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혁거세 거서간 (박혁거세)
천년사직의 창시자이자 알에서 태어난 최초의 한국인이다
근데 이 양반의 성씨는 박씨가 아니다 박(朴)은 훗날 후손들이 붙인건데 성씨로 붙인것도 아니였다
박혁거세(朴赫居世)의 ‘赫(혁)’과 ‘朴(박)’은 둘다 ‘ᄇᆞᆰ’(밝다)의 뜻을 반복하여 쓴거였다
즉 朴(박)이란 밝다라는 뜻의 赫(혁)의 뜻을 확실하게 하기 위한 짧은 설명문으로
혁거세란 이름의 진짜 뜻도 "밝은 누리(=세상,세계)"가 된다
밝은누리를 한자로 음차한 이름도 존재하는데 바로 불구내(弗矩內)다.
근데 졸지에 박(朴)이 성처럼 관습되더니 결국엔 현대의 수백만 모든 박씨들의 시조가 돼버렸다
특이한건 보통 창업군주들은 나라를 세운 대업덕에 말년을 편하게 보내는데 (이성계도 말년에 킬방원하고 화해했다)
밝은누리는 말년에 하늘을 날다가 갑자기 몸이 토막나서 죽어버렸다 그리고 이걸 보고 충격먹은 마누라도 같이 죽는다
알에서 태어났다는것과 똑같은 소리니까 그냥 그러너니 해라 고대 설화들이 다 그렇지 뭐
게다가 고구려,백제 시조들과 사뭇 다른점이 있는데
동명성왕 주몽은 탈부여해서 개쩌는 능력과 기지를 발휘해서 우여곡절 끝에 나라를 세웠고
온조도 그애비의 그 아들답게 똑같이 탈구려해서 개쩌는 위치선정으로 형 비류와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나라를 세웠다
근데 우리의 밝은누리는 고작 13살때 경주에서 힘 좀 쓰던 촌장 6명이서 왕으로 추대했다
즉 헬조선에서 수저의 중요성을 보여준 첫번째 사례라 할 수 있다 막말로 꼬우면 알에서 태어 났어야지 아 ㅋㅋ
2. 파사 이사금
신라 주변에 찌끄레기들을 정리한 왕이다 85년과 94년의 백제와 가야의 침략을 막아냈고
102년에는 음즙벌국과 실직곡국 사이의 영토 분쟁을 해결해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파사 이사금은 연륜이 좀 있는 수로왕한테 맡겨보자 해서 금관가야의 왕 수로왕에게 떠넘긴다
이후 수로가 판결을 음즙벌국이 가지라고 판결을 내리자 연회를 베풀었는데
신라 6부 중 한기부에서 급 낮은 관리가 접대를 하자 빡친 수로왕은 자객을 보내 한기부의 우두머리를 죽여버렸다
근데 이 자객이 음즙벌국에 있는 한 집안에 숨어 들었는데 하필 그게 왕 타추간(陀鄒干)의 집이였다
이에 눈 돌아간 파사 이사금은 아예 음즙벌국을 정복해버린다 ㄷㄷ
그리고 신라의 위세에 겁먹은 현재의 삼척시(혹은 울진군, 태백시, 동해시)의 실직곡국과 경산시의 압독국도 따라 항복했다
그야말로 상남자식 해결법 아니겠노? 는 개뿔 주범 가야는 무서워서 못건들겠으니 주변 찌끄레기들한테 화풀이 한거다
그래도 이 파사이사금 덕에 신라는 경상도에서 일진으로 성장했다
3. 지증왕
업적은 신라라는 국호를 확정 지었다 근데 이때가 무려 503년(!)
