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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갤에서 가장 스압]바둑의 전설 : 바둑황제 조훈현 - 일대기

나1단인가?(121.180) 2015.01.14 02:37:21
조회 5897 추천 8 댓글 8

세계 바둑계를 배경으로 삼국지를 쓴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한.중.일 동양 삼국이 바둑의 중심국이기에 구성요소는 기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삼국의 비중도 결코 어느 한 나라에 기울지않고 팽팽한 황금분할을 이루고있어 균형적이다.
중국은 바둑의 발상지이자 엄청난 바둑인구를 지니고있는 종주국(宗主國)이고, 일본은 바둑을 예(藝)와 도(道)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중흥국(中興國)이며, 한국은 앞서 거론한 두 나라들과의 진검승부에서 승승장구를 거둔 강대국(强大國)이다.
삼국의 바둑영웅들이 펼친 극적 드라마를 소재로 삼국지를 구성한다면 세계대회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발휘한 한국의 기사(棋士)들이 단연 주인공에 캐스팅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결정적 주연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조훈현을 택하겠다.
현대바둑 초창기에 바람을 일으킨 천재 오청원은 바둑 삼국지를 태동시킨 공로자로 족하고, 면돗날 사카다 역시 삼국을 아우르기에는 놀았던 무대가 좁았으므로 큰 역할을 주기엔 좀 아쉬운 감이 있다.
불굴의 투혼으로 일본기단을 주름잡았던 조치훈 역시 세계기전에서 실력발휘를 하지 못했으므로 일국의 맹주로 매김할 수밖에 없다.
그 이외에 기라성같은 영웅호걸들이 즐비하지만 그 어떤 인물도 조훈현의 기록과 업적을 능가할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직 한 사람, 세계 랭킹 1위 이창호가 기록상으로 조훈현을 앞서지만 그의 존재는 조훈현을 더욱 빛나게 하는 현재진행형, 혹은 미래형으로써 자리를 비워두고 싶다.
조훈현의 위대성은 침체되어 있던 한국바둑계를 세계정상으로 끌어올렸다는 점, 그리고 이창호를 제자로 키워 바둑천재의 계보를 이었다는 점, 이 두 가지만으로로도 충분히 인정받아 마땅할 것이다.

삼국지의 오프닝은 아무래도 중.일 수퍼대항전이 적합하리라.
그 이전까지의 주무대는 역시 일본-
16세기부터 시작된 명인기소(名人碁所) 쟁취의 역사는 고스란히 일본바둑의 역사로 이어진다.
최후의 혼인보(本因坊) 슈사이를 끝으로 일본바둑은 권위의 시대에서 실력의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대륙출신의 풍운아 오청원은 번뜩이는 창의력과 질풍같은 전투력으로 난세를 평정하며 일본기사들을 자극한다.
칫수 고치기 10번기를 통해 날고 기는 강자들을 꺾으며 제국시대와 전후까지 명성을 날렸다.
그의 배턴을 이어받은 인물은 사카다.
치열한 접근전으로 승부사(勝負師)라 불리운 사카다는 60년대를 전횡(專橫)하다시피 하면서 63개의 타이틀을 획득한다.
사카다의 시대를 마감시킨 인물은 대만출신기사 임해봉.
대륙적 기풍의 임해봉은 동포 오청원이 발굴한 천재이기에 더욱 드라마틱하다.
중국바둑은 일본보다 발전이 늦었지만 이미 그 시절에 오청원과 임해봉이란 양대산맥을 통해 현대바둑에 참여하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중국기사들의 계보는 이후, 섭위평-상호. 임해봉-왕립성으로 이어진다.)
임해봉 이후는 춘추전국시대이자 기타니 도장 일문의 시대로 접어든다.
컴퓨터 이시다. 미학자 오오다케. 대마 킬러 가토. 실전파 고바야시. 우주류 다케미야 등의 군웅할거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기성, 본인방, 명인 타이틀을 동시에 거머쥐어 대삼관(大三冠)을 달성한 조치훈은 그들 중 막내에 해당하지만 질량면에서 군계일학으로 돋보인다.
이 시대야말로 바둑계의 르네상스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 때의 인물들이 아직까지도 세계바둑계의 맹주로 행세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바둑계도 이 무렵 인재들을 일본에 보내 큰물을 경험할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다.
개척자인 조남철 선생을 비롯해 김인, 윤기현, 하찬석 등이 기타니 도장에서 체계적인 바둑수업을 받고 귀국해 국내바둑계를 풍요롭게 했고, 조훈현과 조치훈, 두 천재가 조기유학을 와 천부의 재능을 닦고 있었으니까.
조훈현은 조치훈을 비롯한 다른 유학파 기사들과 달리 기타니 도장이 아닌 세고에 도장에 입문함으로써 독특한 배경을 갖게된다.
세고에 도장은 천재사관학교.
중국인 천재 오청원과 일본 관서기원의 총수 하시모토가 거쳐간 곳이다.
당시 고령(高齡)이었던 세고에 9단은 조훈현의 기재를 알아보고 마지막 제자로 받아 들인다.
그리하여 동양 삼국의 천재 세 명을 휘하에 거느리는 복을 누린 것이다.
그 무렵 기타니 도장은 걸출한 인재들이 득실거리는 양산박이라고 해도 좋았다.
조훈현이 조치훈과 함께 기타니 도장에 입문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또래의 강자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며 성장했을 테지만 한적한 세고에 도장으로 들어가면서 고독한 황태자로서의 면모를 얻게된다.
오청원과 하시모토를 사형으로 두고 괴물기사 후지사와로부터 실전의 가르침을 받은 조훈현은 그래서 하늘이 내린 재주와 행운을 완벽하게 거머쥔 천재인 것이다.

