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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15일차 - 36k, 드디어 까미노에 적응했다.
- 관련게시물 : 스압) 산티아고 순례길 1~2일차 - 관련게시물 : 산티아고 순례길 13일차 - 오늘은 45k, 쓰러질 뻔했다.- 관련게시물 : 산티아고 순례길 14일차 - 39k, 시련은 항상 몰려온다. 전에 어떤 배붕이가 내 글 보면서 엄두가 안난다고 해서 쓰는데 나는 남들이 가는 하루치 코스를 2개씩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까, 보통은 하루치 코스가 약 20k 정도다. 가끔 30k도 있다. 근데 난 하루에 40~50k를 가니까 하루에 2일치를 간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나처럼 순례길에서 뛰는 미친놈 없다. 그러다가 다치고 그래서 힘든거지 오기 전에 운동좀 했고 보통 사람처럼만 하면 몸에 무리 가거나 문제될 건 없을거다. 순례 초반에 만난 스웨덴 70대 할머니는 까미노가 4번째라시는데 하루에 딱 10k만 간다고 했다. 왜 서둘러 가냐고, 마음껏 쉬고 즐기면서 가라고 하셨었다. 다른 순례자들은 약 20k 면 보통 12시 쯔음 도착하는데 보통은 그렇게 도착해서 여독을 풀고 회복하고 관광한다. 근데 나중엔 도시나 그렇지 마을은 더 볼게 없어서 그냥 안에서 오는 동행만 기다림. 나는 도착해서 하루 종일 숙소에서 멍 때리고 있는게 용납이 안됐다. 물론 다리 회복하는게 중요했지만, 누워서 폰만 보고 있는게 싫었다. 그래서 계속 걷는거다. 다 각자 순례를 걷는 방법이 다른거고 보통 사람들처럼만 하면 문제될 건 없다. 또 하루치 코스씩 가면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 동행하며 행복순례 할 수 있다. 나는 내 순례를 수양으로 선택했고 그래서 홀로 고행을 자처하는 거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오늘은 늦잠을 잤다. 알람이 5시 20분, 5시 50분 있는데 20분에 깼다가 다시 잠들었다. 50분에 또 울리니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해 서둘러 나왔다. 일어나니 감기가 전날보다 좀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양말을 신다보니 새끼 발가락 상태가 안좋아보였다. 전날 내 신발이 비에 젖었다고 신문지를 줬었다. 이런 사소한 배려 하나 하나가 참 고맙다. 이 알베르게는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나가기 전에 사탕 하나를 주워 먹었다. 나 그래도 5유로 도네이션도 했는데 이거 먹어도 되겄지? 집 근처 한의원에서 가져 온 소화제, 속칭 염소똥약. 장트라블이 심해서 속이 부글부글 할 때마다 먹는다. 이거 만큼 좋은게 없다. 속이 편-안. 해외 나가기 전에 지참 추천 이 알베르게는 겨울에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혹시 가려는 이들은 참고하셈 밤새 비가 왔는지 바닥이 젖어 있었다. 오늘도 종일 비 소식이 있었다. 새벽 중 가장 추운 날이었다. 입김이 나오더라 이 마을을 나가는 길에 있는 다리인데 은은히 이뻤다. 먹구름만 아니었어도 별과 함께 아주 멋진 사진을 얻었을텐데. 그래도 꽤 큰 마을이라 그런지 나가는 길목에 가로등도 몇 개 있었다. 오늘은 너무 어둡고 발이 위험한 것 같아 랜턴을 켰다. 사실 까미노 하이킹 코스 말고 옆 도로를 걸으면 더 쉽지만 가아끄음씩 갑자기 두 길이 갈라져서 하이킹 코스는 저 안쪽으로 들어가 아싸리 찢어지는 경우도 더럿 있다. 그렇기에 자갈 길이 좀 힘들더라도 이쪽으로 가는게 낫다. 그리고, 10월 달에 도로로 걷던 순례자 한 분이 지나가는 차가 그냥 냅다 치고 간 사례도 있다. 조심해서 나쁠건 없다. 오늘은 매 번 사과+바게트만 먹기 뭐해서 토마토도 사봤는데 토마토를 좋아하진 않지만 완전식품 어쩌고 하기에 먹어봤는디 여기껀 좀 다른거 같더라. 