinkel) He51 복엽 전투기가 20문의 20mm 대공포와 함께 배편으로 스페인으로 보내졌다. 많은 역사가들은 독일이 스페인 전쟁에 무조건적으로 개입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히틀러는 자신의 모든 내각의 반대를 무릅쓰고서 프랑코(Franco)를 지원했다. 그렇지만, 최초의 독일의 원조는 인원과 군수품으로 제한되었다. 실제로, 처음에는 85명의 루프트바페의 자원병들이 보내져서 휴고 스페(Hugo Sperre) 장군의 지휘하에 스페인군으로 복무하였으며, 전투 작전에서 직접적인 군사 개입이 명백하게 배제된 임무에만 투입되었다. 루프트바페에서 전역한 의용병(Freiwillige)은 스페인인이 독일 비행기를 조종하도록 훈련시키라는 명령만을 받았다. 그렇지만,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스페인 피교육생 중 한명이 사망하고 항공기는 파괴되었으며, 다른 두 스페인인은 첫 번째 임무에서 추락해버렸다. 이러한 사고 때문에, 독일 조종사들은 전투 임무 비행을 요구하였고 허가를 받았다. 독일의 스페인 개입에 대한 국제적인 대응은 즉각적이고 적대적이었다. 영국은 독일 의용병들에 대해 의례적인 항의를 제기하고 스페인 공화파에 지원을 시작하였다. 소련은 프랑스의 불간섭 원칙에 동의하였으나, 독일이 원조를 즉시 중지할 것을 요구하고 스스로 공화파를 원조하기 시작하였다. 괴링은 히틀러의 스페인에 대한 간섭 요구에 굴복하였다; 루프트바페는 더욱 빨리 확장하도록 요구되었다.   스페인에 개입한 히틀러의 실제 이유는 프랑코의 원조 요청이나 단순한 군장비의 시험과 개발 욕구와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그보다는 더 전략적이었다. 안토니 비버(Antony Beever)가 지적하였듯이, 국가주의자 치하의 스페인은 "프랑스 후방의 위협, 그리고 또한 수에즈 운하로 가는 영국의 항로를  봉쇄할 것"이었다. 또한 스페인의 대서양 해안은 유보트 기지로서 구미가 당기는 가능성이 있었다(독일은 실제로 2차 대전 중 스페인 항구를 종종 사용하였다.). 히틀러는 또한 오스트리아와 발칸 반도에 대한 뭇솔리니(Mussolini)의 주의를 흩트리면서 이탈리아와의 추축(Axis)을 튼튼히 하는 수단으로 전쟁을 계획했다. 독일군의 장비 시험장으로서의 전쟁 착상은 기껏해야 부차적인 것이었으며, 콘돌 군단에 최초로 제공된 장비가 불충분하였다는 것으로 이것이 증명이 되지만, 베를린은 신형의 시험되지 않은 항공기를 증원함으로써 대응했다. 스페인은 계획적이 아니라 우연히 루프트바페를 위한 시험장이 되었다.         스페인의 콘돌 군단은 여섯 개의 부대로 나뉘었다: 지휘부(S/88), Ju52로 장비된 3개 비행대대(squadron)를 가진 하나의 폭격 전대(wing) (K/88), He51로 장비된 세 개의 비행대대를 가진 하나의 전투기 전대, 12대의 He70으로 구성된 정찰 대대와 네 개의 88mm 중(heavy)고사포대 (A/88), 두 개의 20mm 경 대공포대(F/88), 그리고 통신 파견대(Ln/88)였다. 스페인 내전 이전의 루프트바페의 교리 1920년대와 30년대에 서구에 가장 영향을 끼친 항공전 이론가들은 이탈리아의 두헤(Douhet), 미국의 미첼(Mitchell), 영국의 트렌차드(Trenchard) 등이었다. 기본적으로, 이 사람들은 항공기가 다음의 주요한 전쟁에서 결정적 요소가 될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하늘은 1차 세계대전의 고정된 참호전을 피할 수 있는 3차원을 제공하였다. 이들의 생각은 본질적으로 "전략" 폭격에 놓여있었다. 각 국가는 적의 도시와 공업기반을 파괴할 수 있는 다수의 장거리 폭격기를 보유할 것이다. 대규모의 파괴로 적의 경제 붕괴를 빠르게 촉진시키고, 국민들의 사기를 저하시켜 전쟁을 조기에 끝낼 것이다. 이러한 이론의 기반은 "폭격기는 항상 목표에 도달한다"는 믿음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빠르고, 장거리의, 중무장한 폭격기는 무적이고 막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두헤의 극단적 지지자들은 항공전이 육군과 해군을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 시기의 독일의 항공전 예언가는 1936년에 사망할 때까지 루프트바페 사령관이었던 발터 베버(Walter Wever)였다. 베버는 두헤의 학설을 연구했지만, 넓은 기반의 항공 전략이 "전략" 폭격에 비해 우세할 것으로 믿었으며 공군은 육군과 해군의 보완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죽은 뒤의 루프트바페의 후임은 그보다 능력이 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프트바페의 지배적인 항공력 교리는 베버가 죽기 전에 그에 의해 공식화되었다. 근본적으로, 세 개의 병종은 모든 전쟁의 가장 주요한 목표인 적 전력의 격멸을 달성하기 위해 협동하였다. "전체 전쟁의 더 넓은 구조 안에서 하늘에서 전쟁을 선도하여 이 목표에 이바지하는 것이 공군의 임무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Luftwaffendienstvorschrift 16: Luftkriegsfuhrung (루프트바페 근무 규칙 16: 항공전의 수행)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요점을 규정하였다: (1) 공중 우세를 달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적 공군력 정복; (2) 육군과 해군의 지원; (3) 적 공업력에 대한 공격. 이 세 가지 요점들은 루프트바페가 적의 공군력을 적의 영공,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직 지상에 있을 때 격멸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적당한 방법으로 항공기 공장 지상 시설과 비행장을 폭격해야 했다. 두 번째로, 육군의 지원이 중요했다. 폭격기들은 병참 시설을 파괴하고, 적 부대를 괴롭히며, 통신을 붕괴시켜 전차와 보병의 진로를 소탕하도록 하였다. 이미 Luftwaffendienstvorschrift 16에서 루프트바페를 육군에 종속시키는 미래가 암시되었다. 이 두 가지 주요한 과업이 달성되고 나면, 항공기들은 생산 시설, 식량 보급, 철도, 항구, 교통 중심지, 군사 훈련 시설, 행정 시설등을 폭격하도록 하였다. 