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야, 저 선배가 이혁 황태자래.”
“와.. 듣던대로네?”
보라색 후드티를 입고 운동장을 누비던 혁은 자신에게 쏠린 시선은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후드티를 훌렁 벗어 한 손에 대충 쥐고는 걸어 나왔다.
물론 항상 그렇듯 이너웨어로 긴팔을 입고 있었지만, 주변은 술렁했다,
그 위로 드러나는 각 잡힌 근육들과 하얀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그를 더 매혹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에라이, 옷은 왜 벗어던져?”
찰싹, 써니의 매서운 손이 그의 팔에 닿아 경쾌한 마찰음이 울려퍼졌다.
“아씨, 오써니!”
“나 연습 늦었어. 네가 이거 가져다달라고 징징거리는 통에 말이야.”
손에 든 쇼핑백을 달랑 흔들어 보이더니 무심하게 툭 건내고 성큼성큼 앞서갔다.
혁은 써니의 퉁명스러운 말과는 다르게 책과 함께 들어있는 믹스커피 묶음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나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챙겼을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귀엽다고 생각하는 찰나에 앞서가던 써니가 헐레벌떡 다가왔다.
“아오, 거기에 내 커피 줘. 깜빡 잊었네.”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혁은 벙찐 채 떨떠름하게 커피 묶음을 내밀었다.
낚아채듯 받은 후 뛰어가려는 써니에게 그는 서둘러 한마디 덧붙였다.
“오늘은 언제 끝나?”
“때 되면 끝나겠지. 공연 준비 막바지라 바쁘네. 나도 몰라. 간다!”
그렇게 사라지는 써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터덜터덜 곁에 대기하던 차로 몸을 우겨넣었다.
축 처진 그의 어깨만큼이나 차안의 분위기는 처졌고, 한참동안 흐르던 정적을 깬 것은 한팀장이었다.
“전하, 오늘도 써니양과 잘 안풀리셨나봅니다. 제 생각에는..”
이어질 말이 부정적일 것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한팀장의 말을 가로챘다.
“언젠가 써니도 제 마음을 알아 줄 거에요.”
“그게 벌써 몇 년째입니까.. 태자 전하 눈에 써니양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만큼,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마찬가지로 보일겁니다. 마음을 표현하세요.”
침묵으로 일관하는 혁을 백미러를 통해 흘끗 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같이 공연한다는 그 만두.. 라는 친구도 있고 말이지요.”
순간 혁의 눈썹이 꿈틀했다.
정만두. 생각만 해도 화가 들끓었다. 연기랍시고 온갖 스킨십에 입맞춤까지 하면서, 심지어 대본 연구라는 핑계로 둘이 카페나 술집에 간 것도 수번이다.
벌써 세 작품째 같이 하는 둘을 보며 혹시라도 만두가 써니를 채갈까 전전긍긍하며 잠들지 못한 밤은 두 손으로 꼽을 수도 없을 정도이다.
“아.. 그리고.. 폐하께서 오늘 궁에 도착하는대로 황제전에 들라고.. 하셨습니다.”
한팁장은 한참을 주저하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말 사이의 공백들은 그의 괜시리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기 충분했다.
만두생각에 초조해져 무릎을 탁탁 두들기던 혁의 손가락은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멎었다.
입술을 살짝 깨물며 알겠다고 대답하는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얼핏 스쳐지나갔다.
...
황제전에서는 신음소리 또는 울음소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고 무언가가 허공을 가르는, 그리고 연이어 나는 둔탁한 소리들로만 가득찼다.
간간히 들려오는 황제의 고함소리에 대기하던 한팀장은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잠시후 나온 혁은 멍하니 침대에 누워 허공을 바라보며 술을 들이켰다.
이런 날일수록 떠오르는 써니 생각에 한참을 휴대폰을 메만지다가 나갈채비를 했다.
만약 보고싶다고 전화했다가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그냥 바로 찾아가기로 했다.
따라나서려는 경호대에게 저리가라는 듯 휘휘 손짓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혼자 갈 것이니 따라 올 필요없다."
...
"다들 수고했어요. 내일봐요!!"
"누나, 집에가요? 나랑 술 한잔해요."
써니와 만두가 꽤나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연습실을 나서고 있을때였다.
그녀의 시야에 가죽자켓을 입고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드는 남자가 보였다.
제 옆의 남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눈빛까지, 이혁이었다.
"술은 다음에. 오늘은 선약이 있었네?"
아쉬워하는 만두를 뒤로하고 평소처럼 장난스레 말을 걸며 혁에게 다가갔다.
"오- 황태자전하께서 이 밤에 무슨 일로?"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어두운 낯빛이 보였고, 얼굴에 어설프게 붙인 밴드가, 작은 생채기들이 보였다.
"무슨 일 있어?"
"그냥. 보고.. 아니 심심해서."
"얼굴이 이게 뭐야. 너 봐줄거라고는 얼굴 밖에 없는데."
"오늘 검술 연습이 있어서. 경호대들 실력이 많이 늘었더라고?"
혁은 그녀가 더 캐묻기 전에 서둘러 한마디 내뱉었다.
"술 먹을래? 꼬막무침에 소주. 어때?"
"네가 쏘는거야? 그럼 가고."
뭔가 석연찮은 대답이었지만 혁이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느낀 써니는 모르는척 넘어가주었다.
검술 연습에 다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제가 본 것만 벌써 몇년인데..
항상 똑같은 레파토리지만 그가 숨기고 싶어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 묻지는 않았다.
자신이 해결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쯤은 어렴풋이 짐작했기에 걱정되는 마음을 숨기고 그저 곁에 있어 줄 뿐이었다.
"으- 근데 넌 이미 한잔 한 것 같은데?"
코 끝에 알싸하게 퍼지는 알코올 향에 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뭐 어때?"
혁은 으쓱하고는 자리에 앉아 주문을 했다.
한잔 두잔 주고 받으며 테이블 옆에 술병 하나 둘씩 늘어갔다.
써니는 취기가 오르는 듯 얼굴이 붉어졌고, 혁은 살짝 풀어진 눈동자로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왜 보냐아?"
혁은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가 이내 마른세수를 하며 다시 써니와 눈을 맞췄다.
"좋아해. 심심해서가 아니라 네가 보고싶어서 온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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