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라하는 IT 기업은 다 가봤다. 페이스북(현 메타)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와는 함께 동남아시아 개발도상국을 다니며 프로젝트를 한 동료였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그가 돌연 ‘꿈의 직장’을 뜬금없이 뛰쳐나와 정착한 곳은 인도네시아. 그는 그곳에서 중고거래 플랫폼 창업에 나섰다. IT 업계에서 잔뼈 굵은 그가 어쩌다 동남아시아에서 중고거래 사업을 하게 된 걸까. ‘셀온’(Sellon) 김동욱(45) 이사의 창업 과정이 궁금했다.
셀온 김동욱 이사. /김동욱 이사 제공.
김 이사는 어린 시절 한국남방개발(Kodeco)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인도네시아를 숱하게 오가며 글로벌 기업에 대한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인도네시아는 그에겐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카카오 인도네시아 법인장으로 근무할 당시엔 도시 곳곳에 있는 쓰레기 산을 보며 문득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는 형태의 사업, 즉 중고 거래야말로 사회에 건강한 영향을 끼치는 사업 아이템이라고 생각한 것도 그때였다. 마침 고성욱 대표의 제안을 받고, 중고거래 앱 개발에 뛰어들었다. 김 이사는 현재 셀온에서 앱 개발과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IT 업계에선 주로 어떤 일을 했나. 저커버그와의 인연도 궁금하다.
“주로 디지털 마케팅과 광고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첫 단추를 IT 기업에서 시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IT 업계에서 경력이 쌓이게 됐습니다. 페이스북 아시아태평양 본사(APAC HQ)가 있는 싱가포르에서 일한 건 4년 정도인데, 당시 페이스북이 ‘인터넷 닷오그’(internet.org) 서비스를 개시하면서 마크 저커버그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인터넷 닷오그는 저개발 국가의 낙후 지역 주민들에게 인터넷 접속을 무료로 제공하기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이를 위해 마크 저커버그와 함께 동남아시아 개발도상국을 다니며 현지화 작업을 추진했습니다. 큰 글로벌 기업들의 경영철학을 배우고 싶어 다양한 곳에서 경험을 쌓아왔습니다.”
-동남아시아에서 사업을 시작한 이유가 있나요?
“싱가포르에서 머무는 동안 멀쩡한 가구와 물건들이 그대로 버려지는 걸 봤습니다. 그곳엔 글로벌 기업들이 많아 해외 주재원들이 많은데요.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갈 때 기존에 쓰던 물건들을 버리고 갑니다. 전자 제품부터 가구, 운동기기, 서적, 자전거 등이 그대로 남겨지죠. 분명 필요한 사람들은 많은데, 중간에서 거래해 줄 시스템이 마땅치 않았죠.
인도네시아는 전세계 ‘쓰레기 배출국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인도네시아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인도네시아는 쓰레기 문제가 심각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3억에 가까운 인구가 매일 쓰레기를 버리니 하루에만 18만톤 가량의 쓰레기가 나오죠. 세계의 폐플라스틱을 수입해오기도 했고요. 곳곳에 거대한 쓰레기 산이 있는데, 이제 그마저도 한계에 다달아 처리 공간이 부족할 정도입니다. 매립장 근처에 사는 아이들이 유독성 폐기물을 잘못 만져 피부가 썩는 경우도 많이 봤습니다.
쓰레기를 처리하는 방법으로 매립과 소각 등이 있지만, 어느 것도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진 못해요. 매립은 토양오염을, 소각은 대기오염을 일으키니까요. 자원을 지속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에 대한 고민이 생겼고, 자연스럽게 재활용과 업사이클에 관심이 생겼어요. 그렇게 눈을 뜬 게 중고거래 시장입니다.”
-셀온은 어떤 회사인가요?
“셀온은 동남아시아에서 중고거래 플랫폼을 비롯해 하이퍼로컬(Hyperlocal)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하이퍼로컬은 아주 좁은 동네 생활권을 말하는데요. 지역 특성에 맞춘 중고거래와 동네 정보 공유 커뮤니티 서비스 등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2001년 싱가포르에서 앱 론칭을 시작으로, 최근에는 인도네시아에서도 서비스를 개시했습니다.
현재 싱가포르에서 셀온 앱 다운로드 수는 5만건 정도 됩니다. 싱가포르 인구가 500만명 정도니, 인구의 약 1%가 내려받은 것이죠. 현재 올라온 콘텐츠 수는 4만개 정도 됩니다.”