루프트바페의 교리는 영공 방어가 대공포대의 책임이라고 가정하였다. 이것은 근시안적인 공상이 아니었다. 전쟁 이전의 대공 부대들은 고도로 훈련되고 극히 효과적이었으며, 아마도 유럽 최고였다. 그리하여, 영공 방어에 전투기가 필요치 않다는 가정에 기초한 스페인 내전 이전의 항공기 생산 규정은 폭격기 세 대당 전투기 한 대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스페인 내전의 결과가 나올 때 쯤, 루프트바페의 기술부장이자 항공 병기국장인 에른스트 우데트(Ernst Udet) 대령은 루프트바페의 전력 구조를 폭격기 3대당 전투기 1대 비율에서 폭격기 2대당 전투기 1대의 비율로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는 순전히 공세적인 이유에서였다. 독일은 해상 항공 이론에까지 관심을 가졌으며, 수상 비행기, 비행정, 해군 전투기로 구성된 독립된 해군 항공전력이 창설하고자 했다. 이 전력은 공세 및 방어 모두에서 해군과 협조할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독일에서는 두 척의 항공모함이 계획되고 그라프 제펠린(Graf Zeppelin)의 건조가 시작되었지만, 한 척도 완성되지는 않았다. 이 전략적 실책은 1943-4년 까지는 전면전이 발발하리라고 예상치 않은 해군 참모부의 근시안, 본질적으로 내륙국인 독일의 항공력 사상, 그리고 독일군(Wehrmacht) 내부의 3군간의 치열한 경쟁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항공전의 심리적인 요소는 루프트바페 이론가들에게 간과되지 않았다. 1933년 초에, 루프트바페는 전쟁 계획에 착수하였다. 대부분의 전략가들은 다음 전쟁은 총력전이 되고, 일반 국민의 완전한 동원을 수반하며 국가의 모든 자원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많은 사람들은 나치스(Nazis)가 만든 공동체 사회가 독일이 전면적인 투쟁을 더 잘 견딜 수 있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루프트바페가 실시하는 도시에 대한 테러 폭격은 적의 사기를 붕괴시키고 필연적으로 항복을 초래할 것이었다. 그 사람들은 독일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t)와 같은 전체주의 사회가 프랑스와 영국과 같은 분열 사회보다 폭격에 더 쉽게 견딜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이러한 태도가 1930년대 전반의 루프트바페의 사상을 경향지었다. 베버가 Luftwaffendienstvorschrift 16에서 입안한 명백한 항공력 교리에도 불구하고, 루프트바페는 초기인 1933년에서 1936년의 스페인 내전 시작의 사이에 항공기와 이론을 야전에서 시험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루프트바페의 최우선 이론은 "전투의 결정적인 지점에 최대 전력을 운용한다"는 것이었다. (주; 이것은 클라우제비츠 이래의 독일의 전통적인 군사 교리를 단순하게 공군에 되풀이 적용한 것입니다. 그만큼 항공전 교리 발전이 더뎠다는 것이죠.) 전투의 진행이 필연적으로 전략과 전술의 변화를 요구할 것이었지만, 루프트바페는 이것을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의 전술적 교훈 독일의 군사적 탁월성은 다른 영역 중에서도 전술의 범주에 있었으며, 대부분 스페인 내전에서 비롯한 루프트바페의 이점은 공중 전술의 범주에 있었다. 이 영역의 독특한 핵심은 베르너 묄더스(Werner Molders)이다. 스페인 내전동안, 묄더스는 단엽기의 증가한 속도와 기동성이 초래하는 공중전투의 변화를 이해하였으며, 로테(Rotte)와 슈밤(Schwarm) 전투기 대형(영국과 미국에서는 핑거-포[finger-four]로 불림)을 개발하였고, 이중 한가지 형태나 다른 형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쓰이고 있다. 날개 끝을 서로 맞댄 좁은 "V"자 대형으로 고정되는 1차대전의 전투기 집단 대신에, 로테는 한 대가 다른 한 대를 수행하여 선도 항공기의 후방을 방호하는 2기로 구성되었다. 슈밤은 두 개의 로테로 구성되었으며, 슈밤의 구조는 로테와 같았다. 이 단위부대들이 몇 개가 모여서 슈타펠(Stafell; 비행대대)을 이루었으며, 각 단위대들은 상호 탐색과 방호를 위해 서로 다른 고도로 엇갈리게 대형을 이루었다. 이 대형은 몇 가지의 이점을 가졌다. 기간 간격이 증가함으로써 더 뛰어난 기동성과 더 높은 속도가 가능했다. 이로써 조종사가 상대방과 맞설 때 더 훌륭한 융통성을 부여받고 적에 대해 더욱 효과적으로 화력을 운용할 수 있었다.   낮이든 밤이든 일반(수평) 폭격기가 표적을 명중시키는 어렵다는 것이 스페인 내전에서 드러났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인하여 루프트바페 지휘부는 일반 폭격기보다도 더욱 정확한 급강하 폭격기를 선호하게 되었다. 독일의 정확한 폭격 조준기의 개발 실패는 급강하 폭격기에 대한 지지로 더욱 악화되었다. 야간 공격의 명백한 어려움은 표적을 명중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표적을 찾는 것이기도 했다. 그 결과, 루프트바페는 본질적으로 악천후와 야간 작전을 위한 항법 보조수단의 개발에 크게 역점을 두었다. 그 궁극적인 결과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처음 쓰인 니케바인(Knickebein) 시스템이었다. 니케바인은 무선 지시를 이용하여 공중 항법을 보조하는 맹목 폭격 시스템이었다. 저고도 공격은 재래식 폭격의 고유한 부정확성의 또다른 귀결이었다. 1차대전의 산물이고 스페인 내전에서 수정된 저고도 공격은 조종사가 폭격 항정을 더 정확하게 판정할 수 있고 적 부대의 사기를 꺾는 기총 소사 공격, 적의 통신 분쇄, 적 포병에 대한 정밀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수평 지상 공격의 한가지 큰 단점은 항공기가 지상 사격에 노출된다는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수평 지상 공격시에는 조종사가 엔진 스톨, 예기치 못한 지형, 기타 이와 비슷한 뜻밖의 재난에 대응할 시간이 충분치 않음으로 인하여 지상 충돌의 위험이 상당히 증가하였다.     스페인 전투는 통신의 중요성을 또한 드러냈다. 