단맛은 좀 적지만 과육이 어마어마 그리고 아침용 크로와상도 샀었는데 토마토가 넘나 실해서 배가 불러 두 입 먹고 아껴놨다. 내가 보통 20~23k 구간(1일치 코스)을 낮 12시 쯔음 도착하는데 그 쯔음에 식당에서 밥 먹으면 딱이긴 한디 오늘은 위 거리 쯔음에 마을이 없었다. 마을이 17k, 30k라 애매해서 혹시 몰라 크로와상을 아껴둠 이젠 나도 베테랑 순례자가 되는 듯 했다. 비가 와서 물 웅덩이가 많다. 꽤 많이 왔다. 며칠 전, 대마를 권한 순례자가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다. 그 친구도 가정사가 있는 친구였다. 충분히 그럴만 했다. 합법적으로 구했다고 했다. 나도 마음이 편해지고 싶었고 합법적이라기에 호기심이 피어났지만 참았다. 나는 우리 아버지 핏줄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도박, 흡연, 여색, 음주를 즐겼고 가정폭력을 하셨었다. 아무 것도 끊지 않았으며 끊을 마음도 없으셨다. 그리고 나는 그런 아버지를 닮아 (어쩌면 내 잘못을 아버지 탓으로 돌리는 것 일지도.) 학창 시절에는 게임에 미쳤었고 20대에는 음주에 미쳤었다. 뭔가에 한 번 빠지면 그것만 보였다. 절제가 안됐다. 그래서 게임과 술 이후로는 손대선 안되는 것은 애초에 시작도 안한다. 그래서 아직도 이 나이 먹도록 고스톱과 포커 룰도 모른다. 절대 배우지 않았다. 그러면서 호기심은 있어서 옆에서 치는거 밤새도록 구경한다. 위험한거다. 맞으면 맞았지 누군가를 때려본 적도 없다. 주먹질을 배우고 때리는 방법을 알까봐. 언젠가 생길 배우자와 자녀가 위험한 순간에 뭐라도 필요할 것 같아서 복싱은 오래 배우긴 했다. 그래도 미트만 쳤지 몇 년 동안 스파링 한 번 해본 적 없었다. 20대 초반에 친하고 따르던 형이 남자는 모든걸 해보고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었는데 나는 무서웠다. 제어를 할 줄 모른다면 그래선 안되는거 같았다. 물론 그 형은 중딩 때 본드도 하고 하루 3갑 흡연을 했었는데 다 끊은 초인적인 정신력을 지닌 인간이었다. 난 아니니까. 다행인건 아버지를 미워하진 않는다. 미워하면 닮는다잖냐 나는 하나 좋은게 나쁜 기억은 잘 잊는다. 오늘도 생각하다 보니 기억이 난건데 아버지가 구둣발로 어머니 배를 걷어차고 어머니는 쓰러져 숨을 못쉬시고 나는 그런 엄마 옆에서 울던 기억이 났다. 그 땐 모든게 슬펐다. 그럼에도 아버지를 미워하진 않는다. 지금은 뵌지 몇 년 됐지만 예전엔 1년에 한두 번은 아버지를 보러 갔었다. 술 들어가시면 꼭 "니 엄마가 못해서 내가 이렇게 된거야" 라며 탓을 하는게 듣기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만나면 반가웠다. 부모 자식의 연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버지니까... 형이랑 어머니는 아버지라면 이를 가는데 내겐 아직도 어릴 적, 우리 네 가족이서 삼겹살 구워 먹으며 신났던 그 때 기억이 있다. 그 때 그 구워지는 삼겹살 냄새, 옆에서 식사 준비하는 어머니, 삼겹살을 굽고 구운걸 잘라 형 입과 내 입에 넣어주던 아버지, 그리고 마냥 좋아서 오도방정 떨던 나. 그래서인지 지금도 삼겹살 굽는 냄새가 좋다. 먹고 있으면 따스해진다. 요즘 말로 소울푸드라고 하던가 우리 네 가족이 함께 삼겹살 구워 먹던 그 때 그 화목함이 그립다. 내 몇 가지 꿈 중 가장 큰게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거다. 요즘은 퐁퐁이라고 비웃지만 그래도 난 좋은 배우자이자 좋은 부모로써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꿈꾼다. 이제 곧 영포티가 될 나이라 반 포기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루고 싶다. 많은걸 참고, 모른 척 하며 살았다. 그리고 선하게 살면 선함이 찾아온다고 믿었다. 욕심내선 안돼. 원해선 안돼. 참아. 견뎌. 난 그래선 안돼. 내 영혼에 족쇄의 쇠사슬을 칭칭 감아놓고 살아왔다. 