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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친일마녀사냥 135 - 徐淳泳 재판장의 고민

운영자 2019.11.25 11:14:17
조회 78 추천 0 댓글 0
친일마녀사냥


135


徐淳泳 재판장의 고민


나는 법조원로인 김이조 변호사를 통해 서순영(徐淳泳) 판사를 추적했다. 일제시대 교사를 했던 김이조 변호사는 해방 후 판사를 한 강직한 법조 원로였다. 그는 서순영 판사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1900년 거제도에서 출생한 서순영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서울의 적선동에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고 법률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약한 사람을 돕는 인권변호사로 알려졌다. 해방정국은 그에게 반민특위의 재판장을 맡겼다. 노덕술 같은 친일(親日) 거물들에게 준엄한 철퇴를 가했다. 그는 김병로(金炳魯) 대법원장과 여러 번 의견충돌이 있었다. 그는 법관이 여론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서순영 판사의 내면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다. 교장선생님이었던 그의 아들 서주성 씨의 연락처를 수소문했다.

지하철 강남역 앞에 하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서주성 씨를 찾느라고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도로에 놓여 있는 벤치에 한 노인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서순영 판사의 아들이었다. 검버섯이 드문드문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 서주성 선생이시죠?”

“그렇습니다.”

노인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우리는 근처의 커피숍에 들어가 마주 앉았다.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는 내게 빛바랜 낡은 책 두 권을 내놓으면서 말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만들어진 문집(文集)입니다. 아버님이 평생 쓰신 시(詩)와 글들을 한번 보십시오. 아버님은 강직한 분입니다. 인재가 귀하던 그 시절 여론에 편승하면 출세가 보장되던 시절이었죠. 그런데도 아버님은 시대상황과 여론을 거슬러가면서 소신대로 판결을 한 분이에요. 출세주의자라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아버님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부산에서 장기 집권을 위하여 정치파동을 일으켰을 때 거기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바른 소리를 하다가 법관직을 그만두셨습니다. 부산에서 다시 변호사 사무실을 여신 후 독재를 반대하는 글들을 칼럼으로 쓰시기도 했죠. 

아버님은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거제에서 출마하셨어요. 아버님을 지지하는 표들이 담긴 투표함이 밭에 묻힌 게 발견되기도 했죠. 50대 중반에 아버님은 변호사도 완전히 그만두시고 나머지 세월을 시와 서도(書道)로 보내다 돌아가신 분입니다. 아버님이 정권의 영향을 받아 잘못된 판결을 했다는 건 자식이지만 전혀 납득할 수 없습니다.”

“혹시 아버님 생전에 반민특위 재판장 할 시절의 소감에 대해 하시던 말씀은 없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아버님은 3·1독립선언에 서명한 최린(崔麟) 씨의 반민특위 재판장이기도 하셨죠. 아버님이 후에 함께 밥을 먹으면서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네요. 다른 사람들은 대개 구차한 변명에 급급하고 비굴한데 대조적으로 최린 씨는 당당하더라는 겁니다. 자신의 변절행위를 정면으로 시인하고 속죄한다고 했다는 겁니다. 

재판장과 피고인으로 대했지만 최린의 그 의연함과 참회하는 태도 그리고 식견과 인품을 보면서 속으로는 마음이 숙연해졌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오히려 법정에서 몸이 불편한 최린 씨에게 의자에 앉아서 대답하라고 하셨다고 말씀한 적이 있었습니다.”

“재판받은 김연수란 인물에 대해서는 어떤 말씀이 없었습니까?”

“그 재판 후 30년이 흐른 어느 날, 아들인 제게 반민특위 재판장 때 느낀 점을 한마디 하신 적이 있어요. 일제시대 경성방직의 제품에 태극성이라는 상표를 붙인 걸 보고 민족정신이 있는 분이구나 하는 걸 느끼셨답니다. 아버님의 말씀은, 그 시대는 관료의식이 강해 누구나 공부를 좀 하면 어떻게 하든지 관직에 한 자리를 하려고 하는데 김연수 사장한테서는 의외로 그런 걸 볼 수 없었다는 거죠.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왔는데 그는 한 번도 의도적으로 관직을 탐한 흔적을 못 봤다는 겁니다. 

아버님께서는 ‘김연수 사장이 중앙고와 보성전문의 설립자금을 대부분 지원하였는데 민족정신이 없으면 못 하는 행동’이라고 하셨죠. 당시 대법원장인 김병로(金炳魯) 씨는 유죄를 선고하라는 쪽이었는데 아버님은 소신을 굽히지 않으셨다고 하더라고요. 

아버님이 그러셨죠. 반민특위 재판을 받은 후 이미 30년이 흘렀는데도 그동안 김연수란 사람이 공직이나 사회활동 전면에 나서서 자기를 과시하는 걸 본 적이 있느냐고 말이죠. 그걸 보면서도 아버님은 자신의 판결에 대한 확신을 가지신 것 같아요.”

서순영 재판장의 사후(死後)에 만들어진 문집에는 김연수에 대한 판결문이 판사 시절의 가장 빛나는 업적같이 그 중심에 들어 있었다. 

“일제시대를 생생하게 보면서 살아오신 아버님의 재판장으로서의 친일파 처벌기준이나 철학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일제시대 말기에는 일본 쪽으로 다 기울어진 것같이 행동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더니 해방이 되자마자 왜 그렇게 이번에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애국자가 방방곡곡에 많은지 모르겠다며 한심해 하셨어요. 그런 엉터리 애국자들이 발호해서 그 등쌀을 견디기 힘들었다는 거죠. 그러면서 아버지는 악질적인 친일파만 처벌하는 선에서 그치는 게 좋다고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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