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조선 - 청주 한씨(韓氏)
시조 - 준왕
중시조 - 한란
인구: 70만여명
고조선 준왕의 후손들로 준왕에겐 아들이 총 셋이 있었는데 각각 우평,우량,우성이다
그 중 청주 한씨는 우량의 32대 손 한란을 중시조로 삼고 있는 고조선 왕가의 후손들 중에 가장 네임드다
한란은 후삼국 시대때 활약했는데 군인은 아니였다 사실상 현재 청주의 호족급이나 다름 없는 상당한 부농이였다
무려 왕건의 10만 군대에게 식량을 제공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왕건의 든든한 보급 창고였다
또한 고조선 왕가의 후손이라는 정통성 덕에 청주 한씨는 역사적으로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리며 최고 명문가로 대우 받았다
삼한은 고구려,백제,신라를 의미하며(역사적으로 삼한은 마한,진한,변한보단 고구려,백제,신라를 의미했다)
우리나라의 별칭으로 줄곧 쓰였다(현재 국호 대한大韓도 이 삼한에서 유래했다)
거기에 갑족(甲族)에서 甲현재도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다들 잘 알거다 즉 합치면 말그대로 삼한의 으뜸 가문이란 소리
어느정도냐였냐면 조선시대 때 최고 양반가문 중 하나였으며 역사의 큰 전환점에 모두 청주 한씨들이 껴있다
당장 우리나라 마지막 왕조 조선의 외가가 바로 이 청주 한씨다
왜냐 태조 이성계의 조강지처이자 킬방원의 친모가 바로 청주 한씨 신의왕후다
즉 1400년만에 "조선"만 부활한게 아니라 고조선 왕가도 같이 돌아온 셈
거기에 조선을 헬조선으로 만든 세조의 집권을 기획한 한명회 역시 청주 한씨였다
그리고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집안도 청주 한씨였다 (총 10명)
또한 옷갖 과거에 급제하며 조정 요직에도 청주 한씨들이 많이 껴있다
심지어 나라가 망할 때도 을사조약을에 찬동한 이완용 등 친일 대신들의 직위를 모두 해제 시키며
일제에 마지막 발악을 했던 조선 최후의 양심 의정대신 한규설 역시 청주 한씨였다
이렇듯 청주 한씨는 우리 역사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에 자주 등장하며 현재는 인구까지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 나도 청주 한씨다!
고구려 왕가의 후손 - 횡성 고씨
시조: 고주몽(동명성왕,추모왕)
중시조: 고인승
인구: 약 1만여명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 손에 멸망 당하자
연개소문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 그리고 고구려의 마지막왕 보장왕까지 싸그리 중국으로 끌려갔다
이 때 보장왕은 이 모든 것은 연가놈들 책임이지 자기는 무죄라고 주장 했고 당고종은 이를 인정하여 보장왕을 사면 했다
대신 보장왕에겐 한가지 퍼포먼스를 시켰는데 바로 당태종의 무덤 참배였다
이는 상징적인 의미가 굉장히 큰 사건으로 중국사 최고 명군중 한명인 당태종 최악의 흑역사가 고구려와 전쟁에서 패배인데
그 고구려가 당태종의 아들 손에 망해 고구려의 왕이 직접 당태종 무덤으로 끌고가 사죄와 참배를 시켰으니
이는 자신들이 당한 설욕을 풀고 당태종의 한을 달래기 위해 보장왕을 마치 제물마냥 바친 꼴이였다 당연히 한민족 역사에서 최악의 굴욕중 하나다
이후 보장왕을 요동반도의 조선왕으로 책봉하여 고구려 유민들을 달래기 위해 보냈지만
보장왕은 되려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부흥운동 계획이 발각되어 당나라 산골짜기로 유배를 가서 거기서 죽었다
<횡성 고씨 종친회장 고준환과 고마씨 대표 고마 후미야스>
하지만 기적같이 보장왕의 아들들은 각각 반도에 남아서 다 끌려가지 않았다
그 중 고인승은 현재 강원도 횡성으로 튀어서 횡성을 터전으로 삼아 자신만의 가문인 만들었는데 그게 횡성 고씨다
이 외에도 신라와 함께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동생 고안승이 있는데 결국 고안승은 신라 왕가로 편입돼 김씨로 갈아탔다
그래서 현재는 횡성 고씨가 국내의 유일한 고구려 왕가의 후손들이다
그리고 고구려 왕가는 유일하게 한중일 모두에 가문을 만들었는데
중국 요동성에 장수왕 대에 갈라져 나간 요양 고씨와
똑같이 보장왕의 아들이였던 고약광을 시조로 모시고 있는 일본의 고마씨다 (전 천황 아키히토가 이 고마씨의 신사인 고마신사를 참배 한적이 있다)
