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로 복원
뒷배경의 한옥은 광해군의 대동법으로 설치된 선혜청의 모습
대동법은 백성들의 납세를 쌀이나, 천으로 낼 수 있게 한 제도였음
원래의 세금 납부 제도는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던 공납이었는데
관리와 상인이 결탁해 폭리를 취하는 방납으로 백성에게 큰 고통을 주었고
(특산물이 아닌데 그 특산물을 바치라고 하거나, 품질이 안좋다면서 지방 관리가 빠꾸먹이는 등등)
(그러면서 그 특산물을 대신 내주는 대신 원래 특산물 값 3배 5배 10배를 쌀로 내라고 계약하는 등등)
이를 해결하고자 토지 면적에 따라 쌀을 걷는 대동법이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었음
특산물 대신 쌀이나 천으로 납부할 수 있게 된건데
이를 징수하고 관리할 관청과 보관할 창고가 필요했고
그로 인해 접근성이 좋은 숭례문 바로 옆에 선혜청을 설치해서 징수하였음.
선혜청에 징수한 쌀이나 천이 쌓이고
선혜청은 징수한 쌀,천(베)을 통해 다른 물품으로 물물교환했음
그니까 선혜청 초기는 지금으로 치면 국세청(세금 징수)과 조달청(정부 물품 구매)이 하는 일을 동시에 함.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선혜청 주변에 국가에게 물품을 팔고 계약하기 위해 각종 물품이 모여들었음
그게 지금까지 남아온게 남대문시장
(본래 남대문시장은 훨씬 이전부터 있던 시장이었지만, 선혜청의 설치를 계기로 엄청나게 발달해 지금의 남대문 시장 영역으로 확장하게 됨)
선혜청의 본청은 숭례문 근처였지만 서울 각 거점에 창고가 자리잡아서 주변에 시장 발달을 도왔음

남대문시장 1번 게이트에 위치한 선혜청 터 안내판 (개인적으로 복원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음)
선혜청은 갑오개혁(1894년)과 남대문로 정비 과정(1890년대)에서 사라졌는데
일단 갑오개혁으로 세금을 화폐로 납부하는 금납제가 시행됐고
그로 인해 쌀과 포, 천을 보관하던 선혜청의 창고들이 필요 없어졌음
근데 마침 1890년대 남대문로 대로변을 정비하려 했고, 주변 상점들을 철거해야 하는데
그냥 철거할 수 없으니 남대문로 양쪽 변을 늘어서 있던 가가(상점)들한테
"너네 저기 비어있는 선혜청 창고 들어가서 장사해라"
하고
상인들한테 창고 공간을 내준 거임.
그 공간에서 장사하는 모습이 1,2짤의 모습이다.
그렇게 남대문로는 정비를 함 (전차가 다니고 전봇대가 생기고 도로가 확대됐음)

정비 이전의 남대문로 (숭례문에서 명동으로 이어지는 길)
도로 양쪽으로 가가(상점)들이 점거해서 길이 좁다
일본이 근대화되는 걸 보고 온 박영효가 주관해서 1890년대에 남대문로 정비를 함

1890년대 남대문로
길 바로 옆 초가집상점(가가)들이 다 사라졌고, 길이 넓어지고
전봇대가 세워지며, 전차가 다니는 걸 알 수 있음

AI로 복원한 모습
멀리 명동성당과 서양식 건물이 보임
그리고 이때 남대문로의 한옥들이
1890년대 서양의 벽돌건축에 영향을 받아
1900~1910년대 이렇게 개량 한옥으로 변함


이때 명동성당이나 서울역, 서양식 건물에 사용된 벽돌이 대량생산되어 들어와서
이렇게 만들어짐
하지만 이런 서양식으로 개량된 한옥도
해방 후 산업화와 전쟁,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거치면서
국민들이 먹고살기 급급해지고
미관에 관심이 사라지면서
상업성의 논리로 간판이 뒤덮이고
돈이 되지 않는 것에 비용을 지출하는 것이 인색해져서
이렇게 변해버림

건물의 바깥으로 보이는 부분만 흰색 페인트로 칠해진 것을 볼 수 있음
창문도 벽돌로 막아버렸고
이 주변이 개발되기 전

1990년대까지 이렇게 남아있었음
사진의 맨 왼쪽 흰색 건물이 9짤 건물임
그 옆 건물들도 다 개량 한옥임..
일제강점기 당시의 남대문로에도 남아있음

빨간 동그라미로 된 곳이 현재 복원된 건물
그 옆은 다 사라짐
남대문로 정비할 때
이 일대 건축 컨셉을 개량 한옥상가로 잡으면 좋겠다는 생각임


남대문로 한옥상가 맞은편 남대문시장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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