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말이 있다. "넌 왜 그렇게 산만하니." 나는 관심사가 너무 많았다. 어른들은 그걸 두고 '집중력이 부족하다'고 했고, 선생님은 '하나만 제대로 해라'라고 했다. 어른이 되어도 나는 여전했다. 심리학도 궁금하고, 사업도 하고 싶고, 글도 쓰고 싶고,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일단 만져봐야 직성이 풀렸다. 그때마다 스스로를 질책하며 말했다. 나는 한 우물을 파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어딘가 부족한 사람이구나.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했던 시절이 꽤 길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결국 나는 한 우물을 파지 않았다. 교육학을 공부하다가 상담 현장에 뛰어들었고, 부모교육 스타트업을 창업해서 7년을 운영하다 매각했고, 지금은 다양한 도메인의 산업에서 새로운 사업들을 만들어내고 기업의 AX전환을 돕고있다. 상담과 교육, 육아와 경영, 비즈니스와 기술 — 이렇게 전혀 다른 분야를 넘나들면서 말이다. 예전 같으면 '이력이 중구난방'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려온다. 성인 ADHD — 혹은 그에 가까운 특성을 가진 사람들 — 이 AI 시대의 인재상에 가장 가깝다는 것이다. 관심사가 여러 개이고, 새로운 도구에 빠르게 몰입하고, 전혀 다른 분야를 넘나들며 연결하는 사람. 예전에는 '산만하다'고 불렸던 바로 그 특성이, 지금은 '다중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솔직히, 좀 억울하면서도 통쾌한 기분이었다.
물론 우리 세대는 다르게 자랐다. "한 우물만 파라." 이 말을 정답처럼 듣고 자랐으니까. 한 분야를 깊이 파는 I형 인재가 이상적 모델이었고, 거기에 폭넓은 교양을 얹은 T형, 두 개 이상의 전문 영역을 가진 π(파이)형이 차례로 등장했고, 얼마 전까지 풀스택 — 이라고 부르고 유니콘과 환상이라고 칭했던 — 역량들이 점점 더 강하게 부각되던 참이었다. 그런데 생성형 AI가 등장한 이후, 이 도식 자체가 흔들려 버렸다.
AI가 진입장벽을 허물면 생기는 일
불과 2~3년 전만 해도 영상 편집은 전문가의 영역이었다. 코딩을 하려면 컴퓨터공학을 전공해야 했고, 번역은 언어를 수년간 공부한 사람의 몫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프롬프트 몇 줄이면 영상이 만들어지고, 코드가 생성되고, 논문 수준의 번역이 나온다. 나 역시 개발자가 아닌데, AI를 활용해서 가벼운 기능들은 스스로 기획하고 만들고 있다. 기술의 진입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이 변화가 뜻하는 바는 꽤 분명하다. 하나의 전문성만으로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
오히려 지금 눈에 띄는 사람들은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연결하는 사람들이다. 역사 속 폴리매스, 즉 다빈치나 벤저민 프랭클린 같은 다재다능한 인물은 늘 존재했다. 다만 과거에는 그것이 천재의 특권이었다면, AI 시대에는 누구나 그 가능성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예전에 '산만하다'고 혼났던 아이들이, 이제는 시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고하고 있었던 셈이다.
여기서 하나의 개념을 제안해본다. 바로 '빗(Comb)형 인재'다. 빗을 떠올려 보자. 하나의 단단한 등뼈가 있고, 그 아래로 여러 개의 빗살이 나란히 뻗어 있다. I형이 빗살 하나라면, T형은 등뼈에 빗살 하나, π형은 빗살 둘이다. 빗형은 하나의 등뼈 아래 무수한 빗살을 가진 구조다. AI가 각 분야의 진입장벽을 낮춰주면서, 여러 개의 빗살 — 다중 전문성 — 을 기르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해졌다.
발달심리학자 비고츠키는 아이가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적절한 도움이 있으면 해낼 수 있는 영역을 '근접발달영역(ZPD)'이라 불렀다. AI는 바로 이 도움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예전에는 전문가 옆에 서야만 배울 수 있었던 것들 — 작곡, 데이터 분석, 3D 모델링 — 을 이제 AI라는 비계(scaffolding)를 통해 훨씬 빠르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가 "수의사도 하고 유튜브도 하고 싶어"라고 말할 때, 그건 산만함이 아니라 이 시대가 열어준 가능성에 대한 직관일 수 있다.
그런데 빗살만 있으면 어떻게 될까
물론 "여러 분야를 넓게"가 "아무거나 얕게"를 뜻하는 건 아니다. 빗형 인재에서 정말 중요한 건 빗살의 개수가 아니라 등뼈의 존재다. 빗살만 있고 등뼈가 없으면, 그건 빗이 아니라 흩어진 바늘에 불과하니까. 이 등뼈가 무엇인지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한 가지만 미리 말하자면 그것은 기술이 아니다. 기술은 빗살이다. 등뼈는 그 빗살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전혀 다른 무엇이다.
서울 중·고등학생의 94.7%가 이미 생성형 AI를 사용해본 경험이 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아이들은 이미 빗살을 만들고 있다. 문제는 그 빗살을 엮어줄 등뼈를 우리가 준비해주고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뒤늦게야 알았다. 어릴 때 산만하다고 들었던 나에게 부족했던 건 집중력이 아니었다. 여러 개의 빗살을 엮어줄 등뼈를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을 뿐이었다. 교육학에서 상담으로, 상담에서 창업으로, 창업에서 AI로. 그 '중구난방'한 여정이 결국 하나의 빗이 되기까지, 내게 필요했던 건 더 깊은 우물이 아니라 더 단단한 등뼈였다. 지금 "하나만 골라"라는 말 대신 아이에게 건네야 할 것이 있다면, 아마 이런 질문일 것이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 그걸 하나로 묶어주는 게 뭘까?"
✒+필자 소개
이혜린 l 쉬벤처스 부대표/하비탄AI 이사
부모와 아이, 비즈니스와 기술, 교육과 심리를 동시에 넘나드는 AX(AI Transformation) 전 문가. 부모교육 스타트업 '그로잉맘'을 공동창업해 7만 부모와 함께하며 누구보다 아이와 부모 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 전문가이자, 현재는 비즈니스빌더로서 다양한 산업분야에 걸쳐 신사업 개발 및 AX전환을 돕고 있다. 저서로 《엄마의 속도로 일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잘 쓸 준비 됐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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