다시 물줄기를 삼국지로 돌리자면, 조훈현이 귀국해 한반도를 평정하고 있을 때 대륙에서 섭위평이라는 거물이 등장해 중일 수퍼대항전의 스타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중국팀의 주장이자 최후의 수문장으로 버티면서 일본의 고수들을 연파, 바둑 종주국 중국의 위상을 드높인다.
그 동안 한국과의 정기교류전은 실력차이를 이유로 회피했던 일본이 중국의 도전을 받아들인 것은 다분히 한 수 가르침을 준다는 시혜의식이 발로됐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1985년 제1회 중.일 수퍼대항전의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중국측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섭위평은 막판벼랑에 몰린 상태에서 일본의 3장 고바야시, 2장 가토, 주장 후지사와를 차례로 물리쳐 승발전(勝拔戰)의 묘미를 한껏 과시하며 스타가 된 것이다.
중.일 수퍼대항전은 바둑선진국을 자처하는 일본의 오만을 여지없이 뭉개버린 일대사건이었으며 중국바둑이 세계로 진출하는 전환점이었다.
대만출신 응창기씨가 바둑올림픽이나 다름없는 응창기배 국제대회를 창설한 것도 딴에는 섭위평을 염두에 두었다는 설이있다.
세계최초의 국제대회를 중국인에게 빼앗길 수 없어 일본이 부랴부랴 후지쯔배를 창설했다는 것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
아무튼 우승상금 40만불을 놓고 당대의 검객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응창기배 바둑대회에서 한국은 달랑 조훈현 한 명밖에 초청을 받지 못한다.
그만큼 우리 바둑이 푸대접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처음엔 대회참가를 보이코트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조훈현은 단기필마로 출전, 고바야시와 임해봉을 연파하고 결승에 오른다.
결승대항마는 역시 섭위평-
철의 수문장 섭위평과 조훈현의 대결은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제1회 응창기배 결승에서 만난 두 사람의 혈전은 적벽대전에 비유할 수 있으리라.
이 세기의 라이벌은 중국 항주와 싱가폴을 오가며 5번기를 펼친다.
최종 스코어는 3:2.
실로 극적인 역전승이었고 한국바둑의 저력을 유감없이 드러낸 쾌거였다.
이름하여 싱가폴 대첩.
지극히 불리한 상황속에서도 치열한 투혼과 지략을 동원해 얻어낸 값진 승리였다.
조훈현 개인은 40만불의 거금과 바둑황제라는 칭호를 획득했고, 한국바둑은 이 때부터 중국, 일본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삼각의 한 모서리를 차지하게 된다.
중.일 수퍼대항전을 통해 기세등등했던 섭위평은 결정적인 대목에서 실족, 진정한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지 못한다.
그는 충분히 강했지만 동시대에 조훈현이라는 천재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사상최초, 사상최대의 큰 승부에서 조훈현의 벽에 부딪힌 섭위평은 바로 그 순간부터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무려 4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 무렵 섭위평은 공공연히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우리는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있다. 훗날 나의 제자들이 성장하게 되면 당신들은 중국바둑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 호랑이 새끼는 다름아닌 상호로 밝혀졌는데-
섭위평이 말한 훗날의 판도는 어떠한가?
상호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여 중국대륙의 1인자로 떠올랐지만 이창호의 벽을 넘지 못해 힘겨워 하고 있지 않은가?
대를 이은 사제대결에서도 조훈현, 이창호 콤비는 완벽하게 바둑황실의 옥새를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요소들인가!

조훈현의 이름 석 자 앞에 무수한 찬사와 수식어가 붙어 왔지만 ‘바둑황제’라는 말 이상 적합한 어휘는 없다.
세계최연소 9세 입단에서부터 최고령 타이틀 보유기록에 근접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생명력.
국내 전관왕 및 국제대회 사이클링 히트를 비롯해 무려 150여 회의 타이틀 획득기록과 세계 최다승 기사로 자리매김된 찬란한 업적.
청출어람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보여준 이창호의 배출.
조훈현의 삶은 경이의 연속이었고, 아직도 승부의 최전선에서 맹활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경이로운 시선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조훈현의 고향은 어디인가?
전남 목포와 영암 두 지역을 두고 설왕설래 논란이 많은데 두 군데 모두 고향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창녕 조씨 일파가 뿌리내린 곳은 영암군 회문리.
남도의 소금강으로 유명한 월출산(月出山) 기슭에 위치한 마을이다.
그 곳에서 조씨 문중은 크게 부유하지 않아도 나름대로 지적(知的)인 가풍을 유지하며 대를 이어왔다.
문중에 교사출신들이 많았으며, 조훈현의 부친인 조규상 씨도 일제시대 때 동경의 메이지(明治)대학을 나온 인텔리였다.
조훈현의 가족은 2남 4녀.
위로 형이 한 명, 누나가 세 명, 아래로 여동생이 한 명이다.
형제들의 면면을 살펴봐도 가문의 분위기는 역시 어디로 가지 않는다.

장남 조종현 - 영화 필름 도매업.
장녀 조복심 -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직.
차녀 조경자 - 국립도서관장.(여성 최초)
3 녀 조연희 - 교육용 교재제조.
4 녀 조현숙 - L.A에서 사업으로 성공.

아무튼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영암 땅의 인텔리 조규상은 무안출신 부농집 딸 박순례와 결혼하여 월출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았었는데 자식들이 한결같이 공부를 잘하고 똑똑했다는 것이 영암 사람들의 증언이다.
어려웠던 시절에도 사각모를 썼던 조규상의 지적 혈통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가족들의 분석에 의하면 모친 박순례 여사의 유전적 영향력이 훨씬 크다고들 입을 모은다.
잠깐 조훈현의 모친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이 분은 지금도 평창동 저택에서 곱디고운 백발의 모습으로 건재하는데 기억력이 보통 비상한 게 아니어서 한때 프로야구 선수들의 타율과 연봉을 훤히 외울 정도였다.
아들의 대국일자와 전적은 물론이고 상대기사의 프로필과 기풍까지도 줄줄 꿰는 걸 보고 주변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으니까.
일본어에도 능통해 팔순이 훨씬 넘은 최근까지도 일본기원에서 발행되는 <碁道>지를 읽곤 했었다니 가족들의 분석이 꽤나 신빙성이 있는 셈이다.

조씨 일가가 영암에서 목포로 이사한 것은 해방 직후이다.
그러니까 조훈현은 그 이후 목포에서 출생하게 되는데 어쨌거나 조씨 문중의 요람은 아직까지도 많은 친척들이 살고 선산이 있는 영암이므로 바둑황제의 본향이 영암이라 해도 시비를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암(靈巖)-
말 그대로 신령스런 바위로 일컬어지는 지명인데 이는 곧 월출산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해발 809미터의 월출산은 소백산맥이 남으로 뻗어 내려가다 바다와 만나는 종착지에서 못내 아쉬운 듯 최후의 기세를 떨쳐 조각해놓은 명산이다.
남도의 곡창지대에 돌연(突然)히 치솟아 오른 월출산의 윤곽은 웅장하면서 화려하다.
산 전체가 기암괴석으로 이뤄져있어 온갖 전설이 서려있는가 하면 왕인 박사와 도선국사 등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땅이기도 하다.
정상인 천황봉에 올라서면 북으로 영암 땅, 남으로 강진 땅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같은 남도라도 이른 봄 대지의 빛깔이 완연히 구분된다.
강진(康津)땅이 한 뼘쯤 아래 있다고 보리 싹이 조금 더 파랗게 자라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월출산의 산세도 남과 북이 판이하다.
풍화작용 때문인지 북쪽은 암반의 노출이 심하고 남쪽은 중턱부터 비교적 완만한 능선이 흘러내린다.
그러니까 영암 쪽 산세가 훨씬 급박하고 화려한 것이다.
그에 비해 강진 쪽 산세는 유려하고 온화한 느낌을 준다.
이런 산세가 주민들의 심성에 유형무형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리 없을 터-
아무래도 영암 사람들의 기질은 강진 사람들보다 조금 억센 편인 듯 싶다.
월출산의 지형을 구구절절이 소개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 두 고장에서 불세출의 바둑명인 두 사람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영암의 조훈현과 강진의 김인(金寅).
그 고장 사람들은 이 두 천재의 출현을 월출산 정기의 발현(發顯)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거기에 나는 월출산 남북사면(南北斜面)의 차이가 기풍의 차이로 드러나지 않았느냐고 강변하는 사람이다.
조훈현의 기풍은 월출산 북 사면의 기암연봉처럼 자유롭고 신묘하며 강미(强味)가 있고, 김인의 기풍은 남 사면의 갈대능선처럼 부드럽고 온유하며 두텁지 아니한가?
다분히 견강부회(牽强附會) 격으로 갖다 맞춘 논리이긴 하지만 언젠가 나는 월출산 천황봉에서 그토록 절묘한 신의 섭리를 혼자 발견한 것만 같아 몇 번이고 영암과 강진을 번갈아 보곤 한 적이 있었다.