루프트바페는 통신대가 무전기를 장비하여 공중과 지상부대간에 근접 접촉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더욱이, 새 로테 대형에서는 기간 거리의 증가가 요구되었다. 과거에는 수신호로도 충분했지만, 독일 조종사들은 새 전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항공기간 무선 교신이 중요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페인 내전이 루프트바페에 끼친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중전투 전술의 몇 가지 다른 부분을 더 세부적으로 추가하여야 한다. 이는 콘돌 군단의 보병에 대한 근접 지상 지원 ,전투기 전술의 진화, 폭격과 정찰 등이다. 근접 지상 지원   저공 공격과 보병에 대한 근접 지원은 스페인 내전동안 볼프람 폰 리흐토펜(Wolfram von Richthofen)에 의해 개발되었다. 1936년의 마드리드의 최초 전투동안 독일군의 공중 전술은 부적당했다는 것이 주로 경험에 의해 증명되었다. 군단은 공중 포대로 활동하였으며, 공화파의 거점을 폭격하고 기총소사한 후 신속히 이탈하였다. 이것은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판명되었지만, 공중 포대 역할을 하면서 독일군은 아군 부대 공격을 피하기 위한 지상군과의 근접 협동의 중요성을 배웠다. 군단은 이러한 위험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항공기와 지상 부대를 연결하는 광범한 통신체제를 발전시켰다. 군단 장교가 진격 부대에 배치되어 무선으로 군단 지휘소와 연결되었다. 이는 이로운 협조관계를 가져왔다 베르사이유 조약(Versailles Treaty) 때문에 독일은 공군의 보유를 숨겨왔었으며, 거의 "모든 미래의 루프트바페 장교들은, 초기에는 다양한 훈련을 받았고 보병, 포병, 기병 등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지상 지휘의 문제점에 대하여 뛰어난 지식과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더해서, 국가주의자 군대는 공중에서 식별하기 쉽도록 백색 식별판을 뒤에 부착하기도 하였으며, 필요할 경우에는 조명탄과 연막통도 사용하였다. 최초에 콘돌 군단에 보급된 장비로 인해 또한 근접 지상 지원이 강요되었다. 콘돌 군단 조종사는 곧 자신들의 He51 복엽기가 소련의 폴리카르포프(Polikarpov) I-16 단엽기에 비해서 성능이 떨어진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직접적인 전투 대치를 피해야 했다. 게다가, 국가주의자들은 포병이 부족했다. 그 결과, He51은 국가주의자 보병을 지원하는 저공 포대의 역할을 할당받았다. 지상 지원 전술은 신속하게 발전하거나 교과서의 공식에 간단하게 도달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국지적인 조건에 대한 융통성 있는 대응의 필요성이 경험적으로 설명되었다. 일반적인 형태는 폭격기와 전투기 공격이 뒤따른 독일 88mm 포의 적의 거점 포격이었다. 보병의 전진은 저공 비행기를 곧장 뒤따랐다. 이 기본 패턴에는 다양한 변형이 있었다. 그 한 예로, 1937년 7월의 브루네티(Brunete) 전투동안, 슈페를(Sperrle) 장군은 그의 비행대대를 각각 2대로 이루어진 4개 편대로 구분하였다. 이어지는 편대들이 멀리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개시하여 적의 대공포를 측면에서 소사하였다. 포대 상공에서는, 폭탄을 일제히 투하하고 가급적 신속히 상승하여 폭탄 파편을 회피하였다. 전투기를 후속하는 둔중한 Ju52 폭격기들은 쉬운 표적이었기 때문에 적의 대공포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저고도 공격은 JU52기들이 아군 보병을 폭격하지 않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군단은 연속으로 잇단 공중 공격으로 공화파의 방어를 점차 약하게 하고 공화군의 사기를 분쇄하였다. 북쪽에서는, 연습으로 실시된 바스케즈(Basques) 공격중의 전술이 완벽하였다. Bf109의 엄호를 받는 He111 폭격기들이 공화군 지역 깊숙이 침투를 하여 적의 주요 표적을 폭격하였으며, 중(heavy)포대와 공중 폭격으로 적의 방어를 파괴하였다. 1936년에 국가주의자들이 마드리드를 공격하는 동안, 공화군 참모장은 자신에 대해 실시되는 파멸적인 공중 공격에 대해서 하소연하였다. "기관총 사격은 그의 병사들을 자신들의 무기를 사용할 수 없는 지점에 지상에 고착시켰으며, 후방 공격은 다대한 혼란을 유발했다." 폭격기 밀집 대형은 북쪽의 바스크(Basque) 지역의 잘 요새화된 적의 거점에 대한 또다른 신속한 전술의 수정의 결과였다. 한 대나 두 대만의 항공기 공격은 적을 단순히 참호로 들어가게 하여 비행기들이 상공을 지나간 후 다시 나타나도 안전했기 때문에, 콘돌 군단은 후방에서 적에게 접근하여 폭탄을 한번에 일제히 투하하였다. 폭탄들의 결합된 폭발력은 때로 요새화된 참호를 파괴하기에 충분했다. 이 혁신적인 방법은 조종사들에게 "난장이의 폭탄 카펫(the little man's bomb-carpet)"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융단 폭격(carpet-bombing)이 태어났다. 국지적인 조건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재능은 군단의 근접 지상 지원 전술의 개발로 특징지어졌으며, 이 전술의 개발에 대해서 주된 경의를 받을 가치가 있는 폰 리흐토펜 대령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전투기 전술의 발전 1차대전의 전투기 전술은 대형이 조잡했고, 대체로 느리고 둔중한 삼엽기와 공중 전투에 대한 지식의 부족에 의해 그 가능성과 한계가 구속되었다. 전쟁이 전개됨에 따라 조종사들은 경험을 쌓았으며, 무장은 발전하였고, 비행기 설계는 진보하였다. 그렇지만, 2차대전과 비교한다면 1차대전의 비행기와 전술은 원시적이었다. 통상, 각 진영은 비행기를 집중하여 혼잡한 도그파이팅에서 전체 화력을 최대화했다. 그렇지만, 고속의 단엽기가 출현하면서 전술은 그에 적응하여 바뀌었고 단엽 항공기의 향상된 능력이 개척되었다. 레이몬드 프록터(Raymond Proctor)가 그 단엽기를 설명한다. 편대 대형의 화력을 위한 기동 요소가 강조되었다. 