남들은 자기 자신이 좋다고 하던데 나는 내가 좋은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냥.. 내 자신이 너무 안쓰럽고.. 애잔하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걷고 있었더니 뭔가 올라왔다. 울었다.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계속 슬프고 내 자신이 너무 너무 안쓰러웠다. 길 위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어 다행이었다. 지금까지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잘 감내해 온 줄 알았다. 자각하진 못했는데 속에 응어리 진게 있었던 것 같았다. 행복하고 싶었다. 영화나 드라마처럼은 아니어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길 원했다. 하지만 늘 꼬이고 어그러졌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질질 짠건지 아깐 뒤에 아무도 없었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눈물을 닦고 모자를 눌러 쓰고 마주보고 웃으면서 부엔 까미노를 외쳤다.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또 울었다. 찌질했다. 이 표식들이 뭔지 모르겠는데 까미노 초반엔 엄청 많다. 그러다가 한참 안보였는데 오랜만에 보니 낙서같지 않고 좋았다. 낙엽들이 간신히 몇 가닥 걸려 있는 나무들이 좋았다. 너만 그런게 아니라 우리도 앙상하고 볼품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 모두가 다 품고 사는 앓이가 있다고. 왠지 위로가 됐다. 혼자 걸어서 다행이었다. 내 생각에 몰두할 기회가 있어서 좋았다. 이제 보름이 되서야 드디어 까미노에 적응한 것 같았다. 그 전엔 힘들고 아프고 외롭고 고행을 지속하니 빨리 가야해서 파워워킹하기 바빴어서 생각할 겨룰도 없었는데 이제야... 힘듬 아픔 고독에 적응하고 생각할 여유를 찾은 것 같았다. 앞서 가던 양인들이 동행이 된건지, 였는지 옹기종기 모여 앉아 간식을 먹고 있었다. 그 전에는 저런 동행에 대해 조금의 부러움은 있었는데 이젠 느껴지지 않았다. 보름이 되서야 드디어 이 고독한 고행을 즐기게 된 것 같았다. 며칠 전엔 분명 만약 다시 온다면 나도 동행을 얻어 가야지 했고, 어젠가 그젠가만 해도 이런 고행을 또 해? 미쳤나 다신 안와 했는데 아니, 지금은 전혀 아니다. 만약 내가 까미노에 다시 와도 나는 또 혼자 멀리 가며 사색에 잠기고자 할 것 같았다. 그게 지금 내가 까미노를 즐기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때는 원없이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싶다. 그런 날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또 오고 싶어졌다. 끝나가는 가을이 좋다. 앙상한 나뭇가지와 나뒹구는 낙엽들, 볼품없고 초라한게 다들 나와 비슷한거 같아 좋았다. 까미노를 다시 와도, 나는 또 이 황량한 시기에 올 것 같았다. 12시가 되서 약을 먹어야 하니까 그냥 길에 주저 앉아 먹을 것을 꺼내 먹었다.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드디어 까미노가 좋아졌다. 죽어라 바삐 움직이지 않았다. 이젠 상관없었다. 어짜피 걷다보면 도착할거고 문은 열려 있을테니까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내 먹을 귤을 나눠줄 때 기분이 좋았다. 김치맨들 하여간. 귀여웠다. 폭풍이 온다. 근데도 즐거웠다. 오면 오는대로 즐겁고 안오면 아쉬울 것 같고. 오히려 더 쏟아지기를 바라기도 했다. 뭔진 모르지만 아무튼 까미노 관련인 듯 저 멀리서 비가 쏟아지는게 보였다. 오늘은 그림이 다 비슷하다. 이게 이 비슷한 길이 약 30k 가까이 됐다. 