영암출신 왕인 박사는 일본에 문물을 전해 아직까지도 그들의 스승을 추앙 받는 인물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혹시 왕인 박사가 바둑판도 들고 간 것은 아니었을까?
중국에서 탄생한 바둑이 일본까지 전래된 데에는 필연적으로 한반도가 교량 역할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 시기가 꽤나 오래됐을 것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삼국시대 무렵이 얼추 맞아떨어질 것이고 그렇다면 백제의 창구인 영암 땅 해창만을 통해 전파됐으리라 추리해봄직하다.
그로부터 아득히 먼 훗날, 이 고장의 바둑천재 김인과 조훈현이 거꾸로 일본에 유학을 떠나 바둑의 정수(精髓)를 습득해왔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현대 한국 바둑의 정상은 거의 호남출신 기사들이 독무대나 다름없다.
조남철(부안) - 김인(강진) - 조훈현(영암) - 이창호(전주)로 이어지는 찬란한 라인업을 보라.
거기에 조치훈도 알고 보면 부안출신이고, 신안의 이세돌도 한 몫을 거든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뭔가 아쉬운 감이 있지 않은가?
나는 이 현상에서도 풍수지리적 코드를 대입해보고 싶다.
예로부터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 풍요로운 호남 땅은 예(藝)와 풍류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고려시대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 이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호남사람들의 에너지는 아무래도 현실 바깥쪽으로 많이 분출됐으리라.
서편제와 육자배기, 문인화와 도예, 그리고 바둑 같은 취미가 성행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내력들이 흐르고 맴돌고 고여 스며들었다가 마침내 오늘날 바둑이란 분야에서 엄청난 잠재력을 폭발시킨 것은 아닐까?
억지라고 몰아붙이면 할말 없지만 어쨌거나 세대별로 정상의 자리를 대물림해 온 호남출신 기사들의 득세는 전체 프로기사 출신지별 분포 비율을 완전히 무시하는 결과로 나타나서 한번쯤 이런 식으로라도 분석을 해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조훈현의 뿌리는 대강 이렇다.
이제 이야기는 다시 그의 가족사와 개인사로 돌아간다.
해방이 되자 그의 부친 조규상은 정든 고향 땅을 떠나 목포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메이지 대학출신인 조규상과 명석한 처 박순례는 일제 당시 영암 땅에서 지식인 대접을 받았으므로 아무래도 해방이 된 시점에서 일부 주민들로부터 질시어린 눈총을 받았던 듯 보인다.
그런 부자유로부터 벗어나고 또 성장하는 자녀들의 교육환경을 감안해서 부부는 과감히 목포행을 결정하게 된다.
그 때가 바로 1946년이다.


 

목포는 항구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가수 이난영은 그리 구슬프게 목포가 항구임을 노래했을까?
너무나 단순한 그 노래 제목에는 영산강의 안개와 삼학도의 등대, 유달산 동백꽃과 똑딱선 기적 위로 나르는 갈매기의 영상이 오버랩 되어있다.
목포와 관련된 유행가나 문학작품의 밑바탕에 흐르는 기본적인 정서는 ‘哀傷’이다.
개항 1백년이 넘은 목포는 일제 때만 해도 삼백(三白)-쌀, 소금, 누에고치 -의 집산지로 번성을 누렸던 곳.
부산, 인천과 함께 3대 항구로 일컬어졌던 도시였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광복과 함께 공출산업의 기반이 와해되면서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물류기지로 발전하기에는 수심이 얕고 조수간만의 차가 극심해 천상 어항(漁港)의 지위로나 만족해야 할 입지조건 때문에 도시의 활력이 감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유로 많은 사람들이 목포를 떠나 상경하는 러시가 일어난다.
그렇게 떠난 실향민들의 가슴과 뇌리에 목포는 아무래도 애상어린 고향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1번 국도의 종점이자 호남선의 종착역인 목포-
이 나라의 남단 땅 끝에 아련히 떠 있는 목포-
그러나 바둑황제 조훈현에게 있어서 목포는 세계로 뻗어가는 출발점이었다.