원래 삼국시대라는게 말이 삼국시대지 원래 고대 한반도는 2강(고구려,백제)+경상도 구석탱이에 짜져있는 나라들 구도였다
딱보면 알겠지만 중국과 가까운 고구려와 백제가 가장 빠르게 성장한건 문명의 흐름으로 보면 당연한거라
이 둘이 초기엔 박터지게 싸우다 신라가 나중에 가야를 흡수하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삼국이 서로 대등하게 죶비비는 단계가 됐다
애당초 이 땅에 딱 고구려,백제,신라만 존재하던 기간은 100년도 안되는 94년따리다
또한 간(干)에서 왕(王)이란 호칭을 최초로 쓴 신라왕이기도 하다
그리고 순장을 금지 했으며 지방 조직인 군현제를 정비 했다
우산국(울릉도, 독도)도 이 때 따먹었다. 우산국 따먹는데 기여한 이사부도 함께 외워두자
누구나 다 잘 알겠지만 한남 최고의 대물로 이름을 날렸다. 크기는 1자 5치(45cm).
신라는 실제로 목재 딜도 유물이 발견 되고 있어 쥬지숭배(?)를 한걸지도 모른다
근데 45cm를 받아줄 한녀가 없어서 환갑이 지날때까지 장가를 가지 못했다 ㅠㅠ
그러던중 크고 아름다운 똥을 발견해서 신하들을 시켜 똥의 주인을 찾으라고 시켰다.
그 똥의 주인은 여자였는데 똥에 비례하는 거대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미터법 기준으로는 225cm겠지만, 그건 너무 크고 절충해서 170대 정도로 봐야할듯)
결국 그 한녀랑 결혼해 질내 대신 장내사정으로 행복한 신혼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어쨌든 해피엔딩이노 ㅋㅋ
4. 법흥왕
45cm의 대물 애비와 큰똥 잘 싼다는 이유로 63세 틀딱한테 따여 허벌이 된 애미 사이에서 태어났다
위에서 설명 했듯이 신라는 전성기를 맞는 속도가 가장 늦었다 그래서 명군들도 후기에 몰려있는데
이때 드디어 가야중에 금관가야를 정복해 신라도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맞게 된다
또한 536년 연호를 건원(建元)이라 정했는데 이는 신라 최초의 연호다
가장 중요한건 이때 신라에서 불교가 국교로 인정된다
시호인 법(法)은 불교도 의미하기에 불교 공인이 당대에도 최고 업적으로 칭송 받았었는듯?
고구려(372년), 백제(384년)에 비해 150년 가량 늦게 불교를 공인했는데
당시 기존의 신라 토착 신앙을 고수하며 외래종교인 불교의 국교화를 반대했다
이때 자신의 모가지를 희생해 국교 공인을 관철 시킨인물이 바로 이차돈이다
5. 진흥왕
당시 백제에는 성왕이라고 백제 전성기 시절의 왕권을 다시 회복시킨 왕이 있었다
근데 고구려 안장왕과 병림픽에서 털리고 사비로 튀었다
그래도 100년을 이어진 나제동맹은 건재해서 신라를 믿고 550년에는 고구려와 도살성, 금현성을 놓고 싸웠는데
이때 갑툭튀한 신라가 두 성을 냅다 먹어버렸다 성왕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당시 성왕은 장수왕한테 모가지 썰린 고스트 바둑왕의 원수를 갚고
고향 땅 한강 하류의 서울 송파구 일대를 회복한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신라의 협력이 필수적이였다
이때 성왕이 나제동맹을 얼마나 지키고 싶어했냐면 혼인동맹으로 발전 시킬려까지 했다
그리고 무왕대에 이루어진다 다만 둘도 없는 원수사이가 됐지만
이후 같이 고구려를 몰아낸 나제동맹군은 서울에 당당히 입성 했는데
문제는....신라의 욕심은 끝이 없고.... 성왕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이때 백제는 신라에게 한번 더 연합해서 고구려의 평양을 치자 했었는데
고구려는 당시 친했던 유연이 돌궐한테 후장이 따여 사라져 전선을 둘로 나눌수가 없는 상황이였다
결국 경기도, 황해도, 함경도 해안선 등 진흥왕이 정복한 땅을 신라 땅으로 용인해 주는 북진을 포기해달라 요청 했다
그리고 진흥왕은 백제 대신 고구려의 제의를 수락하고 백제 쪽으로 남하를 해버린다
근데 처음에는 무력으로 뺏은건 아니였다
백제가 이미 공세종말점 도달해서 한강 하류쪽을 제대로 관할하지 못해서 사실상 점령을 미룬건데
성왕 입장에선 "우리가 갖기로 했는데 설마 내려오진 않겠지?" 하고 나제동맹을 굳건히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을 뿐. 진흥왕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매 이게 다 뭐노??? 씅왕 썽님 므찌네 이거 다 우리 가지라고 군사뺀게 맞제? 충성 ^^7"
당연히 성왕은 "뭐하냐 이건 약속 위반이잖아" 라고 항의했고 진흥왕의 반응은 "나가 그랬당가?"