이렇듯 고구려는 망하고 더는 없지만 그 왕가의 후손들은 한중일에 모두 살아있으며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백제 왕가의 후손 - 부여 서씨
부여 서씨
인구: 17,000여명
시조: 부여온조(온조왕)
중시조: 부여융 (백제의 마지막 왕태자)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수도가 함락 된 의자왕은 바로 웅진으로 커맨드를 띄워 반격을 준비 했는데
백제의 이완용인 예식이 통수쳐서 5일만에 의자왕을 나당연합군에게 넘겨버렸다
그렇게 백제는 허무하게 무너졌는데 의자왕은 당나라 장안으로 끌려가 당고종과 측천무후의 꾸지람을 듣고 죄를 사면 받았다고 한다
당연히 이유야 위에 보장왕처럼 자기는 적국의 수괴도 용서하는 자비로운 황제다라는걸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쇼였다
그렇게 무죄 방면 된 의자왕이지만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얼마 못가 죽었고 현재도 무덤은 중국 시안 주변에 있다 (근데 옆에 묻힌 새끼가 진숙보 ㅅㅂ)
당연히 백제 유민들은 백제를 되살리기 위해 대대적인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백제 좆맛을 잊지 못한 일본까지 합세해 엄청난 기세로 위에 부흥운동 조무사 안승과는 다르게 (안승은 4개월만에 대장 자리를 두고 검모잠 다투다 살해함)
수백개의 성을 수복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근데 역시 이놈의 헬조선 특유의 DNA인가 그놈의 내분,지도자 자리를 다투면서
자기들끼리 칼부림 부리다 하나로 뭉치지 못했고 이 틈을 신라와 당나라가 비집고 들어왔다
이에 일본은 전국에서 싹싹 모든 병력을 긁어모아 최대 4만으로 추정되는 병력을 파견 했지만
백강전투에서 다 말아먹으면서 일본은 부흥운동에서 강퇴당했고 이후 반도내 백제 유민들도 차례차례 진압 됐다
그리고 이 때 백제 유민들을 진압하겠다고 당에서 대군을 파견 했는데 이 때 사령관이 의자왕의 아들이자 백제의 마지막 왕태자 부여융이다
이미 당에서 사령관으로 부여융을 꽂을때 백제의 국성이였던 부여 씨를 버리고 당고종이 하사한 서씨로 성씨까지 갈아버린 상태였다
근데 태자란 작자가 외세의 장군이 되어 자기 백성을 진압한다? ㄹㅇ 이완용 볼케이노 맛이노 ㅋㅋ
어찌됐든 부여융도 나당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끝나면서 분명 중국으로 쫓겨났을텐데
어떻게 다시 반도로 껴들어와 부여군에서 새끼를 까고 대를 이었는지가 사료 소실로 알기 힘들다
아니면 쫓겨나지 않고 그냥 반도에 남았었을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 부여씨로 성씨를 복구하지 않은 이유도 신라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란 설이 있다 (백제 유민들은 고구려 유민보다 차별을 더 심하게 받음)
그렇게 부여에서 부여 서씨의 시조가 되면서 현재 우리나라 왕가의 후손들 중에 유일하게 직계,적통들이 대를 잇고 있다
백제 왕가를 제외하면 살아남은 반도의 모든 왕가의 후손들은 다 방계의 후손들이다
신라 왕가의 후손 - 경주 김씨
신라는 국성이 3개지만 그 중 경주 김씨만 소개하겠다
이는 경주 김씨 왕조가 586년으로 가장 오래 집권했기 때문 (박씨가 232년, 석씨가 172년)
인구: 180만 (전체 4위)
시조: 김알지
시조인 김알지는 신라 김씨 왕조(경주 김씨)의 시자이자 강릉 김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그런데 김알지는 왕이 아니라 나중에 추존 됐다
이후 13대 임금이였던 미추 이사금이 첫번째 김씨 임금이고 17대 내물 마립간이 김씨 왕조의 기틀을 잡았다고 하는데
워낙 너무 고대라 현재 학계에선 실질적으로 신라의 김씨 왕조를 연 것은 진흥왕으로 보고 있다
일단 시조 김알지가 전설로 여겨지는 이유는 삼국사기에는 탈해 이사금 9년(65년)에
김알지가 경주 서쪽 시림 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신하 호공을 보내 조사하라 일렀는데
숲속 나뭇가지에 황금빛 궤가 걸려 있고 궤에서 빛이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 금궤에서 나온게 김알지로 딱봐도 박혁거세 신화랑 비슷한게 김씨들이 박혁거세 알썰 보고 베껴 만든듯?