해방과 함께 영암에서 목포로 건너 온 조규상 일가는 항구에서 가장 번화한 한복판에 터를 잡고 제 2의 인생을 시작한다.
처갓댁의 배려로 목포극장 바로 옆에 위치한 2층 상가건물에 입주해 본격적인 도시생활에 적응하게 된다.
그 곳에서 조규상은 아주 짧은 기간 내에 사업적 성공을 거둔다.
그리 셈에 밝은 편은 아니었으나 메이지 대학 출신인 이 인텔리 사업가는 목포에서 유일한 지물포를 개업해 독점적 영업으로 제법 돈을 모으게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히트상품은, 학용품인 공책을 제작판매하는 일이었다.
서울에서 전지 크기의 종이를 도매로 구입해 와 재단한 다음, 기술자들에게 하청을 주어 노트를 만들어 팔았는데 그게 곧바로 대박으로 연결된 거였다.
그 당시에 얼마나 많은 매출을 올렸는지 하루 영업을 끝내면 M1 실탄박스에 하나 가득 지폐가 들어왔고, 자녀들은 그 돈을 추리다가 찢어진 돈을 골라내어 저녁마다 고급과자 센베를 사먹었다고 한다.
그 시기가 상인 조규상의 개인사에 있어 가장 화려했던 절정기였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대부호가 될 것만 같았던 조씨네 일가를 누군가 질투했는지 몰라도 한창 장사가 잘 될 때 엄청난 세금을 맞게 된 것이다.
당시에 개인사업자로는 목포에서 가장 고액납세자로 거론될 만큼 많은 세금을 물게 된 조규상은 끝내 조세(租稅)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파산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 6.25동란이 터졌고, 조씨일가는 빈손으로 피난살이를 하며 극심한 빈곤을 경험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목포로 돌아온 조규상은 목포역 부근에 조그만 고무공장을 차려 재기를 모색하며 가세를 추스르기 시작한다.
바로 그 무렵 늦둥이 막내아들을 얻게 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조훈현이다.
다른 누나나 형들이 아버지의 전성기 때 비교적 풍요로운 환경을 누린데 비해 막내아들 조훈현은 가정경제가 최악인 상황에서 태어난 거였다.
어쨌거나 늦게 본 막동이를 아버지는 끔찍하게 예뻐해 자나깨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애지중지했는데-
두 살에서 세 살로 넘어가던 조훈현이 남다르게 영특하다는 사실을 가족들이 깨닫게 된 것은 다름아닌 실종소동 때문이었다.
어느날 그 막동이가 엄마, 누나들이 한눈을 판 사이에 집을 나갔는데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자 난리가 났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훈현이는 이제 간신히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였고, 입은 옷도 소변 보기에 용이하도록 앞섶이 동그랗게 터진 갓난애 바지를 입고 있었던 철부지였던 것이다.
온동네를 뒤지고 다녀도 종적이 묘연한 훈현이의 실종 사실을 아버지께 알리기 위해 역전 뒤 고무공장으로 숨가쁘게 달려갔던 엄마와 누이들은 공장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맥이 탁 풀려 희비가 교차하는 한숨을 토하고 만다.
뜻밖에도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천진난만하게 놀고있는 훈현이를 발견한 거였다.
“아버지께서 훈현이를 공장에 데려 왔나요?”
“아니, 아까 지 혼자 들어오더라.”
아버지 조규상은 그 때까지도 막내 훈현이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자 딸들이 반문했다.
“얘가 몇 살인데 여기까지 혼자 걸어온단 말예요? 집에서 공장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데......?”
그제서야 아버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철없는 막내아들을 내려다 보았다.
“훈현아. 너 여기 혼자 왔느냐?”
어린 훈현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만 끄덕거렸다.
“세상에!”
가족들은 일제히 약속이나 한 것처럼 탄성을 터뜨렸다.
집에서 공장까지의 거리는 대략 1.5Km쯤 될까?
거리도 만만치 않지만 오는 길이 거리의 모퉁이를 몇 번이나 꺾고 블록을 휘감아 돈 다음, 대로를 건너고 복잡한 역사(驛舍) 건물을 관통하고 철도를 건너 공장의 담벼락을 끼고 반 바퀴를 돌아야 찾아올 수 있는, 어려운 길이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어린애가 천연덕스럽게 그 길을 혼자 찾아왔다니 놀랄 수밖에-
(훗날 조규상 옹이 회고하길, ‘훈현이의 머릿 속에는 천부적인 방향감각의 나침반이 들어 있는 것 같다.“ 라고 했었다. 따지고 보면 조훈현의 놀라운 복기능력도 다 그런 감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그 소동을 통해 막내아들의 총기(聰氣)가 범상치 않다고 여긴 조규상은 더더욱 훈현이를 슬하에 두고 금지옥엽처럼 총애하면서 또 다른 인생의 감격시대를 예감하게 된다.

 

조훈현과 가까운 바둑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한다.
“그가 바둑을 두지 않고 다른 길을 택했어도 크게 성공했을 것이다.”라고-
명석한 두뇌, 깔끔한 대인관계, 그리고 치열한 지적 호기심과 자유분방한 상상력 등등......
인간 조훈현은 성공인이 되기에 필요한 자산을 아주 많이 소유하고 있는 인물이다.
만약, 그의 부친 조규상이 사업가로 계속 승승장구했다면 아마 바둑황제 조훈현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부유한 환경의 소년이 그 당시만 해도 雜技 따위로 취급받던 바둑에 몰입할 이유는 없었을 테니까.

50년대 초반-
목포의 조규상은 하는 일마다 뜻대로 풀리지 않아 암울한 장년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2층의 마룻바닥에서 조카사위 신서중과 매일 바둑을 두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두 사람의 실력은 7~8급 정도.
하지만 그 시절 남도의 항구에서 그 만큼 바둑을 둘 줄 아면 고수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신중한 성격의 조규상은 바둑 스타일도 진지한 장고파였다.
여러 판을 뚝딱 해치우거나 내기를 즐기는 쪽이 아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맞수 조카사위와 도끼자루 썩는지 모르는 신선놀음을 즐겼다.
가족들에게 2층은 성역이었다.
올라가봤자 재미도 없었고 꾸중을 듣기 일쑤였으므로.
그런데 언젠가부터 네 살 짜리 막동이는 어른들이 바둑을 둘 때마다 계단을 기어 올라와 물끄러미 판을 내려다 보곤 했었다.
그 나이 또래의 어린이들이라면 바둑알을 건드린다거나 어른들을 귀찮게 할 법하건만 막동이 조훈현은 의외로 얌전하게 관전자의 매너를 지켰다.
고집이 유별나게 세고 활달한 편인 훈현이가 유독 바둑판 옆에서는 진지하게 앉아있는 게 대견스러워 아버지는 그 막동이에게 2층을 언제든지 출입할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었다.
꼬마는 성냥과 담배 심부름을 기꺼이 하면서 노상 2층에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날-
맞수끼리의 대국이 한참 점입가경으로 접어들어 난전이 전개됐을 때, 조규상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한 수를 놓으려고 반상 위로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어린 관전객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부지, 거기 놓으면 안돼라우!”
조규상은 네 살 짜리 막동이가 뭘 알고 그런 소리를 하나 갸우뚱했지만 이내 피식 웃어버리고 착점을 했다.
그런데 나중에 복기를 해보니 바로 그 수가 패착에 가까운 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자 아버지 조규상보다도 상대였던 조카사위 신서중(조훈현의 매형)이 먼저 네 살 짜리의 훈수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저 애가 혹시 수를 제대로 읽은 거 아닐까요?”
“에이, 이제 겨우 네 살 짜리가 뭘 알겠어?”
어른들의 대화를 묵묵히 지켜보던 꼬마가 자존심 상한 듯 대꾸했다.
“아부지, 나 바둑 둘 줄 알아라우.”
아들의 항변에 기가 막힌 아버지는 훈현이를 바둑판 앞에 앉혀놓고 흑돌을 밀어 주었다.
“어디 둘 줄 아나 한 번 보자?”
생애 처음 두는 바둑의 칫수는 아홉 점.
꼬마는 거침없이 똑딱똑딱 바둑알을 반상에 내리꽂았다.
판이 진행되면서 아버지와 매형의 눈동자는 화등잔만하게 커져 갔다.
놀랍게도 어린 훈현이가 제법 그럴 듯하게 집을 지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 행마가 제대로 갖춰진 실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꼬마는 처음 두어본 바둑인데도 집이 많으면 이긴다는 바둑의 이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부터 2층의 풍경은 확 달라졌다.
맞수들의 대결에 꼬마 관전자가 붙은 게 아니고 아버지와 매형이 교대로 신통한 꼬마와 대국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어린 훈현이는 어른들이 한참 바둑을 두다가 오후 늦은 시각이면 항상 자기만 놔두고 어디론가 자리를 옮긴다는 사실을 알고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알고보니 어른들의 2차 집결지는 역전의 유달기원.
퇴근 시간이 되면 목포의 바둑강자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기원이 아버지와 매형의 또 다른 사랑방이었던 것이다.
“아부지, 나도 기원에 데려가 주씨요.”
기원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면서 꼬마는 아버지가 가는 곳에 꼭 따라가고 싶었다.
“허허, 그 놈 참! 좋다. 네가 아홉 점으로 나를 이기는 날 기원에 데려가주마.”
아버지는 마지 못해 그런 조건을 내걸었다.
아들이 비록 천재적인 재능을 발하고는 있지만 기원에 데려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 곳은 내기바둑으로 충혈된 기객들의 피로와 더불어 담배연기가 자욱한 곳 아닌가.
그래서 결코 불가능한 조건이다 싶은 내기를 걸었는데 어이없게도 며칠이 가기도 전에 그는 아들로부터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고 만다.
아 글세 이 놈이, 설렁설렁 집이나 지어대던 철부지가 아홉 점의 기착점 프리미엄을 십분 활용해 너무나 간단하게 승리를 닦아버리는 게 아닌가.
이제 기원에 데리고 가준다는 약속은 꼼짝없이 이행해야 할 판인데, 그렇다고 칙칙한 어른들의 사랑방에 이 어린애를 데리고 가긴 좀 찜찜하고......
그런 갈등을 겪고 있을 때 목포여고 수학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집안의 조카 박승곤이 찾아와 조규상의 판단을 도와주게 된다.
“고모부, 기원에 데리고 가 봅시다. 훈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닙니다. 비록 아홉 점이지만 7급을 이겼잖습니까? 게다가 동아일보에 게재되는 국수전 기보까지 주르르 외우는 걸 보세요. 전문가한테 훈현이의 진가를 한 번 감별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해서 꼬마 조훈현은 바둑을 구경한 지 한 달도 채 안된 시점에서 기원과 인연을 맺게 된다.