이렇게 나제동맹이 깨졌고 빡친 성왕은 대가야와 왜까지 끌여들여 복수전을 펼쳤다
는 역으로 허벌나게 털렸다
이때 신라는 쌍도 끄트머리에서 찌질거리던 나라가 아니였다 금관가야 정복으로 전성기를 맞은 신라였다
이후 붙잡힌 성왕은 "구차하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겠다"(일본기록) 라는 좆간지 나는 유언을 끝으로 모가지 뚝 떨어졌다
이때 신라의 통수 맛이 어찌나 달콤 했는지 중독이 된 백제는 신라 한번 따먹어 보겠다고 멸망할때 까지 신라바라기가 된다
만약 이때 백제가 다시 한강을 차지 했으면 다시 근초고왕 시절의 영광을 되살릴 수 있던걸로 보인다
아들내미 위덕왕도 태자시절 기록이 ㅅㅌㅊ에 그 다음 왕들 무왕과 의자왕도 굉장히 호전적인 군주였기 때문
그나마 백제는 양반이였다 이후 대가야는 완전히 후장이 따여 신라로 흡수 당했다
그렇게 가야에겐 죽음을 백제에겐 통수를 고구려에겐 합의를 이끌며 최전성기를 달리게 된다
전통적인 2강 구도였던 한반도가 진흥왕 시대를 기점으로 드디어 3강 구도로 개편되는 순간이였다
이제 한반도에 나라는 진짜 고구려,백제,신라 딱 3나라만 남게 되면서 통일만을 남겨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로써 삼국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끝을 향해 달려간다
니들이 생각하는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대등하게 힘 싸움 하는 그림도 모두 삼국시대 후기~말기에 몰려있다
밑에는 신라 위주가 아닌 그냥 전체적으로 삼국통일의 모든 과정을 다 적었다
<삼국통일: 폭풍전야>
1. 여왕의 시대
단군이래 한민족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이 등장하면서 신라의 위세는 꺾이게 된다
당시 신라바라기로 전직한 백제는 2대에 걸쳐 (무왕-의자왕)한번 따먹어 보겠다고 신라를 압박 했는데
그 공세가 가히 파상공세였다. 재위 3년(633)에 매부(진짜 무왕 마누라가 선화공주가 맞다면) 백제 무왕이 서곡성을 함락 시켰는데
이곳은 무주군에서 경주로 이어지는 최단거리 코스의 첫 단추가 되는 전략 요충지였다
즉 선덕여왕이 옥좌에 앉자마자 백제는 경주로 가는 길목을 뚫어버렸다
당연히 하두 처맞으니 그만좀 처맞고 싶은 마음에 거대 구조물을 하나 지었는데 그게 바로 황룡사 9층 목탑이다
이 목탑 한층한층이 주변 나라들을 의미하는데
1층은 일본, 제2층은 중국, 제3층은 오월(남중국), 제4층은 탐라, 제5층은 백제, 제6층은 말갈, 제7층은 거란, 제8층은 여진, 제9층은 고구려를 의미한다
그만큼 당대 신라의 상황은 절박하게 흘러갔다
2. 애미를 모르는 왕의 등장
애미가 선화공주인지 사택왕후인지 것도 아니면 딴년인지 모르는 노근본 한남이 왕이 됐다 (이런 이유들 때문일까 40살때 태자에 책봉 된다)
진짜 애미가 신라 공주라면 위에 한녀는 자기 조카한테 개처맞은 꼴이 된다 아닌가 반대로 이모를 두들겨팬 후레자식이 되는건가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몸소 닉값을 실천해 체어샷을 존나게 날려댔는데
특히 김춘추가 낙하산으로 꽂아놨던 사위 김품석의 실책으로 윤충의 1만 군사는 대야성을 함락 시켰다
대야성의 함락으로 이제 경주 앞을 지키는건 압독주 하나 밖에 없었다
체어맨의 이종사촌인 김춘추가 이때 대야성 전투에서 죽은 사위와 딸의 복수를 위해 진덕여왕에게 졸랐지만
진덕여왕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수없다 한것으로 보아 당대 체어맨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게 해준다
당시 체어맨의 애무 목록
642년 대야성 포함 40여개 성 함락
645년 7개 성 함락
648년 10여개 성 함락
649년 7개 성 함락
655년 30여개 성 함락
ㄱㅆㅅㅌㅊ
이젠 뷰지에(경주) 넣어 따먹을 일만 남았다
3. 정권을 잡은 영웅? 역적?
