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저 배경부터 알아보자
조선 후기에는 산송이라는 게 있었음
말 그대로 산을 두고 하는 소송인데,
조상 묘 자리 싸움임.
이게 어느 정도였냐?
산송은 노비소송,토지소송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소송으로 꼽힐 정도였고,
규장각 소장 소지 문서 5천여 건 중 산송 관련 문서가 거의 40%에 육박한다고 함
조선 후기 민사분쟁의 메인 콘텐츠라고 봐도 됨

현대인 기준으로 보면 이럴 수 있음
아니 묘 하나 때문에 왜 집안끼리 몇 년씩 싸움??
근데 조선 기준에선 묘가 단순한 무덤이 아니었음
조상 효도 + 가문 명예 + 풍수 + 선산 소유권(이게 존나 중요) + 지역 체면이 한 번에 걸린 물건임
조선 후기에는 조상 묘를 지키는 범위가 법으로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는데,
현실에서는 수호 범위가 점점 넓어졌음 문제는 이 범위가 딱 자로 잰 것처럼 명확하지 않아서,
여기부터 우리 산임
아닌데 여기도 우리 구역인데?
하면서 개싸움이 벌어진 거고
여기서 밀리면
땅도 뺏기고
엌ㅋㅋ 저새끼 조상님 묫자리 뺏긴 좆밥가문 아니냐 ㅋㅋㅋ
소리 듣는거임
이러다 보니 정상적인 재판으로 끝날 수가 없었음
자 이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때는 1807년, 순조 7년.
경////상도 선산 지역에 노상추 집안,
즉 안강 노씨 가문의 세장지가 있었음
세장지는 쉽게 말하면 대대로 조상 묘를 써온 집안 묘역임.
근데 여기 구조가 좀 복잡함
노씨 집안 선산에 예전에 사위 계열인 이씨 집안이 묘를 쓰고,
또 그 이씨 쪽 외손 계열인 박씨 집안도 묘를 쓰면서,
세 집안 묘역이 옆에 붙어 있는 상태였음
설명하니까 좀 복잡한데 대충 말하면
서로 경계 정해서 여기까진 우리, 저기까진 너희 하고 살던 구조였다고 보면 됨
그런데 박춘로가 자기 어머니를 노씨 집안 묫자리의 대안지처에 묻음
대안지처는 대충 묘에서 바라보이는 맞은편 중요한 자리 정도로 보면 됨
노씨 입장에서는 이거임
야 이 새끼야, 거긴 우리 조상님 앞마당 뷰 자리잖아
박춘로 입장은 달랐음
아닌데? 우리 박씨도 여기 세장지 관련 있음 우리도 쓸 수 있음.
노씨 집안은 바로 소송을 냄
이거 투장입니다 남의 분산에 허락 없이 묘 쓴 겁니다 파내게 해주십시오
이게 왜 문제냐면
우리 집안이 대대로 쓰던 가족묘역,선산이 있음
근데 친척의 친척 사람이 와서
‘우리도 관련 있잖아?’ 하면서
정면 좋은 자리에 묘를 박음
이걸 인정하면 앞으로 그쪽 집안도
‘여기 우리 구역’이라고 주장할 빌미가 생김
여기까지 보면 그냥 조선판 선산 알박기 사건임

이 사건의 자체는 복잡하지 않았고 해결법도 존나 쉬웠음
박춘로가 쓴 묘를 투장묘로 보고 파내면 끝나는 사건이었음
그런데 여기서 조선 산송 특유의 병신스런 시스템이 발동함
박춘로가 그냥 버팀
그냥 조금 버틴 게 아님
수개월 동안 옥에 갇히는 걸 감수하면서도 묘를 이장하지 않음
현대식으로 치면
불법주차 맞음 견인 대상 맞음
근데 차주가 차 안 뺌
견인차는 안 옴
신고자는 계속 민원 넣음
차주는 벌금 맞으면서도 버팀

여기가 진짜 골때리는 건데
이게 문제가, 상대 묘가 불법 투장묘라고 해도 내가 직접 파내면 불법임
조선에서는 관의 허락 없이 남의 분묘를 파내거나 훼손하는 걸 사굴이라고 했는데, 이게 살인죄에 준하는 중죄였음
그래서 묘자리 스틸한놈이 패소해도 묘를 안 파내고 버티면
관에서 직접 파내주지 않는 이상 피해자 쪽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음
그러니까 대충 이랬다는거임
노상추:이 묘 불법인거 맞죠?
관아:네 불법인거 확인되쓰요
노상추:그럼 파내도 되죠?
관아:니가 파내면 범죄임
노상추:그럼 관에서 파내주세요
관아:검토하겠음
노상추:언제요?
관아:언젠가? ㅋㅋㅋㅋㅋㅋ
이게 조선 산송의 정신나간 구조임
소송을 이겨도 집행이 안 되면 아무 소용이 없음
판결문은 받았는데 강제집행이 안 되는 상황임
심지어 상대가 야 나 존버탄다 ㅋㅋㅋㅋ 모드로 나오면 답이 없음

