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갤에 소개가 있는 말들이니 짧게 짧게 어떤 말들이 있는지만 알아보고 넘기겠음
1. 토키노미노루
환상의 말이라고까지 칭해지는 토키노미노루
10전 10승으로 더비까지 압승하며 삼관은 당연시 여겨졌고 마주는 삼관달성시 미국원정 의사까지 밝힐 정도로 기대 받는 말이었다.
하지만... 더비 5일후 1951년 6월 8일부터 이상 증세가 나타나더니 당시 더비 1착 상금을 다 때려붓는 약제비에도 불구하고 1951년 6월 20일 사망하고 만다.
마지막 토키노미노루의 눈에는 더비마의 눈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외로운 눈이었다고 한다.
2. 텐 포인트
1차 경마붐인 하이세이코의 등장 이후 인기를 계속 이어갔던 TTG의 일각인 '유성의 귀공자' 텐 포인트.
2세때 한신3세S(현재 한신쥬베닐)을 포함해 10마신,9마신,7마신차로 3전 3승을 거두며 최강2세로 기대를 모으던 텐 포인트
하지만 클래식때 여러모로 아쉬운 성적을 거두고 출전했던 삼관경기+아리마까지 하나도 우승하지 못한다.
특히 킷카 2착, 아리마 2착등 아쉬운 콩콩으로 비운의 귀공자라는 말을 듣지만... 후에 일어날 비극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해프닝이었다.
고마가 되자 클래식의 한이라도 풀듯 봄황상까지 3연승을 이어가지만 타카라즈카에서 라이벌 토쇼보이에게 또 다시 일격을 맞고 텐포는 토쇼보이한테는 이길 수 없나봐ㅋ 이란 소리까지 듣게된다
하지만 1977년의 마지막 경기인 아리마 기념 일본역사에 길이 매치레이스에서 기어코 토쇼보이를 꺾고 1977년 7전6승이란 성적을 기록하고 연도마에 오른다
그리고 1978년 텐 포인트는 세계로의 도전을 외치며 2월 영국 원정을 결심한다.
하지만... 텐포인트를 한번 더 보고 싶다는 팬들의 요청에 의해 1월 일본경제신문배에 출주하지만 텐 포인트에게 주어질 중량은 역시 부담이었다.
조교측은 67kg가 넘어가면 출주를 안시키겠다는 다짐을 하지만... 얄궂게도 텐 포인트에게 부담된 중량은 66.5kg
그리고 텐포인트는 이 경기에서 골절로 쓰러진다. 그 후 43일에 걸친 대수술에도 불구하고 결국 1978년 3월 5일 사망하며 비운이 아닌 비극의 귀공자가 되어버렸다.
3. 페이트 노던
(서러브레드C에서 이나리 원을 이길 당시짤)
카사마츠에서 오구리가 떠난 이후 중앙에서 온 새로운 에이스이자 안카츠의 파트너 페이트 노던.
당시 열악했던 더트의 취급으로 중앙의 더트마는 지방으로 자주 오기도 했는데 페이트 노던도 그런 케이스.
카사마츠에서 안카츠를 만나고 좋은 경기력을 펼치는데 1988년 10월 부터는 아예 포텐셜을 폭발시켜버린다.
최초의 더트 지방교류경기인 서러브레드컵에서 우승하고 당시 최고의 더트 경기인 제왕상에서마저 우승한다.
현재도 제왕상은 JRA출신과 간토남부4경마장출신을 제외하면 페이트 노던과 메이세이 오페라 단 둘만이 지방출신의 우승마이다.
그렇게 당시 더트왕으로 군림한 페이트 노던은 더트마로서는 매우 드물게도 종마장에 들어가기로 결정된다.
그리고 당시에 훗카이도의 생산자들이 미국의 브리더즈컵을 따라 야심차게 만든 브리더즈GC에서 페이트 노던에게 경기에 나와달라고 열렬한 러브콜을 보낸다.
제왕상에 이어 두 번째로 생긴 중앙-지방 교류 더트경기에 매우 상징성이 컸던것.
하지만 페이트 노던은 로렐 쟁패에서 68kg이라는 텐포인트 보다 더 무거운 부담중량을 지고 경기하는 바람에 피로가 쌓여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삿포로 원정까지 갔지만 배드컨디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카사마츠로 돌아와 전일본 서러브레드C 2연패를 준비하지만...
피로가 누적된 것이었을까 결국 골절로 쓰러지고 만다. 처음에는 생명에 영향없어보였지만 결국 다시 증세가 심해지고 1989년 12월 12일 사망한다.
4. 라이스 샤워
말딸에서는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는 라이스 샤워.