여수전쟁 겪고 반전주의자 되어버린 영류왕은 친당 정책을 피며 어떻게든 전쟁만큼은 피할려 했다
는 되려 당나라와 좆목한다는 이유로 죽여버리고 연개소문은 스스로를 대막리지라 부르며 실권을 잡게 된다
당연히 당나라는 이것을 명분을 처들어 오는데 솔직히 당태종 못이겼으면 고구려판 이완용이 될 뻔 했지만 이겨냈다
이때 김춘추는 지들이 전에 공격했던 고구려에 찾아와서
"마 지난 일은 다 잊어삐고 화해합시더... 그리고 군사 좀 보내주이소." 라고 주장한다
이에 연개소문의 바지사장인 보장왕은 "던에 뺏어간 죽령 서북을 다시 돌려주메 군사 지원을 해주갔습네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죽령을 돌려주면 한강 유역의 통로를 뺏기는건 물론이오 경주로 가는 길목이 트이게 된다
즉 연개소문은 첨부터 신라를 도울 생각이 없었다
이에 김춘추는
"마!!!!!! 니는 이웃이 위험에 처했는데 땅 내노라고 하는기가!!!! 어!!!!!!! 이웃간에 증도 모르노!!!!!"라고 병신같은 소리를 해댔고
보장왕은 "저 종간나 새끼 감옥에 날래 처넣으라우!" 하고 감옥에 가뒀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는 난리가 나서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무력 시위를 했는데
이때 김춘추는 꾀를 발휘해 선도해에게 뇌물을 썼더니 토끼전 얘기를 해줬고
김춘추는 "올커니!" 하고, 곧바로 연개소문에게 신라에 돌아가 왕에게 요청하여 땅 줄테니 풀어달라고 한다
이에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풀어주지만 김춘추는 그대로 입 씻었다. 키야~ ㅆㅌㅊ?
만약 이때 김춘추가 죽었다면 연개소문+체어왕과의 쓰리썸을 끝으로 신라는 사라졌다
4. 오랑캐의 후예, 대륙의 주인이 되다
수나라와 당나라 연달아 북방 유목민의 후예들이 대륙을 장악했다
이때 중국에서 변화가 한번 일어나는데 가장 큰건 의복이다
원래는 목 부분을 Y자형태로 포개 입었는데(좌) 이때 유목민들의 옷이 도입되면서
목 주변이 둥근형태의 단령이 퍼졌고(우) 이는 한국,일본,베트남까지 퍼지게 된다 (곤룡포,조선-고려의 관복 모두 단령의 일종이다)
이런 유목민 특유의 개방적 성격과 교류를 중시하는 성격 덕분에 장안에는 외국의 유학생들이 즐비했고
여자들 옷도 애기밥주머니 골까지 보이게 파격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런 개방적인 성격덕에 역대 중국 왕조중에 외국 정세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그 결과 서역으로 가는 길목을 장악했으며
툭하면 신라 백제보고 그만 싸워라라고 잔소리, 고구려보고는 말 좀 들어 개새끼들아라고 잔소리
결국 연개소문이 영류왕 시해한걸 명분+한술 더 떠 토막살인 했다는 유언비어까지 만들어 처들어왔다가 역으로 처맞고 돌아갔다
그렇게 당나라도 쒸익쒸익 거리며 신라보다 더 많은 군사를 보내며 당당히 주연으로써 참전으로써 하게 된다
5. 오직 백제바라기♥ 무조건 백제! 죽어도 백제!