 

어떤 철학자가 예술을 규정하길 “예술은 그 사람의 인생만큼 나간다.”라고 말했다.
연륜(年輪)이 그 만큼 예술을 깊이 있게 만든다는 뜻이리라.

그렇다면 바둑은 어떠할까?
바둑 역시 인생의 부피와 비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가끔씩 출현하는 바둑천재들 때문에 극심한 혼란을 겪고 만다.
신동 이창호의 존재 때문에 얼마나 많은 기사들이 바둑의 불가해한 속성을 탄식하며 절망했던가?
적어도 일정한 판 수(數)를 경험한 뒤에 깨우칠 수 있는 기리(棋理)를 소년은 너무나 쉽고 빠르게 터득하고 말았으며 가공할 파워로 고단자들을 밀어버렸다.
제4기 동양증권배 결승전에서 이창호와 만난 조치훈.
“조훈현 선배는 제자 이창호를 좀더 혼냈어야 한다.”
그는 임전소감을 그 한 마디로 표현했다.
이창호가 아무리 세다한들 아직은 멀었다는 자신감과 함께, 제자에게 너무 쉽게 정상을 내주고 만 조훈현을 은근히 책망하는 촌철살인의 발언이었다.
그 말을 듣고 조훈현은 빙그레 미소로 답했다.
아마도 그는 조치훈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게 말야. 하지만 자네도 한 번 겪어보게. 창호의 완력이 만만치 않을 거야. 비록 내가 가르친 제자이긴 해도 이미 창호는 나름대로 바둑의 길을 터득한 아이거든. 치훈이 자네도 바짝 긴장해야 할 걸세.”
아니나다를까 결승 5번기는 이창호의 싹쓸이 3연승으로 간단하게 끝이 나고 말았고-
혼신의 힘을 다했는데도 허무하게 패퇴하고 만 조치훈은 설레설레 고개를 젓고 현해탄을 건너가야 했다.
천재의 전형을 보여주며 일본기계를 평정한 조치훈은 그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아무튼 어린 나이에 너무 쉽게 바둑의 길을 깨우친 천재들이 우리 바둑사에 드문드문 출현하곤 하는데-
그 첫 번째 타자가 바로 조훈현임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목포의 유달기원
50년대 목포에서는 거의 유일한 바둑사랑방이 바로 역전에 위치한 유달기원이었다.
부친 조규상과의 내기바둑(?)에서 승리한 조훈현은 약속대로 사촌매형 박승곤과 아버지의 손을 잡고 생전 처음 기원에 발을 내딛었다.
만으로 다섯 살 무렵이었다.
기원에서 바둑을 두던 손님들은 왠 꼬마인가 싶어 힐끔거렸다.
목포고 수학교사이자 서울대 출신의 엘리트 박승곤이 원장에게 꼬마를 소개했다.
“원장님. 이 아이가 바둑을 둘 줄 아는데 한 번 봐 주실랍니까?”
“네에? 걔가 바둑을 둔다구요?”
“네, 그리 세진 않지만 제법 둡니다. 게다가 동아일보 국수전 기보를 외우고 복기까지 하거든요.”
“에이, 아무렴 걔가 복기를 할까?”
원장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부친 조규상이 훈현이를 바둑판 앞에 앉혀 놓고 복기를 시켰다.
당시 조훈현은 동아일보에 연재되고 있던 국수전 기보를 틈틈이 공부하던 중이었다.
어린 훈현은 아무 생각 없이 양 손에 흑돌 백돌을 나눠 쥐고 주르륵 복기를 해냈다.
대략 80여 수에 달하는 조남철과 김봉환의 바둑 수순이었다.
그 희한한 광경에 모든 사람들이 바둑판 주위로 몰려들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원장은 아직도 꼬마의 천재성을 의심하는 눈치였다.
“기보를 외우는 거야 연습을 많이 하면 가능한 거고 어디 조금 있다가 신문이 배달되면 오늘 치 기보를 놓아보도록 합시다.”
그래서 신문이 올 때까지 모두가 기다린 후-
원장이 신문을 들고 올라오자 훈현은 대수롭지 않게 국수전 기보의 숫자를 곰곰이 들여다 보고 나서 다시 처음부터 주르륵 한 판을 그려냈다.
그제서야 원장을 비롯한 모든 구경꾼들이 경악했다.
아직 글자도 읽지 못하는 꼬마가 놀랍게도 완벽하게 바둑의 맥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나랑 한 판 둬 볼래?”
원장이 마침내 지도대국을 자청하고 마주 앉았다.
아홉 점 바둑.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바둑에서 훈현은 바둑에 나이가 상관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원장은 그 자리에서 훈현에게 무료입장 자격을 베풀었다.
그 날부터 유달기원에는 색다른 멤버 하나가 들어오게 됐고 모든 기객들이 번갈아 가며 꼬마와 바둑을 즐겼다.
처음에는 너무 신통한 꼬마랑 한판 둔다는 기분으로 상대했던 기객들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점점 훈현의 급성장하는 기력에 밀리기 시작했다.

막내 아들의 천재성을 지켜보는 재미로 기원에만 죽치고 살았던 조규상은 어느날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가세가 기울어 이화여대를 다니던 장녀가 중퇴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무작정 이렇게 세월을 보낼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1958년 겨울.
목포의 조규상은 어린 막내아들을 데리고 무작정 상경을 한다.
임시거처는 갓 결혼한 큰딸의 보문동 집.
그리고 매일 명동의 송항기원으로 출근을 하게된다.
송항기원은 당시의 일인자 조남철 국수가 운영하던 기원이다.


