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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친일마녀사냥 9 - 金相浹 총장의 現代史 요약

운영자 2019.04.01 15:59:41
조회 144 추천 0 댓글 0
친일마녀사냥


9


金相浹 총장의 現代史 요약 


1973년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김상협(金相浹) 총장은 학생들의 우상이었다. 정치학자이자 사상가인 그는 자유당 시절부터 장준하(張俊河) 등과 함께 잡지 <사상계>나 언론을 통해 정권을 비판했었다. 그는 반공의 바람이 냉혹했던 그 시절 ‘모택동 사상’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운동권들은 거의 다 그의 모택동 사상을 읽었다.

그는 어느 편을 초월한 지도자라고 인식했었다. 해방 후 김상협은 고려대학교의 정치학 교수로 시작했었다. 만 26세의 젊음이 넘치는 소장(少壯)교수인 김상협은 좌우의 극심한 대립이 벌어지던 그 시절 이렇게 외쳤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의 全 구성원이 천사라는 환상 속에서 시장도 없고 화폐도 없고 자유경쟁이 철폐되는 사회계획경제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회가 되면 일하는 사람은 없고 철학자만 남게 됩니다. 자본주의의 원죄는 자유경쟁이 아니라 독점경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자유경쟁의 원죄론은 무죄선고를 받아야 합니다.” 

좌익의 흐름이 사회 저변을 장악한 그 시절 그의 주장은 파격이었다. 그는 이렇게 그들에게 반박했다. 

“집단이 곧 전체인 절대적 동질사회라면 만장일치의 단일의사만 존재할 뿐 굳이 다수결 원칙을 적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과 불의 관계같이 첨예한 대결상황만 존재하는 절대적 이질사회라면 폭력투쟁만 있을 뿐 토론이나 타협의 소지는 전무합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정치는 과연 가능할 것인가. 민주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적 동질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상대적 동질사회란 무엇인가? 다소의 대립과 분열은 있으되 최후에는 통일과 결합에 이를 수 있는 사회를 말합니다. 자유사회는 기계적 평등이 아니라 이성적 평등을 지향하며 평등과 동시에 자유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김상협 교수는 남북 간 전면전을 정확히 예측했다. 1948년 말까지 만주전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 모택동은 1949년 본격적으로 남하(南下)작전을 시작했다. 소위 인민해방군은 1월에 천진, 북경을 점령하고 5월에는 상해를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모택동의 승리와 장개석의 패배는 기정사실화됐다. 김상협 교수는 임표 지휘하의 팔로군에 편입된 10만의 조선군이 북한으로 귀환한다면, 그 예봉이 남쪽으로 돌려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 무렵 미국은 북한의 계속되는 전력증강에도 불구하고 국군의 절대적 열세를 그대로 방치했다. 

뿐만 아니라 정부수립을 전후한 무렵 진주군의 중무장을 빼나간 데 이어 소수의 군사고문단만 남겨둔 채 소련군과 보조를 맞춘다는 구실로 전면 철군(撤軍)을 단행했다. 남북한 간의 군사적 불균형이 초래됐다. 김일성은 인민해방의 적절한 시기라고 볼 것이라고 예측했다. 모택동도 중국 해방의 여파가 한국에도 뻗어나가기를 희망한다고 보았다. 혁명과 전쟁을 통해 제국주의를 몰아내는 게 모택동 사상이나 소련 공산주의의 본질인 것을 그는 간파하고 있었다. 미국 역시 교두보인 한국을 포기하지 않으리라고 그는 확신했다. 

김상협 교수의 예언과 세 달 차이는 있었지만 1950년 6월에 북한군의 남침이 일어났다. 전쟁 후 그는 강단에서 이렇게 외쳤다. 

“공산주의가 동방의 유령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시아 제국의 절대빈곤 때문입니다. 아시아의 공산주의에 대한 동경은 빈곤추방 염원의 극단적인 표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산주의의 유령으로부터 아시아를 구출하는 길은 무엇인가? 미국을 비롯한 서방진영은 진실로 후진국의 빈곤이 추방될 수 있도록 경제가 발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조방식부터 전환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이 취해 온 방식은 원조 대상국을 자국(自國)의 잉여물자 처분장소로밖에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경우에 따라서 감사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무상원조를 받는 우리도 태도를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무상원조라고 함부로 낭비하거나 부정 유출해서 특정인의 배를 불리지 말고 그 원조물자들을 알뜰히 활용하여 경제적 실력배양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어둡고 괴로운 과거만을 짊어지고 살아온 국민에게 좌우익, 진보와 보수 중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보수를 하라고 강요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지도 않은 재산을 지키라는 것과 다름없는 말입니다. 중산층의 자유시민을 늘려야 합니다. 민주주의란 결국 소유권 있는 중산층의 산물입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들이 망하리라고 예언한 서구제국은 공전(空前)의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프롤레타리아를 끌어올려 부르주아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평생 정치학자로서 역사를 돌아보고 국민들이 나아갈 이정표를 제시하는 선각자였다.

1993년 5월20일 아침 7시경이다. 그의 수명이 이제 채 2년도 남지 않았을 시점이다. 김상협 교수는 여의도 63빌딩 55층 티파니 룸에서 여야 정치인들을 앞에 놓고 이렇게 가르치고 있었다.

“해방 이후 50년 가까운 세월 대한민국호는 밖으로는 망망대해의 거친 파도들과 싸우고 안에서는 승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반목과 혼란을 이겨나가면서 희망의 푸른 동산에 상륙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동안 침몰될 위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해방 후 극심한 좌우익의 분열대립으로 대한민국의 탄생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6·25전쟁으로 대한민국호는 침몰 직전이었습니다. 4·19 이후의 대혼란 시절 역시 파선(破船)의 우려가 있었고, 1987년 이후의 노사분규, 학원소요와 민주화 투쟁 역시 총체적 난국이었습니다. 