근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늘의 길이 까미노 중 가장 좋았다. 가끔 이런 쉼터도 있었다. 황홀했다. 아마 옛날 사람들이 이런 것을 보면서 하늘에서 신이 내려오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 신 얘기가 나와서, 그 생각도 진지하게 했다. 난 참선을 배우고 행하고 싶다. 나는 붓다의 철학을 좋아한다. 그러나 불교는 자기수양에 더 집중한다. 그래서 종교는 다르지만 그저께 만난 신부님 따라 성당으로 가서 참선을 배우고 베푸는데 힘 써볼까 고민했다. 난 신과 천국은 모르겠고 영혼과 윤회는 믿는다. 그래서 선교나 전도 그런건 모르고 그냥 봉사만. 그 신부님은 자기 직업을 밝히려 하지도 않았고 안 뒤에도 내게 어떠한 신앙을 내비치지도 않았으며 그저 캄보디아에 선교하러 가서 기회를 주러 갔는데 자신이 힐링 받고 왔다는 말만 했었다. 그 2시간 가량의 대화에서 나는 그 사람에게 무언가 깊게 느낀 것 같았다. 만약 신부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다보니 있던 마을 알베르게에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한국인들이 정말 많이 오는가보다 했다. 여긴 하늘이 맑은데 비가 내린다. 저 멀리서 내리는 비가 바람타고 여까지 온다. 10년 전 러시아에서도 마른 하늘에 비가 내리길래 뭐지 했는데 유럽은 다 비슷한가보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찍어봤다. 처음엔 언제 가나, 왜 줄어들질 않나, 갈 수나 있나 생각만 가득했는데 오늘 이걸 딱 보니 아쉽다. 드디어 보름 지난 오늘부터 까미노를 즐기기 시작했는데... 이후로 길이 갈 때마다 줄어든다고 생각하니 정말 아쉬웠다. 사진으로 보이나? 저 멀리 오늘 머물 마을이 보인다. 약 5k 정도 떨어진 것 같다. 오늘 머무는 마을의 성당이다. 장난감 같다. 오늘 머물 알베르게다. 작은 곳인데 사람이 적고 사장님이 친절해서 좋았다. 특히 세탁을 맡기면 다 개어서 돌려주셨다. 한국인이 많이 왔었는지 우리나라 물건들이 많고 숙소 안에는 아름다운 강산 노래가 은은히 나오고 있었다. 한참 쉬고 마을에서 유명한 식당을 찾아갔는데 순례자들이 있었고 나를 자리에 초대했다. 감사했다. 음식은 서로 나눠 먹었고 정말 맛있었다. 한국인 두 분도 계셨는데 그 두 분이 음식 값을 모두 냈다. 내일 머물 예정인 숙소가 같아 소주를 내가 사기로 했다. 낮에 참 생각 많이 하는데 장갑과 스틱을 산 후로 그걸 쓰고 있다보니 생각을 적어둘 상황이 안된다. 그러다가 도착하면 이것 저것 하다가 잊어먹는다. 아쉽다. 걸으면서 한 내 생각들을 적어둘 기회였는데. - dc official App
작성자 : 압델고정닉
우리는 이탈리아군을 벌레처럼 짓밟았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러시아 초원을 가로질러 이탈리아군이 후퇴한다. 그들은 니콜라예프카 부근의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다. 치열한 전투와 막대한 사상자 끝에, 그들은 1943년 1월 말, 추축국 전선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1943년 초 스탈린그라드에서 후퇴하는 이탈리아군 알피니 산악 보병대 병사들. 이탈리아군은 소련군의 포위를 뚫고 나온 추축군 군인들 중 하나였다. 1943년 1월 초, 스탈린그라드 외곽에서 소련군의 공세로 포위 당할 위기에 처한 이탈리아군은 끊임없는 후퇴를 강요받았다. 후퇴하는 내내 그들은 소련군의 공격을 받았고, 23만명의 이탈리아군은 그 중 13만명을 손실하게 된다.먹을건 떨어졌고, 챙겨 온 장비나 러시아 농민들에게서 훔친 음식 부스러기만 있었다. 띄엄띄엄 있는 러시아 인들의 가옥 말고는 쉴 거처 또한 없었다.마리오 리고니 스턴은 1942년 11월 10일, 최전선의 거점이 포위 공격을 받은 이후 탁 트인 초원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암울한 새해를 맞이했지만, 이제 그 일은 아득한 기억으로만 남았다.