조훈현은 입지전적인 인물의 전형이다.
오로지 바둑 하나만을 택하고 그 길로 생활의 자유와 건강한 부유(富裕)까지 획득한 사람이다.
철저히 혼자의 힘으로 지금의 명예와 재산을 일군 것이다.
누가 뭐라해도 그 만큼 프로페셔널한 기사도 드물다.
거의 오십이 다 된 나이에도 여전히 세계 타이틀전의 유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는 것을 보라.
승부가 있고 상금이 있는 곳을 그는 어떤 경우에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프로 갬블러로 유명한 차민수는 조훈현의 승부사 기질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스갯소리지만 방내기 세계 타이틀전이 생긴다면 조훈현을 따라갈 사람이 없을 것이다.”
말그대로 있을 수 없는 농담이지만 차민수의 표현은 그냥 흘려 들을 수만은 없는 뭔가가 분명히 있다.
언젠가 조훈현은 중국의 마효춘과의 대국에서 만방이 어떤 것이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 전까지 마효춘은 번번히 중요한 길목에서 조훈현의 발목을 잡았던 껄끄러운 상대.
그 마효춘에게 족보에 있는 묘수를 구사하여 엄청난 대마를 잡아버린 거였다.
유리해도 더욱 고삐를 죄는 조훈현의 초식에 얼마나 많은 상대들이 치를 떨었던가?
요즘 조훈현의 바둑은 한층 더 격렬해졌다는 평을 듣는다.
젖혀오면 끊고, 끊어오면 늘어 바둑판 전체를 지뢰밭으로 만드는가 하면 특유의 속력행마로 치고 빠지면서 19로에 풍파를 일으킨다.
그의 운석은 화려하지만 미학과는 거리가 멀다.
신인 시절 김인 국수가 조훈현의 한 수(手)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런 수를 둘 수 있지?”
프로라면 차마 끔찍해서 둘 수 없는 곳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조훈현은 단호히 강변했다.
“그래도 그 곳밖에 둘 수 없었습니다.”
두 국수의 승부관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
조훈현의 수(手)는 철저히 승부에 기여할 수 있는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어디에 두어도 한 수인데 미추(美醜)가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렇다고 그의 행마가 전성기 때의 고바야시처럼 처절한 지하철은 아니잖은가?
이기기 위한 수를 추구하다 보면 미학도 어느 정도는 따라오는 법이다.

아무튼 입지전적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한 조훈현의 프로페셔널리즘을 강조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부친으로부터 전혀 유산(遺産)을 물려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부친 조규상은 그 척박한 환경에서도 막내아들의 천재성을 간파하고 자신의 생애를 던져 당대 최고의 바둑황제를 만들어낸 킹메이커이다.

신설동에서 돈암동으로 가다보면 좌우로 야트막한 산맥이 늘어서 있다.
성북구의 비탈진 그 동네가 60년대엔 다 달동네 판잣집촌이었다.
무작정 상경한 조규상 일가가 둥지를 튼 곳은 보문동.
탑골승방 보문사 뒷골목의 우물터를 돌아 층층계단을 오르면 경동고등학교 담장 아래 닥지닥지 붙어있는 마을이 있었다.
번지에 산(山) 자가 붙은 곳.
조규상은 신혼의 장녀 조복심 집에 임시로 기거하면서 보문시장에 좌판을 깔고 야채장사를 시작하면서 어렵사리 집을 마련했고 목포의 식구들을 전부 끌어 올렸다.
모든 생활의 초점은 막내 조훈현의 바둑공부에 맞춰져 있었다.
조규상은 매일 막내를 데리고 명동의 송항기원(松恒기원)으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시장일 때문에 바쁘면 누나들과 매형 김석곤이 교대로 마부 역할을 맡았다.
한국기원이 생기기 전 명동의 송항기원은 한국바둑의 중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바로 현대바둑의 아버지로 통하는 조남철 선생이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목포의 신동이 상경했다고 하자 조남철 국수는 흔쾌히 지도대국을 허락해주었다.
역시 9점 바둑.
콧물을 훌쩍거리며 조남철 국수와 바둑을 두는 소년을 보고 많은 관전객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 보았다.
그런데 이 소년의 바둑이 예사롭지 않았다.
뚝딱뚝딱 속기로 일관하면서도 제법 행마의 틀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흘리개와의 바둑이었지만 조남철 국수는 신중한 장고를 거듭해 최선의 수를 찾아내 응대했다.
승부는 세 시간 뒤에 끝이 났다.
국수의 승리였다.
패배를 확인하고 난 조훈현은 고개를 푹 떨구고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진 것도 분했지만 바둑 한판을 세 시간 씩이나 둔 게 너무 징그러웠다.
그런데 조남철 국수가 또 다시 한판을 더 두자고 했다.
어린 훈현은 넌덜머리가 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소년을 구슬려 바둑판 앞에 앉혔다.
당시 훈현에게는 지옥같은 승부였겠지만 주변 사람들은 모두 경이로운 시선으로 그 판을 지켜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남철 국수는 여지껏 지도기를 두 판 이상 둬준 적이 없는 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 번 소년의 기력을 테스트하고 난 조남철 국수는 훈현의 급수를 강한 8급으로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급수와 관계없이 조남철 국수가 내준 수풀이 문제를 어린 훈현은 단번에 ‘패’가 난다고 대답해 놀라운 잠재력을 과시한다.

조규상은 훈현이의 미래를 믿고 기꺼이 밑바닥 인생을 자청해 보문시장의 인텔리 야채장사로 계속 일을 했다.
물론 좌판을 지키는 일은 거의 아내 박순애의 몫이었지만, 그들 부부는 막내아들이 일본유학을 갔다 온 뒤로도 한참 동안까지 야채장사를 했다.
그러니까 조훈현이 가세를 일으킬 때까지 무려 이십 년 넘게 보문시장의 터줏대감으로 일을 해온 거였다.
그 세월 동안 좌판의 규모는 커진 적이 없었다.
겨우 한 두 평 남짓한 좌판에 오이 몇 개, 고추 몇 개, 깻잎 몇 단을 놓고 지나가는 고객들을 상대했지만 부부는 시장에서 그 누구보다도 웅대한 희망의 주단을 깔아놓고 있었는지 모른다.


 

바둑황제 조훈현의 취미는 등산과 독서로 알려져 있다.
등산은 체력관리를 위해 훗날 그가 의식적으로 택한 취미지만 독서는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뗄래야 뗄 수 없는 선천적 취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분야의 정상에 우뚝 선 명인이므로 그의 독서취향이 고상할 것으로 기대하지는 마실 것.
그는 비교적 읽기 편한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는 잡식취향의 독서광이므로.