속도와 기동의 논쟁은 종결되었으며, 적을 먼저 보고 취약한 후방 지역을 보호할 필요성이 분명해졌다. 모든 공중 격추의 80%가, 격추된 항공기가 적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로 이루어졌으며, 공격은 통상 후방 사각지대(또는 6시 후방)에서 실시되었다. 전통적인 편대 대형에서 새로운 고속 항공기의 조종사는 동료기와 충돌하지 않도록 조심하는데 지나치게 많이 주의가 분산되었으며 그 결과 적의 공격에 취약해졌다.   단엽 전투기의 취약성, 특히 복엽기 전술을 적용할 때 증가하는 취약성으로 말미암아, 베르너 묄더스는 위에 언급한 로테와 슈밤 대형을 고안하였다. 콘돌군단이 더 나은 장비를  수령할 때까지 스페인의 전투기 전술은 1차대전의 그것과는 별 차이가 없었으며, 실제로 러시아의 단엽기에 비교할 때 He51의 느린 속도가 압도적인 불이익은 아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예이다. 복엽기의 상대적인 느린 속도는 He51기의 조종사가 적의 단엽기와 전투를 중지할 때에만 잠재적인 위험이 되었다. 1936년 10월 29일에 Bf109 단엽 전투기를 포함한 근대식 장비를 스페인에 보낸다는 결정이 독일에서 이루어졌다. Bf109는 콘돌 군단이 소련의 I-15와 I-16을 하늘에서 몰아내는 것을 가능케 했으며, 스페인에서의 독일의 공중 우세를 결정적으로 확립하였다. 묄더스의 핑거 포 전투기 대형의 공격과 방어의 이점이 극히 성공적이라는 것이 곧 증명되었다. 각 로테는 필요하다면 탐색, 방어, 공격시에 완전히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두 로테간의 슈밤으로서의 협조는 전체 화력과 육안 방호를 증가시켰다. 하나의 로테가 공격을 받으면, 그 로테로부터 600피트 떨어져있는 슈밤의 다른 로테가 적기쪽으로 선회하여 모든 화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공격시에 리더는 건십(공격기) 역할로 가정되고, 그의 윙맨은 리더의 후방 "원뿔"에서 비행하여 리더의 6시 후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였다. 로테 대형에서는 기간 간격이 증가하여 조종사는 근접 대형을 유지하려고 힘쓰지 않고 하늘을 탐색하는데 주의를 집중할 수 있었다. 그 시기에, 스페인에서 He51은 미끼로 쓰였다. 복엽기들은 I-16기들이 He51을 공격할 때까지 기다리는 Bf109 대대의 수천 피트 아래에서 비행하였다. 공격시에는, Bf109는 우세한 고도에서부터 강하하여 적기를 아래에서부터 지나쳐, 목표물의 후방 사각지대에서 나타나기를 시도하였다. 조종사가 실수를 하면, 강하 속도를 이용하여 이탈하거나 다시 상승하여 또다른 공격을 할 수 있었다. 특히 혁신적인 또다른 전투기 전술은 훌륭한 선견지명과 비행시간의 주의깊은 계산과 관련이 있었다. 몇몇 독일 비행기들이 소련의 비행장 상공을 선회한다. 곧, 소련 전투기들이 긴급출격을 하여 소련 요격기들의 연료가 적어질 때까지 사거리 밖을 유지하려고 하는 콘돌 군단 조종사들에게 도전을 한다. 그러면, 소련 비행기들이 재급유를 하는 동안 군단의 다른 편대가 주의 깊게 시간에 맞춰 적 기지에 도달하여, 지상의 항공기들에 폭격과 기총소사를 하였다. 결국 소련은 적절한 대응방법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이미 수많은 항공기를 상실하고 난 후였다. 폭격 스페인 내전에서의 폭격의 효과는 불확실하게 남았으며, 그러한 이유로 콘돌 군단이 얻은 교훈은 그 가치가 모호했다. 1937년 중반 콘돌 군단은 종종 이론이 있는 제공권 장악을 달성하고도 공군력에 의한 이점을 거의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스페인 내전은 특이한 전쟁이었다. 전쟁 전 기간을 통틀어, 독일 폭격기 조종사들은 통상 전투기 엄호 없이 적진 후방으로 비행하였다. 공화군은 약간의 포대만을 보유했으며, 그마저도 비효과적이었다. 적으로부터 공중이나 지상 모두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적에 대한 폭격의 자유로움은 공중 공격을 포함하는 군사적 교전시에 고속의 중무장 폭격기가 결정직인 무기가 될 것이라는 독일의 믿음을 이끌었다. 많은 방법에서, 독일의 경험은 호위를 받지 않는 폭격기가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밀집 폭격 공격으로 다대한 피해를 입히는 능력으로 묘사된 두헤의 "전략 폭격" 개념을 지지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에 더해서 독일은 두헤의 이론을 확장시켰다. 오히려, 그 결과물이 이전의 전투기나 폭격기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가정아래 전투기와 폭격기의 요소를 하나의 비행기에 결합하려고 했다. 근접 지원 전술은 또한 폭격 능력과 기총소사 능력을 하나의 항공기에 결합하는 유혹에 노출시켰다. 이러한 방법으로 루프트바페를 위한 독일의 군사비가 절약될 수 있었고, 경제에 부담이 덜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스페인 내전의 경험에서 도출한 많은 잘못된 교훈 중 하나였다. 스페인에서의 군단 폭격 전술의 개발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주간 폭격, 야간 폭격, 급강하 폭격, 해상 폭격의 경험들을 더욱 완전히 검토하여야 한다.   전쟁 초기에는, 군단은 국지적 우발상황에 마주치면 언제든 필요에 따라 자신들의 방법에 맞게 개량하는 전통적인 폭격 전술을 이용했다.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전술은 아군 보병에 대한 근접 지상 지원, 적 보급 차단, 적 거점, 밀집 부대, 수송부대, 통신망에 대한 폭격 공격 등을 포함한다. 때때로 폭격기에 전투기 엄호가 할당되었지만, 군단이 공중 우세를 가짐에 따라 필요성이 적어졌다. 1937년 여름의 빌바오(Bilbao) 공격중에는: 독일 폭격기와 다른 공중 부대들이 주간 공격시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지, 터널, 지휘소, 포대, 부대 집결지 등에 대형 폭탄을 투하하였다. 또한, 미라벨레즈(Miravelles)의 북쪽 도로를 계속적으로 폭격하여 모든 통행을 중단시켰다. 모든 공중 부대들은 어떤 상황하에서든 마을이나 거주지역은 폭격하지 말라고 명령받았다. 