-다양한 중고거래앱 가운데 셀온만의 특장점이 있다면.
“한국은 배달 문화가 잘 발달돼 있지만, 동남아시아에선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이유로 ‘빌딩 기반 시스템’(BBS∙Building based system)을 도입했는데요. 동네를 작은 단위로 쪼개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끼리 먼저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경우 물건을 따로 배송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 한국에선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를 통해 동호회나 모임을 만들 수 있지만, 싱가포르에선 동호회 하나 만들려면 오프라인에서 먼저 사람들을 만나 전화번호를 교환한 뒤 메신저를 통해 단체방을 만들어야 합니다. 굉장히 번거롭고 불편하죠. 이렇게 자국 포털이 없는 국가에서 지역 커뮤니티 서비스를 편리하게 제공하려고 합니다.”
-실제로 거래가 잘 이루어지나요?
“동남아시아는 기후가 덥기 때문에 몰(mall) 문화가 발달해 있는데요. 대부분 밖에 나가기 보다 실내에서 활동하기를 선호합니다. 싱가포르의 경우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는 외국인들은 주로 콘도에서 생활합니다. 싱가포르인들은 'HDB'(housing & development board)라고 불리는 정부 임대아파트를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받기도 하고요. 그 안에선 이웃끼리 교류가 활발한 편입니다.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만큼 서로 믿을 수 있으니까요.”
셀온에서 중고거래가 이뤄지는 과정. /셀온
-셀온에서 중고거래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셀온 앱에 접속하면 본인이 사는 건물에 있는 사람들의 게시글과 물건부터 먼저 뜹니다. 그 다음 같은 구역에 사는 사람들, 동네∙지역 사람들 순으로 보여지는 식입니다. 인스타그램처럼 특정 이용자의 글을 보는 ‘팔로우’ 방식도 있어서 자기가 팔로우하는 사람들의 물건을 우선적으로 볼 수 있게 설정할 수도 있습니다. 올라온 중고품 중 필요하거나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채팅하기 버튼으로 판매자와 연락해 가격을 흥정한 뒤 거래하면 됩니다.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이라면 따로 배송할 필요 없이 직거래를 할 수 있겠죠.”
-안전거래는 어떻게 담보하는지.
“동남아시아 중고 거래 시장은 사기가 많아 유의해야 합니다. 저희는 앱을 운영하는 데 있어 ‘이웃 간 신뢰’를 최우선의 가치로 두고 있는데요. 우선 자신이 사는 건물 중심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면, 그 안에서는 허위 매물이 올라오거나 사기인 경우가 드뭅니다. 같은 건물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 간의 신뢰감이 형성되기 때문이죠.”
-주로 어떤 물건이 거래되나.
“싱가포르에선 K팝 관련 상품이 인기가 많은 것 같아요. 아이돌 굿즈 같은 게 젊은층 사이에서 활발히 거래되고 있습니다. 꼭 굿즈가 아니더라도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들이 잘 나가는 편입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소득 격차가 커서 다양한 거래 형태가 나타납니다. 물물교환 형태도 많이 보이는데요. 옥수수와 쌀을 서로 교환하는 식입니다. 이런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물물교환 마켓 서비스도 론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수익구조는 어떻게 되는지.
“중고품을 대신 올리거나 전문가 매칭을 통해 수수료를 받고 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해외주재원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때 물건 하나 하나를 중고로 팔 시간이 없는데요. 저희가 일괄적으로 물건을 올리고, 일부 판매 수익을 수수료로 가져갑니다.
전문가 매칭도 비슷합니다. 싱가포르나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집 등을 수리하려고 인력을 고용할 때 드는 비용이 천차만별인데요.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하는 전문가와 이용자를 연결해주는 서비스를 통해 수수료를 받기도 합니다.”
-동남아시아 중고거래 시장을 어떻게 보고 있나.
“동남아시아 중고 거래 시장은 최근 급격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한국의 ‘중고나라’ 수준의 서비스가 많습니다. 느린 배달 문화와 자국 포털 서비스의 부재로 지역 커뮤니티 서비스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동네를 기반으로 소통하는 셀온을 통해 이런 문제를 극복해 가려고 합니다. 향후 구인구직이나 신선식품 공동구매 등 다양한 서비스로 사업을 확장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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