우리 역사를 미시적이고 단기적으로 보면 실패의 연속이지만 거시적이고 장기적으로 바라보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동안 배를 이끌어온 선장이 어땠는지를 보겠습니다. 해방 후 김구(金九) 선생은 우리가 기다리고 또 기다리더라도 북측과 교섭을 해서 한민족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운형(呂運亨) 선생 같은 분도 좌경화되더라도 한민족이 절대 갈라져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두 분은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두 분은 세계가 둘로 갈라져 오랫동안 대결할 것이라는 사실과 또 먼 훗날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간 싸움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그 무렵 분단된 독일 역시 중립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독의 아데나워 총리는 중립이 아닌 자유민주주의 편에 가담하고 시장경제를 선택해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어냈습니다. 일본의 요시다 총리 역시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친미(親美)자본주의 노선을 택해 일본을 경제 강대국으로 재건했습니다. 

이승만(李承晩) 박사는 미래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요. 이승만 박사는 중립은 환상이라고 하면서 국내 지도자들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 주도의 자유민주 진영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 당시는 이쪽인가 저쪽인가 중립인가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었습니다. 

반면 동구권 국가들은 소련 쪽 사회주의를 선택한 예이기도 합니다. 제가 헝가리를 방문했을 때 그곳의 지도자들은 대한민국이 처음에 줄서기를 제대로 잘했다면서 이승만 박사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칭찬하는 걸 봤습니다. 그때 우리가 잘못 선택을 했더라면 동구권이나 소련처럼 허송세월을 했을 것입니다. 

6·25 전쟁은 신생(新生) 대한민국 침몰의 위기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 유엔의 군사적 원조를 재빨리 받아냈습니다. 전쟁 중 미국 대통령을 능수능란하게 조종해 나갔습니다. 미국이 휴전회담을 진행하자 북한 출신 반공포로들을 독단적으로 석방해 버리면서 미국을 압박해 한미(韓美) 상호 방위조약을 받아냈고, 또 막대한 전후(戰後) 복구 경제 원조를 약속받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비상한 현실 판단이고 즉각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물론 잘못도 있습니다. 부정부패가 있었고 탐관오리의 발호가 있었습니다. 부정선거로 일어난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85세의 노령으로 자진하야(下野)해서 하와이에서 90세로 별세했습니다. 물러가라고 하니까 순순히 물러갔습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의 은인(恩人)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다음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 대한 평가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과오가 많았습니다. 5·16 군사 쿠데타는 좀 심했습니다. 순수하고 심약한 문민(文民) 정치지도자 장면(張勉) 총리를 하룻밤 사이에 축출한 무법자입니다. 군에 원대 복귀한다는 연막을 치고 공화당을 사전조직하고 야당탄압을 하면서 사실상 일당(一黨)정치를 한 기만정략가입니다. 그것은 사술(詐術)이었습니다. 

유신으로 의회정치를 없앤 것도 심했습니다. 장기집권을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영남 떼부자’, ‘호남 떼거지’란 말이 나올 정도로 영남 편중인사, 영남 편중개발을 한 망국적인 지역반목을 만든 민족분열주의자입니다. 마지막은 부하의 총탄에 의해 술자리에서 살해당한 것도 국제적인 망신인 독재자의 말로였습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런 자기 잘못을 모두 알고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서 열심히 경제대통령 노릇을 했습니다. 한일(韓日)국교정상화를 통해 받아낸 배상금으로 각종 공업화 정책을 착수해서 울산공업단지나 포철을 건설하는 좋은 성과를 올렸습니다.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고 산림녹화를 하고 고속도로를 만들고 중동(中東) 건설 진출로 막대한 외화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중국의 최고실력자인 등소평도 박정희식 개발독재를 그대로 따르고, 일본 언론도 박정희식 개발독재를 메이지(明治)유신 스타일이라고 하면서 극찬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빈곤의 추방과 조국의 근대화를 목표로 내세우고 국가개발의 신기원을 이루었으니 우리나라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말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박 대통령 통치시대에 우리 국민들은 고통도 많이 받았고 희생도 적지 않게 치렀지만 그래도 우리는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고 한강의 기적도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됐습니다. 우리의 국제적 위상이 그 때문에 한껏 높아진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는 대한민국이 앞으로 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국제적 환경 속에서 한국이 가야 할 좌표는 어떤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을 둘러싼 미국, 소련, 중공은 우리의 현상고착을 바라고 있습니다. 통일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쪽은 남쪽대로, 북쪽은 북쪽대로 공산주의라는 성역(聖域)을 가지고 있어서 피차 이를 자진포기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반도가 중립화 통일을 할 수 있을까요? 중립이란 국제적인 중립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혼자 중립을 선언해 봤자 주위의 이해관계가 있는 국가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국제적 환경 속에서 우리가 전진해야 하는 광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복지사회라는 광장입니다. 

저는 통일의 개념을 일대 전환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경쟁을 벌이면서 복지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남북한도 이 새로운 경쟁을 치열하게 벌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통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북한보다 우리가 앞서 그 광장에 도착해 기다리는 것이 통일의 첩경이지 무슨 교묘한 술책이나 요행에 의해 통일이 성취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의문이 제시될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상극적인 경제 체제인데 인류공통의 복지사회라는 광장에서 만난다는 게 그렇게 간단하게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고. 나는 미래의 체제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양 체제가 단순히 혼합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해체되어 각자 새로운 모습으로 참여하는 새로운 체제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양 체제가 새로운 창조의 방향으로 발산되는 상태를 그려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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