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광 입석마을 뒷산에는 영월 신씨 조상들의 묘가 있었음
이런 산을 선산, 선영, 분산이라고 불렀는데
문제는 선산에 묘만 있는 게 아니라 소나무도 있었다는 거임
조선시대 소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음
궁궐, 관청, 전함, 병선, 조운선, 건물 자재, 땔감에 다 필요해서 국가가 특별히 관리하던 자원이었음
조선은 소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하는 금송 정책도 시행했고,
개인이 기른 산의 소나무라도 마음대로 베면 처벌받을 수 있었음
즉 소나무는 현대식으로 치면
조상님 묘 옆에 자라는 현금성 자산 정도라 보면 되겠다
자 이제 사건의 시작을 보자

1. 1차 사건 신항업이 나무를 팔았음
1841년 봄, 영월 신씨 사람 신항업이 입석마을 뒷산의 소나무를 팔았음
신항업은 입장은 이랬음
법성포 창고 수리하고 향교 대성전 중수하는 데 기와 구울 땔감이 필요하다길래,
벌레 먹고 재목감 안 되는 나무만 골라 팔았다
값은 20냥이었다
그리고 이 산 전체가 문중 공용산은 아니고,
동쪽,서쪽 기슭은 우리 집안이 관리한 개인 산구역임
그러니 벌레 먹고 쓸모없는 나무 좀 판 게 뭐가 문제임?
근데 같은 영월 신씨인 신복현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이의를 제기함
야, 거긴 영광에 처음 정착한 선조가 묻힌 도선산임
님이 뭔데 문중 땅 소나무를 네가 왜 마음대로 팔아먹음?
문중이 그 돈 가져가야함 이라고 주장함
그러자 신항업은 이 말을 무슨 소리냐 하고 거절
신복현은 신항업을 범금, 즉 금지된 소나무를 함부로 벤 죄로 관아에 고소함
결국 신항업은 곤장 세 차례를 맞고 옥살이까지 했음

2. 2차 사건 신복현이 그 소나무 사실 200냥짜리라고 주장함
신복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음
처음 소나무값은 20냥이었다고 하는데,
신복현은 이렇게 주장했음
그거 관곽, 서까래, 기둥으로 쓸 만큼 좋은 재목이었다
값은 200냥 쳐줘야 하고
그 돈은 문중이 가져야 한다
그러자 관청은 일단 신항업이 200냥을 전부 문중에 주는건 에바고,
반만 주라고 판결했음
일단 결과적으로 신항업은 100냥을 신복현에게 주고,
신복현은 그 돈을 문중에 전달해야 하는 사람이 됨
이 소송은 1841년 윤3월 초부터 6월쯤까지 약 4개월간 이어졌음
여기까지 보면 신복현이 이긴 것처럼 보임
뭐 그냥 흔한 집안 다툼으로 보이는 사건임
여기까지 보면 뭐 신복현이 정의로운 청년으로 보임(이때 약 25살이었음)

3. 반전: 신복현의 100냥 횡령
1841년, 신씨 문중 사람들이 다시 소지(고소장)을 올림
내용은 대충 이럼
신복현이 선조와 문중을 위한다고 소송해서
신항업에게서 100냥을 받아갔는데,
그 돈을 문중에 안 주고 자기가 다처먹음
처벌해주셈
자료에는 신복현이 100냥을 문중에 전달하지 않고 중간에서 가로챘으며,
돈을 받았다는 영수증조차 써주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옴
심지어 신복현은 나중에 문제가 되자
신기찬이라는 인물이 문서를 갖고 도망쳤다는 식으로 둘러대기까지함

4. 3차 사건: 소나무 2그루 베었는데 8~9그루가 같이 넘어짐
1841년 8월쯤, 홍문 중수 작업을 하던 도목수가 신항업을 찾아와 큰 소나무 2그루를 가져가겠다고 함
근데 2그루를 자를 때 옆에 있던 소나무 8~9그루가 같이 넘어졌고,
도목수는 처음 계약한 2그루와 넘어진 소나무까지 몽땅 가져가 버림
신복현은 또 소나무 판 값을 달라고 했고, 관청에도 고소함
결과적으로 신항업은 신복현에게 6냥을 줘야 했음
근데 웃긴게, 신복현은 1841년에만 열서너 차례나 소장을 냈을 정도로 집요하게 소송을 걸었고
그리고 1841년 8월쯤 또 소나무값 문제로 고소하는 과정에서,
뭔 개지랄을 했는지는 몰라도 관청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유배형에 처해짐
신항업: 나뭇값 또 갚음
신복현: 관청에 개지랄 해서 유배형 처해짐