위에 언급한 거주지역에 대한 폭격을 금지하는 명령은 곧 위반되었다. 마드리는 공중 폭격을 경험한 역사상 최초의 유럽 수도였다. 독일은 시민들의 사기를 분쇄하려고 도시의 주거지구의 대부분을 헛되이 폭격했다. 안토니 비버에 의하면, 이 조직적인 심리전 실험은 "대중들을 더욱 저항적으로 만들 뿐이었다." 스투카"Stuka"가 그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렇지만 급강하 폭격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될 때까지, 독일은 군단 폭격기 승무원들이 폭탄을 표적에 정확히 떨어뜨리는 어려움을 보충하기 위해서 저고도 폭격에 집중하였다. 독일은 정확한 폭격조준기를 보유하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상황을 크게 달라지게 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폭격기 승무원들에게는 정밀 폭격을 익히기 위해 철저한 훈련이 요구되었으며, 콘돌 군단의 비행사들은 그러한 훈련에 시간도 노력도 들일 여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군단의 항공기들이 최소한의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주간 폭격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빠르고 중무장한 중형(medium) 폭격기인 하인켈(Heinkel)사의 He111이 1938년에 스페인에 도착했으며 스페인 상황에서 정해진 역할을 훌륭히 이행했다. He111의 스페인에서의 성공적인 활동으로 인하여, 루프트바페는 중형(medium) 폭격기를 단순히 더 크게 설계하여 성능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으로 추론하였다. Ju52기가 폭격기로서는 부적당하다고 증명되어, 루프트바페의 기술부 참모들은 Ju52의 결핍분을 보충하고 He111의 능력을 확대할 것을 요청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은 중형(medium) 폭격기를 주문했다: 1. 기존의 3시간에서 5시간으로 늘어난 비행 시간을 가질 것. 2. 최소 2톤의 폭탄 적재 능력을 가질 것. 3. 더 나은 시계를 위해 기수가 완전히 창으로 되어있을 것. 4. 더 강력한 무장(즉, 더 많은 방어용 기관총)을 가질 것. 5. 개선된 무전기를 가질 것. 6. 더 강한 랜딩 기어와 동체를 가질 것. 7. 늘어난 중량에 대처하고 비행 성능 향상을 제공하는 더 큰 엔진을 가질 것. 마침내 개발된 이 비행기는 '특'중형 폭격기라고 불린 Ju88이었다. 처음에는, 이 비행기는 실패작으로 판명되었고 스페인에서는 적은 전투 행동만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프트바페는 He111로 구체화되어 스페인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으나 결국 몇 년 후 루프트바페에 패배를 가져다 준 중형(medium) 폭격기 개념에 집착하였다. 야간 작전의 어려움을 사실상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야간 폭격은 가끔만 시험되었다. 공화군이 충분한 전투기 방어를 소집할 수 있던 전투의 초기 동안에는, 슈페를 장군은 어두울 때에만 적과 교전하도록 결정했다. 마드리드 상공에서 군단의 폭격기 편대들은 도시가 의지하고 있는 트럭 통행의 헤드라이트 조명으로 거리와 방향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었다. 교묘하게도, 군단 폭격기들은 교량의 병목구간과 소도시의 좁은 길에 의해 트럭의 속도가 늦춰질 때 공격을 가하였다. 기상이 허락하면, 조종사들은 매일 밤 출격했다. 그렇지만, 빈약한 폭격 조준기로 야간에 작은 교량을 명중시키기는 힘들다는 결과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발터 베버의 후임인 루프트바페의 참모장 알베르트 케셀링(Albert Kesselring)은 다음의 명백한 결론을 내렸다: 야간 폭격은 승무원들이 높은 수준의 기강과 기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효과적이다. 야간 폭격은 또한 비상한 훈련, 항법, 임무 실행을 필요로 하였다. 그 결과, 폭격기의 연구와 개발은 두 가지 명확한 목표를 향하게 되었다. 에른스트 우데트와 같은 사람들은 모든 폭격기가 급강하 폭격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확신했다. 다른 사람들은 루프트바페의 과학자들에게 항법을 보조하고 야간과 악천후시의 폭격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무선 지향 시스템의 실험을 종용했다. 후자의 목표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니케바인 시스템이 개발되어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최초로 실험되었다. 전자인 급강하 폭격의 목표는 스페인 내전동안 주의가 더 많이 취해져, 정교하고 세련되어졌다. 스페인 내전은 공군 참모부에 급강하 폭격이 단일한 가장 정확한 폭격 방법이라는 것을 시사했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스페인의 특수한 조건으로 인하여 콘돌 군단은 실제로 이베리아 반도의 상공에서 제한을 받지 않고 작전하는 것이 가능했다. 게다가, 군단의 장비는 "전략" 폭격 임무에 부적당하다는 경험을 제공하였다. 처음에 독일은 Ju52를 폭격기로 사용하려고 하였으나 느리고 쓸모가 없었으며, 따라서 공화군의 대공포대에 극히 취약한 표적이었다. 1937년에야 비로소 군단은 "전략" 폭격에 더 적합한 He111과 같은 항공기를 수령했다. 여하튼, 근접 지상 지원 작전의 절대적인 성공으로 인하여 아군 부대에 폭탄을 흩뿌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정밀 폭격의 정확성 - 재래식 폭격기로는 얻을 수 없다고 판명된 - 을 가지고 폭탄을 투하할 수 있는 항공기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이 요구사항을 충족시키는 항공기가 1938년 투렐(Teruel) 전투에서 처음 쓰인 융커 Ju87 급강하 폭격기였다. 