원래 고대 신화라는게 다 고게 고거라 서로 영향을 받아서 비슷한 클리셰나 설정이 많다
어쨌든 탈해 이사금은 이 아이를 길렀는데 금궤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을 김(金)이라 했으며
성장하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알지(閼智)라 불렀다고 한다
어찌됐든 현재까지도 경주김씨는 신라의 왕성으로 그 후손들만 180만이라는데...
경주 김씨계에서 분적된 성씨로 김녕 김씨(김해 김씨), 안동 김씨, 상산 김씨, 수원 김씨, 청도 김씨, 원주 김씨, 전주 김씨, 안동 권씨, 수성 최씨 등이 있는데
이 성씨들의 인구를 다 합하면 약 600만 명이 넘는다 ㄷㄷ
거기에 다른 경순왕 이후에 탄생한 강릉 김씨나 의성 김씨 언양 김씨 삼척 김씨 등 까지 다 합치면 그 수가 무려 천만에 달한다...
발해 왕가의 후손 - 대씨와 태씨
인구: 만명 이하
시조: 대중상
중시조: 대야발
딱 보면설명이 좀 이상한게 보일거다
발해를 건국한 사람은 대조영인데 왜 시조나 중시조에 대조영 이름이 없는가? 대중상은 누구고 대야발(어떻게 이름이 야발 ㅋㅋ)은 누군가?
바로 대조영계는 끊겼기 때문이다
발해는 220년간 이어졌는데 100년의 역사가 넘을 때 쯤에 대조영계가 단절 됐다
그래서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계가 왕위를 이어 받았는데 서양 기준이면 이 때 왕조가 바뀐 것인데 우리나라 기준에선 같은 왕조로 취급된다
조선으로 따지면 조선의 중시조 포지션에 있는 선조나 인조가 사실 이성계의 후손이 아니라 이성계 동생의 후손인것과 똑같다
그래서 현재 모든 대씨와 태씨들의 시조는 대중상을 시조로 모시고 있는데 대중상이 바로 대조영,대야발 형제의 친아버지이기 때문
대표적으로 탈북자 출신 국회의원 태영호가 발해 왕가의 후손이다
이 외에도 느그들 주변에 대씨나 태씨가 있다면 걔는 본관 무관하게 조상이 발해의 임금님이였다고 보면 된다
왜냐면 대씬는 크게 밀양,협계,영순 대씨가 있고 태씨는 남원 태씨 등등이 있는데
남북 다 합쳐서 모든 대씨 태씨는 전부 발해 왕가에서 시작 된 애들이다
그리고 발해 왕가의 후손들은 현재 반도내 살아남은 네임드 왕조의 후손들 중에 가장 인구가 적다
다 합쳐도 인구가 만명이 안된다 한다
고려 왕가의 후손 - 개성 왕씨
개성 왕씨
인구: 22,000
시조: 왕건(고려의 태조)
사실상 중시조: 효은태자 동양군
일단 왕씨(王氏)라고 알려져있지만 사실 왕(王)은 성씨가 아니다
왕건 친부의 이름은 왕륭인데 사실 '왕륭'이 아니었는데 고려 창업 후에 왕건이 갖다 붙인것으로 보고 있다
왕륭의 원래 이름은 용건이였는데 이름의 건(建)은 세운다라는 의미로 대놓고 "내가 시조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추존 묘호도 세조다)
당연히 왕건이 임금이 된 뒤 주작으로 만든 이름일 확률이 거의 100%다
일단 원래 이름인 용건에서 용(龍)이 순수 우리나라 이름 같은데 이걸 비슷한 소리를 냈던 한자 용(龍)으로 음차표기 한걸로 보인다
