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직에, 돈 잘 벌고, 사회적 평판까지 좋다는 의사. 남부럽지 않은 삶이 보장될 것 같지만 아래 이야기를 보면 모두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타인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주는 의사라고 하지만, 정작 ‘생업 전선’에선 본인 목숨을 위협받는 일이 허다하게 벌이지기 때문입니다.
2022년 6월 경기도 용인의 한 종합병원에서 소름끼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74세 남성 A씨가 의사에게 줄 선물이 있다며 응급실로 찾아와 해당 의사의 목을 낫으로 찍은 사건입니다. 낫에 찔린 의사는 뒷목이 10cm 가량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목 뒷부분에 긴 흉터와 통증, 그리고 정신적 트라우마는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가해 남성은 해당 병원 응급실에서 숨진 70대 여성 B씨의 남편이었습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B씨의 아내는 사건이 벌어지기 며칠 전 심정지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왔다 사망 판정을 받았습니다. B씨가 소생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A씨는 의사의 조치가 미흡했다고 판단해 불만을 품고 이런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A씨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현행범으로 체포됐고, 이 사건을 담당하는 경기 용인동부경찰서는 살인미수 혐의로 A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 사람을 해칠 수 있는 흉기인 낫으로 사람을 찌른 만큼 살인의 목적이 있었다고 판단한 겁니다.
A씨의 끔찍한 범행으로 피해자인 의사와 당시 현장에 있던 간호사들도 큰 정신적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자신들은 항상 정해진 시간에 응급실이라는 고정된 장소에서 항상 근무를 하고 있는만큼 누군가 위해 의사를 품었다면 피해를 당한 의사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테니까요.
“생명 살리려던 의사에게 돌아온 건 낫질”
사건 이후 대한응급의사학회는 긴급 성명을 발표하고 “당시 난동을 제압하고 법적인 격리 조치를 미리 취했다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지 모른다”며 “아직도 우리 사회는 환자와 보호자를 무한한 온정주의 눈길로 바라보는 분위기”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응급실을 비롯한 병원에서) 사망한 망자의 보호자가 설령 난폭한 행동을 보인다 하더라도 단지 일시적 감정의 표출로 이해하고 넘어가려 했을 것이고, 경찰에 신고했다 하더라도 법적 조치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드라마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원에서 가족이 사망하면 망자를 끝까지 진료한 의사의 멱살을 잡거나 망자가 떠난 상황을 부정하며 병원 집기를 내던지는 과격한 행동을 해도, 의료진은 이를 그저 묵묵히 감내하는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학회는 끝으로 “결과적으로 환자의 생명을 되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의사에게 돌아온 것은 감사의 표현이 아니라 살해 의도가 가득한 낫질이었다”며 허탈한 심정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100병상 이상의 병원들은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의료진을 보호할 수 있는 보안 인력을 1명 이상 일선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원이 한정돼 있어 위험 상황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고, 이미 상황이 벌어지고 있거나 벌어진 이후에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대학병원 교수가 환자에게 피습당해 사망하기도
의료진에 대한 폭력은 응급실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2018년 강북삼성병원에서 근무하던 고 임세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진료 중 환자에게 피습을 당해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의료인을 폭행해 상해나 중상해를 입히거나 사망에 이르게 할 경우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법, 일명 ‘임세원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법은 의료인을 폭행해 상해에 이르게 하면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상 7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며, 중상해의 경우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으로 가중처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의료진을 사망하게 할 경우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도 담겼습니다.
개정안 마련으로 처벌은 이전보다 강력해졌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가 2021년 9월 발간한 ‘의료인 폭력방지를 위한 통합적 정책방안’ 보고서에 나온 ‘최근 3년 간 진료실에서의 폭력 피해 경험’ 조사 결과를 보면, 조사에 응한 의사 2034명 가운데 71.5%가 환자 및 보호자에게 폭언 및 폭행을 당했다고 응답했습니다.
이중 15% 는 신체적 폭력을 당했습니다. 폭언이나 폭행을 당한 횟수는 응답자의 절반 이상인 54.4%가 1년에 1~2회 정도라고 답했고 매달 한 번씩 겪는다는 비율도 9.2%나 됐습니다. 이 조사는 2019년 실시됐습니다.
조사 결과처럼 의료인에게 폭언, 폭행을 한 사례는 임세원법 마련 이후에도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2020년 8월에는 부산 북구의 한 신경정신과병원장이 환자의 흉기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2019년에는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의사와 병원 직원이 부상을 입었고, 같은 해 다른 대학병원에서는 사망 환자의 유족이 의사를 폭행했습니다.
의료진에 대한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안정적인 진료가 가능하다고 보는 건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의료진을 향한 폭력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더라도 어디까지 이것은 사후약방문일 뿐이고요. 분노로 흥분에 가득찬 사람이 추후에 처하게 될 벌금이나 징역형이 무서워서 휘두르려던 흉기를 내려놓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료진 폭력은 다른 환자들에게도 악영향
의료진에 대한 폭력 피해는 의료진 뿐만 아니라 다른 환자들에게도 돌아갑니다. 대학병원 응급실에서는 이번처럼 진료를 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경우 이를 수습하기 위해 응급실 문을 폐쇄하기도 합니다. 분초를 다툴만큼 시급한 환자가 있어도 당장 치료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죠. 이 환자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병원을 찾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위험한 상황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이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가족이 처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때문에 병원, 특히 응급실은 더더욱이 보호받아야 할 곳이지만 현실은 A씨와 같이 위해를 가하는 이들과 밤낮할 것 없이 실려와 행패를 부리는 주취 폭력자들, 내 가족부터 봐주지 않는다며 의사, 간호사 등을 때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병원에 공권력 가진 경찰 배치 등 보다 실효성있는 대책 필요
현재 대학병원들이 현장에 배치된 보안인력을 배치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 수가 긴급 상황을 막을 수 있을 만큼은 아닌데다가 또 이들이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도 없기 때문에 의료진이 보호를 받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경찰 또는 이에 준하는 공권력이 상주해야 그나마 상황이 나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대한의사협회, 대한병원협회, 대한전공의협회 등도 현재 일제히 성명을 내고 정부와 국회에 실효성있는 안전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는만큼 이번에야 말로 실효성있는 대책이 나올지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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