그 비행기는 추한 대머리독수리같은 외형을 제공하는 특이하게 각진 날개를 가졌으며, 스페인의 루프트바페 장교들은 스투카가 표적에서 5미터 이내로 폭탄을 투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볼프람 폰 리흐토펜은 Ju87기가 정확성뿐만 아니라 심리적 충격 무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기술자들은 랜딩 기어에 사이렌을 부착할 것을 제안했으며, 그 개발은 스투카의 특징인 표적으로 낙하하는 동안의 휘파람 소리를 제공했다. 아마도, 폭탄 자체보다도 스투카의 사이렌이 공화국 군대를 떨게 만들었으며, 때때로 부대가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는 공황상태를 초래했다. 스투카가 급강하 폭격의 가치를 입증하여, 독일의 생산의 중점은 Ju87로 바뀌었고, 군 참모부 사이에서 폭격기가 전술 공격 무기라는 믿음이 확실해졌다. 스페인의 루프트바페에서는 정밀폭격이 "전략" 폭격을 대체하였으며, 이것이 어째서 공군 참모부가 수년 후에 심히 필요하게 되는 재래식 4발 중(heavy)폭격기의 개발을 소홀히 했는지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독일에서는, 스페인 내전에서의 해상 폭격 경험은 최소한의 결과만으로 묘사되었다. 1935년-1939년 사이의 독일의 해군 항공력 이론은 수상 비행기, 비행정, 해군과 직접 협조하는 해군 전투기등을 이용한 독립적 해군 항공 무기 사상으로 유지되었다. 그렇지만, 그 이론은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비행기를 이용한 지상기지의 공격 역시 비효과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1936년 10월 후반에 프랑코는 콘돌 군단에게 공화군 해군과 보급항들을 폭격하라고 재촉하였다. 이는 실망스런 결과로 수행되었다. 약 1년 후에 지중해에서 소련 선박을 저지하기 위해서 또다른 해상 폭격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콘돌 군단은 더 큰 성공을 얻었으며, 주간에는 해상에서 야간에는 항구에서 비행정으로 선박들을 공습하였다. 프랑코의 명령에 따라, 해상 폭격 공격은 단계적으로 전면적인 공세로 확대되었다. 윌라드 C, 프랭크(Willard C. Frank)의 기록에 의하면, 1939년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공습은 지속적이 되었고, [공화파] 시민들을 부양하는데 필요한 보급을 심하게 감소시켰으며, 사기를 저하시키는데 기여했다." 이탈리아와 독일 항공기는 115척의 공화파 선박과 51척의 외국 상선을 격침하였고, 이는 전체 전쟁동안 두 국가가 파괴한 모든 전체 적 선박의 거의 75퍼센트에 해당했다. 이 기간 중 추가로 225소티의 폭격으로 많은 공화파의 화물이 피해를 입거나 지연되었다. 포위된 주민들의 식량, 의복, 연료와 의료 지원 보급이 경색되었고 고통과 절망을 증가시켰다. 급강하 폭격기가 적 선박 파괴의 기본 수단으로 의도되었었다. 그렇지만, 그시기에 가용했던 유일한 급강하 폭격기인 Ju87은 원래 비행 시간의 제한으로 100마일의 작전반경만을 가졌다. 군단 조종사는 어뢰 공격과 급강하 공격이 매우 유망하다고 파악하였다. 그러나 루프트바페는 장거리 급강하 폭격기나 뇌격기 중 어느 것도 개발하지 않았다. He59와 He115 수상비행기가 뇌격기로 계획되었지만, 작전에는 투입되지 않았다. 독일은 자신들의 능력의 한계를 깨달았지만, 무관심한 태도 때문에 근시일 내에 장비를 개발하는데 실패했다. 공군 참모들은 아라도(Arado)와 하인켈 수상 비행기의 운용에 적합하다고 믿어진 더 큰 독일 전함을 믿었다. 이것은 독일 항공모함인 그라프 제펠린을 완성하지 않는다는 근시안적인 결정의 이유를 촉진했다. 어떤 경우에도, 1937-1939년의 고위 사령부는 대영제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에른스트 우데트같은 사람들은 독일이 대영제국과 같은 해상력에 대항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스페인 내전동안의 해상 항공전의 결과 독일은, 항해중인 선박은 공중 공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잘못 추측하였다. 그에 따라 해군 장교들은 함선 탑재 대공방어체계의 개량을 위험하게 미루었다. 전체적으로, 루프트바페는 분리된 해상 항공무기는 불필요하다고 결론 내렸으며, 1940년부터 지상 기지의 해군 비행대대들이 공군에 흡수되기 시작하였다. 정찰이 결국 스페인의 독일 해상 항공정책의 가장 성공적인 부분이었다. 처음에는, 불충분한 결과만을 얻었기 때문에 지상과 해상의 정찰 모두 부정적으로 판단되었다. 지속적인 폭격으로 공화파를 지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정찰 경시 태도는 공중 관측의 가치를 증명하는 보고서들을 접하면서 바뀌었다. 관측기는 적에게 위치하였으므로, 단순히 되는대로 폭격기를 보내는 무의미한 관습을 배제함으로써 자원 보호를 계획하고 임무를 이행했다. 뛰어난 기동성의 지상 부대의 전투의 특성상, 어느 순간이든 적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것이 중요했다. 브루네티 전투에서는, 국가주의자들의 관측기가 상공에 파견되었다. 30분 이내에 적의 집결지가 관측되었고, 군단의 폭격기가 출현하여 공화군 부대에 공습과 기총소사를 하였다. 공화파 공군은 항상 국가주의자들의 정찰기를 격추하는데 많은 노력을 쏟았으며, 이 관측기들에게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회피 전술의 실행이 강요되었다. 일반적으로, 관측기는 전투용 항공기보다 장갑과 무장이 더 가벼웠다. 속도가 가장 중요했다. 공격을 받으면, 정찰기는 구름 속으로 숨었다. 어느 것도 불가능하면, 비행기는 추적자로부터 탈출하거나, 최소한 공격을 한번으로 제한시키기에 충분한 속도를 얻기 위해 급강하에 들어갔다. 정찰기들이 연습한 또다른 전술은 적 전투기의 사거리에 들기 전에 멀리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개시하는 것이었으며, 때때로 적이 너무 이르게 공격을 멈추는 것을 유발했다. "정찰기들의 기술적 불리성을 고려하면, 군단은 적은 수의 정찰기만을 상실했다." 병참 및 작전 기동성은 루프트바페가 스페인에서 얻은 병참상의 핵심 교훈이었다. 기동성의 필요성은 1935-36년의 이탈리아군의 이디오피아(Ethiopia)에서의 군사적 경험으로 입증된 바 있었다. 