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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수행이 예배다

운영자 2020.03.16 09:50:59
조회 208 추천 2 댓글 0
천구백팔십년대 중반 변호사를 처음 시작할 때 나는 마음이 위축되어 있었다. 법정에 서면 재판장이 근엄한 왕 같이 보이고 주눅이 들었다. 검사의 공격은 날이 새파랗게 서 있어 조금만 닿아도 피가 흐를 것 같았다. 변호사인 내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판사는 검사가 만든 수사기록만 보고 기계적으로 징역형을 결정했다. 외국영화를 보면 변호사가 화려하게 활동을 하는데 나는 법정에 서 있어도 무대장치의 소품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쩌다 법정에서 한마디 하면 못마땅한 눈길들이 날아왔다. 심지어 변론을 기다리는 다른 변호사들한테서까지 “그래 잘났어”하는 듯한 곱지 않은 눈길이 왔다. 재판장은 과거 동료나 친한 변호사에게만 싹싹했다. 의뢰인들에게 그건 대단한 위력이었다. 그 결과는 돈으로 쏟아졌다. 판사들은 변호사들이 자신들 때문에 밥을 먹고 산다고 생각했다. 그런 현실을 보고 깊은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법정을 보면 판검사나 변호사들이 한국 사람들인데도 그들의 입에서는 외계인의 언어같은 말만 나오고 있었다. 한 사람을 법의 제단에 올려놓고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전문용어를 써서 한 인생을 재단해 버리곤 했다. 재판을 당하는 사람은 말 한마디 못하고 컨베이어벨트에 놓인 생산 라인의 물건처럼 인간 지옥으로 가고 있었다.

어느 날 직업이 무엇인가를 막연하게 깨달았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직업은 하나님이 준 소명이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돌이나 나무를 다루는 기술을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기가 막히게 보석을 깎는 재주를 주었다. 사냥꾼도 가축을 키우는 사람도 음악을 하는 사람도 남을 가르치는 사람도 그 모든 직업에 관련된 재능을 하나님이 부어주신다고 성경은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하나님이 나를 변호사로 만들었다면 그걸 천직으로 알고 열심히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다른 직업을 살피고 더 좋은 게 없을까 두리번거릴 때 나는 불행해 질 수 있었다. 왕 같은 재판장만이 좋은 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임금 역할을 또 어떤 사람에게는 성전 문지기역할을 부여했다. 문지기가 나는 왕이 아니니 그 역할을 못하겠소 라고 비관하면 그는 불만의 늪을 빠져나오기 불가능할 것이다. 마음이 바뀌니까 내가 할 일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입이 있어도 제대로 할 말을 못하는 이들의 입이 되어 진실을 말해 줄 수 있었다. 감옥의 철창 안에서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사람들의 의지가 되어 줄 수도 있었다. 가치 기준이 달라졌다. 정치인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최고의 기술을 가진 변호사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사가 범죄를 공소장에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이라면 변호사는 한 인간의 애절한 삶과 그의 참회를 변론문으로 묘사하는 직업이었다. 표현의 수사학이 필요했다. 소설가들은 자기들이 만들어 낸 허구의 캐릭터들에게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뼈를 깎는 문학적 고행을 한다. 그렇다면 흙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살아있는 한 인간을 위해 변호사는 그 이상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예전에는 법대가 아니라 법문학부라고 해서 문학을 동시에 공부하게 했었다. 변론은 법정에서의 연기하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연극이나 영화 속의 명배우들은 작품의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처절할 정도로 자기를 불태운다. 죽기 직전의 힘없고 꺼칠한 얼굴을 만들기 위해 보름을 굶은 배우의 얘기를 듣기도 했다. 변호사는 법정이라는 살아있는 인생 무대에서 감동을 퍼 올리고 눈물을 흘리게 해야 한다. 변호사의 자세나 표정 말투 그리고 하나하나의 동작이 진실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 국내외의 법정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연기자들을 봤다. 현실의 변호사인 나는 허구속의 변호사 발꿈치도 따라가지 못했다. 눈이 조금 열리니까 어느새 변호사는 다이나믹한 직업이 되었다. 변론문 초안을 쓸 때 나는 시나리오작가다. 신청한 증인을 미리 불러 연습을 시킬 때는 연출자가 된다. 법정에 처음 나오면 당황해서 나무기둥이 되는 수가 많기 때문에 사전에 준비할 필요도 있었다. 제조업자가 물건을 만드는데도 혼이 들어가야 명품이 된다. 변호의 과정과정마다 그걸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은 관련된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 섭리를 이루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만 맡기지 않는다. 포커를 하는 사람이 패를 쥔 상대방의 미세한 표정을 예리하게 살피듯 재판장의 마음의 움직임을 포착하려고 애쓴다. ‘그냥 해주세요’ 하는 것보다 일을 하면서 하는 기도를 더 좋아하실 것 같았다. 이제는 더 이상 변호사를 처음 시작할 때 초라하게 느끼던 마음이 없다. 재판장과는 의자의 위치만 다를 뿐이다. 높고 낮은 게 아니다. 각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직업이 그가 받은 소명이다. 청소부는 하나님으로부터 지구의 일부분을 깨끗이 하라는 성스러운 명령을 받은 사람이다. 간호사는 병원에서 환자로 변한 찬사를 돌보고 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직무에 충실한 것이 진정한 예배이고 기도가 아닐까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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