주인님 좆맛에 푹 빠진 왜는 다른거 없고 백제 없인 못살아 정말 못살아~! 이거였다
그래서 "체어맨 하고 싶은거 다해!!" 를 백제 망할때까지 외쳤는데
이때 김춘추는 관계좀 풀어보겠다고 왜에 방문 했다고 일본 기록에'만' 나와있다
당연히 무슬람들이 알라 유일신을 외치듯 백제 유일신을 외치는 왜한테는 소귀에 경읽기였다
그만큼 백제와 왜는 한쪽이 뒤질때까지 끝나지 않는 사랑이였다 그래서 진짜 끝내버렸다
얘네는 부흥운동때 적극 참전한다
<삼국통일: 나당동맹 체결>
6. 6번째 명군
체어맨의 애무에 싸기 직전까지 몰린 신라
그러나 김유신이 활약하는 신라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 일진일퇴의 소모적인 상황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중국과의 좆목절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는데
당태종이 백제와의 단교를 선언했고(645년) 혼자 고구려와 1ㄷ1로 붙다가 안시성에서 길막 당했다 (645년)
당연히 이런 천운을 김춘추가 놓칠리가 없었고 바로 당나라로 찾아가
"마! 황제요! 요 백제놈들 먼저 털고 고 다음 고구려 치면 된다 안카나!!"
이에 당나라에서는 "바다 건너가면 보급(쌀)은 어떻게 하냐해?" 라고 물었고
"쌀? 고거이 우리가 다 대줄테니 걱정 마이소" 라고 이렇게 648년에 나당동맹이 체결 됐다
이후 654년 진덕여왕이 죽고 최초로 진골출신 한남이 왕위에 오르니
그게 바로 이 김춘추로 삼국통일의 초석을 닦은 신라의 6번째 명군 태종 무열왕이다
그리고 김춘추는 김유신을 총사령관으로 파견했는데 흔히들 김유신을 명장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열전 3권에는 혼자 적장 목 따오는 육지의 이순신급으로 나와있는데
근데 사실 이 양반은 정치군인에 가깝다 (그래도 권율정도는 된다)
임신공격으로 몰락한 왕족에서 귀순했던 나라의 왕족으로 사후에는 아예 왕으로 추존 됐다 (흥무대왕)
또 647년 백제가 신라를 3천의 병력으로 쳤을때 1만을 이끌고가서 싸웠으나 백제군에게 밀렸다
이때 부하랑 그 자식 제물로 바치니 이겼다는데
남의자식 죽여다 승리하는게 이 양반의 특수능력인가보다
삼국유사에는 검기로 바위를 벴다고 하는데 이게 필살기로 보인다
아무튼 그렇게 당나라에서는 소정방에게 13만 대군으로 서해바다를 건너 백제를 치게 했고
신라는 김유신과 영혼까지 끌어모은 병력 5만명을 파견해 국운이 달린 쌀배달 쿠팡맨 작전을 시작한다
근데 이 앞을 백제의 명장 계백이 5000명의 군사로 가로막는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황산벌 전투다
5만 vs 5천, 김유신 vs 계백!
드디어 삼국통일 전쟁의 막이 오르는 순간이였다
전쟁,멸망,부흥운동,나당전쟁,삼국통일은 다음편에 계속...
고구려의 7대 명군 https://gall.dcinside.com/baseball_new9/881948
백제의 7대 명군 https://gall.dcinside.com/baseball_new9/1298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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