일곱 살이 되자 조훈현은 집 부근의 삼선국민학교에 입학을 했고 마침 한국기원이 생겨 원생격으로 다니면서 바둑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 무렵 조훈현이 바둑만큼이나 관심을 품은 쪽은 다름 아닌 만화.
꽉 짜인 학교와 기원생활을 벗어나기만 하면 소년은 만화방으로 숨어들어가 가상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었다.
가족들이 그 때문에 무던히도 가슴앓이를 하곤 했는데-
한 번은 보호자 없이 기원에서 바둑을 두던 훈현이 밤늦도록 귀가하지 않는 사건이 발생했다.
통금이 있던 시절이라 야간에 찾으러 다닐 수도 없고, 이래저래 가족들은 애만 태우고 꼬박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는데-
이튿날 동이 터오자 둘째 누나 조경자는 첫 버스를 타고 명동으로 나갔다.
짐작이 가는 곳은 오직 명동의 만화방밖에 없었다.
송항기원 다닐 때부터 훈현이가 즐겨 찾았던 곳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만화방의 양철문을 두드려 들어가 보니 훈현이는 한구석 의자에 쪼그려 옹색하게 잠들어 있었다.
밤늦게까지 만화를 보다가 막차를 놓치자 주인아저씨가 잠자리를 마련해준 것이다.
울화가 치밀었지만 그보다는 어디로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준 동생이 너무 예뻐서 누나는 그만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떨구고 만다.
그 바람에 잠이 깬 훈현은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보다 만 만화책을 다시 펼치고 천연덕스럽게 침까지 발라가며 페이지를 넘긴다.
정말 못말리는 만화광 조훈현의 일화이다.

한국기원 원생시절.
미완의 대기 조훈현을 담금질해준 기사들은 많다.
동향의 선배 김인 국수가 각별한 애정을 주었고, 원생들의 사범을 자처했던 정창현이 많은 판수를 상대해주곤 했다.
본바닥에서 강자들과 어울리다 보니 훈현의 바둑은 일취월장, 괄목상대, 일신 일신 우일신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러니 한국기원의 재롱동이로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을 수밖에.
당시 아마추어 정상으로 군림하던 신면식(申勉植) 선생이 소년 조훈현을 혼내 주겠다고 벼르며 나섰다가 중반에 대마를 잡히고 두손을 들었었다.
그는 깨끗이 돌을 던지고 훈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나보다 세구나!”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 노인이 찬탄을 금치 못하며 훈현이의 후원자가 되주겠다고 나섰다.
그 분이 바로 이학진(李鶴鎭) 선생.
이학진 선생은 그때부터 조훈현의 매니저를 자임하며 많은 바둑책과 옛 기보를 모아 주었고, 체계적인 행마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여러 사람들에게 조훈현을 소개하고 다녔다.
조훈현을 중원무림의 강자로 키우기 위해 이학진 선생은 조건 없이 정성을 쏟았던 것이다.
가족과 후원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조훈현은 구김살 없이 성장해갔다.
바둑을 열심히 둔다는 조건으로 사탕도 원 없이 얻어먹었으며 만화책도 보고 싶은 만큼 볼 수 있었다.

만화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여기서 확실하게 조훈현의 독서 편력을 소개할까 한다.
소년 시절 만화방에 진열된 만화는 모조리 섭렵한 조훈현은 청소년기에 무협지에 심취했다가 청년기엔 추리애호가가 된다.
나는 어렸을 때 삼촌의 방에서 날마다 제목이 바뀌어 쌓여있는 무협지 시리즈들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한두 권도 아니고 대여섯 권에서 열 권에 달하는 무협지들을 삼촌은 밤새워 읽어치웠던 것 같다.
아침이면 무수한 감귤 껍질과 함께 방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무협지들.
외할머니는 그럴 때마다 쯧쯔 혀를 차시며 방을 치우셨다.
“잠이나 푹 잘 것이지......뭔 놈의 책을 밤새워 읽는다냐?”
그랬다.
그 무렵은 ‘조훈현의 폭격시대’로 일컬어지는 전관왕 직전의 시절이었다.
삼촌 조훈현은 거의 매일 벌어지는 타이틀전의 피로 속에서도 밤마다 보문동 골방에서 혼자만의 은밀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비록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마음의 창이라는 눈망울에는 핏줄이 벌겋게 섰지만 그는 상상의 나래를 달고 무협의 세계로 들어가 에너지를 재충전했던 것 같다.
만화와 무협지, 그리고 미스터리.
품위와 다소 거리가 멀지만 조훈현은 그런 장르를 과식하면서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배양했던 것이다.
오십이 다된 지금도 그의 독서량은 상상을 불허한다.
웬만한 대중소설은 거의 손때를 묻혔고 한 번 읽으면 주인공의 캐릭터와 줄거리를 오래도록 기억하는 비상한 재능이 있다.
언젠가 나는 새로 출간한 책에 사인을 해 삼촌에게 드린 적이 있었다.
삼촌은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말했다.
“이거 내가 읽었던 건데?”
그 책은 출판한 지 3년이 지나 표지갈이를 한, 리바이벌 작품이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몇 초 만에 그 사실을 알아내고 만 거였다.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난 삼촌이었다.
작가인 조카뿐만 아니라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평생 재직한 둘째 누나 조경자도 조국수의 독서량을 익히 알고 있는 증인이다.
“내가 근무한 도서관마다 훈현이 도서대여 카드가 수십 장 될 거다. 
소설이라면 안 읽은 책이 없어.”
일반인들에게 하루 두 권밖에 대출해주지 않는 규정이 있지만 조훈현은 누나의 배경을 십분 활용해 그처럼 엄청난 비리(?)를 저질러가며 독서를 즐겼던 것이다.
믿기 어렵다면 그에게 책에 관한 질문을 넌즈시 한 번 해보라. 
아마 쑥스럽게 웃으면서도 전문가 못지않은 식견을 들려줄 것이다.
나는 그의 바둑이 그처럼 자유분방하고 강하게 단련된 이유를 독서량에서도 찾아보고 싶은 사람이다.
만화와 무협지, 그리고 미스터리 물에서 잔뜩 키운 상상력이 자연스럽게 바둑판 위에서 녹아나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닐는지....


 

프로바둑에 입문하기란 사법고시보다 어렵고 신춘문예의 관문보다 어렵다는 것이 통설이다.
요즘에는 연구생과 일반인들의 입단제도가 공존해 조금 나아졌다지만 과거 우리 바둑계이 입단과 승단제도는 일본보다 훨씬 어렵고 엄격했다.
그런 관문을 조훈현은 아홉 살에 통과했다.
사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세계기록이며 기네스북에도 올라있는 공식기록이다.
천재의 기록은 오래가기가 쉽지 않은데 조훈현은 아직도 왕성하게 기록의 보물창고에 하나하나 전리품들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2001년 도쿄에서 열린 제14회 후지Wm배 우승으로 개인 통산 154회 우승과 국제대회 9회 우승 및 세계 최다승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48세 5개월로 국제대회를 제패했으니 앞으로 2년 후에 세계 최고령 우승기록까지 노려볼 만한 입장에 와 있는 것이다.

