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NEWS=김병조 기자] 한국 사회에서 배임죄는 오랫동안 기업 범죄를 처벌하는 법 조항이 아니라, CEO의 의사결정을 규율하는 보이지 않는 규칙으로 작동해 왔다. 투자 실패와 전략적 판단이 형사 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는 기업 경영을 보수적으로 만들었고, 글로벌 CEO들에게는 한국을 ‘형사 리스크가 큰 나라’로 각인시켰다. 배임죄 개편 논의가 본격화된 지금, 문제는 책임이 사라지느냐가 아니라 책임의 기준이 어떻게 바뀌느냐다. 배임죄 개선 전망과 개선 이후 한국 CEO의 책임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짚어본다.
◇ 한국에서의 배임죄 실상
▲ 배임죄란 무엇이고 왜 문제가 되는가?
배임죄(형법상 배임·업무상 배임)는 “신뢰 관계에 있는 자가 타인의 이익을 해치고 자신이나 3자에게 이익을 줘 회사·조직의 재산상 이익을 감소시킨 경우”를 처벌하는 법조항이다. 문제의 핵심은 3가지다.
첫째, 적용 범위가 매우 넓다는 점이다. 배임죄는 기업 임원뿐 아니라 공공·사적 조직 구성원까지 폭넓게 적용돼 왔다는 비판이 있다.
둘째, 내용과 처벌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어떤 행위가 “배임에 해당하는지” 예측하기 어렵고, 정상적인 경영 판단을 넘어선 투자 실패나 전략적 판단까지 형사 책임으로 이어질 여지가 있다는 지적이 기업계에서 지속돼 왔다.
셋째, 실제 처벌의 무거움과 재계 불안이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이 적용되면, 배임으로 인한 이득이 클 경우 징역형이 매우 무거워지는 점도 기업계의 불만 요인이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기업들은 배임죄가 과도한 경제 범죄 처벌 수단이라고 주장해 왔다. “경영 판단의 실패까지 형사 문제로 하면 기업 활동이 위축된다”는 것이다.
▲ 형사 책임이 경영을 설계해 온 나라
한국의 배임죄는 오랫동안 기업 경영의 ‘보이지 않는 규제’로 작동해 왔다. 법 조문보다 더 강력한 것은 CEO들의 학습 효과였다.
“안 하면 문제없다.”
“결과가 나쁘면 설명해도 소용없다.”
“법적으로 안전한 선택이 최선이다.”
이 인식은 실제 기업 의사결정을 바꿔놓았다. 대규모 투자와 M&A는 보수적으로 변했고, 장기 성장보다 단기 손익이 우선됐으며, 그룹 차원의 전략 판단은 법무 검토를 통과할 수 있는 범위로 축소됐다. 한국 CEO들은 실패의 리스크보다 사후 형사 리스크를 더 크게 계산하는 경영자가 됐다.
▲ 배임죄는 ‘불법 처벌’이 아니라 ‘의사결정 규율’
배임죄의 특징은 명확하다. 적용 범위가 넓고 ‘임무 위배’라는 기준이 추상적이며 결과 발생 이후 사후적으로 해석된다. 이 구조에서 배임죄는 단순한 범죄 처벌 조항이 아니라, 경영 판단 자체를 규율하는 도구로 기능해 왔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사건, SK·롯데·한화·두산 등 주요 그룹 사건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 것은 이것이다. 합법적 절차를 밟았는지보다 ‘왜 그 판단을 했는지’가 형사적으로 재단됐다. 이 과정에서 CEO 개인은 늘 책임의 정점에 서 있었다. 이사회는 방패가 되지 못했고, 집단 의사결정보다 개인 결단이 형사 책임으로 환원됐다.
▲ 글로벌 CEO 시각 “왜 이게 형사 문제가 되나”
한국 기업을 처음 접한 글로벌 CEO들이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이다. 대규모 투자 실패, 전략적 M&A, 계열사 구조조정. 미국과 유럽에서는 지배구조나 주주 책임의 문제로 논의될 사안이, 한국에서는 검찰 수사와 형사 재판으로 이어진다.
이 질문의 중심에 있는 제도가 바로 배임죄다. 그리고 지금 한국 사회는 이 배임죄를 바꾸려는 갈림길에 서 있다. 이 논쟁은 단순히 “재벌을 봐주느냐, 처벌을 강화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본질은 훨씬 깊다. 한국 CEO의 의사결정 방식, 책임 구조, 그리고 글로벌 경쟁력의 문제다.
▲ 글로벌 CEO들이 본 한국의 법 환경
이 지점에서 한국은 글로벌 스탠다드와 어긋난다. 미국·영국에서는 유사한 사안이 주로 주주대표소송, 손해배상, 이사회 책임의 문제로 다뤄진다. 형사 처벌은 예외적이다.
반면 한국은 실패한 판단이 형사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크고, 검찰 수사 단계에서 기업 운명이 좌우되며, CEO 개인이 법적으로 고립되기 쉽다. 그래서 글로벌 CEO들과 투자자들은 한국을 이렇게 인식해 왔다.
“사업 리스크보다 CEO 개인 리스크가 큰 나라.”
이 인식은 단순한 이미지 문제가 아니다. 한국 기업에 대한 할인율, 자본 비용, 글로벌 인재 유치 경쟁력에까지 영향을 미쳐왔다.
▲ 해외 상황과 비교
각국은 배임죄·유사 개념을 어떻게 다루는지가 매우 다르다.
미국, 영국 등에서는 한국식 배임죄와 같은 독립적 범죄조항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슷한 행위는 사기(fraud), 횡령(embezzlement) 또는 신탁의무·충실의무 위반(fiduciary duty breach)으로 처리되거나, 대부분 민사 책임으로 귀속된다.