그리고 용과 왕(王)은 발음이 비슷하니 슬쩍 용을 왕으로 다시 음차표기를 한걸로 보인다 그리고 이 왕을 성씨로 삼은 것이다
마침 성씨가 민간에 정착하던게 후삼국시대라 시기상으로도 딱이고 이때부터 그냥 이름 앞 글자 따와서 성으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미 그 전에 선례로 박혁거세가 있는데 박혁거세란 이름은 [밝은누리]라는 우리말을 음차표기+이중설명을 덧붙여 만든 이름이다
정확히는 혁거세가 이름이고 박은 뒤에 혁거세를 확실히 설명하기 위한 단어인데 졸지에 박이 성씨가 돼버렸다
그렇게 애비를 왕씨로 만들었으니 아들인 자기도 당연히 왕씨가 되는건 당연지사
즉 음차표기만 2번을 해서 탄생한 성씨가 개성 왕씨였다
주작질을 해서라도 성씨 만들고 애비 이름 뜯어 고친건 그만큼 왕건의 가계도가 빈약하고 애미가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일단 이 사람의 증조 할배가 누구인지 모른다
원덕대왕이라는 좆간지 나게 왕으로 추존하긴 했으나 역시 기록도 없는 일반 평민으로 추정된다
당장 왕건의 할배는 "작제건: 이라는 인물로 딱보면 알겠지만 왕이나 용이란 발음은 있지도 않다 그 비스무리한 발음도...
대충 전설이나 이런저런 기록을 보면 가장 먼저 계보에 잡히는 인물이 강호경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신천 강씨의 시조이다
편년등록에 따르면 강호경이 고구려계라 적혀있다 별명은 성골장군으로 백두산에서부터 유람을 시작해 송악(개성)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원래 개성 왕씨의 뿌리는 강씨 같이 보이는데 문제는...
편년통록이 여기서부터 구라를 치는데 이후 손보육이라는 사람이 강씨 집안이랑 결혼해서 딸을 낳았는데
이 딸이 당숙종, 당선종이랑 원나잇해서 작제건을 낳았단다 당연히 말도 안되는 개소리다
오죽했으면 원나라 한림학사가 충선왕더러 '님 조상이 당숙종이라는데 이거 존나 말이 안되는거 아님?' 이라고 했는데
충선왕의 반응은 입꾹닫 진짜 한마디도 못했다
그래서 충선왕 옆에 있던 고려 역사가 민지가 대충 둘러 대서 "당숙종이 아니고 사실 당선종임 ㅇㅇㅋㅋ" 라고 했다.
당선종은 원래 당헌종이 절도사 반란 진압하면서 절도사 첩을 뺏고 그 첩과 싱붕이들은 못한 게임을 한판해서 낳은 자식이라
황제랑은 거리가 먼 개좁밥이었고 젊은 시절 존나 싸돌아다녀서 황제가 되기 전 기록이 부실하니
한림학사도 "음.. 당선종이면 그럴 수도 있겠군"하고 넘어가줬다
근데 아무리 싸돌아댕기는거 좋아해도 뜬금없이 수억만리 딴나라가서 싸튀하고 간다는 것도 말이 안되는건 매한가지다
더구나 고려는 송과 국경을 접한적이 한번도 없다 사신 외에 송나라 사람이 고려로 올려면 무조건 배타고 와야했다
즉 강호경 얘기도 구라고 당선종 얘기도 구라로 빈약한 가문이 부끄러웠던 왕건에 의해 무슨 성씨라도 있던 집안처럼 세탁질 된 것이다
당장 할애비 작제건이라는 저 이름도 가늠이 안가는건 매한가지다... 작씨? 그런게 있긴하나..
