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교수가 한 세미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써주는 연설문만 읽지 철학이 없는 것 같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말에 발끈한 전 현직 청와대 비서관들이 반격을 했다. 그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현장에서 원고를 교정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도 인터넷에 올렸다. 진 교수와 비서관들은 진흙밭의 개싸움을 하면서 마지막에는 “똥”이라는 단어까지 올리고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문에는 그 자신의 철학이 반드시 한 단어라도 들어있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력이 있는 살아있는 정치다. 내가 삼십대 중반 무렵 대통령을 보좌하는 팀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었다. 대통령이 어느 부처를 방문하기 전날이었다. 윗사람이 나를 불러 이런 지시를 했다.
“대통령이 순시를 할 때 그 부처의 간부들 앞에서 할 말씀자료를 써 주시오.”
“뭘 써야 하는 거죠?”
내가 되물었다.
“알아서 쓰시오”
정말 막연한 지시였다. 경험이 없는 삼십대 중반의 나는 대통령의 뜻을 짐작조차 불가능했다.
“알아서 쓴다고 해도 대통령의 철학을 조금은 알아야 그걸 주제로 문장을 만들 것 아닙니까?”
“여태까지 그런 철학을 듣지 않고도 보좌하는 우리가 알아서 다 만들었어요. 대통령의 취임사도 우리 팀에서 썼어요. 취임사를 쓴다는 건 대통령의 철학을 우리가 만든다는 거요. 우리는 심지어 대통령이 사석의 모임에서 해야 할 말도 다 우리가 창작했지. 대통령은 그 쪽지에 적힌 그 말을 보면서 또박또박 그대로 말씀하셨고 말이야.”
그때의 대통령은 그랬다. 그걸 보면서 나는 대통령은 어쩌면 연출자의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또 다른 연기자일 수도 있구나 생각했었다.
노무현 정권에서 외교안보 수석비서관을 했던 분과 만나 평택에서 아라비아반도의 예멘까지 가는 LNG선을 얻어 타고 바다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소설가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 나오는 동지나해를 지나는 타고르호에 오르고 싶은 문학적 감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깜깜한 밤중에 하늘에 흐르는 별의 강을 보면서 얘기를 하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열렸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그가 이런 말을 했던 게 어렴풋이 떠오른다.
“우리 비서진에서 연설문을 써 올리면 대통령은 선선히 그걸 받아들였어요. 잔소리를 하고 보는 앞에서 고치면 연설문을 쓰는 비서관들이 위축되고 주눅이 들까 봐 그러신 거지. 그런데 마지막 순간이 되면 대통령이 마음대로 연설문을 고쳐서 발표하는 거야. 그렇게 뒷통수를 맞은 일이 여러 번 있어요. 대통령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한번은 연설문을 써서 아주 늦게 올렸죠. 대통령이 바빠서 고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빡빡하게 일정을 잡았어요. 그런데 한밤중이 되도 교정을 한 대통령의 최종연설문이 내려오지 않는 거야. 대통령도 우리가 그걸 다시 번복하도록 간언할 시간을 주지 않는 거였지. 뒤늦게 대통령의 연설문이 내려왔는데 비서관들이 보기에는 기가 막힌거야. 그렇게 말하면 국제사회에서 아주 뭉개질 것 같은 발언이었죠. 우리의 주적이 북한인데 국제적으로 북한을 도와야 한다는 말이 써있으니까 말이에요. 외교안보수석인 나 혼자서는 안 될 것 같아서 한밤중에 외무장관까지 동원해서 대통령에게 간언을 했어요. 그랬더니 대통령이 알겠다고 하시더라구요. 우리는 겨우 안심을 했죠. 그런데 막상 연설을 할 때보니까 대통령이 뭐라고 하느냐? 참모들은 다르게 말하라고 했지만 나의 소신은 이것입니다, 하면서 원래의 의지대로 뱉어버리더라구요. 참 특이한 분이에요. 말하는 어조도 쓰는 단어도 자기 고유의 것을 그대로 고집했어요.”
참 여러 형태의 대통령이 있는 것 같다. 머리는 남에게 빌려와도 된다는 김영삼 대통령도 있었다. 연설문 뿐만 아니라 조사를 받을 때 피의자신문조서의 오탈자까지 고치는 김대중 대통령도 있었다. 대통령의 말이 글로 바뀐 게 연설문이다. 대통령은 연설문으로 정치를 한다. 그 연설문은 대통령의 철학이 들어있어야 하고 깊어야 한다. 바닥이 얕은 개울물은 소리 내어 흐르지만 큰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 어리석은 대통령은 반쯤 채운 항아리 같고 지혜로운 대통령은 물이 가득한 연못 같은 존재가 아닐까.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아니라 철학을 가진 대통령이 필요한 시대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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