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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책 얘기 꺼내지 마세요

운영자 2020.04.06 10:35:05
조회 161 추천 3 댓글 0
사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나 되고 싶은 게 다 다르다. 대학 시절 청계천의 헌 책방에서 소설을 사다가 읽으면서 그걸 쓴 작가들에게 감탄하기도 했다. 그런 소설을 써 보고 싶다는 마음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뿐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능력이 없는 걸 알았다. 삼십대 중반 무렵 법정 스님이 쓴 수필집들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맑은 샘물 같은 마음을 종이 위에 그려낼 수 있을까 하고 탄복을 했다.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흘러나오는 감상을 쓴 에세이들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언제쯤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탤런트 최불암 씨가 주인공 역할을 맡은 ‘고개 숙인 남자’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신문사의 낡은 나무책상에 앉아 원고지위에 자신의 칼럼을 쓰는 논설위원이었다. 그런 모습이 부러웠다. 마음이 기울어지는 쪽으로 삶도 약간은 변하는 것 같다. 사십대 중반 무렵 ‘변호사와 연탄 구루마’라는 수필집을 냈다. 그냥 글이 좋고 문학이 좋아 변호사 생활에서 보았던 감동을 써 본 것이다. 아침마당이라는 방송프로그램에서 출연요청이 왔다. 속으로 멋쩍은 생각이 들었다. 그 프로는 애환이 많았던 사람들이나 특별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출연하는 것으로 막연히 인식하고 있었다. 나는 별 볼일 없는 뒷골목의 개인 변호사일 뿐이었다. 수필집을 낸 출판사도 가정주부인 여성 혼자서 틈틈이 책을 만들어 내는 수공업 공방 같은 곳이었다. 어쨌든 나는 방송 삼십분 전 쯤 방송국 스튜디오로 갔다. 사회자로 유명한 이상벽 씨가 사전에 대본을 보면서 방송 진행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는 칠십 년대 우리 문화의 아이콘으로 알고 있었다.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등을 발굴하고 키운 연예계의 거물로 알고 존경하고 있었다. 방송 직전에 이상벽 씨가 나를 잠깐 보자고 하면서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책 선전은 제가 필요하면 알아서 멘트를 할 테니까 먼저 그런 얘기를 꺼내지 마세요.”

그 말에 나는 갑자기 머릿속이 멍해졌다.

‘아 그렇구나, 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책을 홍보하기 위해 힘을 써서 방송에 출연하는 것으로 알겠구나.’

일반인의 시각에서 그건 너무 당연했다. 그런데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모자랐고 순진했다. 나는 아마추어였다. 돈을 얻기 위해 글을 쓴 게 아니었다. 남에게 얼굴을 알려 정치 쪽으로 가고 싶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이 보는 시각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그날 나는 찬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그 다음부터 나는 왜 글을 쓰고 책을 내는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수시로 물었다.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내면의 공명심과 정신적 허영을 직시하려고 애썼다. 우연히 유명소설가들 몇 명과 만난 일이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거의 연예인 수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중 한 여성 작가에게 솔직히 물어 보았다.

“왜 작품을 시작할 때 여성을 내세워 먼저 옷을 벗게 하시죠?”

“그렇게 해야 팔리니까요.”

그 말에 ‘아 프로들의 목적은 당연히 돈이구나’하는 걸 다시 깨달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문학작품도 상품이고 작가도 상품이었다. 그 등급은 얼마나 돈을 버느냐였다. 갑자기 나는 내가 가진 소중한 자유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는 내 밥을 얻을 다른 기술을 가지고 있는 지식노동자였다. 돈을 위해 독자들의 원초적 본능에 맞추어 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상품이 아닌 다른 것을 위해 책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백여 년 전 일본 기독교인 우찌무라 간조라는 분은 그 척박한 종교적 환경에서 ‘성서연구’라는 작은 잡지를 죽을 때까지 만들었다. 제목부터 시작해서 어느 누구도 돈을 주고 사 볼 책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후원도 없이 스스로 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혼자 글을 쓰고 편집을 해서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세 번이나 가난으로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었다. 그가 죽은 후 백년이 넘었다. 지금의 나의 책상에는 그가 평생 쓴 글들이 전집이 되어 내가 제2의 성서로 이십년 동안 보고 있다. 문장도 문체도 평범 하지만 그의 글에서는 나쓰메 소세키 같은 일본문학의 거장의 글과는 다른 어떤 생명이 흘러나오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다석 류영모 선생은 사십대 무렵부터 북한산 자락에 집을 짓고 성경을 읽는 생활을 했다. 그리고 매일의 명상을 일지로 썼다. 그가 쓰는 일지는 그의 기도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다석 일지’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 분들은 돈이나 명예를 얻기 위해 글을 쓰고 책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다. 그 분들에게서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만큼 강한 힘은 없다는 걸 배웠다. 매일 아침 나는 기도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몇 마디를 쓴다.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는 아이 같은 마음이다. 특별한 목적이 없다. 물이 밀려와서 모래성을 흩뜨려버리면 또 쌓는다. 다만 보는 사람에게 풀꽃 같은 조금의 향기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소망은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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