부르봉의 삼관, 맥퀸의 삼연패를 막고 본인 성적은 꼬라박으며 온갖 욕이란 욕은 다먹었지만 결국 돌아와 봄황상을 우승하며 찬사를 받는다
그리고 바로 다음 경기인 타카라즈카. 드디어 진정한 히어로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1995년 6월 4일 라이스 샤워는 사망한다.
5. 호쿠토 베가
일본 최강의 더트마는 누구일까? 보통 두 가지로 나뉜다. 쿠로후네와 호쿠토 베가
호쿠토 베가는 데뷔는 더트였지만 터프로 넘어와 당시 트리플 티아라의 3번째 경기인 엘리자베스 여왕배를 우승하기도한다.
하지만 같은시대 베가나 유키노 비진보다 평가가 아래였고 그 후 경기에서 썩 좋다고 볼 수 있는 성적은 거두지 못했다.
결국 같은 마방에서 호쿠토 베가의 위치는 히시 아마존의 친구 역할이 되어버렸다.
중간 중간 더트로 가보기도 하고 장애물 경기도 준비했었지만 1996년 호쿠토 베가는 완전히 더트로 전향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시작되는 연승. 진영은 더트에서 1경기라도 지면 은퇴시키려 했지만 호쿠토 베가는 7연승으로 멈추지 않고 달린다.
그것도 그냥 승리가 아닌 마신차이를 쫙쫙벌리는 압도적인 우승.
당시 지방이나 더트의 인기를 생각하면 호쿠토 베가는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고 1996년 더트 8전8승에 97년 카와사키 기념까지 더트 9연승을 기록한다.
그리고 호쿠토 베가는 두바이 월드컵에 초대받고 그 경기를 라스트런으로 삼은 뒤 유럽의 종마와 교배하고 돌아올 계획을 세운다.
중간중간 컨디션 문제도 있었지만 고돌핀쪽에서 풍부한 지원을 해주기도 해서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컨디션이 되었지만... 차라리 컨디션 난조로 경기를 나가지 못했다면...
경기 도중 호쿠토 베가는 충돌로 인해 골절되고 1997년 4월 3일 현지에서 안락사 된다.
6. 사일런스 스즈카
라이스 샤워와 마찬가지로 모르면 간첩인 사일런스 스즈카
각성한 이후의 스즈카는 엄청난 포스를 보이며 일본에서 엘을 이긴 유일한 말이 되고 역대 최강 도주마의 포스를 보여주며 6연승을 달린다
하지만 이어지는 추황상... 큰 느티나무돌고... 1998년 11월 1일 스즈카는 사망한다.
7. 콘트레일
역사상 세 번째 무패 삼관마이자 많은 말붕이들의 가슴에 아쉬움을 남긴 명마 콘트레일
최초의 부자 무패 삼관을 달성하며 엄청난 기록을 세웠지만 삼관의 마지막 경기인 킷카상에서 너무 많은 채찍질 당해서 상처가 생기고 만다.
결국 그 상처가 원인이 되어 사망해버린다. 재팬컵에서 무패의 트리플 티아라 데어링 택트, 8관마 아몬드 아이의 대결을 기대했던 팬들은 전부 아쉬움의 눈물을 삼키게 된다.
코로나 시대의 희망, 하늘에 남기는 충격의 궤적, 환상의 개선문마 등등 여러 별명을 받게된다.
하지만 현대 의학의 발전으로 사망한 콘트레일의 몸에 다른 영혼을 집어넣어 부활시키지만 결국 원본에 한참 열화된 콘붕이가 되어버린다.
8. 에프포리아
무패로 사츠키상을 우승하고 3세때 추황상, 아리마를 우승하며 연도마를 차지했던 에프포리아
3세까지의 성적은 7전 6승. 코차이로 졌던 더비에서도 타케시의 방심기승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우승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서워 보이는 얼굴과 완벽한 주행으로 경마머신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고 3세가 끝났을 때 이미 현창마 후보에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
하지만 4세 오사카배 경기 직전... 사춘기가 와버린 에프포리아는 갑자기 발정이 나서 암말에게 들러붙는다
주위 사람들이 당황해서 멈칫한 잠깐의 순간. 암말의 뒷발차기를 맞고 에프포리아는 그대로 사망해버린다.
경마계는 콘트레일에게 적용했던 영혼 주입술을 한번 더 시도하지만 F4라고 불렸던 에프포리아는 F6974가 되어 콘붕이보다 심한 열화판이 되어버렸다.
마지막으로 무패 삼관마 콘트레일을 기리는 동상과 묘비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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