예를 들면, 영국 신탁법상 의무 위반의 경우 민사상 책임이 중점이며, 형사 처벌은 다른 법령(예: 사기·부패)으로 규율된다.
일본, 독일은 배임죄 개념을 형법 또는 상법 내에 두지만, 한국보다 엄격한 형사 가중 처벌 구조는 아니다. 다만 주로 민사 책임, 손해배상 중심으로 적용 폭과 처벌 수위가 조정돼 있다.
◇ 배임죄 개편 논란과 전망
▲ 현재 한국에서의 논의 및 입법 상황
(1) 정부·여당의 개편 계획
정부는 형법에서 배임죄 조항을 전면 폐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개혁 방향을 발표했다. 정부 설명의 핵심 논리는 다음과 같다.
- 배임죄가 너무 광범위·불명확해 기업 경영활동을 위축시킨다.
- 대신 범죄 요소를 명확히 하고, 형사 처벌이 아닌 행정 제재·민사 책임 중심의 제도로 전환하겠다는 취지다.
여론·정치권에서는 다음과 같은 쟁점이 부각되고 있다.
(2) 찬반 입장
찬성(재계 및 일부 여권 입장): 배임죄가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 판단까지 형사 위험으로 만드는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미국·영국처럼 사기·횡령 등 다른 법 조항으로 처리하거나 민사 소송 체계로 해결하는 방식을 참고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다.
반대(야당·시민단체·일부 전문가): 배임죄 폐지만으로는 지배주주·경영진의 사익 편취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사라질 우려가 있다.
배임죄 개선이 필요하더라도, 주주대표소송 활성화,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등 대안 마련 후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배임죄 문제점과 개선방안 세미나에서 정부 여당의 개편 방향을 설명하는 더불어민주당 권철승 의원
배임죄 문제점과 개선방안 세미나에서 정부 여당의 개편 방향을 설명하는 더불어민주당 권철승 의원
(3) 국회·입법 절차 상황
2025~2026년 들어 정부·여당에서 관련 개혁 의제를 발표했고, 국회 법사위 등에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대체 입법안과 세부 규정 확정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다. 야당과 시민단체 등의 반발이 강해 단독 처리 여부에는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 가능한 제도 개편 시나리오
첫 번째 시나리오는 전면 폐지다. 이는 재계는 선호하지만, 정치적 부담이 크다. 시민사회와 야당 반발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여권이 단독으로 추진 시 “재벌 특혜” 프레임에 갇힐 위험이 있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경영판단 면책’ 명문화이다.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다. 고의적 사익 추구가 없는 경우 배임이 성립되지 않고, 판단 당시 정보·절차·합리성 기준을 명시한다. 일본·독일식 접근과 유사하다. 이 경우 “결과가 아니라 판단 과정(process)을 본다”는 원칙을 형사법에 얼마나 구체적으로 반영하느냐가 관건이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부분 폐지 + 민사 강화이다. 중장기 과제로 적합하다. 배임죄 적용 범위 축소하는 대신 주주대표소송 요건 완화, 징벌적 손해배상 확대, 공정거래·자본시장법 연계 강화가 핵심이다.
▲ 배임죄 개편 논의의 진짜 의미
최근 배임죄 개편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한국 사회는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경영 실패를 어디까지 형사 책임으로 볼 것인가.”
이 질문의 방향이 바뀌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왜 손해가 발생했는가?
어떤 절차와 정보로 판단했는가?
이는 처벌을 없애자는 논리가 아니라, 책임의 기준을 바꾸자는 요구다.
▲ 배임죄 이후, CEO의 책임은 줄어들까?
답은 명확하다. 줄어들지 않는다. 다만 형태가 바뀐다.
형사 책임은 줄어드는 대신 민사·시장·거버넌스 책임은 커진다. 배임죄 이후의 CEO는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정교한 책임 구조 속으로 들어간다.
배임죄 이후에도 CEO가 피할 수 없는 책임은 분명하다.
첫째, 고의적 사익 편취는 여전히 형사 책임의 영역이다. 횡령, 내부자 거래, 총수 일가 이익 추구는 어떤 제도에서도 면책되지 않는다.
둘째, 절차 없는 판단은 민사상 치명적 책임으로 돌아온다. 주주대표소송, 손해배상, 해임과 연임 실패가 현실적 리스크가 된다.
셋째, 이사회 통제 실패는 집단 책임으로 확산된다. 글로벌 기준에서 이사회는 고무도장이 아니라, CEO를 보호하고 동시에 규율하는 핵심 장치다.
넷째, ESG와 컴플라이언스 실패는 시장의 즉각적 응징으로 이어진다. 주가, 신용등급, 글로벌 자본의 이탈은 법원보다 빠르다.
▲ 글로벌 스탠다드로 살아남는 CEO의 조건
이 지점에서 한국 CEO에게 요구되는 변화는 분명하다. ‘강한 CEO’에서 ‘설계하는 CEO’로이다.
글로벌 스탠다드의 CEO는 무엇을 결정했는가보다 어떻게 결정했는가로 평가받는다. 의사결정 구조를 먼저 만들고, 이사회를 방패로 활용하며, 반대 의견과 리스크를 기록으로 남기고, 법무·준법을 사후 처리자가 아니라 사전 설계자로 참여시킨다. 이건 책임 회피가 아니다. 책임을 혼자 지지 않기 위한 설계다.
배임죄 이후의 한국 CEO는 덜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을 구조화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감옥의 책임에서 벗어나는 대신, 시스템과 이사회, 시장 앞에서 더 투명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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