아니 작이 성씨가 맞긴하냐.. ㅋㅋ 이것도 그냥 순수 고유어 이름 음차표기 아닌가 ㅋㅋ... 그냥 모든게 의문 투성이다
즉 그냥 왕건과 딱 그 애비까지만 특정이 가능한 수준이다
근데 할애비조차 누군지 모를 정도로 빈약한 가문이면 뭐 어떠냐 결국 500년간 반도를 지배한 왕가인데
참고로 지금 살아남은 개성 왕씨의 80~90%는 태조 왕건과 유금필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효은태자의 후손들이다
두번째가 현종의 넷째아들 평양공의 후손인데 효은태자(흔히 동양군파)가 압도적이라 큰 의미는 없긴하다
조선,대한제국 황실 - 전주 이씨
전주 이씨
인구: 400~500만 (전체 3위)
시조: 이한
왕조의 시조: 태조 이성계
조선이 세워지기 전까진 그냥 민간에 "이런 성씨도 있구나" 하는 수준이였다가
조선이 세워지고 나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확확 불더니 현재는 4번째로 많은 성씨가 됐다
일단 크게 3분파가 있는데 전부 태종-세종대왕계 후손들이다
효령대군파-양녕대군파-광평대군파 순으로 현재 전주이씨들 중 가장 많은건 효령대군파다
두번째가 양녕대군 세번째가 광편대군파인데
대표적으로 이승만이 있는데 전주이씨 분파 중 2번째로 인구가 많은 양녕대군파 16대손이다
그래서 이를 근거로 미국에서 지낼때 자신을 프린스 리 라고 소개하고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왕실 후손만 다루니 전주이씨 400~500만은 패쓰하고 대한제국 황실에 관해서만 쓰겠다
영친왕
“나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로 신기하게도 순종의 이복 동생이지만 황태제가 아니라 황태자다
이는 왕조 초기 이방원이 정종의 왕세제가 아니라 왕세자로 책봉 받은것과 똑같다
당시 친모 순헌황귀비 엄씨가 궁궐에서의 영향력이 컸던 탓인지 태어나자마자 귀하게 자랐다고 한다 (내명부 서열 1위였다)
이 덕분인지 다음 제위 계승 1순위였던 이복형 의친왕을 제치고 황태자로 책봉 됐다
애초에 의친왕은 아니다 의친왕은 밑에 서술 참조
이후 영친왕은 이토 히로부미한테 끌려가서 천황의 친척 이방자랑 결혼했다 (이방자 언니가 히로히토의 마누라다)
이방자의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 에 나온 얘기인데 일제가 영친왕을 부부를 유럽으로 여행을 보냈는데
이때 임시정부의 김구 등은 영친왕을 태운 배가 상하이에 정박하면 영친왕을 망명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었다고 한다
근데 이를 안 일제가 군함을 파견해 영친왕 부부를 함내에 머물게 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고 한다
또한 헤이그에서는 현지에 사는 한국인이
“고종황제께서 한일보호조약을 무효로 만들고자 밀사를 헤이그에 보내셨던 사실을 잊지 않으셨다면
신문기자에게 ‘나는 일본 황족이 아니고 한국의 황태자’라는 것을 명확하게 선언하소서”라고
권유하는 글을 전달하려 했지만 수행원의 제지로 실패했다고 한다
이렇듯 당시 순종이 죽고 사실상 당시 민중들에겐 실질적인 후계자로 취급 받았다
<아들 이구와 아내 줄리아>
해방후엔 이승만이 황족들의 귀국을 불허하고 황실의 재산 상당부분을 국고로 귀속시켰다
그래서 6.25 전쟁 이후 황실의 사유 재산이라곤 사동궁, 창덕궁 낙선재 등이 전부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친왕은 "나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니다" 라며 아내 이방자에게 괴로움을 호소 했었다고 한다
자녀로는 이구가 있는데 우크라이나계 미국 여성과 줄리아와 결혼했다가
사업 실패 후유증으로 이혼했고 2006년에 죽으면서 이로써 적통은 모두 끊기게 된다
의친왕
“차라리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의 황족이 되길 원치 않는다.”