5. 이번엔 신항업의 역고소
1842년 12월 초, 이번엔 신항업이 신복현을 고소함
시작은 영광 동부면 면임(지방 실무자) 박정록이 관청 명령을 받고 찾아와 말함
와탄진 진선 개조에 소나무가 필요하니
소나무 4그루를 베어가겠음
신항업은 15냥을 받기로 하고 허락함
그런데 당시 아내가 아파서 벌채 현장에 못 갔고,
나중에 보니 허락한 4그루 말고 7~8그루를 더 잘라간 사실을 알게 됨
신항업은 여기에 신복현이 관여했다고 보고,
신복현과 박정록을 상대로 소송함
이 소송도 1843년 3월 초까지 이어졌
대충 정리하면
1. 4그루 계약했는데?
2. 근데 왜 11~12그루를 베어감?
3. 신복현 너 또 뒤에서 손쓴거 아님?
이제 사건이 문중 산이냐 개인 산이냐를 넘어서
공공사업 명목 목재 반출 + 추가 벌채 의혹으로 커진거임

6. 신항업의 반격
1843년 5월, 신항업은 더 크게 소송을 제기함
주장한 내용은 대충 이럼
신복현 등이 1842년 말 와탄진 진선 개조 명목으로 큰 소나무 12그루를 베어갔다 (5번 케이스)
1843년에는 교방청 개조 명목으로 도목수와 짜고 큰 소나무 24그루를 베어갔다
+기타 허락 없이 더 벤 나무 등 약 7그루
비싼 소나무를 헐값에 사서 차익을 저들끼리 나눠 먹었다
나한테는 한 푼도 안 줬다
총 43그루 소나무값을 추징해달라
대충 신복현 등이 도목수와 협잡질해서
5~6냥짜리 소나무를 1냥에 사는 식으로 이익을 챙겼다는게
신항업 측 주장이었음
대충 현대식으로 보면
공공공사 핑계로 자재 빼가고,
목수랑 짜고 헐값 매입해서 차익 먹은 거 아니냐?
누적 피해 43그루다. 계산해서 내놔라
이랬던거임

7. 왜 이렇게 판결하기 어려웠냐면...
핵심은 산의 성격이 애매했기 때문임
산은 총 3개의 기슭이 있었는데,
신항업은 산을 이렇게 봤음
가운데 기슭: 문중 선산
동쪽,서쪽 기슭: 우리 집안이 대대로 관리한 사산
고로 내가 사용할수 있음
반면 신복현은 이렇게 봤음
그냥 전체가 문중 선산이지
조상님 묘가 있는 산인데 네 개인 산이라고?
간단히 정리하면
산은 하나인데 기슭이 셋이고,
신항업 입장에서는 일부만 문중 산이고 나머지는 자기 집안 산이란 관점이었고
신복현 입장에서는 산 전체가 문중 산이었음
그러다 보니 판관도 소나무값을 어느 쪽에 줘야 할지 판단하기 쉽지 않았음
이러다 보니 결국 관아도 질려버림
1842년 당시 군수 조재경은
신씨 문중 소송 아직도 안 끝났냐
관청에서 대꾸하기도 피곤하다
는 식으로 피했고, 뒤에 온 군수 홍영규는
이쪽 신씨든 저쪽 신씨든 다시 소송하면 엄벌에 처하겠다
고 판결함

8. 소송에서 폭력사태로
신항업은 범금으로 곤장 맞고 옥살이까지 했으니
당연히 신복현 쪽에 원한이 생겼음
이후 신복현 쪽에서 100냥을 받으러 사람을 보내자,
신항업은 자식과 조카들을 불러 심부름 온 사람을 줘패
1842년 2월쯤에는 신항업이 신씨 집안 문유사(문중에서 이런저런 업무 보는 실무자) 신규현을 발로 차 거의 죽게 만들기도 했음
신복현 쪽도 만만치 않았음
신기순과 신기찬 등을 시켜 신항업 집에 쳐들어가 가족들을 때리고, 말안장과 여러 물건들을 훔쳤음
1843년 2월에는 신항업 집의 소까지 빼앗아갔고,
신항업 집 말을 빌려 혼인식에 가던 마을 사람의 길을 막고 말을 빼앗아 남의 혼인도 망쳐놓았음
9. 내 사견
둘 다 깨끗하진 않았음
신항업은 법으로 금지한 소나무를 팔았고, 나중엔 폭력도 저질렀음
근데 난 신복현이 좀더 악질이라 보는데
왜냐면
문중을 위한다고 소송하고 같은 문중인 신항업을 곤장,옥살이까지 가게 만들고
거기에 100냥을 받아 문중에 전달해야 했는데 먹튀 의혹 받고 영수증도 안써주고
계속 소장을 넣고 관아에 지랄하다가 유배형에 처해짐
나중엔 공공사업 명목의 43그루 벌채 의혹까지 엮임
43그루 신항업의 의심이긴 하지만..
여튼 이건 내 사견이니 걍 그러려니 해주셈
결론은 선산의 목재 이권을 두고 벌어진 내부 권력싸움이,
횡령 의혹,불법 벌채 의혹,공사 자재 비리 의혹,폭력사태로 번진 진흙탕 사건이라 보면 되겠다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