우리는 또 다른 좁고 황량한 계곡을 지나간다. 불안한 마음으로 계곡을 따라 걷는다. 숨이 막힐 것 같고, 계곡 밖으로 나가고 싶다.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귀를 기울이고, 숨을 멈춘다. 도망치고 싶다. 언제든 전차 포탑이 나타나고 기관총 사격 소리가 들릴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계곡을 통과 해야한다.배가 고프다. 마지막으로 밥을 먹은 게 언제였더라? 기억이 안 난다. 대열은 1마일쯤 떨어진 두 마을 사이를 지나간다. 거기에 가면 분명 먹을 게 있을 것이다. 작은 무리들이 우리 대열에서 떨어져 나와 마을들을 향해 식량을 찾아 나선다. 장교들이 그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거기에 빨치산이나 소련군 정찰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외친다.우리 소대원 몇 명도 식량을 구하러 나갔다. 잠시 쉬는 동안 우물가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가장 가까운 이스바(러시아식 가옥)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은 마을에서 가장 큰 집 중 하나였고,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집안 곳곳을 뒤지고 난 후였다. 내가 찾은 건 러시아인들이 시럽을 만드는 데 쓰는 말린 사과 한 줌 뿐이었다.우리는 여전히 걷고 있었고 밤은 깊어만 갔다. 춥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춥다. 아마 영하 40도쯤 될 것이다. 입김에 턱수염과 콧수염에 얼어붙는다. 우리는 담요를 머리 위로 끌어올리고 말없이 걸어간다. 우리는 멈췄다. 대지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무도, 집도 없다. 오직 눈과 별, 그리고 우리뿐이다.나는 눈 위에 몸을 던졌다. 눈조차 없는 듯했다. 나는 허공 속에 눈을 감는다. 어쩌면 죽음도 이럴까? 아니면 내가 잠들어 있는 걸까? 나는 하얀 구름 속에 있다.누가 날 부르지? 누가 날 이렇게 세게 흔드는 거야? 그냥 내버려 둬!!! "리고니! 리고니! 리고니! 일어나. 일어나. 리고니."모시오니 중위가 걱정스럽게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눈을 뜨자 그가 내 위로 몸을 숙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두어 번 더 몸을 흔들자 그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의 검은 두 눈은 나를 응시하고 있었고, 흰 서리로 윤기 나고 뻣뻣한 수염과 머리에는 담요가 덮여 있었다."리고니, 이거 먹어." 그가 말했다. 그리고 작은 알약 두 개를 내게 건넸다. "삼키고, 어서 일어나서 따라가자고." 나는 일어나 그와 함께 걸었다. 우리는 점차 일행을 따라잡았고,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했다…눈 위에 몸을 던지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동료 첸치와 모시오니는 내게 말을 타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깨어나는 것보다 더 끔찍하다. 말 위에서 동상에 걸린채, 다시 내려서 걸어가는 것이 너무 두렵다.첸치가 내게 담배를 건네주고 우리는 담배를 피웠다. "리고니, 지금 가장 먹고 싶은 게 뭐야?" 내가 미소 지었고, 그들도 미소 지었다. 내가 밤마다 걸을 때면 늘 그렇게 말했기에 그들은 내 대답을 알고 있었다.집으로 들어가네. 우리 집 같은 집에 들어갔지. 옷을 다 벗고 부츠도, 가방도 없고, 머리에 담요를 덮어 쓰지 않은채.목욕을 하고 린넨 셔츠를 입은 뒤 커피 한 잔을 들이키고 침대에 몸을 던졌어. 난로가 있는 따뜻한 방에 커다란 침대, 매트리스 시트가 깔린 진짜 침대에서 말이야. 