의친왕 이강은 태어날 때부터 불우했다 순종, 영친왕 이은, 덕혜옹주는 출생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의친왕은 기록조차 없다
상궁 김명길에 의하면 이강의 어머니 귀인 장씨는 “평양기생과 대전별감 사이에 태어난 지체 낮은 궁인”이라고 한다
아마 의친왕이 나이가 더 많음에도 영친왕에게 후계자 자리를 뺏긴것도 출신 문제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증거는 없고 내 개인생각임)
의친왕은 한마디로 일탈남이다 1898년 일시 미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주미일본공사에게 600원을 빌렸고
1900~1905년 미국 유학 시절에는 미국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심지어는 차에 타서 창문을 살짝 내리고 길거리를 오가는 여인들을 감상 했다고 한다
역시 굉장한 정력가라 여러 명의 소실 사이에서 수많은 자녀를 낳았다. 공식적으로 호적에 올린 자녀만 12남 9녀고
비공식적인 자녀까지 합치면 28명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막내가 태어날때 의친왕은 76세였다 ㄷㄷ)
이런 ‘대량생산’은 결실을 맺었다. 왜냐 오늘날 까지 살아남은 황실의 후손들은 모두 의친왕의 자식들이기 때문
또한 의친왕 이강은 가장 항일정신이 투철한 황족이였다.
조선총독부 경무총감은
“(이강) 공은 즐겨 시정잡배와 왕래하였는데, 특히 금춘 독립운동의 수모 손병희와는 몰래 회합 모의하였고
손병희가 체포되자 공은 매우 낭패한 빛이 있었다고 한다”고 보고했다(1919년 11월 24일)
그리고 실제로도 상해 임시정부로 가서 독립운동에 가담하기 위해
1919년 11월 11일 전협 등과 만주로 탈출하려 했으나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상해임시정부에게 의친왕은 이렇게 말했었다고 한다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의 황족이 되길 원치 않는다 이를 한인들에게 표하고 아울러 내 일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치길 원한다"
당연히 한국 황실이 일본황실의 일원으로써 화합을 강조해온 일제에겐 고종의 망명정부 계획 이후 가장 치명적인 사건이였다
그래서 의친왕이 대동단원들이 권총으로 위협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끌려갔던 것이라고 발표했고
의친왕은 50여 일간 녹천정(남산 총독관저)에 연금되어 있다가 석방 돼
이후 한반도 내에서 자유여행 권한도 박탈 당하며 일제의 감시 속에서 살게 된다
모모야마 켄이치(이건)
“나는 아버지(의친왕)와의 인연을 끊고 싶다.”
사진속 남자는 위에 의친왕의 장남이자 아예 탈조선해 일본인이 되어버린 장남 이건이다
일본 이름은 모모야마 켄이치인데 성씨 모모야마는 다이쇼 천황이 묻힌 곳이다
한국 황족이 일본 천황과 관련 된 성씨를 쓴다는게 무슨 의미인지는....말 안해도 알테니 따로 설명은 안하겠다
실제로 이건은 아버지나 동생 이우처럼 반일의식이 전혀 없었고
아버지 의친왕이 “그렇게 일본이 좋으면 일본에 가서 살아라” 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근데 진짜로 스시녀 와이프한테 초강력 통수까지 처맞았으면서 끝내 일본으로 귀화해버린다 (자녀가 친자식이 아니였다고 한다 당연히 이혼함)
그리고 일본으로 귀화하던 그 해에 공교롭게도 아버지 의친왕도 죽었다
이에 이건은 나중에 지인들에게 “일본 황실의 태도에는 따뜻한 맛이 있는데 한국 황실에는 냉담함만이 있다” 라고 뒷담화 까지 한다
한술 더 떠 왜 일본으로 귀화 했냐는 질문에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고 싶어서” 라고 밝혔다
귀화 후엔 생활고 때문에 팥죽장사,산양 젖 장사, 과자가게, 막노동(!)까지 했었다고 한다 실제로 영친왕 부부가 한번 방문 했었다고 한다
문제는 새 스시녀 와이프한테 2차 통수 맞아 아내가 화류계에 발을 들여 이혼하고 말년에는 자녀도 없이 쓸쓸히 보내다 1991년에 죽었다
이에 한 교수가 이건을 평가하기를