1962년 4월.
조훈현은 당당하게 실력으로 제16회 프로 입단대회를 통과한다.
그의 나이 아홉 살.
목포에서 상경한 지 4년 만이었고, 입단대회에 도전한 지 세 번째 만에 얻은 결실이었다.
바둑 층이 얕은 한국의 기록이라 일본에서는 그리 중시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어쨌든 아홉 살 프로기사의 탄생은 전무후무한 일이어서 언론의 요란한 조명을 받으며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제16회 입단대회를 통과한 기사는 단 두 명.
김수영과 조훈현이었다.
입단 기수(期數)로만 따져도 조훈현은 현재 활동하고 있는 기사들 중에서 단연 왕고참급에 해당한다.
아직 오십이 넘지 않은 나이임에도 그가 원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그 만큼 입단이 빨랐다는 이야기.
이 무렵 초단 조훈현의 바둑은 잔수가 밝고 싸움을 즐기는 기풍이었다고 한다.
명색이 프로였지만 그 당시에 프로들은 거의 수입이 없었다.
하지만 조훈현은 프로로서의 혜택을 나름대로 톡톡히 누릴 수 있었다.
바둑으로 용돈을 얻어 좋아하는 만화책과 군것질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 프로기사가 탄생했다는 소식에 정계의 거물들이 관심을 보였고, 급기야 야당의 중진 정해영(鄭海永) 의원은 조훈현과 김수영을 자택에 기거시키고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했다.
옛날 우리바둑의 노국수들을 여유 있는 권세가들이 사랑방에 들여놓고 후원했던 형태와 다르지 않은 방식.
그 뒤를 이은 후원자는 박종규(朴鍾圭) 청와대 경호실장 이었다.
5.16혁명과 함께 정권의 핵심으로 떠오른 박종규 실장이 야당의원으로부터 탐나는 보배 조훈현을 인수받은 것은 자연스런 흐름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조훈현은 그런 인연으로 무수한 정관계 및 재계, 예술계의 인사들과 교분의 고리를 갖게 된다.
그보다 조금 후인 1968년 관철동에 5층짜리 한국기원 건물을 지으며 총재로 등장한 이후락 씨도 조훈현과 각별한 관계를 자랑하고 5공화국의 전두환 대통령도 명절 때면 한 수 지도를 요청해오는 애제자(?)임은 모두가 주지하는 사실-

여기서 이 글을 쓰는 작가의 비화 한 토막을 덤으로 소개한다.
1989년 필자는 KBS의 [전국일주]라는 프로그램의 작가로 전국을 떠돌아 다니다 경기도 이천에 들를 기회가 생겼다.
온천과 쌀, 도자기로 유명한 고장 이천에는 취재거리가 무궁무진 했지만 필자는 다소 엉뚱한 취재감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당시 정국은 6공화국 청문회의 계절.
노태우 대통령은 대선을 통해 집권할 수 있었지만 정통성 시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동지 전두환 전대통령을 백담사에 유폐시키는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무렵 필자는 젊은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군사정권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캐내고 싶은 마음에 모 PD와 함께 백담사 부근 용대리에 잠입취재를 하기도 했었고 12,12 사태를 풍자하는 영화 <시비시비(是非是非)>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었는데-
이천에 오니 3공화국의 거물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세상을 등지고 이 곳의 도요(陶窯)에 산다는 것이었다.
군청 공보실에 인터뷰를 의뢰하니 일언지하에 NO.
아직까지 이후락 씨는 일체 외부인과 접촉한 적이 없다며 만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그때 나는 이후락 씨가 한국기원 총재로 역임했던 사실을 떠올리고는 정중하게 이런 요청을 했었다.
“어르신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방송과 관계없이 한 번 뵙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조훈현 국수의 조카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후락 씨로부터 OK사인이 떨어졌다.
그는 친히 마당까지 걸어 나와 풋내기 방송작가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응접실에 앉혀놓고 술상까지 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 분과 노코멘트 약속을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지만 그날 밤 나는 참으로 많은(혁명,평양 방문 등의) 정치비화를 들을 수 있었다.
작가의 입장에서 그처럼 만나기 어려운 거물과 한자리에 마주앉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영광인데, 그 복도 다 알고 보면 삼촌 조훈현의 빽이 통했기 때문 아닌가?

이야기가 가끔씩 다른 길로 흐르더라도 조국수의 팬 여러분들께서는 충분히 아량을 베풀어 주실 줄 믿는다.
천하의 조훈현에 관해서 우리가 더 이상 모르는 게 뭐 있겠는가?
날고 기는 바둑평론가, 관전기자들의 필설을 통해 그는 밝혀질 대로 밝혀진 공인이다.
그렇기에 홈페이지의 라이프 스토리는 아무래도 정통전기 작법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비화들을 발굴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편하게 써내려 가는 것이 여러분께 편하게 어필하리라 믿는다.

피스톨 박으로 유명한 박종규 실장은 4~5급 실력이었는데 조훈현을 집에 들여놓고 시간 날 때마다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박실장도 어지간히 승부욕이 강한 인사라 그냥 친선으로 두거나 배움을 목적으로 하는 바둑은 두지 않았다.
무조건 내기바둑이었다.
프로기사는 내기를 둘 수 없지만 소년 조훈현은 어쩔 수없이 후원자와 한 집에 1원씩을 걸고 바둑을 두었다.
물론 돈이 걸린 바둑을 훈현이 져줄 리 만무했다.
그 때 박종규 실장이 잃어준 돈을 모두 합하면 꽤 큰 금액이었으리라.

 

남들은 평생 바둑공부를 해도 1급에 도달하기 힘든데 아홉 살 만에 프로기사가 된 조훈현은 관철동에서 분명 이채로운 존재였다.
이 빛나는 원석(原石)을 갈고 닦아준 사람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각별한 애정으로 돌봐준 기사는 김인과 정창현.
6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기타니 도장에서 수업을 받고 이듬해인 63년 귀국해 조남철의 아성을 넘보던 김인 9단(당시 4단)은 틈날 때마다 조훈현 초단을 앞에 앉혀놓고 복기를 해주었다.
그 역시 일찌기 호남땅에서 천재 소리를 듣고 홀로 상경해 정상등극을 눈앞에 둔 주인공이었으니 어린 조훈현을 보는 시각이 남 같지는 않았을 터, 열 살 연상의 선배로서 그는 아낌없이 조훈현에게 무공을 전수해주었다.
김인은 태생적으로 입이 무거워 곰살맞은 애정표현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오직 19로 위에서 흑백의 수담으로 친밀한 감정을 토해낼뿐이었다.
잔수가 밝고 싸움을 즐기는 그 시절 조훈현의 바둑에 김인 선배는 부단히 보다 더 넓고 큰 틀의 패러다임을 제시함으로써 공력을 배가시켜 준 것이다.
아마 자신처럼 외로운 승부사의 길을 택한 동향의 후배소년 조훈현에게 운명적인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와 반대로 정창현은 당시 한국기원 원생들의 사감역을 자임하며 호랑이 선생으로 군림했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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