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 겸 의장이 본인 재산의 절반 이상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직원들 앞에서 선언한 데 이어 4월에는 삼성이 고 이건희 회장의 재산 상속·기부 계획을 발표했다. 김 의장의 기부 금액은 현재 가치로만 5억원 이상. 이 회장 유족은 1조원을 기부하고, 미술품 2만3000점을 기증하기로 했다. 기부 역사를 새로 쓴 ‘세기의 기부’가 이어진 2021년. 선한 영향력으로 한 해를 빛낸 ‘기부왕’을 찾아봤다.
◇흙수저→5조 기부, 카카오 창업자 김범수 의장
재산 절반 이상을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밝힌 카카오 김범수 의장은 2021년 3월 자발적 기부운동 ‘더기빙플레지’에 기부자로 이름을 올리고 재산 절반 이상을 기부하겠다는 뜻을 공식화했다. 앞선 2월 직원들 앞에서 약속한 기부 계획을 곧바로 실천한 것이다.
더기빙플레지는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부부가 2010년 함께 설립한 자선단체로, 우리 돈으로 1조원이 넘는 자산이 있어야 가입할 수 있다. 또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해야 한다.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등 25개국 220명이 서약했다. 국내에선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의장에 이어 김 의장이 두 번째다.
카카오 창업자 김범수 의장. /카카오 제공
지난 7월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을 제치고 한국 최고 부자에 등극하기도 했던 김 의장의 현재 재산은 개인 명의로 보유한 카카오 주식 1250만주 등을 포함해 10조원이 넘는다. 기부 의사를 밝힌 ‘재산 절반’은 5조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김 의장은 이른바 ‘흙수저’ 출신 자수성가 기업인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막노동, 어머니는 식당 일을 했다. 김 의장은 할머니를 포함해 여덟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았다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몇 차례 말했었다. 김 의장은 2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5남매 중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게임을 창업했다. 2006년 카카오의 전신 ‘아이위랩’을 세우고 4년 뒤 카카오톡 메신저를 출시해 국민 모바일 메신저로 키웠다.
카카오는 모바일 메신저를 넘어 결제, 금융, 게임, 차량호출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혔다. 카카오톡을 내놓은지 9년만인 2019년에는 자산총액 10조원이 넘는 대기업으로 올라섰다. 코로나 사태로 비대면 서비스 수요가 증가하면서 주가도 급등했다. 카카오의 시가총액은 한국 증시에 상장된 기업 중 네 번째로 많다.
김 의장은 “내가 태어나기 전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라는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를 설정하고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에 나서고 있다. 재산 절반을 기증하기로 하기 전인 2007년부터 이미 현금 72억원, 주식 약 9만4000주(152억원) 등 200억원이 넘는 자산을 기부해왔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 4조원대 기부
2020년 10월 별세한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유가족이 2021년 4월 감염병 예방과 어린이 암환자 치료 등을 위해 미술품 기증을 포함하는 4조원대 기부 계획을 밝혔다. 그가 남긴 주요 재산으로는 삼성전자(4.18%)와 삼성생명(20.76%), 삼성물산(2.88%), 삼성SDS(0.01%) 등 삼성 계열사 주식이 있다. 상속세 부과 기준으로 18조9600억원어치다. 여기에 미술품과 부동산, 현금 등을 더하면 총 26조원에 이른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과 부인 홍라희 전 리움 관장. /조선DB
유가족은 이 가운데 12조원을 상속세로 납부할 계획이다. 상속세를 포함하면 상속 재산의 60%를 내놓는 셈이다. 상속세 12조원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 상속세의 3배가 넘고, 최근 3년(2017~2019년)간 국세청이 거둬간 상속세 합계(10조6000억원)보다 많다. 잡스 사망 당시 유족에게 부과된 세금은 28억달러(약 3조1000억원)였다. 지금까지 국내 최대 상속세는 2018년 별세한 고 구본무 LG 회장의 유족이 연부연납하고 있는 9215억원이다. 2020년 1월 타계한 고 신격호 롯데 회장 유족은 국내에 3200억원을, 일본에 1300억원의 상속세를 납부 중이다.
상속세 외에 삼성 일가가 발표한 기부 계획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미술품이다. 이 회장이 소장하고 있던 정선의 ‘인왕제색도’, 달항아리 등 국보 14점과 보물 46점을 포함해 이중섭의 ‘황소’,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등 감정가로만 3조원대에 이르는 2만3000여 점이 국립중앙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된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생전에 특별히 아꼈던 국보 제309호 달항아리. /YTN News 유튜브 캡처
4조원 기부 계획 중 나머지 1조원은 감염병·소아암·희귀질환 극복을 위해 기부했다. 이 중 7000억원은 감염병 전문병원과 연구센터 건립에 쓰인다. 감염병 연구는 코로나19 확산으로 국가적 중대 과제로 떠오른 만큼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클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소아암과 어린이 희귀질환 치료와 임상연구에는 3000억원을 지원한다. 삼성은 앞으로 10년간 전국의 어린이 환자 1만7000여 명의 치료를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고 이 회장은 사내 어린이집 시설까지 하나하나 챙겼을 정도로 어린이를 위해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삼성은 기업 차원에서도 통큰 기부를 했다. 삼성전자와 주요 계열사들이 이웃사랑성금으로 500억원을 모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탁한 것. 삼성은 1999∼2003년 매년 100억원씩 기부했다. 2003∼2010년은 매년 200억원, 2011년 300억원, 2012년부터는 500억원씩 맡겨 오고 있다. 누적금액은 7200억원이다.