그리고 잠들고, 잠들고, 또 잠들었지. 그러다 종소리가 들려서 깨어나보니 식탁에 음식들이 차려져 있어. 와인, 스파게티, 과일들 포도, 체리, 무화과가 있지. 그걸 먹고는 음악을 들으면서 다시 잠들었지.첸치가 웃고, 안토넬리도 웃고, 나의 동료들도 웃었다.마리오 리고니 스턴은 행운아 중 한 명이었고,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 줄 수 있었다. 이탈리아군의 후퇴는 가면 갈수록 더욱 비참해져만 갔다..파수비오 사단 장교였던 유제니오 코르티는 더 심각한 사례들을 회상한다.지친 사람들은 눈밭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미쳐갔고,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가장 끈기 있던 사람들 만이 오랫동안 길을 따라 기어갔지만, 결국 이 불행한 사람들은 힘이 다할 때까지 계속 나아갈 뿐이었다.내가 가장 자주 보았던건 그들의 정신이 붕괴하는 것이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고는 눈 더미에 앉아 부츠를 벗고 맨발을 눈 속에 파묻은 한 군인 때문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웃음을 마친 그는 큰 소리로 아주 즐거운 노래를 불렀다. 이런 일들이 주위에서 비일비재 했다.만약 붉은 군대가 그들의 후퇴 행렬을 따라 잡으면 아무런 자비도 없었다. 다음은 소련 제18전차군단 170 전차여단의 세르게이 오트로셴코프의 회상이다.흘레브니의 코사크 농장에 도착했는데, 결코 잊지 못할 일이다.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페트로프스키라는 또 다른 농장이 있었다. 그곳도 소련 전차들이 점령하고 있었지만, 우리 여단의 전차는 아니었다. 언덕 위에 위치한 농장들 사이에는 저지대가 있었다. 이른 아침, 거대하고 무리로 이루어진 이탈리아 제8군이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저지대를 따라 진격했다. 이탈리아 선발대가 모습을 보이자 "전진! 분쇄!"라는 명령이 종대를 관통했다. 그때 우리는 양쪽 측면에서 그들을 맹렬히 공격했는데 그런 아수라장은 다시는 본 적이 없었다. 이탈리아군은 말 그대로 땅바닥에 박살 났다. 우리가 얼마나 큰 분노와 증오를 품고 있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을 직접 봤어야 안다. 우리는 이탈리아 군인을 벌레처럼 짓밟았다. 겨울이었고, 우리 전차는 석회로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전투가 끝난뒤 우리 전차들은 포탑 아래는 전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피 속에 헤엄친 것 같았다. 궤도를 힐끗 보았는데, 팔 하나가 끼어 있었고 다른쪽에는 두개골 조각이 있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날 수많은 이탈리아군 포로를 잡았다. 이탈리아 제8군은 사실상 사라졌다. 적어도 그 이후로는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https://www.ww2today.com/p/43-01-21-the-italian-retreat-from-stalingrad The Italian retreat from Stalingrad21st January 1943: Mussolini's's adventure on the Eastern front comes to a dismal end, as Italian troops make a desperate escape from Red Army encirclementwww.ww2today.com내용 출처 소련에서 로케이션한 1970년 작 이탈리아 영화 해바라기 장면 중
작성자 : 투하체프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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