기동성은 때때로 잘 훈련되고 잘 무장된 이디오피아군에 대해서 이탈리아군이 성공을 거둔 열쇠였다. 그렇지만, 스페인의 독일군에게는, 기동성이라는 것은 단순한 인원과 장비의 신속한 전개 이상을 의미했다. 육군 참모부는 기동성은 기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후에 폴란드에서 체험된 바와 같이 전체 부대 시설을 빠르게 이동시키기 위한 공중 수송과 철도 이용은 전격전(Blitzkrieg)의 기초였다. 철도 수송대(Wohnzug)가 실제의 기동성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철도 수송대는 대략 11대의 철도 객차로 구성되었으며, 그중 두 대는 기차의 양 끝에 붙은 기관차로, 회전의 필요성을 없앴다. 객차의 3분의 1은 장교와 사병을 위한 침대칸을 포함하였다. 어느 순간이든, 철도 수송대는 모든 비행대대의 장비와 지원 인력을 수송할 수 있었다. 비행 인원은 자신들의 비행기로 지정된 다음 작전 기지로 비행하여 철도로 수송되는 나머지 대대를 기다렸다. 1939년까지, 모든 콘돌 군단 비행대대들은 수송과 무선 지향 탐지소로 사용하기 위한 두 대의 Ju52기를 배정받았다. Ju52기는 믿음직한 일꾼이라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주어진 임무에 완전히 적합하였다 작전중에는, 콘돌 군단은 지상 지원 인원이 특히 황폐한 스페인 환경에서 매우 중요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료병, 엔진 수리병, 피해 및 손상 수리병등이 콘돌 군단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처음에는, 군단은 항공기를 적절히 유지관리하는데 필요한 인원수와 과로, 부상, 전사한 전선의 조종사를 대체할 예비 인원수를 과소평가했다. 인원들에게 요구된 때때로 가혹하고 긴장되는 조건하에서 길고 일정치 않은 시간이 포함된 노력은 더 많은 인원들에게 작업량이 더욱 고르게 분포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군단은 전투의 초반에는 공중 전투가 계속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곧 대대들이 휴식 없이 많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명확해졌으며, 보급과 인원은 빠르게 소모되고 지쳤다. 루프트바페가 전쟁에서 이점을 취한 대표적인 작전의 교훈은 실행 평가뿐만 아니라 조직에도 해당하였다. 전쟁의 진행중에, 전투 대대의 비행부대와 지상 인원들이 재편되었다. 이 편성은 나중에 표준 작전편성의 기초가 되었다. 특별 전투 보고팀이 베를린에서 구성되어 정기적으로 분석과 평가를 보내라는 명령을 받고 스페인에 급파되었다. 그에 더해서, 교도 사단(Lehr; 기술 개발 비행 부대)이 1937년에 그라이프스발트(Greifswald)에서 조직되었다. 이 부대의 목적은 스페인 전투의 교훈을 발견하고 공중 시험과 공장 연구로부터 경험을 추출하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교도 사단은 대부분 스페인에서 얻은 새 전술적 항공 교훈을 열심히 흡수하고 가르친 고급 비행학교와 심화 작전 훈련소의 기능을 하였다.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 교훈들 중 대부분은 이후에 2차대전 내내 루프트바페가 사용하게 될 표준 절차로 채택되었다. 스페인에서의 항공 이론 적용 공군 사령관(1921)인 굴리오 두헤(Giulio Douhet)가 그의 책에서 밝힌 항공 교리 이론은 1936년에서 1939년의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맹렬한 전투에는 간단하게 적용할 수 없는 "전략" 폭격의 개념을 요구하였다. 두헤의 이론은 1차대전의 전형인 고정된 참호전투가 모든 미래의 지상전투의 모습이 되고 "전략" 폭격이 소모전의 살육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제공할 것이라는 전제를 단정하고 있었다. 스페인에서 국가주의자와 공화파간의 투쟁은 유동적이고 기동성 있는 특징을 지녔으며, 많은 다양한 종류의 지형과 기후에 걸쳤고, 미묘한 정치적 상황에 속박되어 있었으며 가용한 장비의 제한을 받았다. 두헤가 주장한 승리의 길은 적의 도시와 공업기반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스페인에는 대형의 중공업단지가 매우 적었다. 스페인은 두헤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한 전쟁도, 입증하는 전쟁도, 입증할 수도 없는 전쟁이라고 예상되었다. 콘돌 군단의 폭격기가 사실상 방해받지 않고 공화파를 공격할 수 있었다는 특수한 조건을 제외하면, 잘 조직된 전투기 방어가 "전략" 폭격 공세를 불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점은 거의 검증되지 못했다. 근접 지상 지원 전술의 개발은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졌고, 스페인의 독특한 상황으로 인하여 급강하 폭격과 중형(medium) 폭격기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다른 많은 요인들이 이러한 개발 경향의 원인이 되었지만, 부차적인 이유였다. 1937년 5월 1일 리흐토펜은 루프트바페 수뇌부에 "스페인의 [국가주의자] 포병은 항상 늦게 도착합니다; 너무 느리고 적을 고착시키는 것이 너무 서툽니다. 우선 적에게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두 번째로 적을 고착시키며, 도망치게 만들고, 전투 의지를 꺾으며, 보급과 증원을 방해하는 전투의 짐이 비행부대에 지워져 있습니다." 라고 편지로 상황을 보고했다. 스페인에서 체험한 콘돌 군단의 항공 교리가 여기에 납득할만 하게 요약되어있었다. 리흐토펜의 주장에 따르면, 공군은 공격을 실행하는 주된 책임을 졌다. 그의 신념은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것이었으며, 육군과 공군간의 근접 협조는 실제로 필수적이었다. 군단 비행부대의 목표는 세 가지였다: (1) 육군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하여 적 공군을 수색한다. (2) 적 육군을 공격하여 부대와, 수송과 통신을 교란하고, (3) 적의 공중 공격으로부터 지상 부대와 보병을 보호한다. 