◇카이스트에 50억 기부한 ‘휴보 아빠’
로봇 공학자 오준호(67) 한국과학기술원(KAIST) 기계공학과 명예교수는 지난 10월 KAIST에 50억원을 기부했다. KAIST에서 창업한 기업이 교내에 기부한 금액 중 역대 최고액이다.
10월 25일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본원에서 오준호 KAIST 기계공학과 명예교수의 발전기금 감사패 전달식이 열렸다. /KAIST
오 교수는 혼다가 개발한 로봇(아시모·2000년)에 이어 2004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두 발로 걷는 인간형(휴머노이드) 로봇 ‘휴보’를 개발한 과학자다. 인간처럼 걷는 휴보가 세상에 태어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의미에서 ‘휴보 아빠’라는 별칭으로 유명하다.
오 교수가 기부를 결정한 건 연구와 창업을 같이 할 수 있도록 배려한 학교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오 교수는 KAIST의 39번째 창업 교원이다. 창업을 전방위로 지원하는 요즘과는 달리 당시에는 교원 스스로 창업 지식과 인력을 확보하고 복잡한 승인 절차를 거쳐야 했다.
학교의 지원으로 ‘레인보우 로보틱스’를 설립한 오 교수는 고마움의 표시로 회사 주식 20%를 학교에 기증했다. 이후 DRC-휴보를 개발해 출전한 세계 재난 로봇 경진대회인 ‘다르파(DARPA) 로보틱스 챌린지’에서 미국과 일본 등 로봇 강국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고,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때엔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서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지난 2월 레인보우 로보틱스는 열번째 창립기념일을 앞두고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다. 창업 당시 200만원 가치였던 주식 400주는 상장을 거치며 50억3900여만원으로 커졌고, 이는 모두 발전기금으로 기탁됐다.
2020년 교수직에서 물러난 오 교수는 레인보우로보틱스의 최고기술책임자(CTO)로 활동하며 연구·개발을 이어나가고 있다. 두 발로 걷는 인간형 로봇과 4발로 걷는 로봇, 천문·우주 관측기구 개발 등 로봇 연구를 총괄하고 있다.
◇29살 생일엔 5억원, 데뷔 13주년엔 8억5000만원 플렉스
아이유는 2008년 데뷔 이후 자신의 생일이나 앨범 발매일 등 특별한 기념일마다 팬클럽 이름인 ‘유애나’ 등과 함께 소외계층 등을 위해 꾸준히 나눔을 실천해 오고 있다. 2021년 5월에는 자신의 스물아홉살 생일을 맞아 5억원을, 9월엔 데뷔 13주년 기념으로 8억5000만원을 쾌척하는 등 통 큰 기부를 이어갔다.
지난 5월16일 생일을 맞은 아이유는 한국소아암재단, 희귀질환 아동 지원 단체 여울돌, 한국 미혼모가족협회, 독거노인종합지원센터, 푸르메재단, 아동복지협회 등을 통해 소외계층에 총 5억원을 전달했다. 소속사 측은 “아이유가 20대 동안 꾸준히 받아온 큰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20대 마지막 생일에 ‘아이유애나’의 이름으로 따뜻한 일을 하고 싶어 했다”고 전했다.
가수 아이유./ 아이유 인스타그램
아이유는 2021년 3월에도 정규 5집 앨범을 기다려준 팬들과 함께 청소년 한부모 가정과 청각 장애인 지원을 위해 1억원을 기부했다. 5월에는 과천시에 3년째 기부를 이어온 사실이 알려졌다. 김종천 과천시장은 아이유가 1000만원을 기부하는 등 3년째 기부를 해오고 있다고 밝혔다. 아이유는 2018년 경기 과천시에 자신의 작업실을 매입한 이후 3년째 과천시에 기부를 해오며 나눔의 손길을 펼치고 있다.
9월에는 데뷔 13주년을 맞아 광고 모델로 활동 중인 브랜드 회사들과 함께 취약계층에 8억5000만원 상당의 물품을 기부하기도 했다. 전속 광고모델인 경동제약 그날엔, 뉴발란스, 반올림피자샵, 블랙야크, 이브자리, 제주삼다수와 함께 각각의 소외계층과 선별 진료소를 대상으로 의식주 위주의 기부 물품을 전달했다.
◇이름 없는 기부왕도
익명으로 거액을 기부한 기부왕도 있었다. 지난 11월 서울 강남구는 한 할머니가 구청 복지정책과를 찾아와 1억5200여만원짜리 자기앞수표가 들어있는 흰 편지봉투를 맡기고 돌아갔다고 전했다.
이 할머니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봉투를 건넸다. 당시 할머니를 상담했던 김기섭 주무관이 곧바로 할머니를 뒤 따라가 “이름이라도 알려주시라”고 했지만 대답을 하지 않고 구청 앞 횡단보도를 건너가 버스를 타고 사라졌다고 했다.
익명의 할머니가 기부한 자기앞수표. /강남구
할머니가 강남구에 기부한 돈은 1억5225만367원이다. 강남구에 접수된 개인 후원금 중 최고 금액이다. 그간 강남구에선 작은 박스에 1000원짜리를 가득 채워 익명으로 기부를 하거나 저금통을 익명으로 기부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 큰 금액을 기부한 일은 처음 있는 일이다.
강남구는 할머니의 뜻에 따라 강남복지재단을 통해 관내 독거 노인 등 저소득층을 위해 뜻깊게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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