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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시절의 은밀한 범죄

운영자 2019.09.23 17:21:38
조회 117 추천 0 댓글 0
이따금씩 시간의 저편 광막한 들판을 긴 그림자를 끌며 걸어가던 나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빛바랜 검은 교복을 입은 소년이 독서실 구석 창가에서 양은으로 만든 둥근 반합에 담긴 반쯤 남은 찬밥과 작은 병에 담긴 쉰 김치로 저녁을 먹는다. 점심때 반을 먹고 남긴 밥이었다. 밥을 먹고는 잠시 깨진 유리창 사이로 저물어 가는 노을 진 조각하늘을 본다. 전파상 스피커에서 울리는 가수 양희은의 ‘아침이슬’이라는 노래가 까까머리 소년의 가슴을 수채화 물감 같이 부드럽게 물들이고 있었다. 법과대학에 가기 위해서 나는 공부하고 있었다. 눈이 부슬부슬 내리던 십이월의 예비고사 시험장에서였다. 예비고사를 통과해야만 대학의 본고사를 치를 자격이 있었다. 나는 시험장 뒤에서 서너번 째 쯤 앉아 있었다. 컨닝을 막기 위해 여러 학교 학생들을 뒤섞어 놓은 수험장이었다. 바로 뒤에 앉은 학생은 변두리에 있는 공업고등학교의 뱃지를 달고 있었다. 아직 시험을 치르려면 이십분쯤 남아 있을 때였다. 뒷자리의 학생이 나보고 얘기할 게 있으니까 잠깐 복도로 나가자고 했다. 무심코 그를 따라 복도로 나갔다.

“우리 엄마는 내가 대학에 가는 게 소원이야. 우리 집은 아버지도 없고 가난해. 나는 정말 실력도 없어. 너는 수재들이 다니는 경기고등학교니까 내가 예비고사만이라도 통과할 수 있도록 한번 도와줄 수 없을까?”

당시 나는 그렇게 간절한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간절함에 나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게 잘못인지도 모르고 인정에 끌려 어떻게 하면 ‘완전범죄’를 할까 순간 궁리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시험이 시작하고 15분쯤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기다려. 내가 답을 써야 하니까. 그 다음부터 내 등어리에 문제번호를 숫자로 써. 그러면 내가 답을 알려줄게. 네 개중에서 하나 답을 고르는 거니까 왼손을 왼쪽 책상 모서리에 대면 답은 1번이야 오른손을 책상 오른쪽 모서리에 자연스럽게 놓으면 답은 2번 왼발을 약간 옮기면 답이 3번 오른발을 조금 이동하면 답은 4번이야. 그런 식으로 하면 시험관이 전혀 눈치 챌 수가 없을 것 같아. 더러 필요하면 왼쪽귀를 만진다던지 오른쪽 뺨에 턱을 댄다든지 하여튼 그렇게 답을 알도록 전해줄게” 

“알았어, 고마워.”

첫 시간부터 그렇게 했다. 시험관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마지막 종이 울리고 시험장을 빠져나올 때였다. 오전에 내리던 싸라기눈이 함박눈으로 변해 세상을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운동장도 근처의 집도 도로도 눈이 쌓이고 있었다.

“저, 잠깐만”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 뒷자리에 앉았던 그 친구였다. 

“왜?”

내가 되물었다.

“나 도저히 이대로는 보낼 수 없어.”

그의 온 몸에서 감사의 기운이 퍼져나오는 것 같았다.

“됐어, 괜찮아”

“그게 아니야, 내 말 하나만 들어줘.”

그가 그렇게 말하면서 나의 옷소매를 강제로 끌면서 학교 앞 문방구 쪽으로 데리고 갔다. 문방구 앞 진열대에는 당시 유행하던 ‘파이로트 만년필’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내가 갈 까봐 옷소매를 잡고 있으면서 그가 문방구 주인에게 외쳤다.

“아저씨, 이거 얼른 주세요.”

그가 만년필을 받아 내게 주면서 애원했다.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야. 제발 받아줘.”

나는 그가 주는 만년필을 거절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십 칠 년이 흘렀다. 법과대학에 들어간 나는 그게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죄’가 되는 걸 뒤늦게 알았다. 죄의식 없이 잘 모르고 한 행위였다. 평생을 변호사를 하면서 살아온 지금도 죄인을 만나면 그 죄보다는 그의 속사정과 인간이 더 강하게 보일 때가 많다. 죄를 졌어도 참회하는 인간이면 그런 사람이 교만한 사람보다 훨씬 좋다. 잘난 사람보다는 죄인들에게 다가간 예수님을 보고 위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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