공중 우세를 확보한 후에는, 공군은 공대공에서 공대지 공격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루프트바페의 수뇌부는 스페인 전쟁의 초기에는 근접 지상 지원 전술의 효과와 적응성을 알지 못했다. 이는 여전히 "전략" 폭격 개념에 종속되어 있었다. 폰 리흐토펜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수뇌부의 전략적 항공력에 대한 신념에서 독립해 나갔고 근접 지원 전술이 대단한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설득하였다. 어떤 저자들은 독일 육군의 영향력과 지배력으로 인해 독일이 통상적인 항공력이 아니라 전술 항공력에 기초한 공군을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저자들에게는 루프트바페의 날갯짓이 육군 상비군에 종속되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전략" 폭격에 대한 저항은 전술 항공력의 적용을 선도한 리흐토펜의 인내력과 결단력 뿐이었다. 스페인에서의 최초의 근접 지원 작전은 1937년 3월에 실시한 빌바오(Bilbao)의 공화군 전선에 대한 He51 전투폭격기의 매우 성공적인 저공 공격이었다. 독일에게는, 되돌아보면 작전 교리로서 그리고 이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전략인 전술 항공력이 다음 전쟁과 모든 미래의 전쟁의 향방을 바꾸었다. 리흐토펜은 근접 지상 지원 전술을 개발하였을 뿐이었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폭격은 전략의 일부로서 방해받지 않았다. 그렇지만 폭격이 전략 계획에 포함되었다는 것이 "전략" 폭격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위에 묘사한 바와 같이, 스페인 전쟁동안 콘돌군단에 의한 고고도 "전략" 폭격은 다양한 정치, 경제, 구조적 환경 때문에 가끔씩만 시험되었다. 게다가, 스페인 내전에서는 저지 폭격이 빛나는 성공을 거두지도 못했다. 조종사들은 최적의 상황하에서도 통상적인 고고도 정밀 폭격이 어렵고, 강력하게 방어된 표적이나 점표적에 대해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정확한 폭격조준기의 결핍이 이 문제의 한 원인이었다. 그 결과, 대안은 자연히 급강하 폭격쪽으로 가게 되었다. 1938년판 루프트바페 연감은 "전략" 폭격의 추정 효과 - 공업 기반을 파괴하고, 노동 인구의 사기를 황폐화시키고, 시민을 혼란시키는 - 가 단순히 없었다고 묘사한다. 이러한 견해로, "전략" 폭격은 수행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비효과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대단한 정밀성이 보장되는 급강하 폭격이 장래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스페인에서 "전략" 폭격이 사라진 또다른 이유는 발터 베버의 사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베버가 믿었던 4발의 "우랄(Ural)" 중(heavy)폭격기는 그의 사망과 함께 사라졌으며, 수뇌부의 누구도 궁극적인 결과에 대한 확실한 이해 없이 비용이 많이 들고 가설에 근거한 프로그램을 지속할 의지가 없었다. 개인들의 취향이 루프트바페의 항공 이론의 방향에 또한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에른스트 우데트는 1939년 2월부터 루프트바페의 참모장이 되는 한스 예쵸넥(Hans Jeschonnek) 대령과의 교분을 유지했다. 우데트의 성급한 선입견으로 인해 독일 공군 참모정책은 베버의 "우랄" 폭격기가 아니라 고속 경폭격기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독일은 미국의 보잉(Boeing) B17에 상응하는 무기를 끝내 만들지 않았으며, 이는 1940년의 과정동안 루프트바페가 폭격으로 영국을 굴복시키는데 실패한 한 원인이 된 실책이었다. 완고한 교리와 헛된 희망, 경제적 압박, 성공의 과대평가가 1943-44년의 독일 제국(Reich)의 방어에서 전투기 전력의 잘못된 이용을 이끌었다. 스페인은 방공포대가 거의 전능하다는 믿음을 낳았다. 독일은 스페인 전쟁의 3년간 거듭 성공적으로 쓰인 매우 효과적인 무기인 88mm 고사포를 생산했다. 88mm포는 스페인에서 적기에 대한 방어용 뿐만 아니라 선박, 전차, 부대, 기타 지상 표적을 공격하는데 쓰였다. 방공포대에 대한 신뢰는 포수들이 정예라는 특징에 의해 강화되었다. 전쟁 전의 대공 부대들은 자주적이고 잘 훈련된 인원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다. 침입하는 적기를 방어하는데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이들에게 주어졌다. 그 결과, 루프트바페는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영국이 가졌던 것과 같은 조기 경보 레이다, 전투기 관제의 개발을 게을리했다. 이 약점은 방공포와 전투기 부대를 연결하는 뛰어난 항공기 보고 체계(리흐토펜과 근접 지원 전술 참조)에 의해 부분적으로 상쇄되었지만, 이는 스페인의 방공포대의 성공과 두헤의 공격 이론의 영향, 그리고 포대의 소음과 섬광이 정치적으로 유익하고 시민들에게 심리적 효과를 준다는 히틀러의 믿음 때문에 그다지 충분치 못했다. 루프트바페는 본국의 방어를 이 88mm 포대에 의지하였고, 전투기와 폭격기 생산 중에서 후자에 심혈을 기울였다. 전쟁 전의 루프트바페 부대들 중 40%가 폭격기와 급강하 폭격기였으며 25-30%만이 전투기였다. 단기적으로는 이러한 전투기와 폭격기의 불균형이 스페인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독일은 두헤가 구상한 "전략" 폭격에 종속되었다. 다시 말하면, 독일의 빛나는 단기적인 전술적 문제해결을 위한 군사적 특징이 장기적으로는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필수적인 전략 계획의 토대를 침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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