노씨 집안은 향촌에서 소송을 했고,
선산부사,관찰사,암행어사까지 거치며 1년 넘게 질질 끌림
그래도 묘가 안 파임
결국 노씨 집안은 최후의 선택을 함
지방 관아 못 믿겠다
서울 가서 임금님한테 직접 민원 넣는다
이게 상언, 격쟁인데
상언은 임금에게 올리는 청원서 같은 거고,
격쟁은 임금 행차 때 징이나 꽹과리 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거라 보면 됨
여튼 그후
1808년 3월부터 1811년 4월까지
약 2년 동안 노씨 집안은
상언 5회,
격쟁 2회,
총 7차례나 시도했고,
박춘로 쪽도 2차례 격쟁을 시도함

여기서 웃긴점은 계속 민원 넣다가 노상추 쪽이 역으로 찍힌거임
노씨 집안은 향촌 소송에서 승소했음
근데 묘는 못 파냄
그래서 계속 상언, 격쟁을 계속 함
그랬더니 나중에는 오히려 노씨 쪽이 비리건송으로 몰리게 됨
비리건송은 쉽게 말하면,
말도 안 되는 소송을 억지로 계속 끌고 감
이라는 죄목임
결국 노상추는 묘도 못 파낸 채,
오히려 의금부에 갇히는 상황까지 감
1.남의 선산에 묘 씀
2.노씨가 소송 냄
3.노씨가 이김
4.근데 상대가 안 뺌
5.노씨가 계속 민원 넣음
6.관아: 아 그만 좀 해 씨발
7. 노씨: 아니 우리가 소송 이겼다니까요?? 빨리 묘 치워주세요
8. 관아: 알빠노? 너 비리건송 깜빵 ㄱㄱ
이지랄이 난거임

이런일이 왜 벌어졌나면
1. 산송은 한번 지면 리스크가 너무 큼
묘는 그냥 묘지가 아니라 조상과 가문 명예, 땅 소유권 문제라서, 한 번 붙으면 쉽게 못 물러남
조선 후기 산송은 패소해도 정소자를 바꿔가며 계속 소송하는 경우가 많았고,
심하면 대를 이어 이어가는 경우도 많았음
2. 집행이 약함
상대 묘가 불법이어도 직접 파내면 사굴죄가 됨
결국 관이 직접 나서서 관굴해줘야 하는데,
관이 미적대면 피해자는 그냥 민원만 계속 넣을 수밖에 없음
3. 상언, 격쟁도 만능이 아님
이 사건 같은 경우엔 상언, 격쟁을 해도 실질 조사는
다시 지방 관찰사·수령 손으로 돌아가는 경향이 강했고,
이 과정에서 지방관의 어그로를 끌면 오히려 비리건송으로 몰릴 수 있었음
즉 본사에 민원 넣었는데, 본사가 다시 문제의 그 지점장한테 확인 후 처리 바랍니다 하고 내려보내는 거임
민원 넣은 사람 입장에선 환장하는 거고
지점장 입장에선 본사한테 욕처먹고 내려왔으니 이를 바득바득 갈게 되는거지

결말은 좀 울적했음
1811년 4월 19일, 노상추는 산송으로 상언한 일 때문에 한성부에 고소당하고,
경//////상도 관찰사의 장계와 관련해 의금부에 갇힘
본인 일기에도 30년 관직 생활 중 공무로 옥에 갇힌 적은 없는데, 사적인 일로 갇히니 원통하다 라고썼음
그런데 이틀 뒤인 4월 21일, 왕이 가뭄 때문에 죄수들을 대령시키게 하고,
가뭄이 이와 같아 근심스러우니 너희들을 풀어준다라고 말하고 풀어줌
그래서 노상추 갇힌지 이틀만에 석방됨
일기에는 임금의 은혜에 한없이 감사했다고..... 쓰지만,
바로 이어서 산송 문제가 바로잡히지 않았기에 마음은 한없이 울적하였다고 적어놓음
즉 감옥에서는 나왔는데, 묘 문제는 그대로였다는거
그 뒤 4월 24일, 노상추는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감
승리엔딩이 아니라 북악을 돌아보며 슬픈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일기에 썼음
완전 아 씨발… 내가 뭘 한 거지… 허무한 엔딩이었음
아까글 가독성 떨어진다 해서 다시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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