이건 공은 당시는 깨닫지 못했으나, 1945년 일본 패전 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들(왕·공족)의 본질이
일본 황실의 식객이며, 천황제 기구의 부록이고, 인격이 없는 괴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노라
쉽게 말해 일제가 한국 황실을 받아준건 좋아서가 아니라 한국인들의 독립의식을 억누르기 위한 선전용 도구로 쓰기 위함이였는데
2차 대전이 끝나고 해방 된 남의나라 황족을 이젠 굳이 일본이 챙겨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년에 돼서야 본질을 깨닫고 비참하게 살다 갔다고 평가했다
이우
“나는 일본의 것이라면 병적으로 싫다”
위에 이건의 친동생이자 의친왕의 차남으로 얼짱 왕자로 유명한 이우다
현재는 영친왕계가 단절되고 이건계가 일본으로 귀화를 해버려서 이우계 후손들이 가장 정통성이 강하다
아버지 의친왕처럼 항일의식과 독립의식이 뚜렷해서 일본의 것이라면 병적으로 싫다라고 까지 말했으며
그의 가정교사였던 가네코는
“당시 이우 공은 일본의 모든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어 일본 육군에서도 두려워했다”는 증언을 남겼다
위에 형하고는 완전 정반대인셈 그래서인지 의친왕은 이건에게 쌀쌀 맞았어도
이우는 굉장히 아껴서 한국에 도착하면 직접 기차역까지 마중 나갔었다
이러한 투철한 반일의식은 실천으로 이어졌다
영친왕 이은이나 덕혜옹주와 달리 일본 황족·화족(귀족)과 결혼하기를 거부하고 한국 여인과 결혼을 강행한 것이다
당시 조선 공족의 결혼은 1926년 제정된 〈왕공가궤범〉에 따라 천황의 칙허를 얻도록 되어 있었다
근데 이우는 이를 무시하고 멋대로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와 약혼을 해버렸다
이왕직 장관 한창수와 일본 궁내성에서도 반대했지만 일본 정계 요로에 지인이 많았던 박영효가 나서서 이를 무마시켰다
결국 1935년 5월 이우는 박찬주와의 결혼에 성공했다
당시 일제는 한국 황족들을 싸그리 일본 황족과 강제로 결혼시켜 명맥을 끊고 일본 통치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 선전할려 했었는데
이우만이 유일하게 저항했고 끝내 황실의 자존심을 지킨 것이다.
그 결과 현재는 세간에 알려진 꽃미남 왕자 이미지까지 합쳐져 가장 이미지가 좋은 황손이다
하지만 이렇다할 독립운동까진 하지 못했다 일본군에 강제로 입대하며 사실상 평생을 일제의 감시망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친왕의 자녀들은 많지만 사실상 적자로 인정받은 자녀는 이건과 이우 두명 밖에 없다 (그래서 다른 그 외 다른 후손들은 안쓰겠다)
이 사람이 위에 이우와 박찬주의 맏아들 이청으로 (차남은 미국에서 유학중에 뺑소니 사고로 죽었다)
큰아버지 이건이 일본인 모모야마 켄이치가 됐기 때문에 현재는 이우의 맏아들인 이청이 혈통상으론 황제에 가까운 황손이다
게다가 땅 내노라고 나라 상대로 소송하는 기타 황족 후손들과 달리 오히려 운현궁은 박찬주 여사가
필사적으로 지킨 사유재산이였는데 운현궁과 흥선대원군 무덤 주변 땅까지 싸그리 다 나라에 기부하며
다른 황족들에게 모범이 되는 개념찬 모습까지 보였다
이청의 정통성은 당대에도 인정을 받아 이승만이 자신의 양자로 달라고 까지 했었다
근데 어머니 박찬주가 "어딜 방계후손(이승만은 양녕대군 16대손) 따위가 직계를 노리느냐" 라고 반발해서 실패했다
황실만 보면 PTSD오는 이승만까지 탐냈다는건 이청의 혈통이 어느정도인지 어느정도인지 감이 오지 않노?
현재는 나이도 많아(84세) 병석에 누웠다고 한다 슬하에는 아들이 있다고 하며
이청이 죽으면 그 아들이 가장 강한 정통성이 강한 황손이 된다
더구나 이젠 형인 이건이 일본으로 런 해버렸으니 이우계가 황위에 가장 가까워졌다
위에 사진 속 꼬마 남자애도 이 아재다
즉 적장자 승계 원칙으로만 따진다면 그럴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황실이 복원 될 시
이우의 맏아들 이 아재가 대한제국의 3대 황제가 된다
이상으로 후손들 더 있지만 손가락 아파서 글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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